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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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멘지스의 기록에 의하면, 장기미라고도 불린 장금이(張今伊)는 고아원의 최 연장자로서 1902년 당시 17세였다. 한국나이로는 19세였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바느질을 돕는 등 선교사들의 사역을 보조하였고 후에는 봉급 받는 교사로 일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신체장애가 있었다.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여아 봉선이는 세탁, 바느질, 요리 등 여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오빠가 초량에 살았다고 한다. 그 다음 연장자가 보배인데, 그도 봉선이처럼 선교사들의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세기, 순남, 순복, 서매물, 홍이는 아직 어리고 공부하는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가장 어린 종희는 생후 2-3개월 되었을 때 선교사들의 주택 화덕 옆에 버려진 아이였다. 1902년 당시 8살인데,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1911년 말의 경우 고아수는 6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고아들과 함께 기숙하는 관리인(boarder) 1명, 보모 3인, 원장격인 책임자 무어(Miss Moore) 등 11사람이 함께 살았다. 이 미오라 고아원이 부산 경남 지방에서의 복지운동의 시작이자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었다. 고아원의 불구소녀 장기미, 그리고 매머리(徐玫物)와 보배는 1901년 2월 3일 세례를 받았다. 이때의 세례식은 왕길지의 내한 이후 첫 세례식이었다. 고아원 수용아동들의 수가 많아지자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895년 10월 15일에는 수업연한 3개년의 소학교과정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사립 부산진 일신여학교(私立 釜山眞 日新 女學校)로 발전한다. 이 학교가 한강 이남의 최초의 여자학교였고,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첫 교육기관이자 부산 경남지방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이 된다. 
  한 가지 부연하면, 부산에서 멘지스, 퍼셋 양과 더불어 고아를 돌보는 사업을 시작했던 페리(Jean Perry)는 이때의 경험을 가지고 서울에서 고아원 사업을 시작했다. 즉 그는 호주빅토리아주 여전도회연합회(PWMU) 선교사로 1891년 내한했으나 1894년 여전도회연합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가 영국의 몇 몇 친구들의 후원을 얻어 독립적으로 고아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1896년부터 같이 일한 동료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 출신이었던 엘렌 페쉬(Ellen Pash)였다. 이들은 이미 종교교육, 장애아교육, 여성교육, 고아원 운영 등 사회복지사업 경험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영국복음전도회(British Evangelistic Society)를 조직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한편, 남한 최초의 맹아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는 기숙형 학교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와 맹아들을 위한 기관이었고, 이들의 자립을 위한 실업교육을 실시했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지만 자활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다. 이들 두 영국계 여선교사들은 한국에서의 특수교육을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 페리는 1916년까지 조선에서 활동하고 은퇴하여 1935년 세상을 떠났다.
noname01.jpg▲ 부산 미오라 고아원을 떠나 서울에서 사역한 진 페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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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미오라 고아원: 부산지방 첫 자선기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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