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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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0월 2일 제물포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를 둘러보고 오후 4시 다시 출항하여 수많은 작은 섬들이 드리워져 있는 한국의 해변을 따라 이동했는데, 남해안 여수와 제주도 사이의 거문도(巨文島)를 지나갔다.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를 영국인들은 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1845년 이곳을 처음 탐사한 사마랑(Samarang)호의 선장 벨춰(Belcher) 함장이 영국해군성 차관의 이름 Hamilton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영국해군은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 2년간 무력으로 이 섬을 강점하고 주둔한 바 있다. 이 섬에 대해 데이비스는 “영국인들이 석탄 저장소로 강점했다가 훗날 한국 정부로 반환했다.”라고 쓰고 있다. 거문도를 지나면서 데이비스는 멀리 보이는 제주도에 대해, “오크랜드 산을 닮은 제주도(Guelport)를 보았는데, 벙커 씨는 이 섬이야 말로 때묻지 않은 미개척 지역이라며 선교사들이 일할 수 있는 좋은 지역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현재까지 그 누구도 이 섬에 상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썼다. 10월 4일 금요일 아침 11시경 에는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렇게 썼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이 우리 일행을 반겨 주는 것 같았습니다. 태양은 밝게 빛났지만 공기는 차가웠습니다. 바다는 그야말로 평온했습니다. 밀물 때였는데, 파고는 30피트였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북 감리교회 선교사인 존스(Mr. Jones)가 배로 와서 동행자인 벙커와 데이비스를 영접해 주었다.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는 1887년 9월 내한하여 서울에서 활동했는데, 그는 1892년에는 Korean Repository를, 1900년에는 「신학월보」를, 1901년에는 The Korea Review를 창간했고, 1907-9년에는 협성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가 데이비스 일행을 서울까지 안내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들은 제물포에서 하루를 쉬고 10월 5일 토요일 오전 8시 경 제물포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썼다. “두 부인 선교사는 남자가 끄는 인력거를 타고 갔고, 세 남자 선교사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여행은 아주 즐거웠습니다. 제물포를 떠난 우리는 논을 가로질러 지나갔는데, 언덕과 계곡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들판이라기보다는 ‘논 계곡’이라고 불러야 한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두 부인이란 벙커의 부인과 누나 메리 데이비스를 말하고, 세 남자란 벙커, 존스 그리고 데이비스 자신이었다. 그는 계곡해서, “우리가 목격한 대부분의 산은 벌거숭이였고, 벌목된 오래된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자란 작은 소나무들로 덥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무르익어가는 벼와 진녹색의 채소밭은 풍성한 시골 풍경을 느끼게 하였고, 특별히 계곡을 따라 이어진 바다의 모습은 남부 이태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러한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의 마을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들은 바로는 한국인들은 아주 청결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길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청결함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인 거류지에서와 같은 오물을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이 없었고, 온갖 쓰레기들이 도로변으로 흐르는 악취로 가득한 도랑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방치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썼다.
오후 4시 이전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벙커 씨의 학교 동료인 헐버트 씨(Mr. Hulbert)가 그를 만나러 왔다.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8)는 벙커, 길모어(G. W. Gilmore)와 함께 1886년 내한하여 육영공원에서 일했던 미국인 교사인데, 후에 『사민필지』를 저술했고, 1901년에는 존스와 더불어 영문 잡지 Korea Review를 창간했다.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워싱턴에 파송되었으나 대통령과 면담하지 못했고, 1907년 4월에는 헤이그에서 세 밀사의 활동을 후원했던 인물이다. 서울에서 데이비스는 세관에서 근무하던 존스톤(Johnston) 부부, 다른 관리인 타운센드 씨(Mr. Townshend) 등을 만나 한국정착에 필요한 도움을 받았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이렇게 썼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장마철에 범람하는 한강을 가로질러 모래사장을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강 넓이가 비교적 많이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한강을 따라 깨끗한 물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했고, 말을 타거나 인력거를 타는 등 여러 이동수단을 이용하여 서울의 성문으로부터 3마일 정도 떨어진 서울의 한 교외(郊外)에 도착했습니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헤론 의사(Dr. Heron)가 우리 일행을 영접하러 말을 타고 왔습니다. 알고 보니 서울에는 우리가 생각 했던 것 보다 훨씬 강력한 선교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중 몇 명은 우리처럼 새로 임지에 온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맥길 의사(Dr. McGill) 부부는 꼭 5주 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신참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은 별로 없었습니다. 미국북 감리회 선교부의 스크랜톤 부인(Mrs. Scranton)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어서 마치 우리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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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호주 첫 선교사 데이비스가 쓴 첫 편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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