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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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대, 중소벤처기업부장관상 등 수상
    동서대학교(총장 장제국) LINC+ 산학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단은 ‘융합교과목 캡스톤 디자인(소프트웨어학과+광고홍보학과+디자인대학)’을 운영해, 2021년 제 56회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에서 중소벤처기업부장관상을 포함해 Winner 3팀이 선정되는 등 총 4팀이 수상했다고 18일 밝혔다. 특히 동서대는 5년 연속 장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하고 한국디자인진흥원 및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디자인 어워드이다. 중소벤처기업부장관상은 임혜정(소프트웨어학과), 손영민(광고홍보학과), 최수정, 이유림, 김성민(디자인대학) 씨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VR Dental Treatment System’이 차지했다. 이 작품은 청각장애인의 경우 입 운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일반인에 비해 치석 및 잇몸병이 잘 생기고, 치료시 눈을 가리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진료시 VR과 연결된 앱을 활용하여 치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Winner에는 ▲이영준(광고홍보학과), 조동하, 박준혁(소프트웨어학과) 이서영, 하은별(디자인대학)씨의 ‘Smart Label Package’ ▲김우리(광고홍보학과), 신동주, 이소연(소프트웨어학과) 황채영, 이치수(디자인대학)씨의 ‘Headrest Oxygen mask’ ▲한세진, 한예지, 홍현기(광고홍보학과)씨의 ‘500년만에 배달 왔습니다’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임혜정 씨는 “처음 출품한 작품이 바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며, 이번 작품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사회적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스스로 더욱 발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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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독일이야기]난민의 나라(1)
    2018년 500명이 넘는 낯선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서 난민 신청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난민수용에 대한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등 때 아닌 난민문제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만, 특별히 이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기독교인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읽으면서 올해 미라클 작전으로 아프칸에서 구출된 391명에게 정부는 난민보다는 특별공로자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난민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두루의 김진 변호사는 외교부나 법무부가 국민을 의식하여 난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피하고 있어 우려된다면서 “아프간인들이 국내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부분 등에서 난민에 준하거나, 난민 지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정식 선진국 지위를 얻은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그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만큼, 난민문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 한다. 난민을 반가워하고 좋아할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많은 세금을 써야한다는 재정적인 문제뿐 아니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염려와 아울러 외국인 범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는 난민문제가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을 직시하고 오래전부터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공존하는 것을 배워왔다. 독일생활 초기에 내가 다닌 사설 어학원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우리 반에 서글서글해 보이는 터키인 두 명과 친하게 지내면서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터키인이 아니라, 터키 내의 박해받는 쿠르드족이고, 그중 하나는 전쟁터에서 직접 터키군인을 죽인 전사임을 알았다. 망명자로 받아들여진 이들의 어학공부를 위해 독일정부가 그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또 친하게 지낸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고내전 때에 애인과 함께 난민으로 온 안나였다. 안나는 크로아티아계이고 그녀의 애인 사올은 보스니아계였는데, 두 사람 다 착하고 정이 많아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우리 교회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처럼 독일에는 이미 많은 난민들, 망명자들이 살고 있었다. 본래 독일은 외국인에게 친절한 민족이 아니고 외국인이 발붙이고 살기 어려운 나라임을 히틀러 나치가 증명해주었다. 19세기 후반에서야 뒤늦게 얻은 식민지들도 1차 대전의 패전으로 다 상실했기에,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지인들의 유입도 적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폭발적인 경제부흥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불렀고 이들이 정착하면서 외국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유의 외국인 유입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난민이었다. 그동안도 꾸준히 정치 망명자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난민의 시작은 유고내전부터였다. 1991년부터 시작된 유고내전은 120여만 명의 난민을 만들었는데, 그 중 32만 명을 독일이 수용했다. 안나와 사올도 그들 중 하나였다. 1990년 이후 독일도 통일로 인해 많은 재정적인 부담을 겪고 있었지만, 국제적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부만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 되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독일개신교회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교회는 삶의 터전을 잃고 오갈 데 없었던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실천하는데 앞장 선 것이다. 난민문제를 앞으로 좀 더 다루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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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성서연구]그녀가 거기에 간 이유(요한복음 20장 1-2절)
