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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만 목사의 삶과 이념
2016/01/28 15: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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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ㆍ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에서 발표된 논문입니다.)
 
장성만 목사의 삶과 이념
 
 
동서대 김대식 교수.jpg
 
김대식 (동서대학교 교수, 전 장성만 박사 비서실장)
 
시작하면서
 학교법인 동서학원의 설립자인 장성만 목사는 신앙 에세이집 ‘약속의 땅’에서 “그 곳이 어디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거룩한 땅’이요, 그 부름(使命)에 발 벗고 나서는 자가 사명자인 것이다.”고 설파하였다. 믿음 아래 예배당 안과 밖에서 열정적으로 예수의 삶 쫓아 사역과 인재양성, 기독교정신 국민에 전파한 정치활동으로 한평생 봉사한 인물이다.
 2015년 12월 6일 소천한 장성만 목사(1932-2015)는 “예수 빼면 허수아비”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삶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실천한 크리스천이었다. 장 목사는 예배당 안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성(聖)과 속(俗)이 구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와 삶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크리스천은 적극적으로 사회 속에 뛰어 들어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믿음에서 장 목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으로 평생을 사역활동과 함께 인재양성, 정계 활동에 바쳤다. 대학을 세워 인재를 키우고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국회에 나가 입법 활동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온 국민에게 펼치는 일도 목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발 뿌리에 구원을 갈구하는 백성이 있는 한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든지 그 사람은 복음의 사역자라고 했다.
 “생애에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다”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 속엔 기쁜 일, 슬픈 일, 깜짝 놀랄 일, 숨이 막히는 고통, 환희의 순간들이 짜깁기처럼 섞여 있었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요, 사랑이요, 은혜였다” 고 한 장성만 목사는 감사와 영광을 오로지 주님께 돌렸다.
 장 목사는 1961년 일본 오사카 성서신학교를 졸업한 뒤, 1964년 미국 신시내티신학대학원을 수료, 1975 미국 미드웨스트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80년까지 경남공업전문대학교 학장역임, 1981~88년까지 제 11,12대 국회의원 역임, 1988~2015년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1995~97년 동서대학교 총장역임, 2005~2015년까지 21C 포럼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77년에는 부산시 문화상(지역사회 개발분야)을 수상하였으며, 1978년에는 대통령 표창(교육공로)을, 2007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장성만 에세이 전집 5권〉과 〈도전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약속〉, 〈民意와 政策사이〉, 〈디지털 사회를 사는 지혜〉 등 27권이 있다. 본 원고는 <경남정보대학교 50년사> 및 그 밖의 자료를 통해 요약, 발췌하였음을 밝혀둔다.
 
1. 첫 번째 부르심: 목회자로서의 삶
 장 목사는 마크 맥시(Mark G. Maxey) 선교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래 맥시 선교사는 미군 종군목사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처참한 상황에 처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장 목사와 만난 것이다. 맥시 선교사는 “장성만 목사, 좀 더 웅대한 꿈을 가져라. 세계는 아주 넓다. 일본에 유학 와서 공부할 생각은 없는가, 내가 너의 모든 삶을 보장하겠다.”면서 ‘신학의 바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당장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지만, 유학의 꿈을 갖고 계속 기도를 드린 끝에 일본 오사카 성서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한 · 일 외교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비자를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맥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규슈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일본 유학은 장 목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일본 유학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무렵, 맥시 선교사가 조용히 장 목사를 불러 “장 목사, 이제 더 큰 물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미국의 친구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해두었다. 미국 신시내티의 신학대학교에서는 장 목사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이미 결정했다. 생활비를 지원할 후원자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미국으로 유학이 결정되었다.
 1961년 말, 2년여의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6남매를 헌신적으로 키워낸 어머니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부만을 생각해 어머니 곁을 또 떠나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1962년 1월 첫 주일, 부산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님의 특별한 배려로 새해 첫 설교를 맡게 되었는데 이날 예배를 통해 아주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박동순,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다. 박동순 여사는 당시 성가대에서 찬양을 담당했었는데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박 여사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토플점수도 확보해놓고 유학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심한 반대 때문에 미국 유학의 꿈을 접어버렸다. 그런 여사는 장 목사의 설교를 듣고 용기를 냈다. 장 목사의 일본 유학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었다고 한다. 박 여사는 집회가 끝난 며칠 뒤, 유학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장 목사를 찾아가 유학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고, 친절하게 대답해주면서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신뢰를 쌓아갔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가 되어달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장 목사는 1962년 9월에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원래 약혼자 박동순 여사와 함께 미국에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약혼자의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혼자 갔다. 신시내티 신학대학교에 도착하니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우편배달부였다.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많은 편지가 도착했다. 주로 설교 부탁을 하는 내용이었다.
