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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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9월 내한하여 2년간 부산에서 활동했던 에네스트 홀(Ernest F Hall)은 1907년 3월 21일자로 북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에 보낸 서신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빈에 대한 그리고 어빈을 둘러 싼 은혜롭지 못한 기록들은 폐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빈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프리실라 웰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빈 의사는 매우 독자적인 인물로서(a very independent man)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고 또 고위층과의 연계를 통해 한국 선교부 밖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외선교부 집행위원회의 결정과 지시를 무시하기도 했다. 부산선교부의 높은 교체율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많은 동료들이 그와의 사역을 힘들어 했다. 한 편지에는, ‘지부 사역과 생활분위기와 상태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주께서 그곳의 사역을 위해 부르신다는 것을 느낄 수 없고, 그곳에 있던 사역자들은 한사람씩 상황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전출을 요청했다’고 썼다.”
이런 편지를 쓴 이가 다름 아닌 사무엘 마펫이었다. 마펫은 해외선교부 이사회에 보낸 1909년 1월 28일 편지에서 어빈 의사와 관련된 선교부의 고충을 떨어놓은 것이다. 부산지부에 배속된 선교사들은 어빈과 같이 일하기를 꺼려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네스트 홀이 부산지부에서 2년도 못되 성루지부로 옮겨 간 것도 어빈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리실라는 이렇게 부연한다. “상황이 격화되자 한국선교부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어빈 의사를 사역에서 제외 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 인해 이사회가 매우 예민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빈의 모교회인 뉴저지 몬트클래어 제일장로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clair, NJ)는 이런 논란에 대해 매우 흥분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어빈을 후원하고 그가 운영하는 병원 운영비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빈은 언더우드, 에비슨, 그리고 한국 선교를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세브란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선교 현지인 부산 지부에서 어빈은 상당한 문제를 일으켜 그의 선교사직 사임을 요구할 정도였으나 미국 본분에서는 어빈을 해임할 수 없었다. 그의 고향의 모교회인 몬트틀래어 제일장로교회는 그의 사역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고, 어빈은 서울 지부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선교부 이사회는 어빈의 해임 요청건을 기각한 것이다. 이런 결정으로 해외 선교부 이사회는 재정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선교지의 영적 조건을 해쳤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주한 선교부, 특히 부산 선교부는 이점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1911년 결국 어빈 자신에 의해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어빈이 부인 베르타와 이혼하고 선교부를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본국 선교부는 어빈에게 사임을 권유하였고, 1911년 4월부로 어빈의 사임을 결정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빈에 대한 부산 선교부의 판단이 옳았다는 점이 늦게나마 인정을 받은 샘이다. 이런 당시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어빈은 의사로서는 유능했으나 독특한 성격의 자기 중심적 인물로서 독선적인 면이 있었고 이런 점들이 다른 이들 간의 평화와 화합을 헤치는 결과를 가져와 부산 지부를 어렵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산 문제’는 Fusan Question, Fusan Matter, Fusan Case, 혹은 Fusan Problem 등 여러 이름으로 회자될 만큼 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40여년 간 체류했던 어빈 의사는 1933년 2월 9일 부산에서 사망하고, 복병산에 묻혔다. 한편 어빈과 이혼한 부인 Bertha K. Irvin(결혼 전 이름 Bertha Kimerer)은 일본으로 가 도지샤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사제를 털어 쿄또의 한국인 교회인 교또중앙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35년 11월15일 찍은 어을빈 여사 및 최경학 목사 송별기념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베르타는 1935년 11월까지 일본 교또에서 아들 로드릭(Roderick Irvin)과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로드릭은 일본의 곡산(穀産)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미국회사로 강냉이로 식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평양에도 공장을 두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베르타는 1940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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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어빈 문제 (Fusan Problem)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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