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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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선물
    멜라네시아 원주민들에게는 “쿨라(kula)”라고 부르는 독특한 관습이 존재했습니다. 일종의 선물 교환 시스템으로 누군가가 선물을 받으면 제공자가 아니라 다른 이웃에게 선물하는 교환 기부 형태였습니다. 북미의 인디언 중에는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진수성찬을 베풀고 축제를 후원하며 상당한 가치의 선물을 하는 “포틀래치(potlatch)”를 행하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부족사회를 연구해서 이러한 의미심장한 결과물들을 찾아낸 마르셀 모스(Maecel Mauss)는 이러한 현상들을 두고 “평화를 얻기 위해 ‘소유권을 없애기’, 서로 죽이지 않기 위해 ‘축제를 열어 분배하기’, 동맹을 맺기 위해 ‘물건을 희생시키기’”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증여론(Essai sur la don)』(1924), 원문 197-202). 그런데 이런 기부와 후한 인심은 위에서 언급한 지역들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원시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원래 사치스러운 기부는 경쟁이 아니라 화합을 위해, 경제가 아니라 도덕을 위해, 과시가 아니라 종교적 동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인류학적으로 볼 때 “사치”는 크게 세 개의 범주로 존재해왔습니다. 첫째는 신성한 사치 혹은 속세의 사치로 신들이나 왕들에게 고가의 물건을 바치는 형태를 의미합니다(질 리포베츠키, 엘리에트 루, 『사치의 문화』(2004), 32).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사회적 사치’ 혹은 ‘에토스(ethos)적 사치’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전술한 쿨라나 포틀래치도 여기 포함됩니다. 둘째는 미학적 사치인데, 예를 들면 예술품과 같은 어떤 물건들은 사회적 위상이나 권력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귀한 존재처럼 소개되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에로스(eros)적 사치’라고 할 만한 이러한 변화는 중세를 지나면서 르네상스와 근대를 잇는 중요한 하나의 표상으로 작용합니다. 셋째는 감정적 사치 즉 ‘파토스(patos)적 사치’로서 ‘사치의 현대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19세기 후반부터 조짐을 보이다가 20세기 들어 대유행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가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는 파리의 고급 양장점의 총칭인데 해가 지날수록 발전을 거듭해서 1935년 이미 4천 명이 일하고 있던 ‘코코 샤넬(Coco Chanel)’만 해도 연간 2만 8천 점의 작품(?)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샤넬만큼은 아니어도 1956년에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1,200명이나 되었다 합니다(사치의 문화, 48). 그런데 지금 바로 그 “디올”이 대한민국의 언론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대통령 영부인이 동사의 고가품 가방을 선물 받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유포되면서부터입니다. 그 직후 대통령 내외가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환영식 광장에 있던 커다란 디올 매장을 우연인지 트럭이 가리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 자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지금 한국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인물은 바로 디올의 최고경영진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의 모방 심리를 자극해서 디올 제품이 앞으로 불티나게 팔리리라는 예측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했던 프랑스 사상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을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삼척동자라도 하겠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해부터 “여사는 디올을 입는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면서 디올의 국내 매출액은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상승했고(6,139억) 영업이익은 102%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머니투데이, 2022.6.5). 우리는 신이 인류 최대의 선물인 “성탄(聖誕)”을 안겨준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성탄은 석가나 다른 성인들의 탄생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물론이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참된 의미의 성탄은 창조주가 영원 전에 나시고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신 독생자를 아낌없이 인류를 위해 내어주신 사건이기 때문에 특별합니다. 세속적 사치나 미학적 혹은 감정적 사치를 위해 내어준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의 대가를 바라면서 바치는 뇌물이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이 선물을 이 땅에 투척한 이유 또한 원시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을 불태우거나 바다에 던져버리기도 했던 행태와도 달랐습니다. 절대존재이기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따위의 이론이 적용될 여지도 전혀 없었습니다. 성탄은 창조주의 무한한 호의의 결과요, 지고지순한 순수의 산물입니다. 모스는 원시사회를 분석하며 “선물의 교환은 풍성한 부를 만든다”(증여론, 165)고 했지만, 성탄이야말로 스스로를 다 내어주면서 모든 사람을 풍성하게 만든 유일무이한 선물이었고, 지금도 가장 놀라운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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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은혜의말씀]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눅 1:26-38)
    예수님의 탄생은 우주가 생긴 이래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꼭 열 달 전에 이 엄청난 일을 혼자서 다 겪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지요? 마리아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네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다” 예고했을 때 마리아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처녀가 임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천사에게 따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이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었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할 때 마리아는 겸손히 순종합니다. 그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지녔던 믿음이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천사가 한 말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때 마리아의 나이는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정혼을 한 사이지만 아직 어린 처녀 아이입니다. 