 대학원장인 루이스 포스터 박사부터 찾아갔더니, “장 목사, 당신을 많이 기다렸다. 장 목사에게 기대가 크다. 일단 교수 두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엘리오트 교수와 심스 교수였다. 그리고 자신의 부친인 R. C. 포스터 교수에게 장 목사를 데려갔다. 여든이 넘은 포스터 교수는 신약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그는 마치 손자를 맞이하듯 정겹게 장 목사를 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원 공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다고 한다. 거의 매일 리포트를 작성했는데, 짧은 영어로 논문을 준비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일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 목사는 신시내티에서 가장 분주한 학생이었다. 미국 20여 개 주의 교회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다. 서투른 영어로 한국의 참상을 또박또박 알렸다. 그들은 장 목사의 말에 때로는 눈물을 흘렸고, 때로는 활짝 웃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의 역사를 넘어 극한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장 목사는 수업이 없는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집회를 인도했다.
 
2. 두 번째 부르심: 교육자로서의 삶, 인재 양성의 꿈
 
 그 힘겨운 시기에 낭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모든 고통을 일시에 날려버린 기쁜 소식이었다. 장 목사가 미국에 온 지 한 달 반 만에 약혼자 박 여사의 비자 문제가 깔끔하게 처리가 되어 미국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사고무친한 미국 땅에서 인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과 위로가 아니었다고 한다. 미국에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늘 서운했다고 했다.
 그렇게 장 목사는 신시내티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아내 박동순 여사는 기독교 교육을 공부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아내가 기독교 교육을 선택한 것은 좀 의외여서 “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려 하는가?”고 물었더니, “당신은 조국에 돌아가 기독교 대학을 설립할 꿈을 갖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원대한 꿈을 펼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좋은 내조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공부라고 생각해다오.”라고 했다. 둘은 서로를 의자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미국은 기능사회이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우받는다. 아이비엠(IBM)에서 컴퓨터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간당 4달러 45센트를 받았다. 그러나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사람에게는 시간당 1달러 40센트가 주어졌다. 아무 기술도 없는 사람은 노동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았다. 심지어 공동묘지 잔디를 깎는 사람도 자동차가 두 대였다. 잔디를 깎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었다. 다시 한국 국민 1인당 GNP가 87달러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장 목사는 “야, 바로 저것이다. 조국에 돌아가면 고급 기술자를 양성하리라.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리라.”고 인생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계획을 놓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런 와중에도 장 목사는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여러 교회로부터 초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수많은 교회가 자신의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찌 알고 자기를 초청했을까. 정말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집회 초청을 한 교회에 넌지시 “나를 어떻게 알게 됐나?”고 물어 보았더니, “맥시 선교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의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미국에 올 것이라고···. 당신을 잘 도와주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였다. 당시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정말 뜨겁고 순수했다. 그러면서 장 목사는 한국에 기독교 대학을 설립해 기술과 신앙을 가진 인재를 양성할 것이라는 비전을 밝히고 기도를 당부했다. 장 목사는 공부와 설교를 병행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수 십 년 동안 유학해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기 전 장 목사는 강릉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래쉬 선교사가 그를 초청한 것이다. 그는 선교활동에 약간 지쳐 있었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실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래쉬 선교사는 “장 목사, 한국 사람들은 게으르다. 맘에 들지 않는다. 이들의 정신 상태를 좀 개조해다오.”고 부탁했다. 교회로 향하는 길은 질퍽거리고 지저분했고, 예배당 벽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도대체 예배당인지 쓰레기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장 목사는 집회를 갖기 전에 청년 몇 사람을 불러 모아, 청년들과 함께 길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모래를 퍼와 새로 길을 단장하고 밝은 색 벽지를 사다가 예배당 벽면도 깔끔하게 도배했다. 하루 만에 전혀 새로운 예배당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본 래쉬 선교사는 깜짝 놀랐다. “장 목사, 넌 보통 한국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원한다. 미국에 다녀와서 무얼 할 계획인가?”고 물었다. 이에 장 목사는 “나는 대학을 세울 것이다. 고급 기술과 신앙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고 대답했다.
