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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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경남교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반대 연합집회’ 개최
    경남교계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장반대 연합집회’를 22일(주일) 오후 3시부터 창원 용지문화공원에서 진행했다. 1-3부로 진행된 이날 연합집회는 (사)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의 기도회와 조영길 장로(법무법인 아이앤에스 대표변호사)의 강의, 창원시청 로터리를 돌아오는 도보행진으로 진행됐다. 이날 연합집회는 경남교계 지도자 및 성도 약 3천 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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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3
  • 통합 부산여전도회관 운영이사회, 부산장신대에 발전기금 전달
    통합부산여전도회관 운영이사회(이사장 김옥재 권사, 모라교회)는 지난 5월 18일 부산장신대학교(허원구 총장)에 학교 성장을 위한 발전기금 1200만원을 기부했다. 학교 설립 때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후원해 오는 통합부산여전도회관 운영이사회는 최근 코로나19가 완화되면서 학교 발전과 학사운영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발전기금을 모금해 전달했다. 운영이사회측은 “가족이나 친지들이 학교에 다니는 연고는 없지만, 부산장신대를 위해 하루 두 차례 이상을 꾸준히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산장신대 허원구 총장은 “교회의 존속은 권사님과 집사님들의 기도로 인해 결정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부산장신대학교가 현재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기도의 용사들의 기도와 후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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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3
  • 고신대 총장에 이병수 교수 당선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이사장 김종철 목사)는 20일 회의를 갖고, 고신대 제10대 총장에 이병수 교수(국제문화선교학과)를 선출했다. 법인 이사회는 19일 후보등록을 마감한 결과 이병수 교수(고신대)와 이정기 교수(백석대)가 후보로 등록했고, 이날 후보자 소견발표 후 투표를 통해 이병수 교수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이병수 교수는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옆에서 도와주신 분들게 감사를 드린다. 고신대가 이 시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또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고신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세계선교의 중심과 다음세대 인재양성에 힘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병수 교수 임기는 내일(21일)부터 4년이다. 한편, 이날 선거법 위반 논란이 제기됐다. A 이사가 모 후보자가 선물(넥타이)을 돌렸다는 발언을 한 것. 다른 B 이사는 그 선물을 현장에 들고 나와 이사들에게 확인시켜 줬다. 하지만 일부 이사들은 A 이사의 발언 자체가 선거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선물을 돌린 것은 과거(작년 말이나 금년초 경) 후보 등록 전 일이고, 투표 직전 투표에 영향을 주는 발언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이다. C 이사는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후보 등록 전에 선물이나 식사 대접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투표 직전에 특정 후보자를 겨냥해 투표의 영향을 미치는 발언을 한 것 자체가 선거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고발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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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성서연구] 판단으로부터 자유하십시요
    바울 사도는 사역 중에 육체적 고통과 함께 많은 마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그러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을 머물며 말씀을 전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바울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에게 비난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충성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 즉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로 자각하고 충성했습니다. 여기 <일꾼>이라고 번역된 <휘페레타스>는 <아래서 노 젓는 자>란 의미입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노예선에서 노 젓는 노예들이 나오지요. 그들은 쉴 새 없이 노를 저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래서 노 젓는 자로서 평생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파당이 있었습니다. 아볼로파가 있었는데, 아볼로는 바울에게서 배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아볼로는 바울의 손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이어 고린도교회의 2대 목회자가 되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바울보다 아볼로에게 기운 것이었습니다. 바울로서는 인간적으로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게바파, 즉 베드로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치명적 핸디캡은 한때 핍박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도처럼 일찍 주님의 부르심을 입지 못한 것, 그리하여 핍박자로 산 것을 마음 아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게바파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야말로 최고의 지도자요, 바울은 핍박자 출신으로 그가 전한 복음도 신뢰할 수 없다고 비난할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또 그리스도파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바울도 할 말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파가 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바울을 비난하면서 그리스도파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바울에 대한 비난과 파당은 바울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매우 초연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절을 <쉬운성경>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판단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판단을 받든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심지어 나 스스로도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참 부러운 모습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말에 너무 민감합니다. 좋게 말해주면 교만해지고, 나쁘게 말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인생의 고통은 다른 이들의 평판에 민감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칭찬하면 교만해지고, 악플이 달리면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역자들도 이런 올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평판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이런 올무에 우리를 가둘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평가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최종 판단입니다.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시면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이 주는 한 표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며, 그 자리에 앉게 했어도, 주님께서 꾸짖으신다면, 그건 무익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노를 저어 배를 앞으로 가게 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충성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를 기다렸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늘 코람 데오의 마음으로, 주님께만 귀 기울이면서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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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소강석칼럼] “길고양의 눈빛이 지금도 아련합니다”