그런데 잉태가 웬 말입니까?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한 이래 들어본 일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38절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기적의 하나님인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교리 중에서도 핵심교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육신의 아버지와 육신의 어머니를 통해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탄생하셨습니다. 요 1:14 뭐라고 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700년 전에 벌써 그와 같은 일을 예언했습니다. 사 7: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러분은 기적을 믿으세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기적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면 우리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기적의 얘기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기적을 믿을 뿐 아니라 기적을 기대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가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그렇게 기적을 믿고 사는 것이 복 된 삶입니다. 예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 했지요.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며, 여러분 모두가 기적이 상식이 되는 그런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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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신앙교육나침반] 온세대가 성탄의 복음을 놀이하는 교회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죄 가운데 고통 받는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므로 죄와 함께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가운데 고통 받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로 몸소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올해 대림절과 성탄절에는 온 세대가 이 기쁜 소식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을 꼭 마련해보세요. 일회용 앞치마와 복음색깔(하늘색,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탁구공을 이용해서 복음을 즐겁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탁구공에 담긴 네 가지 색깔은 각각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늘색)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나에게 오셨습니다. (빨간색)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오셨습니다. (초록색) 죄로 죽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오셨습니다. (노란색) 죄의 종이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오셨습니다. 모든 세대가 일회용 앞치마를 착용한 후에, 앞치마 안에 복음색깔 탁구공을 담아서 옆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선 사람은 우리나라 지도 그림 위에 복음색깔 탁구공을 놓습니다(사전 작업: 탁구공이 지도 그림 바깥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플레이콘을 지도그림 테두리에 붙입니다). 하늘색 탁구공을 전하며 “하나님!”, 빨간색 탁구공을 전하며 “십자가!”, 초록색 탁구공을 전하며 “생명!”, 노란색 탁구공을 전하며 “자녀!”라고 외칩니다. 이렇게 성탄의 복음을 놀이하다보면, 모든 세대가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기쁨의 소식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복음을 놀이하는 <향기나무 복음놀이터>를 귀 교회에 세워보세요. 부모세대로부터 자녀세대로의 신앙전수가 활발하게 리부트될 것입니다. 향기나무 복음놀이터를 세우려면, 복음놀이터를 운영하며 진행할 코디네이터가 필요합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현재 <향기나무 복음놀이 코디네이터 초급1 과정>의 신청접수를 받고 있습니다. 복음놀이 코디네이터 과정을 신청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 2024년 1월에 출간될 《복음놀이리부터 50》 책을 기반으로 한 복음놀이 프로그램(6주)의 모든 내용을 교회교육 전문가와 놀이전문가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 향기나무 복음놀이터를 귀 교회에 세울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 개설준비부터 운영까지의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도와드립니다. 자세한 신청접수안내는 향기나무교육개발원 홈페이지 또는 향기나무복음놀이터 유튜브 채널을 통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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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12-20
  • [양육칼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배우는 자녀의 리더십을 키우는 양육기술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Christ’와 미사(예배)를 뜻하는 ‘mass’가 합쳐진 단어로 ‘예수님께 미사(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Merry’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기쁜’ 혹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를 모두 합치면 메리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경배하자’는 의미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 위해 오셔서 목자가 양을 보호해 주고, 양을 위해 섬기듯이 우리를 위해 섬겨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자녀의 리더십을 키우는 양육기술을 배워보자. 먼저 리더십의 가장 주요한 역량인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예수님의 사역에서 소통하시는 모습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소통의 달인이셨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무시당했던 죄인들과 어울리며 소외된 자들을 격려하셨다. 그러나 상류층에게도 문을 닫지 않으셨는데 아리마대 요셉 등 부자들과도 교류했다. 로마 군인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만 로마 군인과도 소통하셨고, 율법학자들과 대립각을 세우셨지만 니고데모와 같은 율법학자에게 진리의 교훈을 주셨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앞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 요구되는데 예수님은 항상 만나는 사람들 개개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하고 경청하고 또 질문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해올 때에도 바로 답을 내놓기보다 '질문'으로 다시 되돌려주셔서 상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도록 하셨다. 