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9:8-9)
 
1. 거짓말 천국
 
지금 세계는 탈세계화(후기-지구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국의 유럽연합탈퇴(Brexit)와 미국 트럼프 시대의 개막은 보호주의적 패권과 국민국가적 배타주의의 표상으로 소통과 교류와 연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시되고, 세계는 이제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지평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적으로는 대외고립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민자와 교역 상대국에 대한 적대의식을 감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주체의 욕망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그 욕망의 헛된 전망을 정당화시킨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으며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2016년의 독일어로 뽑았다. 바야흐로 탈세계화 시대는 탈진실의 사회를 이끌며 ‘거짓의 시대’를 개막시킨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018년 10월 5일 재판부는 횡령, 뇌물 등 16가지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대통령(이하 MB)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130억 원을 선고했다. 정계 입문 이래 20년 이상 국민을 속여 온 MB의 대국민 사기극이 이제야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MB의 죄질이 박근혜 전대통령보다 더 나쁜 이유는 다스가 ‘법인화된 최순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신교 장로로서 거짓말을 하였고, 신앙으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는커녕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범행과 책임을 전가한 파렴치범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거짓(false, lying)을 ‘하나님보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본다. 이러한 거짓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우상숭배, 복술, 주술과 관련해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여 예언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렘 29:8-9). 구약성서는 거짓 고소와 거짓 증거에 대해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짓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 십계명의 8계명도 이렇게 선포한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교회, 목회자, 개신교 단체에 이르기 까지 온 세상이 거짓말 천국이다.
 
2. 가짜뉴스(=허위정보)
 
가짜뉴스(fake news)는 2010년 중반에 등장했다.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는 가짜뉴스라는 말 대신 ‘허위정보(disinformation)’로, 혹은 ‘거짓정보’로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가짜뉴스에서 풍기는 ‘그래도 언론적 행위’라는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허위정보’가 100% 가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이 함유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90%의 내용이 사실인 경우도 있다. 사실에 근거해야 일반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위정보’는 인과관계를 허위로 만들어내고 별개 사실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결론을 비틀어 버린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에스더 기도 운동의 실체를 파헤친 <한겨레 신문> 탐사팀 김완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스더 기도운동은 동성애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고, 난민을 범죄와 연결지으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가짜뉴스들을 만들고 배포했습니다. 애초 탐사팀의 에스더에 대한 관심은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이스라엘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깃발을 추적하다 에스더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론 속에서 그들은 세상과 ‘영적 전쟁’을 벌일 ‘인터넷 사역자’를 모집해 ‘지저스 아미’(Jesus Army=하나님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기가 바로 비틀어진 사실, 가짜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군대’,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가 필요한 시대이다. 개신교 단체의 ‘거룩의 지나친 잉여’가 ‘폭력의 과도한 풍성함’을 낳은 것이다.
 
2017년 8월 빌리그레이엄 센터 사무총장인 에드 스테쳐는 ‘가짜뉴스 세상에서 진리의 사람 되기(Being people of Truth in a world of fake news)’란 글에서 ‘가짜뉴스 대응법 4가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당신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공유하지 말라. 둘째, 진실함(integrity)을 지키라. 셋째, 당신이 공유하는 것이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지 확인하라. 넷째, 만약 당신이 문제의 일부라면 사과하라.” 가짜뉴스, 곧 허위정보는 영혼을 좀먹은 사탄의 음성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실을 왜곡할까? 건전한 보수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3. 무너진 보수주의, 극우로 치닷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김현준 연구원은 한국 개신교의 극우 이념을 조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보수주의는 반공주의와 근본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반공주의에 동성애 혐오, 여성혐오(반여성주의). 이슬람․이주민 혐오(인종주의)를 ‘가짜뉴스’로 추가하며, 혐오와 차별 주장을 공공성 담론으로 포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현준 연구원에 따르면 보수 우익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다. 1단계, 1970-80년대 ‘국가조찬기도회 정치’를 시작으로, 2단계, 1990년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광장정치’와 기독당을 거쳐, 3단계, 2000년대 기독당과 기독교 뉴라이트라는 ‘전문적 사회운동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4단계로, 2010년 전후 에스더 기도운동이라는 혐오와 차별 기반의 전방위적 세력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보수와 극우 개신교의 발생사적 근원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라고 한다. 김현준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 기독교의 극우 이념 중심에는 ‘독실한 크리스천’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은 오늘날 보수 우익 정치 세력 전체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에스더 기도운동 네트워크 세력을 비롯한 이른바 ‘극우’ 세력이 재발견한 보수 이데올로기와 국가론적 비전의 기원이다.”
 
