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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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팔레스타인 분쟁이 한창일 때(2014. 7), 연인으로 보이는 아랍 남자와 이스라엘 여인이 인터넷 화면에 등장했습니다. 들고 있는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적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refuse to be enemies).” “사랑은 점령이라는 언어를 말하지 않습니다.”(Love doesn’t speak the language of occupation.)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문장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네샤마라 부르고, 나는 그를 하비비라고 부릅니다.”(He calls me neshama, I call him habibi.) 하비비는 나의 사랑이라는 뜻의 아랍어이고, 네샤마는 너는 나의 생명, 나의 영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네샤마”는 본래 “숨”(breath)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숨은 생물학적인 호흡을 가리키지만 그 이상을 상징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숨은 생기요 생명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생명 있는 자를 “호흡(네샤마) 있는 자”라고 부르는가 하면(신 20:16), 엘리야 선지자가 머물렀던 사르밧 과부 아들의 경우에도 그냥 “죽었다”라고 하지 않고 “숨(네샤마)이 끊어진지라”라고 썼습니다(왕상 17:17). 이어지는 구절을 참고할 때 아들의 숨이 끊어졌다는 말은 단순한 사망 선고가 아니라 또한 그 어미의 생명, 그 어미의 영혼도 동시에 끊어졌음을 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도 합니다.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7:18)
2014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한 476명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습니다. 많은 인명 피해가 났는데, 특별히 안타까운 것은 승객 대부분이 수학여행 길에 나선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숨, 누군가의 생명이었던 아이들이었기에 많은 이들을 울렸습니다. 그랬던 세월호가 지난 3월 25일 오후 9시 경 침몰 1075일 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소설가 천명관이 쓴 소설마냥 한 마리 고래같이 떠오른 배는 3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을 안팎으로 지닌 채 마치 거친 숨을 몰아쉬는 듯했습니다. TV를 통해 미수습자 가족들의 절규를 보고 있노라니, “그 아이를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왕상 17:23) 그 옛날 엘리야처럼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숨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티끌(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를 불어넣으셔서 생령(네페쉬)이 되게 하셨고(창 2:7), 욥기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 입의 기운(니쉬마트)으로 멸망하고 그의 콧김(루아흐)으로 사라진다 했습니다(욥 4:9). 따라서 “호흡(네샤마)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 150:6)라는 말은 숨의 고향을 향한 숨 있는 자의 너무도 당연한 고백입니다. 하지만 숨이 끊어진 아이를 품에 안고 오열하는 이들에게는 동시에 너무도 잔인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이의 죄나 잘못에서 기인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 실존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참(悲慘)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9문).
부활의 계절입니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문을 닫고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향하사 숨(네페쉬)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루아흐)을 받으라” 하셨습니다(요 20:23). 숨 쉬고 있는 자들에게 새로운 숨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인양된 세월호와 모든 유족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도 이와 같이 부활의 주께서 불어넣으시는 새로운 숨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네샤마, 나의 호흡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모든 주권과 영광이 있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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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나의 숨 나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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