특히 사복음서 전체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시대에 질문해오는 사람에게 바로 답을 주지 않고 상대 스스로 답을 말하게 하는 식으로 대화를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통 기술이다. 최근 한 연구에서 초등학생이 부모와 소통하는 시간을 조사한 연구에서 66% 이상의 가정에서 하루 1시간이 안 되는 대화시간을 갖는다고 답했으며, 게다가 55% 이상의 가정에서 대화의 주도권은 엄마가 가지며, 9% 이상이 아빠가 갖는다고 답해 64% 이상이 부모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진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나 많은 가정에서 부모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훈육을 하려 하거나 일방적으로 지시, 명령하는 경우에는 상호간에 대화가 안 된다. 무엇보다도 소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먼저 경청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경청하는 부모는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능력과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경청하는 기술 두 가지를 한꺼번에 키워주게 된다. 예수님이 사역에서 배울 또 다른 양육기술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는 목적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죽기까지 우리에게 섬김을 보여주셨다. 리더는 팔로우를 진정으로 섬길 때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의 리더십을 키우려면 진심으로 이웃과 주변을 섬기는 기회를 갖게 하고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이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는 솔선수범의 태도 즉 ‘모범의 리더십’이 그 기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섬기러 왔다는 목적에서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시면서 먼저 섬김의 도를 보여주셨다. 용서하라고 가르치시고 스스로 용서의 본을 보이셨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스스로 기도의 본을 보이셨으며,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며 스스로 십자가에서 그 가르침을 지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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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육칼럼
    2023-12-20
  • [다음세대칼럼] 대림절은 기다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못 견딥니다. 특별히 ‘빨리 빨리 병’에 걸린 우리는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필자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잠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합니다. 패스트푸드 문화와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내일의 희망이요 꿈입니다.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성숙시킵니다. 기다림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내일로 다가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절기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 절기는 크게 대림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오순절)입니다. 대림절은 대강절 또는 강림절이라고도 합니다. 성탄절이 오기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대림절의 의미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삶의 현장에 주님께서 능력으로 임재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대림절 기간은 자신을 돌이켜 보며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때입니다. 대림절 기간은 들뜬 분위기가 아닙니다. 차분하게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기간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성화가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성도들이 모여 있기에 교회는 여전히 ‘공사중’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보편적 교회 가운데 완성된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어제의 은혜를 기억하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삶에 빠져서, 우리의 모든 삶이 결산되는 ‘그날’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기다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조급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첩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약속의 씨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조급함이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 후손은 이삭의 자손과 끊임없이 싸우는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왕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단에 분향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망령된 행동을 한 사울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기다리지 못함으로 일을 그르친 경우는 없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요 능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기다림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 기다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완성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싸움이 있습니다. 많은 부족함과 결핍이 있습니다. 반목과 질시가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이 있습니다.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대림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소망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근신하고 깨어서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의 쾌락에 사로잡히거나, 현실의 삶에 안주하며 살아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내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준비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준비된 다음 세대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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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기적의 성탄 양초를 아십니까?