 래쉬 선교사는 장 목사의 비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곳에서는 선교 활동에 한계가 있다. 나도 너와 함께 일하고 싶다. 미국에 다녀오면 나를 꼭 부산에 불러다오. 나 역시 학교 사업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둘은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장 목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6개월 전, 그는 이미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킨 것이다. 그렇게 장 목사와 래쉬 선교사는 함께 영남기독교실업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1965년 11월, 원대한 꿈을 향한 출발의 총성이 울린 날이다. 래쉬 부부와 장 목사 부부가 학교 건축을 위한 첫 삽을 뜬 날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학교 사업의 시작이었다. 장 목사가 교장을, 래쉬 선교사가 교감을 맡았다. 장 목사는 설립허가를 얻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무려 36번이나 왕복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쳤다.
 미국에서 귀국하기 2주 전에 가계(家系)를 이을 장남 제국이 태어났다. 신시내티는 동양인이 아주 드문 도시다. 동양인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아주 재미난 뉴스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문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왔다고 한다. 제국이를 낳고 2주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장 목사 부부는 미국 유학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한다.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난 것이 최고의 축복이었다. 비록 피부·언어·풍습은 다르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공통점 하나 때문에 쉽게 친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으면 매우 고달픈 삶이었을 것이다. 둘은 항상 그것을 감사드렸다.
 1965년, 드디어 그리운 고향 부산에 도착했다. 학교를 세울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오직 꿈과 비전만 초롱초롱 빛냈다. 강원도에서 사역하던 래쉬 선교사가 유일한 동반자였다. 우선 과수원을 하다가 그만둔 땅을 구입해 학교 건물인 알파홀을 짓기 시작했는데, 래쉬는 바위를 깨뜨리고 블록을 찍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장 목사가 잠을 자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장 목사는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교 건물 공사를 하는 곳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길을 내주지 않으면 산 아래 주민들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빨리 물길을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장 목사는 삽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하나님, 학교를 지켜주세요. 만약 건물을 짓다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도와주세요.”
 학교는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만약 공사장에 물이 차올라 산사태라도 나며 큰일이었다. 폭우를 맞으며 장 목사는 산길을 올라갔다. 순간 발을 헛디뎌 심하게 꼬꾸라졌다고 회고했다. 흙탕물에 휩쓸려 한참 동안 미끄러졌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몸이 걸렸다. 조금만 더 떠내려갔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믿음을 주세요. 소망을 주세요.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폭우 속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였다. 그것은 일종의 절규였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깨달았다다고 한다. 그는 폭우 속에서 삽으로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계곡 쪽으로 유도했다. 이런 숱한 시련들을 딛고 첫 건물인 알파홀이 들어섰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일이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됐다. 그러나 인가도 나지 않은 학교에 과연 학생들이 얼마나 찾아올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에는 인문계를 숭상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다. 기술자를 양성하는 실업계 학교는 가난하거나 성적이 신통치 않은 학생들이 가는 곳쯤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트럭을 몰고 부산·경남 일대를 순회했다. 주로 극장·예식장·교회에서 “우리나라도 곧 기능사회로 변한다.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고의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학비는 걱정하지 마라. 모두 장학생이다.”고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첫 입학식이 열렸다. 학생은 총 19명, 주로 부산·경남 지역에서 강연을 듣고 찾아온 젊은이들이었다. 교육 슬로건은 ‘성경과 보습을 들고’였다. 학훈은 ‘근면·자립·협동·신앙’이었다. 이것이 2년제 초급대학의 첫 출발이었다. 장 목사가 가사를 만들고, 부산대 이상근 교수가 곡을 붙여 교가도 만들었다.
 “낙동강 굽어보는/ 민석대 위에/ 진리의 이상탑이/ 우뚝 서 있네/ 새 시대 새 일꾼을/ 길러나가는/ 아! 그 이름/동서기독교실업학교/ 근면 자립 협동 신앙/ 우리의 학훈/ 만방에 펼치자/동서기독교실업학교”
 장 목사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적인 삶이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불신자였으나 졸업할 때는 기독교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도록 지도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장 목사는 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수이며, 경비원이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감당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정말 필요한 시기였다.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한국사람들은 너무 게으르다. 게으른 민족은 절대 잘 살 수 없다.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한다. 자립정신으로 무장해야한다.”
그런데 학교를 설립한 이듬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의 정신은 ‘근면·자립·협동’이었다. 우리 학교의 교훈 4가지 중 ‘신앙’만 빠진 것이다. 사람들은 장 목사에게 “학교가 새마을 운동의 4대 정신을 모방했다.” 고 말한다. 그러면 장 목사는 늘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학훈을 흉내 낸 것이랍니다.”고 말했다.
