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기독교이야기] 찰스 어빈 의사(3)
어빈의 나환자 보호시설의 설립
나환자 선교회는 부지와 건축비용 등 운영전반의 경비를 제공하되 현지 선교사들이 관리와 행정 등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정책을 지향했는데, 부산에서 이 일은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되고 병원이 설립되어 어빈 의사가 책임을 맡았으나 북장로교 선교부 내의 문제, 특히 어빈 의사의 가정사로 그가 1911년 사임하게 되자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보호소의 운영을 호주선교부에 위임하였고, 결국 1912년 5월부터는 노블 매켄지가 이 수용소의 원장이 되어 이 일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메켄지가 원장으로 취임할 당시는 환자 수는 54명에 불과했으나, 그 수는 급속히 증가되어 1914년에는 80명, 1916년 당시는 150여명, 1921년에는 180명, 1922년에는 208명, 1924년에는 363명으로 증가하였고, 1930년대는 580여명, 1937년에는 600명에 달했다. 1934년 당시 전국적으로 2만 여 명의 한센병 환자가 있었는데 경남지역에 7천명의 환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부산 상애원에 나병선교회의 베일리 회장 일행이 방문했는데, 이때가 1913년 11월이었다. 베일리 회장 부부는 선교회 총무였던 앤더슨(W. H. P. Anderson) 부부와 함께 부산 감만동의 상애원을 방문하고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우리는 작은 항만 건너편에 있는 나환자의 집을 볼 수 있었다. 배를 타고 약 45분 소요되어 우리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쯤 갔을 때 선상에 있는 우리 일행을 보고 환영하기 위해 언덕에서 내려오는 환자들을 보았고, 우리들은 먼저 관리인과 그의 두 아들을 만났다. 이 관리인은 깊은 경의로 우리를 맞이하였고, 두 아들은 손을 이마에 올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몇 번이고 절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첫 남자 나병 환자 집단을 만났는데, 그들은 우리를 환영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대부분의 입주 환자들은 힌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들은 잠시 건물들을 둘러보고 아담하게 보이는 구내 교회에 도착해 보니 남자들은 정면을 향해 왼쪽에, 여자들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남녀석 사이에는 한국의 관습을 따라 휘장으로 구분해 두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송가 기도가 끝난 후 나는 그들에게 설교했는데, 통역은 윈(Winn) 선교사가 담당했다. 찬송을 부를 때 어린 소년은 노인이 찬송가의 구절을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여자와 아이들은 글 읽기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는 돌보아주지 못하고 방관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대문 밖에 많이 있었다. 정말 동같이 차가운 심장이라 할지라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나는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는 방이 모자라 받아 줄 수 없는 입주 희망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한국기독신문 & www.kcnp.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