    영국의 시골마을인 글래드스톤에는 한 가지 전통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이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천사는 정확히 25년마다 한번 양초장이 해딩턴 가문의 집에 찾아와서 단 하나만을 만지고 가는데, 그 양초가 기적의 양초가 되어 여기에 불을 붙여 기도하면 어떤 문제든 해결된다는 기적이었습니다. 어느덧 운명의 25년째 성탄절이 점점 다가옵니다. 대강절이 시작되자 양초장이 해딩턴 가문의 에드워드 부부에게 마을 사람들은 찾아와 자기에게 기적의 양초를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들어보니 모두들 딱한 사정들입니다. 마음 좋은 양초장이 부부는 딱 잘라 거절도 못하고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드디어 대강절의 어느 깊은 밤 천사가 나타나 양초 하나를 만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양초를 집으려던 에드워드가 그만 다리가 풀려 넘어지는 바람에 선반 위에 있던 양초들이 다 바닥에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것이 천사가 만진 양초인지 알 도리가 없게 된 양초장이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사정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절박하고 애틋한 사연들입니다. 마음씨 좋은 이 양초장이 부부는 양초를 하나씩 꺼내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마시고 당신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에드워드 부부는 찾아오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기적의 양초를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사실이 드러나면 한 사람 외에는 다 자기를 사기꾼이라고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해딩턴 가문의 명예에도 먹칠을 하게 되고 글래드스톤의 평화로운 마을에 씻을 수 없는 큰 혼란을 주게 될 것이 뻔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니 마지막으로 초가 하나 남았습니다. 에드워드 부부는 남은 초 하나를 켜고 자신들의 소원도 빌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가게 됩니다. 이 부부는 두려운 마음으로 예배당에 갔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은 기적을 체험했겠지만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다 실망하고 자기를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예배 중에 ‘기적의 양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혹시 양초를 켜서 기도하고 응답받은 간증을 할 사람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순간 에드워드 부부는 눈을 감았습니다. 온 교회가 술렁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든 마을 사람들이 다 일어난 것입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기도 응답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대인공포증으로 사람들을 두려워하던 한 소년이 모두의 앞에서 이젠 하나님이 주신 용기로 말할 수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희망이 없던 젊은 부부는 비록 아픈 아이지만 우리 가정에 아이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하던 부부는 이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좋은 남편과 아내를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웃과 다투던 한 가정은 그 가정의 아주머니가 떠준 털장갑을 아이들이 끼고 왔다면서 아이들을 일으켜서 간증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아마도 양초장이 에드워드가 마지막으로 양초를 켜고 기도했던 것은 양초를 받고서 기도한 이 마을 사람들의 모든 기도가 다 응답받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복음적인 설교가요 소설가와 동화작가로도 유명한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쓴 “크리스마스 캔들”이라는 책의 줄거리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적일까요? 양초를 하나씩 사라는 걸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듣고 보고 접하지만, 정작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고 어려움이 많아도 제대로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기적의 양초를 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이 소설의 모티브로 양초를 떠올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양초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4주간의 대강절 기간 동안 교회에 밝혀놓는 대강절의 상징입니다. 이 양초가 조금씩 불에 타서 줄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이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기뻐합니다. 양초는 또한 자신의 몸을 태워서 빛을 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이 양초이기도 합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에 우리 아이들에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적의 양초이심을 알려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의 연약함이 강건함으로 바뀌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물려줍시다. 그렇게 우리도 이 시대를 밝히는 양초가 되고, 우리의 다음세대도 미래를 밝히는 희생과 화평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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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12-20