    몇 주 전, 영광에 있는 ‘청아’라 고 하는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호텔 주차장에서 내리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를 보고 무섭지도 않은지 도망가지도 않고 오히려 애처롭게 울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뜻 보니까 암고양이인데 새끼를 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호텔의 정문 불빛에 반사되어 고양이의 눈빛과 제 눈빛이 마주친 것입니 다. 그런 고양이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구걸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도 고양이가 배가 고픈 것 같았습니다. 아니, 배 속에 있는 새끼를 위해서 모성애가 발동하여 어떻게든 먹이를 구하려고 밤거리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호텔 숙소로 들어가는 저와 마주친 것입니다. 원래 길고양이는 사람을 만나면 무서워서 도망을 가는데 어떻게 안 도망가고 오히려 야옹, 야옹하며 다가온단 말입니까? 그래서 고양이에게 줄 게 있나 보았더니 마침 한정식집에서 다음날 아침에 먹으라고 준 갈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갈비를 주니까 그냥 “땡큐, 땡큐, 굿, 굿” 하는 듯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배 속의 새끼를 위해서 더욱더 간절하게 뼈까지 쪽쪽 빨아 먹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너무나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보니까 “갈비를 몇 개만 줘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플라스틱 통에 있는 갈비를 더 주었습니다. 수행하는 비서들이 “목사님 드실 것은 남겨 놓으세요”라고 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어 버렸습니다. 제가 갈비를 줄 때마다 고양이가 구애를 하는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고양이를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많이 먹고 새끼들 낳아 잘 키우거라.” 그러자 고양이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주인에게 버림을 받아 본 적이 있지요. 그러나 정말 제가 사람을 잘 봤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따뜻한 정을 줄 거라고 짐작했죠. 제 감이 옳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플라스틱 통에 든 갈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니까 고양이가 다 먹은 후에 포만감을 즐기듯이 감사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와 처음으로 마주쳤던 눈빛은 애절하고 간절했는데 먹이를 먹고 난 후에는 만족하고 고맙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정권사님이나 집사람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애완용 개나 고양이의 털이 빠져 날리면 건강에 안 좋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애완용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 애정의 대상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더 그렇지만,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다 하더라도 이기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지 않은 정말 순수한 애정을 주고 싶은 대상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요즘은 애완용 개보다는 고양이로 많이 바뀌어 간다고 합니다. 그날 밤, 저는 제가 키우는 반려묘는 아니었지만 고양이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어 줬습니다. 계획된 사랑도 아니고, 예정된 사랑도 아니었지만 그날 저녁에 마주친 길고양이의 간절한 눈빛을 통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배 속에 밴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한 모성애로 가득한 길고양이를 사랑했다는 것도 보람이 있지만, 정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찮은 미물이지만 저를 알아보고 잠시나마 의지했던 고양이가 고마웠고 생명 사랑의 마음을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길고양이의 눈빛이 아련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하찮은 미물도 자기 배 속에 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음식을 달라 고 구걸을 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과 사랑을 쏟으 셨는지 모릅니다. 그 어버이의 은혜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어버이의 은혜를 무조건 추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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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독일이야기] “통일세”
    독일은 환호성과 감격 가운데 통일했지만, 통일 이후 예상보다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우리가 한반도의 통일을 필연적인 과제라 생각한다면, 독일통일의 준비과정과 진행과정 뿐 아니라, 통일 이후 과정도 주목해야 한다. 나는 통일이 된 지 3년이 지난 1993년에 동독지역을 방문했었다. 가는 곳마다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도로를 보수하지 않아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독일에서는 100년이 넘는 집들이 많았는데, 서독은 계속 집을 보수 단장하다보니 깨끗하고 환했지만, 동독의 집들은 어둠침침하고 여기저기 깨지고 금간 곳이 많았다. 이 모든 인프라들을 재건하는 비용 그리고 동독지역의 20%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재정상황을 위해 독일정부는 매년 독일 GNP의 약 4%에 해당되는 136조원을 쏟아 부어야 했다. 이런 큰돈을 계속 지원하다보니 독일의 재정상태가 굉장히 어려워졌고 서독지역에서는 모든 상황이 통일이전보다 나빠져 갔다. 통일되기 전 서독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2위였는데 계속 하락해서 10년 뒤인 2002년에 15위로 곤두박질 쳤고, 1인당소득도 통일되기 전에는 3만 7천불이었는데 2만 2천불로 떨어졌다. 물론 서독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고 재정상황도 안정적이었지만, 정부재정으로만 감당하기에는 어림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1991년부터 서독지역 주민들에게서 통일세를 거두기 시작했는데,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범한 직장인의 경우 매월 100마르크 정도로 1년에 약 100만 원을 통일세로 내야했다. 이것이 2020년 말까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 약 3천만 원의 통일세를 지불한 셈이다. 분단국가의 통일을 위해서 서독국민들 개개인이 그만큼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것이다. 통일세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국민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며 받아들였기에 큰 무리 없이 30년이라는 긴 시간 이를 통하여 통일비용을 보전할 수 있었다. 독일은 통일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비용을 써야 했다라는 비판도 없지 않아 있지만, 통일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말해준다. 