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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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경 밖의 인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국인을 꼽으라면 몇몇 가운데 승려로는 성철(性徹)과 법정(法頂)을 꼽는다. 비록 내 신분이 목사이긴 하나 그분들과 자주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살아왔다. 성철과 법정의 저서들을 읽고 있을 때면 “목사님이 성경이나 읽지 어찌 그런 책을 읽고 있습니까?”라고 아내가 이맛살 찌푸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내 목회의 폭을 이해하고부터는 더 이상 아내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독신으로 살아간 그 분들의 삶에 견주면 결혼한 목사로서의 내 모습은 세속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목사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의 삶을 엮어갈 수 있다면 틀림없이 나도 그분들처럼 살아가리라는 내재된 내 삶의 철학이 여전히 마음 깊이 깔려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오늘도 그 분들의 삶을 동경하고 공감하면서 비록 조기은퇴를 한 늘그막이지만 마음은 청년으로 오늘도 농어촌과 산골 개척교회들을 찾아 복음전도의 걸음을 주님의 나귀로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정스님의 입적(入寂)이 2010년 3월이다. 특별히 그 해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33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당시 뉴스의 중심은 법정의 입적과 함께 서점가 베스트셀러였던 <그 청년 바보 의사> 주인공 안수현 씨, 그리고 부산 여중생 살해사건의 피의자 김길태 씨였다. 공교롭게도 안수현 씨와 김길태 씨는 같은 33세 청년이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표현된 당시 국민들의 정서적 표현은 선과 악의 대조, 감동과 분노의 대조, 평안과 불안의 대조, 존경과 멸시의 대조로 정리되는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년 안수현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군의관의 옷을 입고 한국 땅에 나타나셨다가 가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른 한 청년 김길태는 기억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였다. 이렇게 당시 국민정서는 극명하게 갈리어 대조를 이루며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사노라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들의 인생여정’을 보게 된다. 천만번 이해하려해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안타까운 사람들, 모든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을 하면서도 자신의 언행이 의롭다고 외치는 사울의 후예들, 그런 사람들을 본다. 사울 왕, 그는 참으로 준수한 용모와 겸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주의 종 사무엘의 가르침을 무시했다. 그런 사울의 삶은 성경의 화보 가운데 지독히도 어둡고 아픈 한 편의 그림이다. 결국 사울은 불순종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무엘상 15장을 통해 사울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사람,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 멸망을 재촉하는 사람, 주의 종의 옷자락을 찢은 사람,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사람으로 정의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픈 이야기다. 그럼에도 사울은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라고 뻔뻔스레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 옳고 그름, 바르고 비뚤어짐에 대한 판단이 자기 잣대에 따라 측량된다. 그것이 사울이 몰락해 가는 무서운 과정이다. 그 잣대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의 시작이다.
하나님이 싫어질 때 히브리 민족은 세상 왕을 구했다. 사무엘은 그것이 범죄행위임을 역설했지만 이미 백성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탄식할 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민족의 아픔의 시작이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얼마나 아파하시는 말씀인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2개 노회 연합 장로수련회 강사로 갔다가 식사 대접을 받았다. 앞에 앉은 어르신 한 분이 “며칠 전 친구가 하는 말인데 ‘교회를 위한다면서 죄를 짓는 것을 마치 즐기듯 하는 사람을 본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라고 하셨다. 듣기만 해도 섬뜩함으로 전율이 되었다. ‘죄를 즐기듯 하는 사람’은 사단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편 1:4~6절을 너무 잘 안다. 1~3절의 복 있는 사람과 확연한 대비를 이루는 말씀이다. 그렇다. 악인의 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심판을 견딜 수 없다. 사울은 낮은 마음으로, 겸손함으로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러나 점점 교만해져 주의 종인 사무엘을 무시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을 져버렸다. 그 결과 악인의 삶으로 비참한 생을 마감한다. 성경의 많은 악인들의 삶을 보면 하나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다.
그러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있다. 다윗 같은 사람이다. 다윗의 심중에는 오직 하나님만 있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다윗은 죽는 것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이 상할 때는 앞뒤를 재지 않고 나아가 불의의 세력을 처리했다. 그런 그였지만 개인적으로 겪는 것은 그 어떤 억울함도 아픔도 속상함도 괴로움도 모두 참고 인내했다. 결코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어려서부터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 제일주의였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는 골리앗과의 싸움이 있다. 그 이후에는 10년도 넘게 사울 왕의 칼에 추격을 받으면서도 결단코 맞장 뜨지 않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시므이의 저주사건도 감내했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어 공과 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는 적군이었지만 용서하고 선대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불의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사울왕의 죽음을 알리러 온 자,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온 사울의 부하들을 여지없이 책망하고 죽인 다윗의 중심은 오직 신(信)과 의(義)와 예(禮)였다. 속간에 ‘되는 사람에게는 되는 사람이 함께 한다’는 말처럼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그렇게 의롭고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울과 함께 한 사람들은 불의하고 자기만을 생각는 기회주의자들로 가득했다.
부활의 계절을 살고 있다. 부활신앙은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전환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을 사는 어두움에 속한 삶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 속에 녹아 있는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의 삶, 참 복음의 삶을 통한 생명을 주는 부활신앙으로 이 아름다운 계절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코람데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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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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