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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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 조기은퇴식을 하는 안용운 목사를 21일 온천교회 인근에서 만났다. 안 목사는 ‘은퇴하는데 어떤 마음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특별한 건 없다”며 애써 무덤덤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은퇴한다고 많은 것을 내려 놓았는데,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은퇴 이후 좀 더 내려놓고 이제 좀 편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2007년 부산 그래함 페스티발부터 부산교계 연합운동을 주도해 왔던 안용운 목사.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본부장으로 수많은 사업들을 추진해 왔고, 탈북난민 강제북송 반대운동과 동성애 반대 운동, 최근에는 ‘(사)행복한 윤리재단’을 창립해 우리사회 윤리도덕을 지키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그가 연합운동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은퇴이후 활동에 대해서도 들어보았다.
 
SFC에 목숨걸었던 평신도 간사
경남중고등학교와 서울대를 나온 안용운 목사는 대학 졸업후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받고 시골로 내려갔다. 전교생 앞 부임 첫 인사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여러분들께도 복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인사말을 전했다. 첫 만남부터 ‘내가 예수쟁이다’라는 것을 선포하고 교사 생활을 해 왔다. 크리스찬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학교에서 늘 최선을 다해 왔다. 동시에 시골교회에서도 열정적으로 봉사했다. 그 덕분에 ‘총각집사’ 타이틀을 갖게 되었고, 중고등부 부장으로 주일날 말씀도 전했다. 하지만 학교와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학교에서 5-6개 과목을 맡아 수고해 왔던 그에게 토요일 오후는 수업준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동시에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수업준비’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말씀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쌓이게 되었다. 결국 어느시점에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고, 고민하는 중에 1978년 1월 사직동교회에서 열린 SFC 동계 수련회에 인솔교사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길이 ‘학교’가 아닌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SFC 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SFC 간사의 길은 쉽지 않았다. 학교와 달리 당시 간사는 사례비가 전혀 없었다. 안정적인 교사직과 달리 간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이 때문에 가족들의 동의도 필요했다. 당시에는 교사 발령 이후 일정기간 교사직을 수행하지 안했을 때는 다시 교사직을 반납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SFC 간사는 다시 교사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많은 것을 내려놓게 만드는 험난한 길이었다. 안 목사는 이 순간 ‘SFC 간사직’을 택했다. 그리고 스스로 “내 젊음을 SFC에 바쳤다”고 고백했다.
 
일선목회의 길로
안 목사는 SFC 평신도 간사를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리더로 부르셨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신학공부를 통해 목사신분으로 좀 더 강력한 리더쉽으로 SFC를 이끌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졸업을 했지만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2년간 일선 목회를 해야 했다. 안 목사는 “당시에는 SFC로 돌아갈 일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의사들도 여러과들을 공부하는 인턴과정이 있듯이, 목사들도 일선 목회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딱 2년만 목회를 할 생각이었습니다”며 시골교회인 진성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2년이 아닌 8년 동안 진성교회에서 사역하게 하셨다. “8년을 있으면서 그렇게 원하던 SFC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동시에 여러곳에서 청빙도 왔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SFC나 다른 사역지가 아닌 진성교회에서 좀 더 있으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진주와 가까운 진성교회에서의 8년은 그에게 연합운동을 배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매일 진주로 나가 일선 목회자들을 만났고, 진주 YMCA, 경실련 등 다양한 곳에서 연합운동을 함께 해 왔다. ‘서부경남 선교 동지회’를 만들어 서부경남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역할도 해 보았고, 어떤 사역을 위해 사람을 만나서 설득하고, 함께 일하자고 전화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안 목사는 “(진성교회에서의)이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입니다. 이때 진정한 목회가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 같아요. 목회한다는 것은 ‘성도들과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 그렇게 살았고요”
그가 진성교회에서 8년이 되었던 해 앞으로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성교회에서 계속해서 사역하는 것과 다른 곳으로 부임하는 것, 그리고 새롭게 개척하는 것에 대해 기도하고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안 목사의 발걸음을 온천교회로 인도하셨고, 1996년 4월 온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연합운동
안 목사가 부산교계 연합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산 그래함 페스티발’ 때문이다. 그가 연합운동을 주도해 온 진주는 부산의 1/10 크기였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6년 부산 그래함 페스티발 준비위원회가 가동되고, 여기서 총괄총무를 맡아 그래함 페스티발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이 자신감을 갖게 된 동기라고 말했다. 당시 그래함 페스티발 예산만 22억이었다. “제가 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서 설득하고, 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진성교회에서 그런 훈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예비하심이 놀라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총무와 본부장, 지금은 법인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정필도 목사(수영로교회 원로)가 부산성시화의 토대를 쌓았다면, 최홍준 목사(호산나교회 원로)와 안용운 목사는 그 토대위에 성시화본부를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타 지역 성시화본부측도 부산성시화운동본부를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본부라며 벤치마킹을 하고 있을 정도다.
 
조기은퇴와 활동
‘왜 조기은퇴를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교회를 위해서 있는지, 아니면 교회가 나를 위해서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금은 교회가 나를 위해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사님이 오실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고 말했다. 연합운동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교회가 많은 것을 양보한다는 것을 알고, 그 부분이 항상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모 권사님의 말이 항상 마음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그 권사님이 ‘목사님 우리는 독립투사의 딸 같아요’라고 한 말이.....”
목사를 믿고, 지금까지 희생한 교회에 늘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안 목사는 “두나미스 성령 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로서는 성령운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해 왔던 사역들을 하나씩 내려 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내려놓는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다른 일들을 다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웃음). 모든 것들을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며 앞으로의 계획도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의 은퇴 후의 삶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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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계 연합운동을 주도해온 안용운 목사 - 24일 온천교회에서 조기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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