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홍석진 목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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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명절이 있는 달입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목격합니다. 성묘(省墓)도 차례(茶禮)도 점점 사라지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풍조가 변한다 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추석이 다가올수록 옆구리가 시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쩍 차가워진 가을 날씨 탓만은 아닙니다. 사무치도록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했지만 사랑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 사랑하고 싶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그래서 괜히 옆구리가 시려오는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30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 한 대가 날아와 충돌했습니다. 2살 크리스티 핸슨부터 83세 로버트 그랜트 노턴까지 2,948명이 사망했는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 일부를 소개합니다. “여보, 사랑해.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근데 아마 나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사랑해. 아이들 잘 부탁해.” “나 브라이언이야. 상황이 아주 나쁜 것 같아.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만일 그렇게 안 되면...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즐겁게 살아주길 바래.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사랑해. 나중에 우리 만나.” “엄마, 이 건물이 불에 휩싸였어. 벽으로 연기가 들어오고 숨을 쉴 수가 없어. 엄마, 사랑해. 안녕. 베로니카.” “당신을 사랑해 정말 사랑해. 우리 딸 에이미도 정말 사랑해. 에이미를 잘 돌봐 줘.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무엇을 하든 꼭 행복하기를 바래. 사랑해!”
왜 우리는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린 후에야 사랑 때문에 목마를까요? 왜 우리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을 두고 정작 사랑할 이유를 찾다가 수많은 시간을 허비할까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참된 사랑은 참으로 사랑하겠다는 결심에서 출발합니다... 인물이 잘 나서가 아니라, 장점이나 돈, 지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기쁨을 나눌 뿐 아니라 서러움, 번민,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아는 것, 잘못이나 단점까지 다 받아들이는 것, 그의 마음의 어두움까지 받아들이고 끝내는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래서 참사랑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을 만큼 함께 괴로워할 줄 아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바보가 바보에게』 중에서)
사실 우리는 예수를 알기 전에는 그런 사랑을 몰랐습니다(요일 3:16). 우리 옆구리가 그토록 시린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옆구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첼라’는 창세기 2장 22절에서 아담의 “갈빗대”로 등장합니다. 아담의 옆구리를 통해서 하와가 나왔다면, 예수의 옆구리를 통해서는 우리를 위해 쏟으신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와서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요 20:27) 의심하고 배신했던 제자들에게마저 기꺼이 옆구리를 내어주신 그것은 사랑입니다.
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주의 사자가 “옆구리를 쳐” 깨웠습니다(행 12:7). 그 후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홀연 다른 곳을 향해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새롭게 시작된 여정이었습니다. 훗날 그가 남긴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벧전 2:11; 4:12; 벧후 3:1,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주님은 유월절을 사랑의 절기로 바꾸시고 제자들을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네 명절도 사랑의 절기가 되고, 더 이상 시린 옆구리가 아니라 사랑이 철철 흘러나오는 옆구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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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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