남북한의 통일비용에 대한 예측은 연구기관마다 천차만별이고 통일 후에 대박처럼 찾아올 경제효과를 부풀리기도 하지만, 우리 국민들 개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맬 각오는 꼭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통일 당시 동독 이 서독에 비해 인구는 1/4, 소득은 1/3 수준이었던데 반해, 한반도의 경우 북한은 남한에 비해 인구가 1/2, 소득은 1/56 수준이다. 단편적인 비교이지만, 우리나라의 통일에는 독일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 있음을 예측하게 해준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 통일세로 인한 불똥이 예기치 못하게 교회로 튀었다. 단돈 1마르크도 계산하면서 사용한다는 독일 사람들의 눈에 종교세가 크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별히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사람들 중에 종교세를 이유로 교회를 탈퇴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옛동독교회가 통일 후 재정자립을 위해 교인들에게 종교세를 내도록 하자, 동독교인들 역시 탈퇴하기 시작하면서, 독일개신교는 통일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독일교회는 매년 교인들의 탈퇴가 계속되고 있고, 탈퇴 속도가 조금 완화됐다는 것을 갖고 안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통일을 위해 좋은 다리 역할을 했던 교회가 통일의 역풍을 맞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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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시사칼럼] 유에프오(UFO)
    며칠 전인 5월 17일 미국 의회에서는 1970년 이래 50년 만에 이른바 ‘유에프오(UFO)’라고 불리는 ‘미확인비행물체’ 관련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해 미국 국방부를 비롯한 일련의 정보기관들이 이 문제에 관한 분석보고서를 제출한데 따른 후속조치였다고 합니다. 청문회는 그간의 조사 상황을 들으면서 새로운 영상도 공개했는데, 각각 삼각형과 원형 모양의 비행 물체를 가리키는 정식 명칭이 ‘미확인 비행 현상’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미확인 비행 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라는 말에 익숙했었는데, 현재 미군은 ‘미확인 비행 현상(Unidentified Aerial Phenomena, UAP)’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작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부터 기산해도 군용기에서만 관측된 미확인 비행 현상(UAP) 중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례가 144건이라 했는데, 미 정보국 당국자는 새롭게 구성된 태스크포스 조사 결과 총 400개로 그 수치가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이 외계로부터 온 물체들 때문에 일어났는지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유에프오(UFO) 관련 논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미확인 비행 현상이 어느 때보다 많이 관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전부터 관련된 이야기들이 적잖았습니다. 6.25 전쟁 기간 중 미군들이 UFO를 보았다거나, 1976년 청와대 상공에 나타난 미확인 비행 물체들에 한국군이 집중 사격을 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분야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진 하나가 1995년 경기도의 어느 시골집에서 찍혔습니다. 평범한 시골의 가을을 취재하기 위해 한 농가를 찾은 문화일보 기자가 곡식을 타고 있는 노부부를 촬영한 사진 위쪽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UFO의 선명한 형체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전 세계 전문업체로부터 조작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이 사진 속 물체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2011년 5월 5일에도 어린이날을 맞아 한 가족이 놀이공원 하는 길에 우연히 서울 도심 한복판의 빌딩 위를 날고 있는 비행체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2021년 10월에는 김해비행장에서 한 영상제작자가 UFO를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UFO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이들은 과연 외계로부터 날아온 물체들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신자들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광명체들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창 1:14-19). 뿐만 아니라 욥기서 38장 31절은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묘성”은 오늘날 ‘플레이아데스 성단’(Pleiades star cluster) 곧 ‘떨기별’로 부르는데, “묶을 수 있으며”라는 구절이 절묘하게 들어맞습니다. “삼성”은 오리온 별자리의 허리띠로 불리는 세 별을 가리키는데 육안으로는 일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구로부터 각각 800광년, 1200광년, 2000광년 떨어져 있다고 하니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 또한 현대 과학과 잘 어울립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수많은 별자리들 존재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욥 9:9, 38:32), 현재 인간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신비한 별 곧 ‘블랙홀’의 존재를 연상하게 만드는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계 6:12, 14) 같은 구절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수많은 별 중에 외계생명체가 살고 있는 별도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UFO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유독 교인들이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인정하자니 왠지 신앙에 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교회에서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이 하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저도 이 문제 때문에 혼자서 고민하고 씨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는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갔는데, 수업시간에 지금은 작고하신 한 교수님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시는 거였습니다. ‘만일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해주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가 품고 있던 나만의 해답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전도해야 합니다.’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만, 더 좋은 대답이 있나요? 하나님께서 우주를 포함한 만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안에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는 전무하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습니다. 오직 이 한 가지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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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은혜의말씀] 사명자에게도 시련이 오는가? (출5:20~6:1)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형 아론을 만나 드디어 바로 앞에 섭니다. 그런데, 바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바로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노동을 더 무겁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차디찬 거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순종했는데,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고난과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하는 시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1.