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치권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대립은 현대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빠름과 느림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한참 각광 받고 있는 5세대 이동통신(5G)은 기가(giga) 급 처리 속도를 자랑하는데, 이를 잘 설명해 주는 인터넷 상 익명의 글이 있습니다. “이미 4G 시대에 무선이 유선의 속도를 추월했고, 800MB(메가바이트)짜리 영화 한 편을 20초면 내려 받을 수 있고, 달리는 차 안에서 고화질 동영상을 스트리밍으로 끊김 없이 볼 수 있는데 대체 얼마나, 뭐하려고 더 빨라지겠다는 것일까?” 반면 현대사회에는 느림의 미학도 존재합니다. ‘슬로시티’(slow city)의 탄생이 이러한 현상을 대변합니다. 이는 1999년 이탈리아 그레베 인 치안티(Greve in Chianti)에서 시작되어 느림(slow),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주안점을 두고 느리게 먹기(slow food), 느리게 살기(slow movement) 등을 표방하면서 아예 도시 자체를 ‘슬로 시티’(slow city)로 바꾸자는 30개국 190여 개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느림보 운동입니다.
생각해 보면 무작정 빠르게만 갈 수도 없고 무작정 느리게만 살 수도 없는 인생입니다. 속도전만 강조하다 보면 탈선하고 붕괴할 위험성을 안고 살아갑니다. 서양 사전에도 등재되었다는 한국말 ‘빨리빨리’ 문화는 결국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참상을 양산하지 않았습니까? 반대로 느림만 강조하다 보면 결국 지체현상과 시대착오의 위험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오그번(Ogburn)은 ‘문화지체’(cultural lag)를 정의하면서 물질문명은 자꾸 앞서가는데 정신문명이 너무 뒤처지면 심각한 사회부조리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실 만물에는 빠름과 느림이 공존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시속 100km를 자랑하는 치타가 있는 동시에 하루 18시간 이상 자면서 시속 0.9km 속도로 걷는 나무늘보가 존재합니다. 서양 음악에 안단테와 알레그로가 존재하듯 우리 가락에도 진양조와 휘모리가 공존합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전하고 공전하는 지구 위에 펼쳐져 있는 한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평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빠름과 느림의 조화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입니다. 일단 성경 속 인생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욥 9:25-26).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시 90:9-10, 모세의 고백 중에서). 하지만 창조주께서는 ‘안식’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습니다(창 2:1; 출 20:10). 성경 속 안식은 쉼인 동시에 ‘멈춤’을 의미합니다(아브라함 헤셀, 마르바 던). 결국 인생의 핵심은 경주(競走)와 안식(安息), 달림과 멈춤의 조화에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패스트트랙과 필리버스터, 이들을 주도하는 현대판 정치적 토끼와 거북도 인애와 진리처럼 의와 화평처럼 서로 같이 만나고 입 맞추는(시 85:10)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되기를, 어디서든 빠름과 느림의 공존의 미학이 나타나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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