    지금까지 저는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수백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교육지도사와 전임전도사, 부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만 32세에 담임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려운 개척교회가 아니라, 장로님이 여러 명 계신 교회였습니다. 그 후 지금은 그 보다 훨씬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주님을 따르는 고단함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일부러 일 년에 한두 번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부산 외곽의 시골로 나갔습니다. 지나다가 교회가 있으면 무턱대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날에는 모든 것이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낯선 교회에 처음 들어가는 경험, 그 교회의 성도들이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을 때의 느낌, <지나가다 들렸다>고 대답하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드리는 기도, 그 후 교회 주보를 읽어보고, 교회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던 생소한 느낌, 그리고 조금 분위기가 다른 예배와 설교..... 어떤 교회의 목사님은 일찍 나오셔서 직접 교회 문을 열고, 불을 밝히고, 강단을 정리하고, 예배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그러다가 네댓 명의 성도들이 참석했겠지요. 저희 부부 두 사람은 예배 분위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설교했을까요? 그리고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계속 그러했겠지요. 갑자기 교인이 많이 늘어나거나 재정이 불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늘 모자라고 쪼들렸을 것입니다. 처음엔 3년 정도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3년이 30년이 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왜 이 교회에서 목회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어떤 분은 그 지역에 대한 소명 때문이라 대답하겠지요. 제가 들은 대답 중 하나는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셨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서 섬긴다>입니다. 그러나 이 정답은 머리에만 있을 뿐, 가슴으로부터 이 대답을 하는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요? 제 동기 목사님 중에 김동찬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인도네시아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고등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학비도 끊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길을 갔고, 지금은 온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일입니다. 지리산 자락의 목사님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삼십일 년째 골짜기에 머무는 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지나가다 갑자기 들렸더니 일을 하시느라 바빴습니다. 얼굴을 그을리고 옷맵시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천사의 웃음이 배어났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안식후 첫 날,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갔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 여인의 몸으로 무덤에 가는 것은 쉽지 않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왜 무덤에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게 했습니다. 저의 숙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가>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농어촌의 어려운 교회에서, 개척교회에서, 힘든 선교지에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계신 분들처럼, 저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심방하고, 기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덤에 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1-10-22
  • [서임중 칼럼]허리를 굽혀라.
    한 잎 낙엽이 속삭이듯 창문을 노크하며 날아 내린다. 아파트 앞 둘레길 가로수도 어느새 울긋불긋 채색 옷을 갈아입고 빼곡히 짙던 잎새들을 조금씩 솎아내며 서 있다. 열어놓던 창문도 이제는 닫아야 하는 계절의 변화에 분주함을 잠시 멈추며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고희의 세월을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나는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거룩한 옷을 갈아입으려 얼마나 애쓰는가 생각해 본다. 어린 나이에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었다. 목회 추억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노회를 마친 어느 주일 당회 모임에서 평소 어린 목사를 따뜻하게 품고 지극히 아껴 사랑하며 동역하시는 큰형님 같은 장로님이 웃으시며 조용하게 “목사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사님, 노회에 가셔서 너무 그렇게 허리 굽혀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큰 교회 당회장이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앙교회 당회장의 자리에 걸맞은 모습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로님의 말씀을 백분 이해하면서 나도 웃으면서 말씀을 드렸다. “대형교회 목사가 인사할 때 허리 굽히면 안 된다는 성경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당회원들은 파안대소하면서 분수에 맞는 언행이란 꼭 필요한 것임을 서로 이해하고 포항중앙교회는 관계개념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고 베풂의 삶을 실천하는 교회를 지향하자고 했었다. 나의 목회병법에는 10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휴지통 목회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사용한 후 버려야 할 것들은 휴지통에 버린다. 휴지통은 가득차면 비우고 다시 채운다. 교인들이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에서 오는 불평 원망이 왜 없겠는가? 그럴 때면 상호간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목사에게 와서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기 뜻이 관철되면 웃고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갖 아픔을 목사에게 되돌려주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런 경우에 나는 휴지통 목회로 일관한다. 다 받아들이고 더 담을 수 없도록 채워지면 십자가 앞에서 다 비워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목회병법의 한 가지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청소를 하는 집사님을 계단에서 만났다. 걸레를 들고 청소 도구를 옆에 세우고 있던 집사님은 나를 보자 언제나처럼 애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비켜서다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내 발 앞에 떨어진 빗자루를 내가 엎드려 주워서 건네주니 “목사님, 목사님,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집사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먼지를 닦고 휴지를 줍고 연신 허리를 굽히고 일어서고 굽히고 일어서고...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집사님은 그렇게 교회를 쓸고 닦는다. 집사님의 아름다움은 육체적 허리를 굽힐 때보다 마음의 허리를 굽힐 때 더욱 확연히 전해져온다. 이조(李朝) 역사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충정 어린 재상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 가운데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을 빼놓을 수 없다. 일생을 가난하게 지내면서도 성품은 온유했고, 그러면서도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하면서 직무에 강직했던 재상이었다. 