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1. 진화, 목적론과 기계론 사이에
19세기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만물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에 의해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목적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만물은 시계와 같이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이었다. 그러나 1875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진화론의 등장은 두 세계관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 진화론의 핵심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적자생존은 특정한 환경에 적응을 잘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인데, 이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목적에 의한 세상’과 ‘기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가 이제 돌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윈은 자연도태를 맞이하여 우리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냉혹함 속에서도 비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복지 정책을 베푼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긴 한다.

2. 진화의 산물, 도덕성?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은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에서 “모든 생명의 역사는 성공적인 자기 복제를 위한 DNA의 일대기이며, 인간의 몸은 DNA의 자기 복제를 위한 그릇이다.”라고 말한다. 곧, 인간의 본성과 의식, 문화 등 우리가 인간적인 특성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들이 유전자가 정해준 범위 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도 『통섭의 식탁』 (명진출판사, 2011)에서 “인간의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도 더 효율적으로 디엔에이를 복제하고 확산하려는 이기적 유전자가 시킨 것이다.”라고 말한다. 적어도 DNA의 관점에서는 ‘자기희생적 이타성’은 ‘자기중심적 이기성’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말인데, 왜 우리 사회는 도덕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지배자가 되는 것일까?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일시적인 거다. 우리가 이 순간 사회가 썩었다고 얘기하면서도 한편으로 끊임없이 도덕을 얘기하는 이유가 뭘까. 그건 우리가 도덕적인 조상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더 잘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후손으로 여기 살아남은 거다.”

가령 돌고래를 통해서도 이러한 도덕성을 볼 수 있는데, 수컷 돌고래에게 제일 힘든 점이 뭐냐면, 혼자서는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망망대해에 무슨 막다른 길도 없고 암컷 돌고래가 도망가면 혼자서는 잡아 세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수컷 두세 마리씩 짝패를 만들어서는 한 마리 암컷을 놓고 양쪽에서 방향을 제어하며 쫓아간다. 몇 시간 지나서 암컷이 더 이상 도망가기를 포기하면, 둘 중에 한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다시 새로운 암컷을 찾아 나서는데, 이때는 아까 못한 수컷이 짝짓기를 한다. ‘아까는 네 차례고 이번엔 내 차례야.’ 이런 계약이 암묵적으로 체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호주 샤크 베이에서 연구한 결과 신기한 게 발견되었다. 간혹 얌체 같은 놈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먼저 짝짓기를 하고는 계약을 깨고 도망 가버리는 수컷이 있는 것이다. 먹고 튀는, 먹튀 돌고래이다. 그런 얌체 짓을 몇 번 하다 보면 돌고래 사회에 그놈에 대해 평판이 돈다. 이후 사랑의 추격 팀에는 그 돌고래를 끼워준다. 두 마리가 쫓아가는 것보다 세 마리가 쫓아가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컷에게 다가갈 순서가 되면 그놈을 탁 쳐낸다. “넌 안 돼! 팀에는 끼워주지만, 너 같은 놈은 우리 사회에선 안 돼.” 이렇게 ‘평판’이라는 것을 통해 돌고래 사회에서 도덕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도 씨족사회, 부족사회처럼 옆집 숟가락 개수도 알던 사회에서는 평판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했다. 25만년 인류의 역사에서 야비한 사람들이 성공한 기간은 길지 않다. 25만년 중에 우리가 농경을 한 것이 최근 1만년인데, 농경사회로 접어들고 산업사회가 되면서 야비한 사람이 득세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사람들의 권력은 그리 길지 않다(지금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10년 정도?) 인간과 같은 사회성 동물이 도덕적인 추구를 멈출 리는 없다. 따라서 도덕성도 진화의 산물인가?

3. 번식 수단인 종교?
짝짓기, 번식, 연애 등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표출되는 행위를 진화심리학의 관점으로 풀어쓴 『인간은 야하다: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인간 본성의 비밀』 (21세기북스, 2012)에서 진화심리학자 더글러스 켄릭(Douglas T. Kenrick)은 “추측건대 우리의 마음은 미녀와 권력자를 찾아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들은 ‘마을의 미녀’를 짝으로 맞거나, ‘거물들의 짝’이 되기 위해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TV나, 인터넷 등 대중 매체를 도배하는 연예인들의 매혹적인 외모는 실제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당황스러운 것은 종교에 관해서도 켄릭 교수는 “종교는 번식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장려하는 일부일처제는 번식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 간의 독점적 사랑’, ‘무분별한 성교 억제’ 등 일부일처제의 규범이 번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켄릭 교수는 한 가지 실험을 했는데,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이성과 동성 사진을 보여준 뒤 신앙심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이 조사에서 남녀 모두 매력적인 이성보다, 매력적인 동성을 봤을 때 신앙심을 더 크게 표출했다. 켄릭은 “이러한 현상은 매력적인 경쟁자가 많으면 번식에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를 끌고 와 일부일처제란 틀 속에서 안정적으로 짝을 찾으려 한다. 성과 가족에 대한 사고방식은 종교 의식에 참석하게 만드는 원인이지, 단순히 종교적 가르침의 결과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흔히 ‘진화=적자생존’으로 알려져 있지만, 켄릭은 이렇게 말한다.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생존이 아니라, 번식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했다 해도 홀로 산다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수는 없어 진화로 보긴 어렵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땐 빨리 죽더라도 짝을 유혹해 자손을 낳는 동물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진화를 이끈 것이 꼭 번식을 위한 이기적 본성만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사회는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터’로 변했을 터, 켄릭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신경 쓰고, 그들에게 선하게 행동해야 번식에도 성공할 확률이 높기에 이타적인 본성도 지니게 됐다. 따라서 진화생물학의 원칙 중 하나인 상호 이타주의는 이렇게 나오게 됐다.”라고 말한다. 