 장 목사는 비록 지금은 입학생 19명의 초라한 입학식이지만, 나중에는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을 믿었다. 그것을 어느 목사님은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영광스런 그날을 상상하며 오늘의 시련을 극복했다. 절망의 벽은 탱크 같은 강한 기도로 분쇄하면 된다. 기도는 기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19명의 신입생을 나는 ‘엘리야의 구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엘리야가 처음 본 것은 손바닥만 한 구름이었지만 그것이 나중에 거대한 구름으로 변할 것을 믿는다. 어렵게 모집한 19명의 첫 신입생은 엘리야의 구름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기서 8장 7절).
 장 목사는 학교의 발전을 위해 미국을 10여 차례 오가며 재정지원을 호소했고, 재미재단 이사회는 최선을 다해 장 목사를 도와주었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주로 일을 했다. 이제 갓 시작한 학교였기 때문에 항상 일손이 부족했다. 2년 후에는 감격적인 첫 졸업식을 가졌다. 입학생 중 5명은 중도 탈락하고 14명만 남았다.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서로 고생을 많이 했기에 감동도 컸다.
 1970년, 정식으로 전문대학교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정말 ‘엘리야의 구름’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신입생 80명을 모집하는데, 구름처럼 많은 학생이 모여든 것이다. 2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인 것이다. 일찍 기술을 배워 취업을 하길 원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최소한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각 도시를 순회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사람들은 장 목사에게 “대학을 빠른 시일에 크게 발전시킨 비전이 뭡니까?” 물으면, 장 목사는 “첫째는 설립정신에 충실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육시설을 첨단화하는 것입니다.” 고 대답했다. 그는 학생들의 수업에 필요한 기자재를 대리점을 통해 구매하지 않았다. 직접 본사에 가서 그것을 구입해왔다. 시마스제작소와 메그로회사의 전자계측기인 오실로스코프 싱크스코프 밸런스 등을 구입할 때도 장 목사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당자를 만났다. “난 부산실업전문학교 학장이다. 학생들의 실습 기자재를 구입하려 한다.”고 말하자 “우리는 개인에게는 기자재를 판매하지 않는다. 대리점을 통해 구입하기 바란다.”고 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잘 알고 있다. 학생들이 당신의 회사의 기자재를 익혀놓으면 나중에 엄청난 판매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좀 다오. 결코 당신들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것이다.” 고 설득했다. 그러자 담당자가 “당신의 열정에 감동했다. 기자재의 값을 40% 할인해주겠다. 계속 우리와 거래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움을 갖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교육은 곧 만남이다. 좋은 교육은 좋은 만남에서 출발한다. 장 목사 한 학기에 두 차례씩 ‘학장과의 대화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만남을 통해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갖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채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 중 하나였다. 모든 지식은 신앙의 바탕 위에서 빛이 난다. 신앙이 없는 교육은 때론 공허할 뿐이다. 그는 그룬두비히의 책을 읽고 그의 삶을 많이 연구했다. 그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면 독서하고(知), 둘이면 노래하고(情) 셋이면 체조를 하자(意) 하나님·이웃·땅을 사랑하는 ‘심애의 마음’을 갖자.”
 머리로 배우는 지적교육, 가슴으로 느끼는 정서교육, 손으로 일하는 의지적 교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드시 1년에 두 차례씩 부흥회를 열었다. 주일은 대교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을 맡아 사역했고, 평일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방학 중에는 미국에 건너가 도움을 청했다. 최근 파악해보니 부산실업전문학교 출신 목회자가 11명이나 됐다. 교회에서는 세족회를 만들어 신앙 좋은 청년들을 선발, 훈련 시켰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목사가 2명 배출 됐다. 서울 답십리교회 박구하 목사와 중국선교사 김찬영목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장 목사는 졸업생 중 목사 장로 집사가 많이 배출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
 기술교육은 시대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여러 회사에서 졸업생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 산업화를 외치며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졸업생들은 학교에서 충분한 실습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울산 현대조선을 비롯해 각 회사에 수 천 명이 취업했다. 또 한 가지 호재가 있었다.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측량 전기 토목 설계 기술을 가진 인력이 대거 중동에 파견된 것이다. 졸업생 취업률 100%.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
 1971년, 부산실업전문학교는 국내 최초로 사회교육원을 운영했다. 당시 한국에는 ‘사회교육원’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그것은 장 목사가 미국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대학에 주부 · 신부 · 노인 · 꽃꽂이 교실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개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부산실업전문학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주부와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캠퍼스는 학교가 아니라 공원처럼 변했다 그 즈음 사업을 하는 이학수라는 분이 그를 찾아왔다. “대학이 지역사회를 위해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더군요. 저는 중병에 걸려 곧 죽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면서 그는 장 목사에게 흰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봉투 하나에는 1,000만 원, 다른 봉투에는 500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당시 1500만 원은 지금의 1억 5000만 원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액수였다. 그 돈으로 종훈 장학회를 만들어 매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장 목사는 정말 분주한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의 성서학 강의는 물론 교회 대학 채플에서의 설교와 집필활동이 이어졌다. 결국 잠자는 시간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새벽 4시 30분에 기상했다. 먼저 기도를 드린 후,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낼 원고를 집필한다. 그날 하루 중요한 일들은 새벽에 거의 마무리한다. 장 목사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수면을 취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장 25절). 당시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편입할 4년제 대학을 세우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장 목사 부부는 무려 12년 동안 기도했다. 그런 12년 동안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1991년, 4년제 대학인 동서대학교가 인가를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꿈을 드디어 이루게 해주신 것이다. 그 대신 정치에서는 손을 때고 교육과 목회에 전념하도록 새로운 길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동서대학교는 인가를 받은 이듬해부터 신입생을 모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그렇게 전문대학인 경남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편입학할 수 있는 4년제 대학이 생긴 것이다.