그는 이조(李朝) 역사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서 공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오직 목민(牧民)에 두었고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청렴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직했던 고불(古佛)의 정신은 오늘처럼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처처에 공직자의 비리가 만연해지는 때에 참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고 고불이 본래부터 겸손하고 훌륭한 재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한 머리로 교만했던 고불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맹사성이 열아홉에 장원급제-正史는 1386년(우왕 12년) 27세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 후 파주 군수로 명을 받았을 때 선사(禪師)를 찾아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고언(高言)을 듣기를 청했다 그 때 고승(高僧)이 이르기를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시오”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오만한 맹사성은 “스님, 그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아십니까?” 하며 노기 띤 얼굴로 일어섰다. 고승은 “먼 산사(山寺)까지 오셨는데 녹차라도 한 잔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하고 권유했다. 오만했던 맹사성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못 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고승은 맹사성 앞에 녹차 잔을 놓고 차 주전자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찻물이 흘러넘쳐 방바닥을 적시는데도 계속 따르고 있는 것을 본 고불이 더 화가 나 “스님, 지금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화를 냈다. 고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고승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차 잔의 물이 넘쳐 방바닥 버리는 것을 보고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까?”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어 황급히 차를 마시고 일어서 문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피하려는 급한 마음에 서두르던 맹사성이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나가는 맹사성의 뒤에서 고승의 설법 같은 두 번째 말이었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오만했던 고불이 위대한 이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되게 한 한 사건이 이것이었다. 교회도 사회도 정치도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왜 모두 이렇게 시끄럽고 불편한가를 생각해 보면 맹사성을 향한 고승의 말 한마디가 명언이 된다. 마음의 허리를 굽히면 육신의 허리도 굽혀진다. ‘허리를 굽혀라’ 그것이 너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삶의 지남철이다. Bend down! Bend over!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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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시사칼럼]깐부
    요즘 유행하고 있는 “깐부”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릴 땐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참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실력이 꽤 좋은 편이어서 따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몽땅 다 잃고서는 무척 속상했던 날이 하루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상대방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고,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서 둘 사이에는 계산을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때 자기들끼리 부르던 명칭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86년에 또 듣게 되었습니다. 배우 박중훈과 김혜수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의 개봉 때문이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깜보”였습니다. 그 후로는 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같은 뜻을 가졌다는 단어 하나가 21세기에 이토록 세계적으로 유행하다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모조리 시청률 1위를 휩쓸어버린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에 등장해서 어쩌면 앞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될지 모르는 “깐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지역에 따라 “깜보(부)”나 “깐부(보)” 혹은 “가보(갑오)”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일단 “깜보”에 대해서는 미8군 시절의 소규모 음악 밴드 ‘캄보(comb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오종석, 국민일보), 늘 밖에서 같이 뛰어 놀아 가무잡잡해진 친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라는 견해도 있는바(네이버 사전), 앞선 영화 속 주인공 장두이 배우의 극중 별명이 “깜보”였는데 이런 뜻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깐부”와 관련해서는 일본어 ‘카부(株)’가 어원이라고 하는데, 에도시대 상인조합 ‘카부나카마(株仲間, かぶなかま)’ 또는 지분을 가리키는 말 ‘카부시키(株式, かぶしき)’의 “카부”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견해로(이무완, 오마이뉴스), 쓴 돈을 나누어 낼 때 ‘카부시키하다’라는 말을 썼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간 “깐부치킨”이라는 가게를 운영해 온 분은 요즘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특수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어원을 묻자 어릴 때 고향(평안도)에서 쓰던 말이라 했다고도 하고, 친구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중국어 발음 ‘꽌보’나 일본어 발음 ‘깐보(かんぽう)’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한국을 시샘하기 바쁜 일본이나 중국에서 “깐부”도 자기네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현대판 “깐부”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는 관계, 그런 의미라면 진정한 “깐부”는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각자의 소유를 심지어 팔아가면서까지 함께 쓰고 함께 나누며 살았다고 사도행전은 두 차례나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행 2:44-45, 4:34-35).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어떻게 소개했던가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나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고(갈 4:1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관해서는 “자신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롬 16:4)? 