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충만 목사.JPG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 사울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왕정시대를 연다(삼상 9:1-2, 10:1, 13:1; 행 13:21). 이미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 예고된 왕의 제도(신 17:14-20)가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 8:6a)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 결국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허락하시는 흐름으로 응답되는 셈이다(삼상 8:10-22).
한편 사울왕정 40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그가 왕으로 부르심을 받는 시기부터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다(삼상 8-15장). 제2기는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때부터 그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전투에서 전사하는 때까지다(삼상 16-31장). 이쯤에서 사울왕정이 요동치는 사무엘상 16장이 사울 왕위 중 어느 시점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사무엘기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무엘상 16장에서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다윗의 나이를 추론해 보면 대략 사울왕정의 파국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다. 그가 첫 번 기름부음을 받은 후 바로 이어지는 블레셋(골리앗)과의 전쟁에 형들 중 위 3명이 출전한다. 율법은 20세 이상을 전쟁에 참여한다고 보는 바 그렇다면 형제가 모두 연년생이라는 가정(假定)하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넷째 형은 20세에 몇 달 부족하고, 다섯째가 19세, 여섯째가 18세, 일곱째가 17세, 그럼 여덟째 다윗은 16세가 된다.
자, 다윗은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 다스린다(삼하 2:4, 5:4-5). 그렇다면 소년 다윗이 16세에 사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선되는 첫 번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가 사울의 나이 66세, 즉 사울왕위로는 26년이 되는 해다.
이로 보건데 사울왕정 제1기는 26년, 제2기는 14년이 되는 셈이다. 사울은 40세에 “스스로를 작게 여길 그 때에”(삼상 15:17)에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때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함으로서 새사람과 새마음을 따라 왕으로서의 소명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이다(삼상 10:10, 11:6). 그런데 사실상 왕조가 바뀌고야마는 사무엘상 16장에서, 그러니까 그의 왕위 26년 어간에 마침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난다(삼상 16:14).
사울행전 40년의 역사 가운데 제1기인 2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떻든 ‘여호와의 신’이 사울 위에 임하여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성령 안에서 한 일이 무엇인가. 전쟁(아말렉전투)에서의 ‘승리’(불순종)가 오히려 사울의 ‘실패’(폐위)를 앞당길 뿐이었다. 동시에 성령 안에 살았으나 성경의 평가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삼상 15:23)라고 단언한다. 참담하다.
한편 이어지는 제2기는 ‘여호와의 신’(성령) 없이 왕놀이만으로 무려 14년 동안을 연명한다. 결국 40년 동안 ‘여호와의 신’ 안에서의 26년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살았고, ‘여호와의 신’ 없는 14년은 오직 다윗 죽이기에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신이 임재 중일 때나, 성령이 부재 중일 때나 그의 40년은 맛 잃은 소금과 같았을 뿐 아닌가.
신약은 예수를 주(主)라 시인하면 다 성령 안에 있다 하신다(고전 12:3). 그런데 그러고도 고린도서가 전하는 고린도교회는 그 모양 그 꼴이었다. 사울왕위 40년과 고린도교회가 중첩되는 이유다.
그럼 나 자신이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교회는 어떤가. 사울 주의보(注意報) 앞에 무릎 꿇고 은혜 한 모금 갈망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나 역시 겉사람으로도 속사람으로도 사울왕처럼 신앙놀이 중인 건 아닐까. 내 안에 여호와의 신이 거하심에도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사울처럼 여호와의 신이 부재 중이라서 그러는 것인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참 두렵다. 성령 안에 있었으나 왕위 2년만에 버림 받은 왕으로(삼상 13:13-14), 더욱 그런 왕으로 38년을 성령을 넘나들며 왕놀이한 사울! 자꾸 사울과 겹쳐지는 게 좀 불안하다. 이 말세의 영적 주의보(靈的 注意報)의 답을 조금이나마 알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아프고 시리다. 주 앞에 서는 날이 곧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오, 마라나타!(Maranatha, Our Lord has come; 고전 16:2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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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만 목사] 사울 주의보(注意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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