 1995년, 동서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꿈과 비전과 신앙을 심어주는데 주력했다. 사실 그것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었다. 총장을 맡아 처음 선언한 것이 교육의 세계화였다. 국내에만 머무는 교육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장 목사는 세계 20여 국가 78개 대학 및 연구소와 교류협정을 체결했다.
 
3. 세 번째 부르심: 정치가로서의 삶
 장 목사에게 교육은 평생의 소원이요, 꿈이었다. 경남공업전문대학은 일취월장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도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생 중 가장 보람 있고 분주한 나날이었다.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시 문화상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캠퍼스 중심에 초현대식 건물을 짓고 그의 호를 따서 민석기념관이라 명명했다. 거칠 것이 없는 성장의 연속이었다.
 1979년, 정국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해 10 · 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이어 12 · 12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최규하 총리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9월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부산의 여러 모임에 참석해 나라의 안정을 역설하곤 했다. 이때 새로 등장할 정당은 전국에서 참신한 인물들을 찾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두 차례나 받았지만 계속 거절했다. 그런데 평소 안면이 있던 어느 분이 조용히 그를 불러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이 뜻을 전하기 위해 심부름 온 사람일 뿐입니다.”
 “우린 지금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인물을 찾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당신을 추천했다. 이 지역의 새로운 인물은 바로 당신이다.”고 했다. 장 목사는 정치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갈 길은 목회와 교육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교육(Teaching Ministry), 둘째는 목회(Preaching Ministry), 셋째는 치유(Healing Ministry)다. 이 셋은 결국 하나다. 그는 목회와 교육은 해보았지만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을 할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치를 통해 치유 사역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의 방향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세 번째 부리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새 역사 창조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 아래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1년 3월, 제11대 총선에 출마했다. 물론 지역구는 부산 북구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했다. 선거전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경남정보대학교 사회교육원에 참여한 주민들이 그의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일순간에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확보했다. 돈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11대 국회의원이 되어 여의도에 입성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장 목사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국회 선교사’가 되려고 권고하는 분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국회에 보낸 뜻이 무엇일까? 어떤 일을 맡기실까?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하나님, 국회의원도 제게 주신 소명임을 믿습니다. 신앙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로 단단히 무장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항상 길을 열어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약한 듯해도 강하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일이 닥치면 더욱 기도의 강도를 높인다. 그때마다 놀라운 위로와 지혜와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다. 국회에서는 교통체신위원회에 배속됐다. 당시에는 각 위원회 중 가장 인기가 없는 부서였다. 초선인 나로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선택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고를 받아보니 철도사업이 엉망이었다. 철도청장은 대부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적자는 연 수백억 원이 넘었다. 직원들 간의 음해성 투서는 도를 넘고 있었다. 이런 조직이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었다. “이건 순전히 나랏돈을 집어삼키고 있구나.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는 생각이 들자, 양복을 벗어던졌다. 점퍼로 갈아입었다. 6개월 동안 완행열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그 결과 철도 운영 상황을 훤히 알게 됐다. 그는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철도사업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철도 철도병원 식당을 민영화하고, 적자노선은 버스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철도사업은 대부분 이때 장 목사가 제안한 정책대로 운영되고 있다. 철도 자재의 무분별한 수입도 문제였다. 그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철도청은 창고에 재고가 쌓여 있는데도 계속 발주를 하고 있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것은 소중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행위다.”고 말하자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초선 의원이 직접 현장을 발로 뛰어 조사한 것을 토대로 밝힌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택시 운영도 민원이 많았다. 그는 몇 개월 동안 택시를 타고 다니며 의견을 수렴해 ‘택시사업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주변에서는 참 별난 초선 의원이라며 장 목사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목사로서의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가 입법의원 시절, 국회의사당 지하에 채플룸을 마련해놓았다. 그는 11대 크리스천 국회의원, 사무처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수요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국회조찬기도회 고문으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해두셨던 것이다.