아무리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동역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눈을, 목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 속 신자들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나환자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가족과 심지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최흥종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답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예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이들을 향해 “친구”라 부르셨습니다(요 15:4).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깐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곁에는 이와 같은 깐부가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이와 같은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실한 깐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너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깐부가 되어 준다면, 이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나쯤은 주님 닮은 깐부가 하나씩 붙어있지 않겠습니까? 대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서도 깐부라는 말이 연일 등장해 화제입니다. 야당의 어느 예비주자는 “우리 깐부 아닌가요? 치열한 경쟁은 하되 품격 있게, 동지임을 잊지 맙시다”라 했고, 여당의 원내대표도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깐부, 네것내것 없고 네편내편도 없다, 우리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지요? 좋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지금까지 격동의 세월을 용케 함께 헤쳐 온 사이들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부디, 더러운 이(利)나 부패한 사욕(私慾)이 아니라,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열정과 미래의 비전과 타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깐부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보다 우리부터 주 안에서 그런 깐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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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은혜의 말씀]예수님의 시간표(요 11:1~7)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이고 빠르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더디다고 여기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나사로가 병들어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결국 오빠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시자 그들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은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이 위기의 상황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처럼 갑작스런 시련을 만날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큰 어려움을 만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사로 삼남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위기 가운데서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2,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사람들이 달려와서 위급함을 전하는데도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이틀을 거기서 더 머무셨습니다. 두 자매의 속은 얼마나 타 들어갔을까요?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내뱉은 말이 무엇입니까?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의 지체하심에 대한 상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두 자매를 향해서 “네 오라비는 다시 산다”고 단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가정에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생각하듯이 늦은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인데, 어떤 것이 그 가정에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는 주님인데,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십니다. “3best : best time / best way / best thing”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3:25,26) 예수님의 시간표는 가장 정확합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시련 중에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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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역사바로알기]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1917.12.26~1976.5.20)
    출생과 기독교 입문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여원리에서 전일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영창의 할아버지 전치선은 일제치하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영창의 아버지 전일봉도 할아버지의 독립정신과 신앙심을 이어받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읍내 장터에서 열변을 토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 전영창 나이 세 살 때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교육열로 전영창은 집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안성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했다. 미국장로교 선교사 보이어(Elmer T. Boyer,1893-1976)가 해마다 두 차례 그의 동네로 와서 성찬식을 베풀곤 했는데 이때 전영창은 성구암송책에 있는 성경구절을 전부 암송하고 소요리 문답까지 막힘없이 다 외우자 보이어 선교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영창을 학비까지 지원해 주며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서 근로장학생으로 공부하게 해 주었다. 1936년 5년제 신흥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촉탁선생이 되었으나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쫒겨났다. 일본유학과 투옥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을 휩쓸 때 끝까지 이를 반대한 전영창을 눈여겨 보았던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이 영창을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가도록 지원해 주었다.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영창(21세)은 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1년 12월 1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신사참배 반대자 일제 단속에 걸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꾸오까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루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투옥될 때부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영어공부에 혼신을 다했었다. 해방과 미국유학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 합격한 후 미군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가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벧종드를 소개해 주었다. 