  • [영화]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감독 : 캐서린 하드윅, 주연 : 오스카 아이작(요셉), 케이샤 캐슬 휴즈(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일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땅으로 오셨고, 주인이 종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이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와 거주하기 위해 그 분이 오신 날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 날을 인간들의 축제로 변질시켰다. 연인들의 날로 바꾸고 선물 꾸러미로 대체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영화를 통해 성탄의 참된 의미, 본질을 묵상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통치할 때 유대 땅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스토리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시공간적 간극이 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기에 당시의 문화, 분위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위대한 탄생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은 정확무오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대의 사회, 문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우선 영화는 예수의 모친이 되실 마리아에게 집중한다. 그녀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 친척 엘리자베스를 찾아가는 것,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임신의 사실을 묘사한다. 사실 당대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익명성의 사회도 아니다. 마리아가 살았던 곳은 작은 마을이었고 온 마을이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집성촌이다. 어느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아는 시대다. 그러한 때에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했으니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이러한 마리아의 고뇌, 당시 주변 인물들의 반응, 그녀를 비난하는 것에서 인정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 한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자 했다. 자칫 목숨의 위험까지 있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믿음에 있다.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경건한 기도 생활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하였다. 만약 마리아가 세상의 기준, 세상의 가치관이 더 강했다면 그녀는 순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순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 수 있음을 믿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역설을 믿었고, 믿음의 조상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믿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또한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 요셉의 혼란도 잘 보여준다. 약혼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고뇌, 분노, 당혹감은 당연하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쉽게 읽기에 그 행간에 있는 감정, 분위기, 혼란을 간과하기 쉽다. 영화는 친절하게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을 잘 보여준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녀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요셉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준다. 요셉 또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의 믿음, 그의 결단, 그의 다짐은 당대의 윤리를 뛰어넘는다. 요셉 역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기 머리로, 자기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순종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뜻과 다를 수 있음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과 다를 수 있음을 믿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요셉의 신실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면, 고뇌, 결단을 볼 수 있어 좋다. 또 하나 이 영화의 장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게 해 준다. 우리는 그 동안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사람들이 그린 성화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왔다. 우리가 본 예수님은 긴 머리에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서양의 잘 생긴 남성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난 동양인이셨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도 중동인이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이 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혈통은 유대인이시다. 유럽인이 아니시다. 로마인이 아니시고 유대인이시며,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시다. 