 이후 1985년 2월에 치러진 12대 총선은 그야말로 혈투였다. 김영삼, 김대중 씨의 지지를 받은 신민당 바람이 전국을 강타했다. 하지만 장 목사는 4년 임기동안 양산~구포 간 도로확장, 구포역 신축, 도서관 신설, 서부터미널 유치, 그린벨트 완화조치 등의 업적을 열거하며 득표활동을 벌이는 등, 차분한 정책대결로 맞섰다.
 12대 총선을 치르고서야 장 목사는 비로소 정치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아니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온통 ‘복지사회 건설’에 있었다. 그가 정당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을 세워 젊은이를 교육한 것도 복지사회 구현 때문이었다. 정책위의장을 맡고 보니 국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정치국민을 위해 봉사할 결심을 하면 구체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대학생들의 학자금 문제가 시급했다. 영세민 자녀들이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학자금 융자 제도’를 만들었다. 은행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융자해주고 이자의 50%는 정부가 부담하는 제도였다. 학생은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원금을 상환하는 제도였다. 서민과 학생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은행과 정부는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모든 정책에 대해 분명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은 이 일을 기뻐하실까. 과연 국민들이 기뻐할까.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책인가.”라는 이 물음이 바로 그의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됐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장 목사는 정치를 하지 않아도 별반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정치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학자금 융자제도를 반대하는 은행과 정부에 맞서 수차례 당정협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 제도를 확정했다. 이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대학교수들의 연구년제를 도입했다. 교수들의 재충전을 위해 연구비를 지급하고 단기간 외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안식년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지만 이 제도가 처음 실시된 1986년에 가장 많은 국공립대학 교수들이 연구비를 지원받아 해외로 나갔다.
 그는 교육자다, 교육은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자녀가 어렸을 적에 좋은 습관을 심어놓으라. 그러면 그 습관이 평생 동안 이어지리라. 습관은 나무와 같다. 오래된 나쁜 습관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좋은 습관과 신앙이다.
 장 목사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 가지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깨끗한 정치인의 꿈이었다. 적어도 물질의 유혹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한 평의 땅도, 당 한 푼의 돈도 옳지 않은 것이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한다. 권력을 이용해 땅을 사거나 부를 취한 적이 없다. 초선 때부터 좋은 정치인의 습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2대 국회 후반에게 뜻하지 않은 중직을 맡게 되었다. 국회 정 부의장 선거에서 이재형 의원이 165표를 얻어 국회의장에, 장 목사가 160표를 얻어 부의장에 선출됐다. 재선의 국회부의장은 분명히 이변이었다. 그는 당선 인사를 통해 용광로 같은 국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계층 세대 지역 간의 불화와 갈등을 수렴해 용해시키는 국회가 되자고 역설했다. 그는 일단 짐을 싸서 부의장실로 옮겼다. 공간도 널찍하고, 비서진도 중원이 되고, 관용차도 지급됐다. 이제는 지역구를 관리할 시간적 여유도 갖게 됐다. 의장단은 입법부를 대표해 외국 손님을 맞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를 접견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까지는 ‘정책’에 몰입했으나 이제부터는 조금씩 ‘정치’를 배우는 시기였다.
 1988년 4월 26일, 제 13대 총선이 치러졌다. 장 목사는 민정당 공천을 받아 부산 북갑에 출마했다. 그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일해 온 것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총선의 키워드는 ‘바람’이었다. 정치바람 앞에서는 ‘업적, 봉사, 지역발전’ 등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상대 진영에서는 선거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때 장 목사는 정치는 바람인 것을, 바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인 것을, 정책도, 공약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제13대 총선 실패를 ‘사막에서 찾은 무덤’으로 정의했다. 무덤은 종말이 아니다 무덤은 실패가 아니다. 무덤은 곧 희망이다. 그는 총선 실패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것을 ‘사막의 무덤’으로 표현했다.
 〈탈무드〉를 보면 사막을 여행하는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나온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부자가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그들은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다. 그때 눈앞에 펼쳐진 공동묘지···.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묘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그것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암시였다.