벧종드는 자신의 모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 기특한 청년을 포옹하며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고 개인경비까지 다 부담을 해 주었다. 당시 미군정청 산하 외교업무 담당처는 첫 한국유학생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해 줌으로 1947년 4월 건국 이후 최초의 유학생이 되어 펜실베니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으나 2년 뒤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1년 1월 웨스턴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때 1951년 1월 3일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전영창은 뮬더 학장을 찾아가 지금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 일을 시키려고 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약 조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까지 배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점령하기 전에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6. 23-24쪽) 뮬더 학장은 졸업을 두 주 남기고 포탄이 쏟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막아섰다. “학위를 받으려면 졸업을 해야 하니, 두 주일을 기다리며 사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전영창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완강한 태도였다. 전영창의 고집을 꺽을 수 없음을 깨달은 뮬더박사는 귀국을 허락하고 수속도 책임질테니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라, 그리고 두주일 후의 졸업시험은 치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학장의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학장은 이사장과 협의하여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여 1951. 1. 8일 저녁 학장실에서 뮬더 박사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경비는 학장의 친구 게리드윗 목사의 도움으로 해결하였고 게리드윗 목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전란중의 조국을 도우려는 전영창을 위해서 미화 5,000불을 별도로 모금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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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기독교교양읽기]“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김응교의《손 모 아》 -시련 앞에서의 시 이야기- 기도하는 손의 모습을 책 제목으로 하였다. 저자 김응교 시인 겸 평론가는 활발한 매스컴 활동으로 대중에게 친근한 문학인이다. 기독교문학을 포함하여 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가 2016년 겨울 KBS국제부 라디오에서 북한에 보내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소개된 시편과 2017년 《월간 목회와 신학》 세계기도시에 연재한 내용 중 팬데믹 시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수정 보완하여 엮은 시 해설서이다. 츠빙글리로부터 기형도, 칼 바르트, 릴케, 까뮈, 윤동주, 디킨스, 톨스토이 등 국내외의 유명 문학인과 종교인 등 50여 편의 시편들이 수록되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저금통을 깨 기타를 사줬던 저자의 누이가 팬데믹 기간 중에 죽은 개인사도 있어 질병과 슬픔 앞에서란 부제가 더 공감이 간다. 늦가을, 시가 그리운 교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 저자소개 ∥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과 종교는 본래 하나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저자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분단시대에 시 발표를 시작으로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 《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을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였고, 1998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10년간 강의하였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있으며, 트위터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 저서∥ 《씨앗/통조림과 평론집 한일쿨투라》, 《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등 많은 저술이 있으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비아토르 간 / 2021. 5.25. / 1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그늘-문학과 숨은 신》 /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 김응교 / 문학동네 《곁으로- 문학의 공간》 /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기도는? “기도(祈禱)는 첫째 ‘나’를 잘라내는 영적인 도끼질이다. 내 정욕과 욕망과 고집을 쳐내는 대화의 시간이다. 둘째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깨닫게 해 달라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셋째 그 힘으로 노력하며 살겠다고 다짐하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김길구 휴가가 예상보다 길어졌네요. 그 사이 박 관장께서는 제8대 부산복지개발원장에 취임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공직에 있어 바쁘실 텐데 이 코너를 계속하기로 하셨습니다. 참가자들의 자원하는 마음이 이 코너가 장수하는 비결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인사 한마디~ 박영규 복지개발원은 부산광역시의 사회복지정책개발과 시민에 대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증진시키는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시민들의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만큼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현호 3개월을 쉬었다 다시 시작하려니 새로운 느낌이네요. 심기일전해서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팬데믹 시대의 성찰과 위로의 메시지 김길구 오늘은 계절에 어울리는 가벼운 주제로 정했습니다. 흔히들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번 호에는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응교의 《손모아》로 정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죠? 김현호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매스컴들이 팬데믹 소식을 우선해서 다루잖아요?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저명한 분들의 기도문과 시편 등 50여 편을 묶어 해설한 책입니다. 박영규 그동안 코로나19는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코로나 블루’는 우울한 일상을 표현하며, ‘코로나 레드’는 장기화에 따른 분노를, 그리고 분노를 넘어 폭발해 버린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를 ‘코로나 블랙’이라고 한다더군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데요. ‘질병과 슬픔 앞에서’라는 부제가 상징하듯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고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김길구 저도 다양한 저자의 이력 그리고 시에 대한 해제까지 있어 한편 한편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하여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월별로 4~5편씩 구성되어 있는 50여 편의 전 작품을 다 다룰 순 없고 오늘은 가을 편을 중심으로 몇 편만 소개해 보지요. 