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15, 21절) 그들은 고통이 더해지고 자신들이 끌려가 매질을 당하자, 바로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바로의 선처를 구합니다. 나아가, 모세와 아론에게 자기들이 바로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했다고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바로의 눈치를 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온 간데없고,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믿음이란 상황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세상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할 줄 믿습니다. 2. 그러나 모세는 어떻습니까?(22절) 모세는 이 문제로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와야 합니다. 칼리쉬(Kalisch)라는 신학자는,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전능자의 뜻을 알고자 분투, 노력하는 경건한 영혼의 몸부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시 146:5)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있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하십니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께 마음을 토해 놓는 우리 사직동의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모세가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23절) 모세는 이 시련을 통하여 이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1. 이러한 시련은 예견된 것이라는 것입니다.(4:21) 다시 말씀드리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의 시련과, 세상의 미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시련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 가운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2. 이러한 시련은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입니다.(6:1) 하나님의 강한 손을 바로와 온 애굽에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 상황을 더욱 악화되도록 섭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련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나타내기 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직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 시련 앞에서도 당당하며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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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2-05-20
  • [교회음악칼럼]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갱신과 회복을 소망하며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냈다. 주님의 고난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생각하면서 어쩐지 모를 송구함과 민망함이 밀려오는 이유는 뭘까?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은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복음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작금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리라. 이러한 까닭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보다는 다시금 주의 마음에 못을 박는 참담함을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송구한 마음이다. 혹여 사순절이 나와 상관이 있는 절기라면 한번 깊은 묵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연유가 있겠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예배의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으로 진단하고 싶다. 이러한 판단은 그저 개인의 주관적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바다. 다년간 대학원에서 예배음악의 실제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얻게 된 결론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 해야 할 일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성경 말씀 앞에 서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정말 개인이, 가족이, 교회공동체가 생명력 있는 예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이 사회를 향한 선한 영향력을 다시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배와 찬양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다르지 않고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배를 찬양으로 찬양을 예배로 바꿔 이해하면 되겠다. 예배는 피조물인 만물이, 인간이 창조주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예이자 의식이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을 향하여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사야서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1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인 치신 이유가 우리로 당신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늘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정하여 다른 지파처럼 어떤 분깃도 주지 않고, 어떤 일을 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수종 드는 일에 전념토록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예배하는 일을 귀하고 중히 여겼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아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되 신령과 진정을 다 하여 드려야 하는데 외형적으로 잘 준비하여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거부하신 기사가 성경에는 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유념 또 유념해야 한다. 특별히 단체로 드리는 예배는 개인뿐 아니라 전체가 마음을 합하여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을 부어주신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예배는, 찬양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거기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하나 이것이 현실과 현장 속에서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위로나 은혜, 나아가 능력을 힘입지 못하게 되므로 세상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행하지도,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따라서 예배가 살아나야 하겠다는 것이다.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예배와 그 가운데 행해지는 찬양이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에 적합하여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영광을 경험한 자만이 삶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어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칭송케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이것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고 복음 선포의 적극적인 표현이며 그 결과로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자 찬양이다. 