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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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스톱에서 배우는 삶의 교훈’이라는 글이 있다. 나는 목사이기에 고스톱의 원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용어를 보면 공감이 가는 글이라 읽으면서 고소(苦笑)를 머금는다. 옮겨보면 이렇다. “①낙장불입-인생에서 한번 실수가 얼마나 크나큰 결과를 초래하는지 인과응보에 대해 깨우치게 함.②비풍초똥팔삼-살면서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때 우선순위를 가르침으로써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가르침.③피박- 쓸모없는 피가 고스톱에서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해서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소홀히 보지 않도록 함.➃쇼당-인생에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을 때 현명한 판단력을 증진시킬 수 있음.➄고-인생은 결국 승부라는 것을 가르쳐 도전정신을 배가시키고 배짱을 가르침.➅스톱-안정된 투자 정신과 신중한 판단력을 증진시키며 미래의 위험을 내다볼 수 있는 예측력을 가르침.➆나가리-인생은 곧 ‘나가리’라 허무를 깨닫게 해 주어 그 어려운 ‘노장사상’을 단번에 이해하게 함” 이런 설명의 글을 읽으면서 무엇이든 인간사에서 이루어지는 범사에는 교훈이 있음을 새삼 생각한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우편과 좌편의 영광된 자리를 요구하게 되자 다른 제자들이 ‘분히 여기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같은 내용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요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의 관심사와 제자들의 관심사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의미심장하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즉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후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된 자리 좌우편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안무치의 가치관 이야기다.
누가복음 10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예수님이 강론하실 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있다. 같은 시각 부엌에서 일을 하던 마르다가 주님 앞에 나아와 은근슬쩍 마리아를 힐난하는 발언을 했다. 이 때 예수님은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현명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가치관에 대한 교훈을 일깨우셨다.
요한복음 12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그 발을 닦을 때 가룟유다는 그것을 왜 허비하느냐고 힐난한다. 그것은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으니 이 또한 후안무치의 언행이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가 옳고 유다의 행위가 옳지 않음을 분명하게 정리하셨다. 이 모두가 가치관의 이야기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도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 분쟁과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상대방을 폄하하고 고통하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죽이고 죽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것이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것이다. 죄를 짓고도,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언행을 의롭다고 항변하는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언행은 소위 막가파다. 자신의 소욕을 위해서는 이웃도 주님도 보이지 않는다. 시편 49:20절에서는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짐승 같다고 경고한다.
교회 안에서도, 노회에서나 총회에서도, 사회적으로는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도 후안무치의 사람들이 있다.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실현되는 복음의 삶이 없기에 삶의 기쁨도 감동도 없고, 철저하게 자신의 소욕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과 모함, 거짓과 술수, 위증과 정죄만이 연출된다. 그런데 그것을 정의라고 항변한다.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후안무치의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가인의 삶을 안다. 사울왕과 아합의 삶, 고라와 시므이의 삶,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삶, 빌라도와 가룟 유다의 삶을 안다. 하나같이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 살았던 후안무치의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인정받기 위하여, 칭찬 받기 위하여,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바람하며 일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반면에 모세, 여호수아, 다윗, 사르밧과 수넴 여인, 마리아와 루디아,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 같은 사람들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섬김으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의 마지막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감격함으로 해야 하고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 기쁨으로 하고 자원해서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힘을 주셔서 하는 것으로 알고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디아코니아’다.
우리가 사역(使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말의 뜻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이다. 그 근간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 道에 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는 헌신, 그 섬김이 곧 사역이다. 사역의 진정한 의미는 doing이 아니라 being이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지 존재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다.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이와 같은 사역이 이루어질 때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으며 축복이 있다. 그것이 마가복음 10:45절이다. 곧 지고한 삶의 교훈이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섬기며, 자신을 남보다 낮게 여기는 삶, 그것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그것이 지고한 인생훈(人生訓)이다.
‘칼 바르트’는 “섬김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위하여 행동하는 의지(Will)와 수고(Working), 행동(Doing)”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자신의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하여 사용하는 거룩한 희생이 섬김이다. 그것이 지고한 삶의 메시지요 살아감의 의미이며 더 없이 존귀한 가치이다. 그것이 마가복음 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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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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