4. 생물학의 수수께끼, 동성애
동물행동학이나 진화생물학으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고 하면 부딪히는 딜레마가 있다. 자식을 낳을 능력이나 조건이 안 되는 개체는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인가? 비혼 남녀나 동성애자처럼 생물학적으로 자기 유전자를 번식시킬 조건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인간 생태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재천 교수는 “동성애자가 왜 진화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생물학계의 수수께끼다. 하지만 가장 막강한 이론 중 하나는 ‘동성애자가 필요했다’는 가설이다. 사냥을 가야 하는데 동네 남자들이 다 같이 가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남은 놈이 내 부인을 겁탈할까봐. 그래서 다 끌고 가면 옆 동네 남자들이 쳐들어온다. 그런데 동성애자를 남겨놓고 가면 걱정할 게 없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는 동성애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고, 동물 사회에도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갈매기의 예는 무척 흥미롭다. 갈매기는 평생 해로하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결과 갈매기의 이혼율은 30%를 넘는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과거 새끼를 키우면서 애를 먹인(먹이를 제때 물어다 주지 않는) 배우자와는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매기는 대개 2개의 알을 낳는데, 어떤 둥지에는 알이 4개가 있었다. 짝짓기는 다른 수컷과 하고 암컷끼리 레즈비언 커플이 돼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통계상 갈매기 사회에 이런 둥지의 비율이 일정하게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계통을 밝히는 연구에서는 철저하게 암컷의 계보를 따른다.”라는 증언으로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호주제 폐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 있는 최재천 교수의 진화생물학적인 생각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도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로부터 재출발해야 함을 보여준다.

5. 호모 심비우스
공생인간(Homo symbious)을 이야기하는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호소한다. “나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의 시대에 우리 인간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현명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자만을 버리고, ‘공생인간인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 호모 심비우스의 정신은 우리의 협동은 물론 이 지구 생태계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과의 공생을 우리 삶의 최대 목표로 삼자는 자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진화생물학자의 목표도 결국은 더불어 함께 사는 종교의 삶과 다르지 않다.

아무튼 이러한 공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곤충이 꿀단지개미(honeypot ant)이다. 이들은 진딧물 같은 곤충들을 보호해주고 대가로 받은 단물을 저장할 마땅한 단지가 없어 몇몇 선발된 일개미들이 굴 천장에 매달려 그들의 뱃속에 단물을 담아놓는다. 이 개미 뱃속에 다른 개미들이 꿀을 집어넣으면 배가 100배 이상 커진다. 꿀단지개미는 위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소화를 담당하는 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위’이다. 사회적 위는 동료들과 나눌 때 쓰려고 꿀을 저장하는 위이다. 따라서 천장에 매달린 꿀단지개미들은 먹이가 없는 겨울에는 입으로 꿀을 배출해 동료 개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꿀단지개미와 같은) 협력은, 인간 사회에선 절대로 불가능하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모두가 같이 희생을 감내하면 참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불균형적으로 일방의 희생이 계속되면 협력 시스템은 깨진다. 내가 볼 때 민주주의는 효율이 가장 높은 제도는 아니지만 인류가 선택한 가장 합리적인 제도다. 희생을 평준화해서 골고루 나누고 어느 일방이 혼자 손해 보지 않게끔 하는 것, 그것이 협력을 촉진하는 기반이다. 민주주의는 진화의 결과물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공동체인 인간, 개미, 흰개미, 꿀벌 등은 모두가 협력 할 줄 아는 동물들이다. 그러나 바퀴벌레나 모기한테는 협력이 없다. 따라서 고도로 협력할 줄 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행복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그 협력에는 희생이 따른다. 누군가가 더 희생을 했기 때문에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공동체가 살아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적으로 25만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꿀단지 예수’의 자기희생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지금도 살아가는 행복의 근원인 것이다.
honeypotAnt.jpg▲ <천장에 매달린 꿀단지개미들>
 
honeypots-hanging.jpg▲ <꿀단지 개미 뱃속에 가득찬 꿀>
 
뱀꼬리: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으로 변하게 되면?
『독립신문』 (1899.11.9.)에서 윤치호는 “동양의 황인종이 하나로 뭉쳐 일본을 맹주로 하여 백인의 농락과 침탈에 맞서지 않는다면 다들 서양인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황성신문』 (1904.5.11.-13)에서도 윤치호는 “같은 황인종의 형제인 일본과 한국의 동맹은 동양평화의 기초다. 우리가 일본을 확실히 믿어 우리의 제도를 고치고, 일본이 우리의 독립과 영토를 러시아 등의 야수로부터 지켜주게 된다.”라고 말했다. 『개벽』 (1922)에서 ‘민족개조론’을 외쳤던 춘원 이광수도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라고 한다.

서구제국주의가 우수한 백인종이 열등한 인종들인 황인종과 흑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거스를 수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라는 ‘사회 진화론’을 무기로 동양을 침탈할 때, 동양의 민족주의는 그 제국주의 앞에서 무너지며 대다수의 지성인들은 독립운동보다는 오히려 제국주의 침탈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은 이러한 서양의 사회진화론에 대항하여 ‘사무라이 진화론’을 통해 ‘일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서구인들보다 열등하지만 집단적인 정신력으로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일본인들은 백인종들의 침략으로부터 멸종할 수밖에 없는 동양인종, 특히나 중국과 조선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인식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20세기 들어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면서, 그 이론구조가 배격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진화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그들 간의 협력인 곧, 호모 심비우스로 살기 때문이다.

최병학 목사.JPG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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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0 :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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