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항서교회.JPG
 
부산 부용동에 위치한 항서교회(나재천 목사)가 지난 1일(주일), 설립 110주년 기념예배를 가졌다. 이날 기념비 제막식과 임직 및 취임, 은퇴예식도 함께 진행됐다. 앞으로의 100년을 기대하면서 역경의 바람이 불어도 뿌리 깊은 역사로 이겨내길 소망하는 항서교회를 찾았다.


암울한 시대에 세워진 교회

을사조약이 체결됐던 1905년, 항구도시의 서쪽 어귀에 말씀의 씨앗이 싹을 틔어 세워진 자갈치교회. 지금의 항서교회다. 나재천 목사는 “1900년대 초반에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암울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에 부산에서 교회들이 많이 세워졌다.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항서교회가 세워진 1905년 당시 부산에는 이미 부산진교회, 영선현교회(초량교회), 영선동교회(제일영도교회) 등이 호주와 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있었다.
항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된 사이드보덤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김성우, 김공원, 박인서, 이치선 등이 모여 가정에서 첫 예배를 가진 이후 자갈치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나재천 목사는 “항서교회는 항구도시의 서쪽에 처음 세워진 교회다. 1905년 2월 첫 주에 첫 예배를 드렸다. 금년 110주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일, 2월 첫 주에 110주년 기념예배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고 말했다.

 
 
항서교회 과거1.JPG▲ 1935년도 항서교회 교우들
 
 
어려울 때 함께 했던 교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항서교회는 교회 건물을 피난민 거주지로 선뜻 내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피난민들을 위해 예배당까지 그들의 숙소로 내주게 됐다. 당시 인근 학교 건물이 군대 막사로 사용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장소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항서교회는 아이들을 위한 임시 교실로 교회를 제공했다.
“교회 건물이며 마당까지, 피난민들을 위해 최대한 다 내어줬다. 당시에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는 나 목사는 “당시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교회를 기억했다. 작년 6월 서울에서 권사님 한 분이 피난시절 고마웠던 마음에 교회에 연락을 하고 감사헌금을 하셨다. 또 가수 윤형주 장로의 모친 또한 늘 피난시절 도움을 받았던 우리교회에 대해 아들에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전도 잔치 때 윤형주 장로가 선뜻 초청에 응했고 은혜를 나누고 돌아간 일이 있다”고 말했다.

 
항서교회 과거2.JPG▲ 아미동에서 부용동으로 이전, 건립한 교회(성전)모습
 
 
‘학사교회’라는 별명을 가지다

항서교회를 설명하면서 김길창 목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32년 항서교회에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36년간 시무했던 김길창 목사는 1968년 원로 목사로 추대됐다. 김길창 목사가 시무하는 기간 교회 개척이 많이 이뤄졌다. 1936년 항남교회의 개척 설립이후 1938년 감천교회를 설립했다. 해방이후에도 개척 교회 사업은 계속 전개됐다. 1951년 신광교회와 신성교회, 1952년 신암교회 등 8개 교회를 개척했다. 나재천 목사는 “분쟁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다. 지난 1966년 9월 경남노회 창립 50주년 기념 예배에서 특별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길창 목사는 교육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영생유치원(현 놀이아유치원), 남성여자중학교, 대동중학교, 부산신학교, 남성여자고등학교, 대동고등학교, 광성공업고등학교, 계성여자중학교,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 거제중학교, 남성초등학교, 경성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여자초급대학 등을 설립했다. 나 목사는 “당시 학교 교직원들이 교회에 많이 출석했다. 정규 대학을 거친 이들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항서교회가 수준이 높은 교회로 알려졌고 그러면서 학사교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설명하면서도 “사실 그것이 조금은 전도에 걸림돌이 된 것 같다. 소위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쉽게 올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문턱이 높은 교회가 됐던 것 같다”면서 부임 후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데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회복과 전도에 집중하며 성장

2008년, 현재 항서교회의 담임인 나재천 목사가 제11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항서교회는 교회 안의 문제로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나재천 목사는 “부임 당시 교회가 아픔을 겪고 있었고 교우들의 마음이 흩어져 있었다. 사실 교회의 이러한 상황들을 전혀 모르고 부임했었다. 그래서 처음 와서 목회의 방향과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중 아픔과 상처 치유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부임 후 2년 동안은 교우들이 하나가 되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뒀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치유의 시간을 가진 항서교회는 결속력을 가지게 됐고, 지역을 돌아보게 됐다는 나 목사는 “서울에서 목회 훈련을 받았다. 한 교회에서만 전임전도사, 부목사로 사역했었다. 강남 대치동에 있던 교회에 있었고, 당시 서울은 기독교인 비율이 높았다. 처음 부임했을 때 교회 인근 지역은 공가도 많고 노인 비율이 높았다. 사역에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부산을 선교지라고 생각하고 사역하라는 조언을 듣게 됐다. 처음 2년을 교우들에게 집중했다면 2010년부터는 모든 목회방향을 전도로 잡고 교회체질도 전도체질로 바꾸었다. 당회에서 중심이 되어 줘 그때부터 교회가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낸 것은 교회가 가진 역사성에 있는 것 같다. 내 아버지가 다닌 교회, 내 할아버지가 다닌 교회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교회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항서교회 제막식.JPG▲ 지난 1일(주일), 110주년 기념예배 때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지역에 파고드는 교회

나재천 목사가 부임하기 전부터 항서교회는 경로대학을 운영하면서 지역 어르신들을 섬겨 오고 있다. 나 목사가 부임한 해부터는 ‘사랑의 쌀’을 나누고 있다. 성도들의 헌금으로 준비된 사랑의쌀은 동사무소와 협력해서 지역주민들에게 전달한다.
“110년동안 이 지역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교회와 지역은 서로 동떨어지면 안 된다. 지역에 파고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다”는 나재천 목사는 교회 안의 결속력, 복음의 능력과 섬김이 지역에 펼쳐나가야 한다면서 교회안의 담, 지역사회와의 담을 무너뜨리고 지역에 필요한 것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8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교회 부설 유치원은 지역 아이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명품 유치원으로, 최근 어린이집 문제로 걱정하는 부모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교육기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항서교회의 장기적인 비전은 어린이 도서관과 장학관 설립이다. 지역 아이들에게 양질의 도서를 제공하고, 원거리에 있는 젊은 청년들을 돕고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나재천 목사는 교회가 나누고 베풀며, 갑이 아닌 을의 자세로 섬기는 것을 늘 강조한다. “예수님은 갑에서 을로 오셨다. 내려놓음이 없어 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다. 내 생각, 내 주장만 한다면 교회도 혼란을 겪는다. 섬기는 자세로 낮아질 때 세상 가운데 존경을 받는다”면서 “앞으로 110년의 역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책임 있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감동을 주는 삶이 항서교회 교인들의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항서교회 은퇴식.JPG▲ 110주년이 되는 지난 2월 첮 주 임직 및 취임, 은퇴 예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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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110년 전, 항구 서쪽에 복음으로 세워진 부산 항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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