 낙선, 그것은 장 목사의 묘지였다. 새로운 희망의 암시였다. 가까운 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선물이 있었다. 그를 지지해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지지해준 여러분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낙선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연구소를 출범시킬 것입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다. 장 목사가 이사장을 맡았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인들이 회비를 보탰다. 연구위원은 권영설 · 김동일 · 조승민 · 유동길 · 이성복 · 서의택 · 오석기 교수 등이었다. 자문위원은 정성모 · 서정화 · 이자헌 · 김중위 · 민병규 · 오한구 씨 등 현역 의원이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시선대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후보의 선거유세 때, 수영비행장으로 사용하던 장소에서 100만여 명을 모았다. 또 31개 개신교단 대표를 서울 힐튼호텔에 초청해 기도회를 가졌다. 노 대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딸 노소영 씨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노 대표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낙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장 목사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5남매를 기도로 키워온 한 여인의 삶이 89세로 마감된 것이다. 어머니는 폐암으로 1년간 고생하다가 가셨다. 아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거처를 서울로 옮겼을 때도 부산에 남으셨다. 주말마다 내려오는 아들을 위해 새벽 한 시든, 두 시든 기다렸다가 손수 문을 열어주신 분이다고 회고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고자 했다. 그리고 목사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100% 진실이라고 믿었다. 제13대 총선에 실패해 어머니의 가슴에 충격을 안겨드린 것을 장 목사는 늘 죄스럽게 생각했다. 반드시 재기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재기를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아파했다.
 
맺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3대 총선 실패는 화가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이었다. 나중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실패처럼 보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큰 사랑이었다. 그즈음 그는 부산 북구에 4년제 대학 설립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대학 설립 조건은 까다로웠다. 우선 시설을 미리 갖추어야만 했다. 장 목사는 열심히 부지도 확장하고 건물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꿈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2년제 전문대학 출신들이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일단 대학설립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학교명도 ‘동서’로 잠정 결정했다. ‘동서’란 동쪽(East)과 서쪽(West)을 의미한다. 즉 동양과 서양, 한국과 미국의 협력을 상징한다. 장 목사는 종합대학 승인을 얻기 위해 정원식 문교부 장관과 협의했었다. 그는 공과대학 말고는 승인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공과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선진조국 건설에 앞장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장 목사의 견학이념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1991년 허가를 받아 이듬해 첫 신입생을 모집했다. 12년 동안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정말 감격적인 입학식이었다. 4년제 대학 설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초대 학장에 정권섭 장로가 취임했다. 장 목사는 이 학교가 MIT 공과대학처럼 세계적인 학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세계 석학들이 몰려오는 명문이 될 것을 믿었다.
1995년 장 목사가 총장으로 취임해 본격적인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총선 패배가 학교 성장의 기회가 된 것이다. 원래 그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목회와 교육, 그것이 그의 달란트였다. 우선 대학의 과장 계장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담당역 제도’를 시행해 결제 단계를 대폭 축소했다. 기관이 활성화되려면 의사결정이 신속해야 한다. 담당자가 기안한 문서는 그 다음 단계를 거쳐 곧바로 총장에게 올라오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5단계 절차가 3단계로 축소됐다. 또 캠퍼스를 교육존, 연구존, 스포츠존으로 분류해 공원화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강의실에서는 화상강의가 가능했다. 장 목사는 직원들에게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했다.
 또한,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아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교수평가 제도를 도입해 모든 교수가 교육 연구 봉사 부문에 대한 자기평가를 하는 한편 상호 간의 상대평가를 해 ABC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것에 따라 업적금을 차등지급하는 제도였다. 3년 연속 A등급을 받은 교수는 ‘브랜드 교수’라는 칭호를 주고 연구비 지급, 정년 보장, 강의시간 조정 등 특혜를 주었다. 교과과정에 영어 강좌를 18시간 포함시켜 어학 교육을 강화했다. 재학생 대부분이 전공에 따라 미국 중국 일본에 1년씩 연수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그리고 장 목사는 “후발 대학은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학과 동일한 과정으로 경쟁해서는 이길 수 없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승산이 있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시작한 것이 디자인 분야였다. 우선 학부에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멀티미디어 디자인, 환경 디자인, 패션 디자인 등 5개 학과를 만들어 28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국내 여러 기업과 산학협력을 맺었고, 일본 나가오카조형대학, 독일 바이센제예술대학, 중국 베이징이공대학, 상하이공정대학, 홍콩폴레텍대학 등과 교류 협정을 체결해 교수 및 학생의 교류를 시작했다. 2000년에는 동서대에서 국제 디자인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미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일본 등의 수많은 학자들이 내한했다.