사실, 보수주의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북진통일’로 규정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으로 세운 인물로 추종한다. 그러나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은 좀 더 나아가 한국이 미국처럼 애초에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다고 생각하고 한민족이 ‘이스라엘’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임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것은 말세론자들의 144,000명만 구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의 믿음, 나아가 에스더 기도운동이 대중에게 유발시키려는 정서는 (정치적 주도권과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통한 여론의 동원이다. 곧, ‘대중의 절망과 좌절-사회적 공포-증오와 공격’이 극우주의의 출현 과정인 것이다. 말세론이 위세를 떨쳤을 때는 ‘증오와 공격’ 대신 ‘포기와 무기력’이었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공격성 레벨이 강화된 것이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종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촛불 혁명 이후 대중은 절망하기 않고, 희망으로 나가고 있다. 따라서 ‘대중의 절망과 좌절’은 ‘보수주의의 절망과 좌절’로 교체해야 한다.
 
아무튼 김현준 연구원은 이렇게 말한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오늘날 저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사회적 소수자’ 때문이라고 선동한다. 그들이 만든 가짜뉴스가 그 혐오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셈이다.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재추동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리, 죄인, 창녀, 병자들과 같은 사회적 소외자와 소수자를 찾으셨는데, 한기총과 기독당,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 에스더 기도운동도 사회적 소수자를 찾는다. 그러나 다른 점은 예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하고자 찾으셨지만, 이들은(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은 거짓뉴스와 결별하고 진솔한 신앙과 복음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을 짓밟고자 찾고 있다.
 
4. 보편적 해방과 대안적 사실
 
‘탈진실’과 ‘탈사실’의 시대가 이끈 ‘거짓의 시대’는 ‘진실의 죽음’을 가져온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와 다원주의(Pluralism)가 여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하였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 기술이 열어놓은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을 만들어냈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나아가 소통과 교류와 연대가 사라질 때 세계는 다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진리의 상대성으로 말미암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 칸트와 헤겔을 통해 대안을 탐구하고 있는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관점에서 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지제크에 의하면 진실의 죽음은 3가지 경로를 통해서 왔다고 한다. 첫째,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의 부상 둘째,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의 유산이 그것이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은 합리적인 토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는 데 유리하기만 하다면 가차 없이 데이터를 조작한다.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예는 앞서 언급했으니, 좌파에 대한 지제크의 말을 들어 보자.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좌파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약자에 대해 부정적인 뉴스가 나오면 이를 감추려 들거나 그런 뉴스를 내보내는 매체를 ‘이슬람 혐오적인 인종주의’라고 비난한다.” 둘째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로 공동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온갖 음모와 주장이 아무런 제약 없이 유통이 된다(무수한 단체 카톡에 떠도는 허위 정보를 보라). 셋째 해체주의와 상대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팩트, 사실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의견의 자유’와 ‘사실의 자유’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지제크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지제크의 말을 들어보자. “이른바 ‘데이터’라는 것은 방대하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이해의 지평에서 데이터에 접근하며, 어떤 데이터는 특권화하고 어떤 데이터는 누락된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는 선별된 데이터를 엮어 일관된 서사로 만든 ‘이야기’지, 실제 일어난 일을 사진처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지제크의 생각을 신학적으로 적용하면 이렇다. 성서를 보되, ‘보편적 해방’과 ‘대안적 사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 성서의 무수한 이야기들은 보편적 해방의 사건이며 그 사건의 진술은 대안적 사실인 것이다.
 
오늘 가짜 뉴스에 빠진 근본주의자들은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자신들만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하여 ‘우리는 역사적 제약에서 한 발짝 벗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상대주의의 인식론에 기반 하여 오히려 자신들만의 정당성을 위하여 거짓을 퍼뜨린다. 거기에는 보편적 해방도 없고 대안적 사실도 없다. 쉽게 이야기해보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세상! 생명이 생명답게 인정받는 세상! 그들에게는 그러한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생명 되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아주 간단한 보편적 해방의 관점이자, 이 불의한 세상에 대안적 사실이 된다. 일찌기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이렇게 말했다. “사유는 세상의 속도보다 더 빨라야 한다.” 그렇다. 그래야만 세상 안에 팽배한 악의 세력들과 그나마 겨우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참된 신앙의 길은 ‘치열한 사유’와 ‘뜨거운 실천’에 있을 것이다.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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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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