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민들레포럼의 유희태 대표는 가난한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만나고 상고를 졸업하여 기업은행에 입사해 37년간 근무하면서 1등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경영능력에 뛰어났다. 그래서 국책은행에서 노조위원장을 거쳐 최초로 부행장까지 고속 승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95세 된 할아버지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내가 60살 때에 은퇴를 했는데 글쎄 어느 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네. 이 나이까지 살 줄 알았으면 인생 계획을 달리 했을텐데 허송세월을 보내 후회가 막심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그 나이에 후회하는 것을 듣고, “나도 인생 후반전에 더 늙기 전에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지역사회 봉사 단체인 ‘민들레포럼’을 만들어 고향 땅에 민들레 동산을 조성하여 유기농으로 효능이 뛰어난 민들레를 재배하게 되고 건강에 유익되도록 보급함은 물론 그 여력으로 ‘한국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로 봉사하면서 딸 쌍둥이를 입양하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가 읽었던 어느 책에서 이를 알게 되었다. 시편 143편 10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삶에 만족이 있다는 진리의 말씀을 일찍이 깨닫고 늦게 깨닫는 농도에 따라 인생 후반전의 삶이 차이가 난다.
45년이 넘도록 한 우물만 파서 그런지 샘물이 나는 것인지 흙탕물인지 알 수 없어도 그렇게 잘 살았다고 볼 수 없었다. 늘 남으로부터 미움과 질타를 받아 아마도 욕을 많이 들었던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래는 살 것 같은 예감은 든다.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에 겨우 부산지역 교회가 불과 150~200개가 될까 말까 하는 즈음에 서울에서 본사를 둔 한양대 설립자 고 김연준 장로가 운영하고 이사장인 교회연합신보(지금은 (주)기독교신문)에 기자로 출발할 그 당시만도 부울경, 경북은 그야말로 광야같은 허연 벌판이고 교계 파워는 그냥 모기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허약 그 자체였다.
기사 송고하고 신문 붙이고 발송하는 일에, 광고모집과 수금까지 1인 5역으로 그때의 암울함을 살아갈 때는 교계는 그래도 인정과 눈물과 사랑이 있어 견딜 수가 있었다. 때로는 어느 목사는 “고생이 많다”면서 봉투를 꺼내준 때도 한두번이 아니어서 그 정에 못이기고 정론에 몰두하다보니 세월이 흘려 여기까지 왔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나은 첫 아이와 둘째도 모두 기독병원으로부터 무료로 입퇴원 시켜 준 자애로움으로 감사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50년이 지난 한국교회와 부산교계는 어떠한가? 살벌하고 얼음판에 독사에게 물릴까봐 이리 저리 피해 다녀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시편 23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함이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이하시리로다”라고 매일 같이 외우지 않으면 살 수없는 온통 신뢰할 수없는 주위엔 영적인 마귀들만 보였다. 언젠가 “봄날이 오겠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그 날은 올 것이라는 기대로 걸어온 반평생을 교계 언론에 매달려 왔다. 이제 손을 놓을 때 무얼하고 사나해서 늦게 배운 부산디지털대학 노인복지학을 전공해서 노인복지사 2급을 땄다. 노인 100세 시대를 보고 평생 배워서 만학의 꿈을 펼쳤다. 쾌청한 봄날은 올 것이고 늙어가면서 죽을 그날도 올 것이다.
물론 후회하며 골백번 회개하면서 “모두가 내 탓이로소이다”로 고백하면서 살아 온 76년 그 세월이 작다면 작고 많다면 많은 흘려간 세월에 웃음 짓고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범사에 고마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그 때에는 내 무덤에 침을 뱉고 돌을 던져도 무방하게 받아 드리는 심정이니 이제 제발 미워하는 마음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2019년 새해 벽두에 하게 된다. 이제 반드시 그날은 올 것이라고....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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