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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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월 28일 부산롯데호텔에서 열린 재단법인 21세기포럼 주최 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포럼에서 이상규 교수가 강의한 원고입니다. )

1. 문제와 과제
삼일운동이란 일제의 식민지배와 그 억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서 19193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1910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독립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때의 독립운동 기간 동안 전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고, 전국 218(232)개 부,군 가운데 212(229)개 부,군에서 1,491(1,542) 건의 시위기 일어났다.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지만 3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자 7,509, 부상자 15,961명이었고, 피검된 자는 46,948명에 달했다. 피해상황이 보여주는 바처럼 1919년의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으로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다.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삼일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고,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알리는 기회가 된 것 또한 삼일운동의 의미를 더해 준다. 평양 주제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Moore, 1874-1963)조선인의 삼일운동 후 일 년 간의 사상적 진보는 50년의 진보와 같은 진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삼일운동은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으나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첫째, 그해 411일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서 국민주권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고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둘째, 삼일운동이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독립 투쟁이 일어나, 북간도에서의 국민군회를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가, 같은 해 청산리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대결하는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고, 국산품애용, 근검, 절재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삼일운동이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 피 압박 약소 만족의 독립과 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북경대학 중심의 5.4 운동, 인도 간디 중심의 샤타 그라하비폭력 무저항운동이 그것이다. 필리핀, 베트남, 이집트 등지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섯째, 삼일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수단인 무단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어 비록 가식적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 개괄한 삼일운동을, 이기백은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함석헌은 민중운동으로, 김성균은 민족정신 환기운동으로, 현상윤과 이병혁은 조국해방운동으로 인식했는가 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농민 노동자운동이기 때문에 인민혁명운동혹은 계급투쟁운동으로 평가한다. 어떤 평가를 하던 분명한 사실은 삼일운동은 소수의 엘리트 구릅의 주도적인 준비와 대중적 호응으로 발전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삼일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아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어왔다. 첫째, 삼일운동 준비단계에서 러시아 혁명이나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우리나라 삼일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삼일운동은 대중 혹은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거사에 참여한 주도적인 세력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이 국제 정세에 민감할 수 있었을까? 지도부를 형성한 소수의 엘리트 구릅이 국제정세에 민감했고, 그것이 삼일운동의 시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민중동원의 실제적인 동력원이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삼일운동 발발배경에 있어서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 그리고 양자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둘째, 삼일운동을 이끌어가 주체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이 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 운동을 실제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다수의 기독교계가 관여한 민중 세력인가? 이 운동의 외연에 있어서 주도적인 세력 혹은 조직은 무엇인가? 셋째, 삼일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운동이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아 동학농민운동, 개화자강운동, 의병운동 등 세 갈래의 민족운동이 합쳐진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와 개항 이후 추진되어 온 민족운동의 하한점으로 보고 이후의 민족운동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이런 사학계의 해석과 더불어 기독교계의 삼일운동 참여정도에 따라 삼일운동 성격규정이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위의 세 가지 논점에 대해 유의하면서 삼일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기여 혹은 역할이 어떠했던 가에 대해 고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개별 기독교인들(Christians)과 집합적 개념으로서의 기독교회(Christian church) 양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삼일운동과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미 논구된 바 있으나,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수렴하되 새로운 정보 혹은 자료를 기초로 삼일운동의 준비단계, 거사 실행단계, 그리고 피압박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의 열망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 형성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체한 선교사들은 3.1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부다 구체적으로 논구하였다. 특히 국제사적 시각에서 이해한 선교사들의 견해, 특히 삼일운동에 있어서 선교사의 역할이 어떠했던가에 대해 고찰하였고, 또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3.1운동 백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시의적절한 논구로 판단되며, 향후 기독교와 삼일운동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의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삼일운동의 배경과 준비과정
19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출범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11월에는 독일에서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1920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특히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1918)과 함께 세계정세의 큰 변화가 예견되고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1월 연두교서에서 새로운 전후 질서의 ‘14개조’(The Fourteen Points) 원칙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민족자결주의와 국제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맹의 결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 원칙은 식민지배 하에 있던 약소국을 크게 고무하였다. 한국의 지식인들도 민족자결주의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191811월 미국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여운형은 그를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크레인은 19191월의 파리강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 한국 대표 파견을 권유하고 국내외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피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비롯한 장덕수 김규식 서병호 선우혁 신석우 조동호 등은 이를 즉각 실행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한 조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만들었다. 이들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하여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독립선언을 준비하게 했다. 이에 191928400여명의 학생들이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이를 일본 정부와 공공기관 그리고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이 독립선언식의 주도적 인사들이 기독교신자들이었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백남훈은 2.8 독립선언 실무를 담당했던 기독교 신자였다.
반면 선우혁(鮮于爀)19192월 조선으로 들어와 선천과 평양 정주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파리평화회의 소식을 알리는 한편, 서북지역 개신교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과 협력하도록 했다. 위의 신한청년당의 7인의 지도적 인사들을 포함하여 삼일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활약했던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신자였다. 한편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도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키로 했는데, 중심인물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비록 이들은 일본 영사관의 방해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이 소식이 일본의 영자신문에 보도되어 재일 유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은 일본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접하고, 19191월 중순경 만세시위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고, 이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을 정했다. 한편 평양의 기독교계는 정주교회 집사 출신으로 상하이 한인교회에서 일하던 선우혁을 통해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근황을 전해 듣고 19192월 중에 기독교계 학생들과 신자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김선두 강규찬 도인권 이덕환 윤원삼 김동원 등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었다. 천도교 측은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손병희 최린을 중심으로 기독교 측의 이승훈 함태영과 접촉하여 운동의 일원화를 협의했다. 224일의 일이었다.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은 연합하여 1) 독립을 선언하고, 2) 일본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며, 3)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3가지 방식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최린과 함태영은 각각 양측을 대표하여 실무를 협의하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조선 YMCA 전국연합회 박희도, 세브란스병원구내 교회 이갑성 등 학생 중심의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들 학생들에게도 참여를 요청하였다. 불교계도 동참케 하여 성사되었으나 유림(儒林)과의 연합은 성사되지 못했다.
운동지도부는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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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과 한국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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