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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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호주장로교회의 제2진 선교사 메카이(James H. Mackay, 1857-1919) 목사 부부는 3명의 미혼여선교사, 곧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퍼셋(Miss Mary Fawcett)와 함께 1891년 10월 12일 내한하게 되는데, 그는 본래 멜버른 교외 발라랏(Ballart)의 성 요한교회(St. John's Church)의 담임목사였다. 그가 부산에 왔을 당시 부산에 체류했던 선교사는 하디 의사(Dr R. Hardie)와 윌리엄 베어드(W. Baird) 뿐이었다. 내한 한 그가 거주했던 곳이 일본인 거류지(Japanese town)의 임대 주택이었다. 처음에는 20일을 임대하였고 연장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다시 월 40불을 임대료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3개월을 연장하여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일본인 집은 사실 주택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흙벽돌로 지은 운막과 같았다. 그런데 그해 12월 12일 그의 부인 사라는 병을 얻었고, 구역질이나고 잠을 이루지 못했고, 감기와 폐렴에 걸려 6주간 동안 병상에서 고생하던 중 1892년 1월 27일 새벽 사망했다. 부산에 온지 꼭 3개월 후였고, 데이비스에 이어 호주선교부의 두 번째 희생자였다. 29일에는 몇몇 일본인들과 4사람의 한국인 어학선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초라한 장례식을 마치고 유해는 데이비스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메카이 목사 또한 건강을 잃어 1892년 5월 호주로 돌아가 약 2달간 휴식과 치료를 받고, 8월 3일 오전 10시경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때 호주 빅토리아주 여전도회연합회의 4번째 한국선교사인 무어(Miss Bessis S. Moore)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석 달 후인 1892년 11월 17일, 일본인 거류지 내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인 거류지에는 938호수(戶數) 5,100여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이 화재로 가옥 85채가 소실되고 350여명이 집을 잃어 주민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이때 일본인 거류지에 살던 매카이 목사는 이들 재민(災民)들을 위해 구호 구호활동을 폈다. 그는 5원의 기부금을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매카이 자신이 기록한 바 없으나 일본정부가 수여한 감사장이 남아 있다. 일본 정부는 명치 26년(1893) 9월 13일 자로 상훈국(賞勳局) 총제(正三位勳二等侯爵 西園寺 公望)와 부총제(從三位勳一等子爵 大給 恒) 명의로 감사장을 보냈다. 일본정부가 보낸 이 감사장은 부산 해관장이었던 헌트(J. H. Hunt)를 통해 전달되었는데, 헌트가 이 감사장(official recognition from the Japanese government)을 전달하면서 1893년 10월 23일자로 매카이에게 보낸 편지 또한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보낸 감사장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호주인(濠太利國) 제임스 H. 매카이 씨는 명치 15년 10월 조선국 부산항 일본제국 거류지 내에서 실화(失火)가 발생했을 때 이재자(罹災者)를 구조하고 금5원을 기부하였음으로(金五圓施輿セラレタルヲ) 이에 포장(褒狀)을 하사(賜)합니다. 명치 6년 9월 13일”
감사장을 발행한 상훈국 총재 西園寺 公望(1849-1940)는 후에 문부대신, 외무대신,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는 정치인이었다. 부총제 大給 恒(1839-1910)은 후에 상훈국 총제가 되고, 일본 적십자사 창설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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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매카이 목사와 일본인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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