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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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이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언어공부 했는데 언어습득이 비교적 빨랐던 것 같다. 체이스의 내부 6개월이 지난 1897년 5월 29일자 편지에서 아담스는 엘린우드에게 “채이스양은 언어 습득에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Miss Chase is I think making good progress on the language)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선교사로서의 고뇌와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도 아담스의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아담스는 엘린우드에게 쓴 1897년 5월 29일자 편지에서, “채이스양은 ... 깊은 영적 체험과 소명에 대한 의심이라는 시기를 거침으로서 선교사로서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맛보았습니다. 사실 그는 한때 선교사로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이제 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보이며 이 경험을 통해 틀림없이 더 효과적인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체이스는 부산에서 체류하는 5년간 언어공부 후에 아동들과 여성들을 위해 일했지만 아담스 부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예컨대 1897년 2월 아담스 부부가 대구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로 대구로 갈 때 체이스도 동행했고, 1897년 4월 대구로 갈 때도 체이스와 동행했다. 1897년 11월 1일 대구지부로 이동하기 위해 이사할 때도 체이스는 아담스 가족과 동행하여 대구로 갔고, 존슨(장인차) 의사 부부가 대구로 올 때까지 같이 지내기로 했다. 대구로 이동할 때 육로로는 3일 길이지만 낙동강을 따라 선편으로 이동하는데 11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낯선 대구에서의 정착을 위해 체이스도 대구까지 동행하여 3개월을 지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체이스는 대구에서 사역하는 아담스를 도왔다. 예컨대, 1899년 2월 20일자로 엘린우드에게 보낸 아담스의 편지를 보면, 체이스는 대구에서 아담스와 같이 지내며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대구지방에서 최초의 여성들을 위한 사역이었는데, 안의와 부인과 장인차 의사의 부인과 더불어 1899년 2월부터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이들의 사역을 도와주었다. 정리하면, 체이스는 부산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들, 그리고 교육사역에 집중하였는데, 때로는 대구지부로 가 아담스 부인의 사역을 보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01년 12월에는 선천으로 이동하여 선천지부 개척에 동참하게 된다. 이곳에서 약 10년 간 일했던 체이스
선교사는 1911년 9월 26일 한국을 떠나 귀국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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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한 북장로교 선교사들, 루이스 체이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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