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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낳은 인물 윤인구 박사 (1)
2016/05/04 15:5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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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에는 부흥목사로, 장년기에는 농촌과 농민을 위한 계몽자로 그리고 후진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자로서, 노년에는 신학교 교장직과 사회봉사자로 활동한 윤인구 목사는 1903년 11월 1일 부산 북구 구포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상은씨는 일제 때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한 금융인었으며, 동래 부윤을 지낸 백부 윤필은 독립투사였던 종형 윤현진 등에서 보듯 그의 집안은 꽤 잘 나가는 부유한 유지 집안이었다. 

▲기독교와 만남
일찍이 부산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래고보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가담했던 윤인구는 중도 퇴학 후 서울YMCA청년회학관에 다녔다. 그의 인생 항로를 정해준 기독교와의 만남은 일본 유학시절, 1920년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입학해 성경과 톨스토이, 사회사업가의 체험론 등을 접하면서 기독교교육에 뜻을 두고 청교도적 생활을 하게 되는 계기로 기독교에 심취했다. 명치학원에서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신앙사상에 잠시 열정했으나 뒷날 그는 내촌 선생의 신앙사상을 사회 진보적인 면에서 머물고 있다고 해서 보수주의의 요람 대학인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사, 영국 에딘버러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1931년 평생 동지인 동갑내기 방덕수씨와 28세 늦은 나이에 결혼, 첫 전도사로 부임한 곳이 진주 옥봉교회에서 교역자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4년간의 목회 생활 끝에 교회는 사회 특히 비참한 농촌을 향해 좀 더 나아가야함을 깨닫고 그는 35년 마산 복음녹업실업전수학교로 부임, 농촌교회 사역자와 농촌 지도자양성을 꾀한 것은 나라가 사는 길은 젊은 인재를 기르고 양성하는 농촌 인재 육성에 기인함을 느낀 나머지 농촌 계몽운동에 젊은 나이로 전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미 군정하에 경남도 학무과장을 맡았다. 일본인 교사들이 떠나버린 국교, 중학교를 다시 열고 교사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지금의 교육대학으로 발전한 부산사범학교도 이때 설립했고, 이화여전을 나온 부인이 영어교사를 맡아 수고했다. 이때 학무에 관여한 5년간 그가 길러낸 교사가 무려 15000여명에 달했다. 

▲부산대학교 설립에 꿈을 펼치다
한편 1946년 5월 15일 부산대학 설립 기성회를 구성하여 마침내 부산대의 설립인가를 문교부로부터 받아냈다. 마땅한 교사(校舍)가 없어 수산대, 대신동의 청년학술원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것마저 군에 뺏기고 대신동 운동장 뒤 종묘원을 매입, 천막교사를 짓게 되었다. 이곳에 유엔한국지원단 등과 후원회의 도움으로 목조 교사를 지었다. 
그런 중 1953년 4월 종합대학 승격을 받아 낸 윤인구는 이해 11월 초대 부산대 총장에 추대되었다. (…계속)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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