저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마지막 시가 여운에 남습니다. 「(중략)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시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주소서」 이 시를 읊조리다 보면 생의 마지막을 시골의 작은 역에서 객사한 노 사상가가 떠오릅니다. 그 무엇이 이 거인을 거리에서 헤매게 하였을까?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그가 배회하며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는데, 이 시를 보고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 교계도 거목들의 마지막 모습이 구도자로 보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마지막 며칠, 몇 시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봉사하겠다는 거인의 간절함이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김현호 그의 일대기를 보면 유서 깊은 백작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복무 중인 24살에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데, 당시만 해도 그는 권위와 폭력에 길들여 있었고, 40대까지 방탕한 생활을 했어요. 결혼 후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등을 통해서 명성도 얻었지만, 그의 인생관이 바뀐 것은 그의 나이 42세 때 시작해 50세에 마친 안나 카레리라 집필 시기인 8년여의 기간이라고 해요. 국가와 권력과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로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의 고뇌 끝에 50대에 이르러 그는 회심하게 되었고 58세 때 ≪바보 이반≫이란 작품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박영규 이 단편에서 톨스토이의 분신인 바보 이반은 톨스토이의 좌우명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손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악마의 유혹에 “손과 등은 일하라고 주어진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반처럼 우직한 바보들이 모인 나라야말로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건강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농노해방운동에도 기여한 그는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어요. 김길구 저자의 전작인 ≪그늘≫을 보면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가 쓴 베스트셀러 ≪진보와 빈곤≫이란 책을 읽고 큰 영감을 받습니다. 그 결과 당시의 농노제도에 가까운 토지제도를 신랄히 비판합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 사상을 건너뛰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대표작 ≪부활≫에 서 “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좌절과 ‘대장동 사건’으로 시끄러운 우리나라를 보면서 톨스토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선한 힘들에 관하여 김현호 지난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제일 많이 읽힌 책은 알베르트 카뮈의 <페스트 La Peste>라는 소설이라고 하는데, 저는 기도문에 실린 네 명의 인물에 주목하는데 도그마에 싸인 교리의 기독교와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예수의 삶과 변혁적 기독교에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던 인물들이죠. 의사 리유, 반항하는 인물 장타루, 성실한 임시직 공무원 그랑, 참혹한 현실 속에서 새롭게 깨달은 인물, 기자 랑베르를 통해 이상적인 ‘선한 사마리아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길구 책에는 널리 알려진 곡들의 일화를 소개 하고 있는데, 디트리히 본회퍼의 기도문 <그 선한 힘들에 관하여>이 가스펠 <선한 능력으로>로 번안되어 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독재자 히틀러 암살운동에 가담한 죄목으로 체포된 후 수감, 종전을 코앞에 두고 194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죽음을 예감하고 그의 약혼자에게 전한 편지에 쓰인 기도문으로 그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 작곡가 지그프리 트피치가 곡을 붙인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마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 못지않은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전편에 흐르는 신앙의 확신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잔혹한 낙관주의’가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박영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슈렉>에 삽입되어 화제가 된 곡이며, 200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201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2016년 82세로 작고한 캐나다의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싱어송 라이터, 배우인 레너드 코헨의 중독성이 강한 노래 <할렐루야>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운데, 다윗과 밧세바의 금지된 사랑을 노래한 곡인데, 가사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중략) 사랑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야 사랑은 차가운 것 사랑이란 부서진 할렐루야~」나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은 그대보다 총을 빨리 뽑는 사람을 먼저 쏘는 방법이었죠」라는 노랫말이 부서질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욕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성서기자의 한 인간의 실수를 눈감지 않고 굳이 다윗의 아내가 아닌 우리아의 아내로 표현한 강직한 역사관, 그리고 부정한 가계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피할 수 없는 운명 등의 얘기가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김길구 50여 편을 다 들려드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한편 한편이 다 귀한 글들 입니다. 이 짧은 가을날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호에는 도서출판 엠마우스에서 펴낸 홍석진 목사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통찰 《시선》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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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자전거 로망
