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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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위안부로 끌려갔었던 한국의 김군자 이용수 두 분과 네덜란드의 오헤른 이 세 할머니가 2007년 미국 하원 아태소위의 청문회에 출두하여 증언을 했다. 민주당 혼다 의원 등이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으로 규정하고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등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내서 이뤄진 청문회였다. 이들의 증언 이후 난시 페로시 하원의장 아래 가결된 121호 결의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과거에 없는 잔혹함과 규모면에서 20세기 최대 인신매매의 하나라고 하여 성노예가 된 위안부라고 불리는 여성들에 대한 공식 사죄, 역사적 책임, 모든 이론에 대한 명확한 논파 및 장래 세대에 걸친 교육을 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고 명기했다. 2017년에 개봉된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 라는 영화는 이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아베정부는 최고의 로비스트들을 미 의회에 보내어 이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놓았다. 한 마디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담화를 통해 위안부 모집에 일본 관리들이 직접 개입했음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했지만, 아베를 비롯한 우익성향의 정치인들은 이것까지도 되돌려 놓으려고 하고 있다.
일본은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을 이룬 나라이고, 높은 시민의식과 민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지목받고 있다. 자신들이 과거 그와 같은 야수적인 행위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거짓과 은폐뿐 아니라 왜곡된 역사해석과 자기합리화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과거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과거사에 대한 진실한 규명과 반성이 없는 한, 현재를 그 잘못된 과거와 단절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전후 선진국들 중에 가장 우경화된 사회가 되게 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신뢰는커녕 여전히 불신과 불안을 안겨주는 나라로 인식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한 나라나 개인이나 간에 자신의 지은 죄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참 어렵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함으로 얻게 될 경제적, 명예적인 손실 내지는 자존심의 상처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들먹거리거나, 남도 다 하는 일이라는 등의 자기 합리화로 덮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 왜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느냐고 도리어 분노한다.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쳐버리는 과거의 잘못은, 죄에 대한 모호한 태도나 자기합리화의 통로를 타고 현재와 미래에 다시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1995년 8월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이 일본에 초청되어 “종전 50년의 독일과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어떤 단어로 사죄를 해야 하는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죄냐, 유감이냐, 통한의 염이냐 등등. 어떤 기자가 이에 대해서 바이체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가 갖는 경험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된다고 봅니다.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은 자주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유효한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어떤 용어를 쓴다고 해도 결국 단순한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스위스의 저술가 아돌프 무쉬그가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지에 낸 글은 의미심장하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마치 마취가 풀릴 때처럼 먼저 고통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정말 옳지 않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는 종종 아픔이 따르지만,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럴 때 우리에게 바른 미래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방이 누구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용기이다. 참된 신앙도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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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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