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부흥 그 저변에는 전도가 있었다. 삶으로 전도하고 복음으로 강권하여 전도하였다. 이 방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도 기독교인의 삶으로 전도하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한다. 이 일은 단순히 교회당에 인원을 채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필자는 교회학교를 담당하던 시절에 5년 동안 매주 교사들과 함께 학교 앞 전도를 나갔다. 지금이나 그때나 학교나 일반 학부모들은 교회에서 나와서 전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간단한 간식을 나누어주고 사영리와 같은 짧은 복음의 내용을 숙련된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전하는 전도를 주로 하였고, 또한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면 잘 출석할 것을 권면하는 심방의 역할도 하였다. 그렇게 꾸준히 전도활동을 하여 교회학교가 폭발적으로 부흥하였는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지역에서 복음을 못 듣는 아이는 없었을 거다. 5년을 한결 같이 영혼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헌신했던 교사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복음을 전하는 교사들이 가장 많은 은혜를 체험하였다. 우리는 복음 그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이마다 변화를 경험할 것을 믿어야 한다. 일제강점기의 2%의 신자들은 복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국권을 잃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는 조국의 광복을 채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망으로 현재의 고난을 뛰어넘는 미래의 영광과 조국의 광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교회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세대를 잘 양육하기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음세대를 복음으로 전도해야 한다.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제일 먼저는 교회 안에 잘 나오지 않는 자녀들을 중심으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리고 잘 나오는 자녀들의 학교에 심방도 가고 심방과 함께 자연스러운 전도의 장을 열어보자. 한 예로 성민교회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블레싱 택시’라는 프로그램을 행하고 있다. 예능프로그램 포맷을 따온 이 방식은 교역자나 교사들이 주중에 청소년들을 만나거나 이들의 친구들을 만나기 어려운 현실이기에 기획되었다. 교회 차량의 뒷 좌석을 고급스러운 시트와 목베게, 아기자기한 소품과 안락한 슬리퍼 등으로 꾸미고 하교하는 청소년과 그 친구를 태우고 학원이나 가정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물론 차내에는 커피와 음료수, 간식 등을 준비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이렇게 ‘블레싱 택시’를 이용해본 청소년들은 교회에 대해서 편안한 마음이 생겨서 자발적으로 전도하는 데 동참하고 있고 이 ‘블레싱 택시’를 타본 친구들은 얼마 뒤에 교회에 나타나곤 한다.
이제 곧 여름행사시즌이 다가온다.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다. 다음세대의 부흥을 꿈꾸는 가정과 교회마다 부흥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그 부흥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들의 섬김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로 직접 찾아가셔서 제자들을 부르셨다. 찾아가는 전도가 간절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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