 하나님은 2002년에 디자인 전문대학원 설립허가를 받도록 도우셨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 디자인 분야의 박사를 배출했다. 디자인 전문대학원장에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조영제 교수가 임명됐다. 일본나가오카조형대학 도요구치 학장과 독일 바이센제예술대학 기노부 교수가 객원교수로 초빙됐다. 최상의 교수진을 확보한 것이다. 그해 교육부는 우리학교를 디자인 분야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했다. 특성화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또한, 장 목사는 늘“우리 대학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강조했다. 이 정신에 따라 국내외 봉사에 주력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개교 때부터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특히 국제기술봉사단의 인도네시아 봉사활동은 15년째 계속되고 있다. 장 목사도 학생들과 함께 현지를 방문했고, 페트라대학은 ‘한국의 날’을 제정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나중에 수라바야 시장이 동서대학을 방문해 감사패를 전달했다. 경남정보대학교도 국제선교봉사단을 만들어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버림을 받느니라.”(잠언 12장 24절).
 동서대학이 개교 10주년을 맞이 한 해에 슬로건 두 개를 정했다. 그것은 Top 10 and the world’와 ‘너희 가슴에 세계를 담아라’다. 첫 번째 슬로건은 특성화 분야에서 국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목표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국내 대학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즈음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장 목사는 “우리 대학에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설치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붙인 단과대학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영화연구소도 만들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자 그는 쾌히 승낙해주었다. 임 감독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겠다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서대학은 부산국제영화제와 제휴해 AFA(Asia Film Academy)도 개최하고 있다. 아시아의 젊은 영화 지망생들이 이곳에 와서 수업을 받으며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2006년 1월 8일, 장 목사는 대학교회를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김호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현재는 최훈규 담임목사). 대학교회는 재적교인이 800여 명쯤 된다. 교회에 중보기도팀이 있어 365일 계속 학원복음화를 위해 릴레이 기도를 드린다. 대학교회는 장 목사가 설립한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계승한 것이다. 장 목사는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회는 영적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이곳에서 모아진 에너지가 대학에 송전되어 기도의 불을 밝혀야 한다. 대학교회에서 기도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캠퍼스는 계속 영적인 빛을 발하며 발전할 것이다. 장 목사는 그것을 믿는다.”고 늘 강조했다. 그는 목사였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대학을 설립하게 하시고 전 세계의 대학들과 교류하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 장 목사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캠퍼스 선교를 위함이다. 캠퍼스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캠퍼스는 낚시로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다. 그물로 한꺼번에 수많은 영혼을 낚는 가두리 양식장이다. 우리 대학에는 캠퍼스 선교사들이 있다.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도록 돕고 있다.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도 배출했다. 그것이 최고의 보람이다. 장 목사는 학기초와 학기말에는 직접 설교를 했다. “이 학교는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세웠다. 기독교 정신이 희석되면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우리학교 학생들이 Number One이 아니라, Only One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지난 50년간 우리 학교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우리 학교는 이공계 중심으로 발전한 학교다. ‘경남공전’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인문사회계통을 비롯한 다양한 학과를 신설하며 그야말로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대학은 그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해야 한다. 지역사회를 떠난 대학은 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50년 동안 동서학원은 지역사회에 많은 은혜를 입어왔다.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흙을 실어 나르느라 먼지도 많이 날리고 고음도 심했을 텐데 큰 불평과 항의 한번 없이 많이 이해하고 참아주셨다. 장 목사는 “우리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은 지역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으로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 지역사회가 발전하고 더불어 동서학원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발행연도순)
《세 번째 부름》 민석문화사, 1983.
《의정활동과 정책과제》 민석문화사, 1984.
《장성만 에세이 전집》 전5권, 민석문화사, 1986.
《민의와 정책 사이》 민석문화사, 1988.
《도전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약속》 민석문화사, 1991.
《소향 박동순박사 회갑기념논문집》 소향 박동순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편집위원회, 1999.
《디지털사회를 사는 지혜》 양서원, 2001.
《예수님 때문에 = Because of Jesus》 동서대학교대학교회, 2003.
《동서대학교 10년사》, 2003.
《(장성만 목사 설교집)약속의 땅》 현학사, 2003.
《행복을 선택하는 것》 현학사, 2004.
《성서가 말하는 행복과 성공의 비결》 시리즈 5권, 현학사, 2004.
《플러스 파워》 민석문화사, 2006.
《소향산책》 동서대학교 소향 박동순 총장 문집편찬위원회, 2007.
《박동순총장 문집2》, 2007.
《빌사일삼》 국민일보, 2010.
《경남정보대학교 50년사》, 2015.
《동서대소식》 341호, 201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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