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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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때 훌륭한 재상 고불 맹사성 대감이 고향 온양에 내려가게 된 일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한 이야기가 있다. 온양에서는 맹사성 대감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진위’와 ‘양성’ 두 고을 군수들이 함께 의논하여 맹사성이 내려오는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백성들의 왕래를 제지하며 맹사성의 행차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정승의 행차가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윽고 해질 무렵, 허름한 삿갓을 쓴 노인이 아이들 몇을 데리고 청소를 깨끗이 해 놓은 길을 지나지 않는가. 이를 본 군수들이 “저게 웬 놈이냐? 당장 쫓아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군졸들이 달려가 “웬 놈이 무엄하게 정승의 행차를 앞질러 가느냐? 썩 비키지 못할까?”하며 그 노인에게 마구 호통을 쳤다. 듣고 있던 노인이 “여보게 그렇게 성내지 말고 군수에게 온양 맹고불이 지나갔다고 전해주게”라고 하면서 유유히 길을 재촉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군수들은 ‘고불’이 맹사성의 호인 것을 알았기에 황급히 뒤 따라 달려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맹사성은 “무릇 길이란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인데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지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며 개의치 않고 길을 갔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맹사성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삶의 철학을 제시하는 말씀이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 ‘크다’는 의미는 키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게 될 것인가를 뜻하는 인간 본성의 교만’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모델로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이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항상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죽음’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구약에서 ‘겸손’은 보편적으로 히브리어 ‘아나바(󰕯󰗺󰘧)’를 사용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경건한 자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겸손은 형용사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를 사용한다. 이의 문자적 해석은 ‘낮은’이라는 말이지만 낮은 곳에 마음을 두는 경우를 의미한다. 영어에서 겸손은 humility를 사용하는데 이는 라틴어 humilis(땅바닥에 가까운)로부터 유래되었다.
이와 같은 겸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다. 진정한 겸손의 내용은 자기를 아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 자기를 숨기는 것, 자기를 살피는 것, 타인을 자기보다 높이는 것이 겸손이다. 마귀의 본성은 항상 자기를 높이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타인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의 모습을 낮추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교훈하신 작은 자가 되는 것이다. 작은 자의 원리를 어디서 배울 수 있는가? 주님의 가르침을 거울로 본다면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누룩과 소금의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채근담에 ‘處世 讓一步爲高 退步 卽進步的張本 待人 寬一分 是福 利人 實利己的根基’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처세에는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을 높다 하나니, 한 걸음 물러섬은 한 걸음 나아감의 장본(張本)이다. 사람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일 분을 너그럽게 함이 복이 되나니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실제는 나를 이롭게 하는 근기(根基)다’라는 뜻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좋은 군대는 도전적이 아니다. 숙련된 기술자는 조급해 하지 않는다. 사람을 부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 거만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오만하지 않다. 공작새도 자기 발 밑을 볼 때는 깃털을 접는다. 아주 좋은 향수는 항상 작은 병에 담겨 있다. 병에 담겨진 물은 저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인격과 학문과 신앙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떠들지 않는다. 마음이 고상한 사람은 절대로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슈베르트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 그는 언제나 말하기를 자기 곡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시가 좋았고 가수가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독의 슈미트 수상의 위대함은 수상직을 끝낸 그가 한 신문사 편집장을 수행하는 것에도 감사했기 때문이다. 조만식 장로의 위대함은 자신의 제자였던 어린 주기철 목사의 목양에 절대 순종함에 있고 그런 그의 겸손의 승리가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링컨의 위대함 가운데 하나는 그를 시골뜨기라, 원숭이라 놀렸던 정적(政敵)들을 각료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애국을 호소함으로 발탁된 그들로 하여금 신명을 다해 국가경영에 이바지하게 한 것인데 이것은 그의 겸손의 승리다. 슈바이처의 위대함의 단편도 아프리카 가봉에서 의료 선교사역을 하면서 생명을 다 바쳐 흑인들을 돌보던 그가 돈이 몹시 필요해 모금 차 고향으로 가게 되었던 때였다. 고향 환영객들은 그가 1등 선실에서 내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3등 칸에서 내리며 ‘4등 칸이 없어 3등 칸을 탔다’고 해 군중들이 그의 겸손 앞에 고개를 숙인 일화로 그의 위대함이 겸손에 있음을 깨우침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흐르다가 막히면 멈춘다. 그러나 멈춘 것이 아니라 막힘을 돌파할 때를 기다리며 채우는 것이다. 그 채움이 다하면 유속(流速)을 따라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렇게 흐르다가 마주치는 걸림돌은 돌아서 가는 지극히 보편적인 물의 흐름을 통해서도 삶의 지혜를 배운다.
참 좋은 5월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물줄기가 내 마음에 흘러들게 하자. 넘치는 행복을 노래하자. 그렇게 높아진 마음을 조금 낮추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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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겸손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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