문제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 속에서 영적 혼돈과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성경학자가 말한 것처럼 믿는 자들이 가장 성경을 멀리하고 믿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경성해야 한다. 그 옛날 우리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한 것을 다시금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대하고, 향하는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지? 진심으로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구원받은 백성으로 진실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며 찬양하고 있는지? 예배자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배하고 찬양하되 지, 정, 의 이 세 가지가 균형 잡힌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단체가 드리는 예배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말씀의 기초 아래 선교, 전도, 영적 교육을 위하여 적절한 변화를 준 예배와 찬양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 필요하나 때와 장소가 구별되어야 함은 물론 이 역시 하나님과 말씀 중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인간적인 것은 배제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고 이를 뛰어넘으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이성으로, 감성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 즉 이성의 틀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진실함으로 드려지는 개인, 가족, 공적 예배를 통하여 주님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의 도가 이 땅 가운데 흘러넘쳐 충만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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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가정을 교회로 만드는 가정예배(1)
    일찍이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리스도의 뜻으로 다스려지는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의 신앙 교육과 질서는 하나님의 은총의 중요한 수단이다. 이것을 무시한다면 다른 어떤 수단으로 은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의 가치와 의미를 단순한 가족 구성원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신앙하는 믿음을 전승하는 공동체로서의 모습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정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유일한 두 개의 조직인 가정과 교회는 본질상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가정은 교회를 지향하고 교회는 가정을 닮아갑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 교회는 모든 세대가 함께 행복을 나누며 하나님의 자녀로 마음껏 성장하는 가정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1. 가정예배의 필요성 하지만 어느덧 주일학교의 발전 이후로 가정은 신앙교육의 사명을 교회로 떠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아침에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교회학교 교역자들과 교사들이 내 자녀의 신앙을 책임져주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부모들이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주일 168시간 중에서 단 1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주일학교의 예배와 공과학습만으로는 우리의 다음세대의 신앙을 잘 세워가고 그들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학교 교육은 대그룹 중심이고 이론 중심이고 가르침 중심이기에 교육효과가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소그룹 중심이고 실천 중심이고 배움 중심이기 때문에 교회학교의 부족한 점들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의 신앙적 대화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축복하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바로 가정예배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민교회는 5년 전부터 매주일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온 교회가 함께 신앙의 성숙과 행복을 누리는 신앙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가정예배의 소중함을 알고 도전하지만 쉽게 포기하고 마는 것과 달리 성민교회는 그동안 꾸준히 가정예배 전통을 이어오고 있고 우리의 다음세대가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분위기를 잘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2. 가정예배 인증샷의 활용 그것은 바로 가정예배를 우리 가정의 이벤트로만 끝내지 않고 온 교회가 함께 격려하고 응원하는 온 교회가 함께하는 사역으로 이끌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가정예배 인증샷이 있습니다. 성민교회의 가정예배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먼저 가족들이 그 주의 가정예배에 참여하는 인증샷을 찍어서 교회 홈페이지 가정예배란에 업로드합니다. 그러면 이 사진들을 모아서 그 주 주일예배 광고시간에 온 교회 교인들이 함께 봅니다. 그러면서 어느 가정이 지금 가정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를 함께 보면서 때론 도전도 받고 때론 응원도 해나갑니다. 이 인증샷에는 주로 자녀들의 이름을 적어서 그 가정을 알리는데 이렇게 하면 교인들이 다음세대의 이름을 알게 되는 효과가 있어서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러주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정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사진으로 보면서 우리 교회에서 누구와 누구가 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정의 가치가 교회 안에 점점 중요하게 되고 가정생활을 잘 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임을 모두가 인지하고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키워나가는 것에 힘쓰게 됩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얼굴이 교회 예배시간에 대형 화면에 나오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가정예배 광고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장년예배에 엄마 아빠와 함께 오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이들은 이 시간을 통해서 온 교인들이 가정예배 드리는 가정을 기뻐하고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습니다. 현재 성민교회 홈페이지 가정예배란에는 4,756장의 가정예배 인증샷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역사이자 가장 귀한 자산이자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에 사진을 올리고 있는 가정들은 평균 5년 이상, 최장 5년 5개월동안 가정예배를 드려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별로 270장의 사진을 통해 지난 5년여의 가정의 변천사를 기록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신혼부부 둘이서 예배를 드리다가 아이를 낳아 세 가족이 되기도 하고 어떤 가정은 한 아이를 중심으로 예배하다가 둘째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자녀가 예배하면서 아버지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다가 어느 주부터는 아버지가 같이 가정예배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것을 바라보는 온 교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고 감사의 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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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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