영화를 통해 이러한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 아울러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내방, 헤롯의 반응, 헤롯의 군사들의 만행을 스크린 속에 펼쳐놓는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 가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장점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 느낌, 분위기, 위기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 위대한 탄생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저 몇 줄 성경의 기사로 끝나지 않고 대신 긴박하고 극적인 스토리라는 것, 그러하기에 더욱 위대한 스토리이며 우리의 구원 이야기임을 잘 보여준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주제를 조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영화를 통해 감동을 받을 뿐 아니라, 성육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성육신은 경이로운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가 되셨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의 몸을 입으셨다. 자기 부정의 절정이다. 성육신, 즉 예수님의 탄생은 철저한 자기 비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왜 인간으로 오셨는가? 왜 우리와 같아지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시고 세상을 맡기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결정적으로 시험에 빠졌다. 사탄의 유혹은 한 가지였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유혹이다. 다른 말로 상향성의 욕망이다. 이 욕망은 사람들 사이에 시기심과 질투를 낳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을 낳았다. 바벨탑의 핵심도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수많은 인간들, 왕들은 하나님이 되려고 했다. 성육신은 정확히 이것과 반대다.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셨다. 상향성이 하니라 하향성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인간의 본성이 상향성을 향하기 때문에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그 분이 낮아지심으로 하향성이 살 길임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그 분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상향성의 본성을 극복하고 하향성을 배운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향하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향한다.” 따라서 성육신, 즉 성탄의 본질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낮아짐이다. 자기 비움이자 자기 부정이다.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다. 그래서일까? 성탄의 기쁜 소식은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졌다. 성탄을 축하한다면 우리 또한 낮은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 한다. 가장 높으신 그 분이 가장 낮아지셨기에 그 분을 영접하는 가장 낮은 자들이 역설적으로 이제 가장 높은 자가 된다. 그래서일까?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사람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주셨다.” 올해의 성탄은 이 본질을 잘 이해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을 통해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예수님의 임재를 증거하며, 우리의 본성인 높아짐을 극복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면 좋겠다. 이 기쁜 소식이 교회당 뿐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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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목회자칼럼] 하나님의 선한 손길
    꿈자리가 사나울 때는 어떻게 해야될까? 속 시끄러울 때는 무엇을 해야할까? 꿈자리가 사납고, 일이 종잡을 수가 없을 때, 그 때 주께서 간섭하신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 다할 때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숨 쉴 수 없을 만큼 코너에 몰리고, 힘겨울 때 주께서 숨통을 틔워주신다. 구약성경에는 이방 왕들의 꿈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을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시절에 개인적으로는 출세하여 수산궁의 술 맡은 관원이 되었던 느헤미야는 고향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것과 무너진 성벽소식을 듣고는 수일을 슬퍼하며 금식 기도하는 중에 아닥사스다 왕이 그의 소원을 묻고 느헤미야는 왕 앞에 황망한 중에도 막간 기도를 하며 왕께 아뢰니 하나님의 도움의 손이 역사하셔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총독으로 파송 받고, 건축 자재를 얻고, 특별조서까지 받았다. 나라의 결재권자는 왕이지만 역사의 최종 결정권자는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에스더는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아하수에로 왕의 눈을 열어 왕에게 부름 받지 못한지 30일이 지난 에스더를 예쁘게 보게 하였고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만큼 사랑하는 마음을 주었다. 다급한 가운데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에스더는 내일 잔치에 오라고하는 여유를 부릴 때는 그 믿음의 배짱이 대단하다. 어느 날 밤, 왕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역대일기를 읽는 중에 모르드개가 암살음모에서 왕을 구한 것을 알게 되고 대반전이 일어나서 하만을 물리치고 나라와 민족을 구했는데 위기의 때에 이방왕의 마음을 움직인 분은 하나님이시다. 요셉은 꿈꾸는 아이였다. 