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무도 이 편지나 신문 게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이 편지를 발굴하게 되었다. 멜버른의 시립도서관(State Library) 내의 신문도서관에서 옛 신문을 열람하던 중 이 편지를 발견했고, 복사하여 지난 30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으나 데이비스 내한 130주년을 기념하여 공개하게 되었다(「크리스챤경남」, 2019. 10. 2, 「국민일보」, 10, 8.참고)
이 편지는 한국에 도착하여 쓴 첫 편지로서 일반 나가시키를 떠난 이후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여정, 제물포와 서울에 대한 인상, 선교사들의 이야기 등을 이윙 목사에게 소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썼다. “... 우리는 항구를 떠나 아름다운 녹색 언덕을 지나 땅을 보지 못하고 항해하여 이튿날 아침 7시에 부산항에 입항했습니다. 우리가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우리가 타고 온 선박회사의 다른 증기선이 정박하고 있었고, 그날 늦은 시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세 번째 증기선이 입항했습니다. 이곳도 해안 끝자락에는 언덕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지만 나가사키에서 보았던 것처럼 밝은 녹색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탄 배는 일본인 거류지 맞은편에 정박했고, 중국인 거류지는 오른쪽으로 1마일 지점에 있었고 거기서 2마일 더 나가면 한국인 거류지가 있습니다. 일본 영사관은 전나무가 아름답게 조성된 언덕의 낮은 경사지의 2층으로 된 큰 흰색 건물인데 바다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좋은 동료인 벙커 씨(Mr Bunker)가 우리를 마을 주변을 둘러보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츄르가 호에는 일군의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벙커 씨 내외는 미국에서 짧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의 임지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북중국에서 일하는 세 사람의 미국 선교사는 그들의 임지로 돌아가는 참이었습니다. 세어보니 제물포로 가는 승객은 8명이었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한국인 신사였는데, 일본에 있는 한국영사관 서기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우리가 서울에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즉시 영어로 안경수(An Kiong Shiu)라는 영어와 한자어가 병기된 그의 명함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경수(安駉壽, 1853-1900)는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을 왕래하다가 1887년(고종 24)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발탁되어 최초의 주일공사 민영준(閔泳駿)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러나 민영준의 돌연한 사임으로 3개월 만에 귀국하여 별군직(別軍職)·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전환국방판(典圜局幇辦) 등을 지냈다. 이 시기에 일본을 왕래하며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화약 생산을 위한 제약소(製藥所) 설립과 신식 화폐 발행에 주력하였다. 후에는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1898년 7월에는 경무사를 지낸 김재풍(金在豊)·이충구(李忠求) 등과 더불어 황제 양위 음모에 가담한 일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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