    자전거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확 트인 강가에서 산들산들 봄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으며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매주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겠노라고 꿈꿨었다. 자전거만큼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의 즐거움을 누리는 이동 수단이 또 있을까? 어디든 달리거나 나아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가장 건전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자전거라고 생각해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 즐거움을 꼭 누리게 하고 싶었다. 첫째가 3-4살 즈음 페달을 혼자서 돌릴 수 있을 때 네발 자전거를 시작으로, 4명의 아이들 모두에게 비교적 성실하게 자전거를 가르쳤으며(물론, 이 부분은 대부분 남편이 담당했다.) 1년 정도 제주도에 살 때는 큰 애가 학교 갈 때를 비롯마트 갈 때도 자전거를 타고 가곤 했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문득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전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첫째, “시선을 앞으로, 혹은 자연으로 돌릴 수 있어서 좋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최근에 초등학교 앞에 가본 적이 있는가?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 가보면 아주 진기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삼삼오오 일렬로 모여 핸드폰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학교 정문 앞이나 문구점 의자에 빼곡하게 앉은 아이들이,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 무언가를 하며 앉아 있다 태권도 학원, 피아노 학원 등의 차량이 오면 그제야 고개를 들고 후다닥 차를 탄다. 이런 아이들, 손바닥 세상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는 아주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에는 시선이 앞으로, 더 나아가 자연에 머물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있는 산, 펼쳐져 있는 구름, 길가에 있는 가로수 등 무심하게 지나친 것들이 자전거를 타면 이미지로 박혀서 남는 경우가 있다. 자전거가 주는 묘한 매력이다. 둘째,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서 좋다.” 아이들에게 자전거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이동 수단이다.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도 자전거만 있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충분히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 같지만 의외로 아이들에게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다준다.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 없이 먼 거리를 간다는게 힘든 일인데, 자전거는 이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끔 도와주면서 동시에 “어른들처럼 나도 해냈다” “혼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한다. 어릴 때부터 쌓인 이 경험은 큰 자산이 되어 무슨 일을 하든 밑거름으로 자신이 될 것이다. 굳이 두 가지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자전거는 단순히 타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재미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상쾌한 날씨에 아이들 모두가 자전거를 스스로 탈 만큼 건강하게 자란 것도 감사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함께 웃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우리가 있다는 것도 더없이 감사했다. 자전거, 앞으로 더 많이 애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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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10-22
  • [다음세대 칼럼]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목사님은 믿습니다.
    제자녀석에게서 D.M(문자)이 왔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절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술 한 잔 하다가 예전에 이삭교회 수련회에 따라 갔다가 목사님이 제 발을 씻어준 게 기억이 나서 갑자기 연락을 드립니다. 저는 불교신자라서 예수님은 아직 믿지 않지만 목사님은 믿습니다.” 하나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목사님 oo입니다. 친구랑 싸우고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트려서 손에서 피가 날 때 내 손을 잡고 유리 조각 하나 하나 빼주신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학교 앞을 지나가다가 학교를 생각하니 그때 일이 떠올라 소식 드립니다. 성공해서 찾아뵙겠습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지나갔다. 큰 사고를 쳐서 기억나는 제자부터, 존재감 없이 아주 착하게 성실하게 지나간 제자들까지 여러 부류의 제자들이 지나갔다. 수많은 제자들이 세상을 흘러가는 중에 잊지 않고 소식을 전해오는 제자들은 여러 사건 사고 속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이 상당수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순간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곳은 문제학생들을 그렇게 반기지 않는다. 문제학생들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이런 녀석들이 더 손에 잡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의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밥 먹고, 함께 욕하고, 함께 공도 차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그냥 이 녀석들이 좋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냥 좋아해서 했던 그 시간이 훗날 녀석들에게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고 답을 주곤 한다. 결국 살아있는 교육은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보여주는 교육이 가장 힘 있는 교육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깨닫곤 한다. 생명 있는 교사로,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때 그 순간 같이 있는 것이다. 아이들도 안다. 자기들이 지금 온전한 모습인지 아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때 먼저 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과 함께 해주는 것이다. 한 번은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당 뒷문이 슥 열리더니 우리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걷는 것이 조금 수상했다. 교복을 입고 술 한 잔을 하고 비틀거리면서 예배당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는 얼른 제자놈을 부축해서 내 옆에 앉혔다. 그리고 곧 데리고 나가서 혼내 주려고 하는데 앞자리에 앉아 있는 권사님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주면서 얼른 데리고 나가라는 사인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오기가 생겼다. 데리고 나가려다가 그냥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 그냥 재워 버린 후 예배가 다 마치고 데리고 나왔다. 물론 제자 녀석은 나한테 엄청 혼났다. 그날 제자 녀석을 끝까지 안고 있었던 것은 교회는 멀쩡한 사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제자놈처럼 비행을 일삼고, 사고를 치는 녀석도 올 수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아이들을 배척하려 한다. 그리고 그때 배척받은 아이들은 교회를 영원히 떠나게 된다. 이때 내가 안고 있었던 그 제자 녀석은 지금 훌륭한 교회의 리더로 자라 있다. 이 녀석도 같은 말을 한다. “목사님이 그때 나 안고 있는 바람에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겁니다” 그렇다. 다음세대 아이들은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그래서 무엇을 하기 전에, 보이는 우리가 먼저 신자됨을 보여야 한다. 아이들이 하나님보다 먼저 여러분을 믿게 하라. 거기에서 복음은 시작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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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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