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김운성 목사.jpg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보다 너무도 작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위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으로서 존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그 분은 온 세상의 창조주로서 행위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사랑에서 있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탁월한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풍성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다윗만큼 풍성한 고백을 드린 이는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시들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하며 풍성한 고백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8편 1-2절을 보면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는데,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다양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다양하게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높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그는 <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주로 높이고, 송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크게 찬양받으실 위대한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도 그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리 위대하시다 해도 우리와 무관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신이 버티고 있고, 인간들이 그 앞에서 애원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없이 크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들에게 다가오시고,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본문 8-9절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면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가장 크신 분이 가장 미천한 우리를, 가장 거룩하신 분이 가장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여 다가오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분께 연결되고, 그 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께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기도야말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깊이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진실하게 간구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경외함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향한 작지만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그러한 이들을 향할 것입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성서연구] 간구하는 자의 하나님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