그러나 현실은 꿈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살아서 나오기 힘들다는 왕실의 감옥에 갇힌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총리가 되어서 가족과 민족을 보호하였다. 바로 왕은 요셉을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받은 사람으로 인정을 하였다. 다니엘은 그 시대에 최강 제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쓰임 받게 되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어린 시절 이국 만리 포로로 끌려간 아이가 다니엘이다. 패배감, 절망감, 열등감, 수치감에 살아갈 팔자였지만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멀고도 험한 고향땅을 그리워하며 집에 가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의 루틴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도할 때마다 더 어려워졌다. 왕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사자 굴에 투옥되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기에 모든 지혜자들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마저 죽을 위기에 빠졌지만 다니엘의 꿈 해석으로 친구들도 살고 뜻밖에 그는 총리가 되어서 정권이 바뀌는데도 세 번이나 총리가 되었다. 모두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부와 부흥되지 않는 교회의 공통점은 영감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 영감이 없고, 성령의 영감(Inspiration)이 없다는 공통점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의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주께서는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주께서는 꿈을 통해서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꿈이라도 꾸어지면 언젠가 실제상황이 된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꿈이라도 빵실하게 꾸지만 믿음이 없는 자들은 꿈도 없고, 소원도 없고 “냅둬 이래 살다 죽을란다” 성도는 긍정, 낭만, 진취, 발전, 소망의 꿈을 꿔야 된다. 잠꼬대라도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된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100%, 사람100%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부간에 존경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도시를 사랑하라. 성경 곳곳에는 이름도 없고 힘도 없는 여인들의 믿음 찬 모습이 나온다. 이방 모압 여인 룻의 신앙과 하나님의 우연한 인도로 재혼 후 다윗 왕통 출생,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결단으로 인한 온 가족 구원, 자식이 없음으로 통곡하며 오래 기도한 한나에게 이스라엘 최고 멘토 사무엘 주심,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인 외딴집에 살던 헤벨의 아내 야엘... 신앙생활에는 5기가 있다. 언약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쉬지 말고 기도하면 기념비적인 기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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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한신대, 유학생 강제출국 논란
    한신대가 한국어를 배우러 들어온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수십 명을 강제로 출국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일고 있다. 한신대는 지난달 27일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23명을 대형버스에 태워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강제 출국 과정에서 교직원과 경비용역 직원들을 비행기 탑승구까지 동행시킨 사실도 확인됐다. 학교측은 건강문제를 호소한 1명을 제외하고 유학생 22명을 미리 예매한 비행기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시켰다. 이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지난 9월 말 어학연수 비자를 발급받아 들어온 유학생들. 학교측은 1천만원 이상의 통장 잔고를 유지해야 하는 국내 체류조건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강제추방 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한신대 측은 입장문을 통해 "학생 대다수는 출입국 사무소가 사전에 공지한 잔고 증명 유지 규정을 지키지 못해서 조건부로 받았던 비자 취소가 명확한 상태였다"며 "학생들이 불법체류자가 되어 한국 재입국을 못 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기 전에 선제적으로 조치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강제 추방을 당한 학생들은 “버스를 태울 때 행선지를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고, 사설경비업체까지 동원한 것은 선제적 조치가 아닌, 강제출국”이라고 반발하면서 지난 1일 국민신문고에 신고했고, 현재 오산경찰서가 사건을 넘겨받아 수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신대 재학생들도 지난 13일 학교 당국을 규탄하는 시국기도회를 개최했다. 약 70여명이 참석한 기도회에서 학생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심 대학이었던 한신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탄식과 분노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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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12-20
  • 붉게 물든 저녁 노을처럼 한 해를 떠나 보내면서
