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문해룡 목사2.JPG
 
늘 도전보다 포기가 앞섰던 것은 아마도 좋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패배주의 성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란 자녀가 이겨낼 수 있을까? 물론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동기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의지도 약했지만 거인 골리앗 같이 내 앞을 버티고 선 장벽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늘 그의 앞에서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그 견고한 성채 같은 골리앗이 내 앞에 서서 이렇게 외쳤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강아지 새끼다.”
(마귀는 늘 이렇게 속삭인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아주 나빴다. 늘 뒤에서 놀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짧은 다리로 발만 동동거리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난 착하지만 성격이 급했고, 성실성이나 인내력이 아주 부족했다. 그러나 의욕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길조차 없다는 좌절이 거듭되자 의욕마저 꺾어 놓았다. 급기야는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내게 넘쳐났던 의욕과 자신감은 모두 사라지고 그 속에 외로움만 커져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소년 시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의욕과 자신감인 것 같다. 그 의욕과 자신감에 덧보태 갖춰야 할 진짜 능력은 성실함과 끝까지 해보고자 하는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만 번의 법칙처럼 반복 끝에 뭔가 하나를 터득하게 된다. 젊은 시절 성실과 인내를 배우지 못하면 결국 별 볼일 없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포자기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삶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에게서는 성공하는 사람의 필수적인 요소인 성실과 인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그 성실과 인내를 배우지 못한 채 청소년 시기를 끝내고 성인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장벽 앞에서 허덕이던 내 학창시절은 결국 의욕과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만 끌어안은 채 졸업을 한다. 그리고 20대에 내 속에 패배주의 성향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해 ‘해서 뭐하나.’ 주의로 사고가 바뀌었다.  
현재 센터에서 위의 나의 청소년기와 유사한 유형의 청소년들을 많이 만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정, 학교(사회), 자신의 내면 등등 모든 부분에서 그들은 이겨낼 수 없는 환경 속에 처해 있다. 이들을 살리고,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 인가?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교회 공동체의 힘이 이 세상을 살리고 이들을 살린다. 교회는 가만히 눈감고 있어서는 안되는 국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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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칼럼] 뼈 속 깊이 자리한 패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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