    도종환 시인의 ‘겨울 나무’ 시가 생각난다.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 내지 않았는가 …(중략)…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하였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 온 한 시대를 빼놓고.” 이제 내 팔순 나이에 참 어울리는 시고 딱 알맞은 내용이 머리를 스친다. 잘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자라는 것 이리 보태고 저리 보태어 아웅다웅 피가 터지도록 모질게도 살아왔지 아니했던가. 그렇게 남들처럼 부하게도 아주 가난뱅이처럼 살지는 아니 했지만 겨우 겨우 밥이나 굶지는 않고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그때 마다 주셔서 하루살이처럼 살았다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한량없는 은혜라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내가 아내와 바꿔 살았다면 골 백번 이혼하고 살았을 것이다. 용케도 그 놈의 삶의 인연과 부부의 끈이 하나님께서 마음 상하고 성질 날 때마다 참아서 살게 하시고 자식들 때문도 있겠지만 어리숙한 나이 어린 아내를 데리고 와서 모진 풍파 헤치고 따라 살아 온 아내의 착한 심덕 때문에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왔지 아니 했던가. 그래서 아내가 74세 노인이 돼서부터 척추협착증 수술이며 천신 등 종합병원 신세가 되고, 병들고 아픈 병치레를 도맡아 하는데도 옆에 있는 배후자라 늦게 서라도 사회복지사 2급을 공부하여 국가자격증을 따고 또다시 병간호를 위해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1달 가량 수업과 강의를 받아 첫 번째 합격을 했다는 보람을 갖고 늙고 병든 아내를 케어 하는데 조금이라도 빚진자의 보람을 느끼고 살아 가고 있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요. 이제는 사는 날 까지 아내를 위해 헌신하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소풍 가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풀어야 할 과제이자 들어야 할 수업이다. 그렇기 위해 나는 날마다 미리 20년 전 부터 체력을 단련하기위해 가까운 헬스장에 가서 30분가량 러닝 하고 근육운동을 하고 있다. 벤치 60kg를 드는 것 보고 젊은 50십대 헬스장 운동하는 동료들이 놀랐을 정도로 말한다. “어르신 그만한 무게 들면 너무 많이 드는 것 아닙니까?”라고 늙은 나이에 장사라고 과찬을 한다 마는 나는 시니어 바디 대회를 나가기 위해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아내의 돌보미 케어를 위해 하루 같이 생활하며 밥짓고 설거지는 기본이고 실력이고 청소, 빨래 등 요양보호사가 하는 가정방문 요양 훈련은 모두 내가 할 수 있도록 실습 훈련을 받았다. 이 일이 매일 반복하며 4급 요양 체크를 하는 것이 하루 내 사명이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라고 느껴진다. 이렇게 하기위해 일찍이 체력만은 단련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계획이 나로 하여금 준비해 두시고 사용하도록 예비해 두셨다. “네 놈은 이렇게 해서라도 나이 어린 아내 데려다가 오십평생 고생만 짠득 시켜 먹인 죄를 이것으로 되갚아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아내를 위해 매일 나는 죽노라 노력한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본 교회에도 출석하면서도 2부 예배는 집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에 출석하면서 조금씩 나눠 헌금을 하는 보람도 느끼며 남은 여생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 역시 감사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특별히 한국교회와 부산 교계 기관 단체 여러 교회들 목사, 장로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이렇게 살아 온 삶을 연명해 온 것도 그때마다 필요한 축하 광고이며 기관 단체들이 보내 준 일반 광고료로 생활을 연명하였다고 장담하며 너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일평생 근 60년 가까이 교계 언론계 기자로 생활해 오면서 감사하며 살아 왔다. 마음의 빚 청산을 갚을 길이 없어 어찌해야 하는지. 그러나 늘 글을 언제까지 쓸지는 모르나 교회와 목회자들과 여러 교계 기관 특히 고신대학교와 고신대 복음병원, 동서대학교, 부산장신대학교, 특히 본보 이사장 강봉식 장로와 그의 사모 박 권사. 그 외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호산나교회와 동서대 대학교회, 서울 명성교회, 부천 참빛교회. 부산영락교회(윤성진목사)와 새에덴교회, 서울 영락교회(김운성 목사), 포항중앙교회(서임중 원로목사, 손병렬 담임목사), 21세기포럼 직전 회장이신 홍순모 장로, 백양로교회, 땅끝교회, 거제 고현교회 멀리는 나의 동료이자 친구 필리핀 두마게티에서 선교하는 이문선 이사장. 역대 본보 초대 이사장 박선제 목사. 그리고 온천제일교회 정동만 장로, 남부산교회 원로이신 김상권 장로, 부이사장 이송학 장로 (부산영락교회 원로이자 이약국)와 여러 이사님들. 그 외 경북 대구, 거제, 창원, 마산, 양산, 김해 등에서 활동하시는 지사장들 여러 독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송년과 더불어 지상으로 감사의 인사를 한국기독신문사를 대표하여 정중히 고개 숙인채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문사를 위해 불철주야로 기사로 활동한 여러관계 직원과 편집하여 온 김희정 대표와 인쇄 매체관계자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우리 신문 인터넷 독자와 인연으로 관계하고 있는 부산 교계 청십자신협(이대길 이사장), 고신 교단 고려학원 이사장과 여러 이사, 고신교단 총회 산하 관계자들과 부기총, 부교총, 부산자유기독연합회 대표회장 박선제 목사와 여러 임원들,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신세와 은덕을 입고 살아 왔다. 너무 너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 인사가 제 인생애 마직막이 될 것 같아 2023년 한 해가 가기 전 뒷 자락에서 붉게 물든 저녁 노을처럼 어느 때 조용히 살아질지 몰라서 이렇게나마 지면으로 마지막 인사를 올리게 됨을 널리 이해와 양해를 먼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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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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