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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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교단장 부활절 메시지
    교회의 심장 뛰게 하는 예수 부활! 우리 구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복음의 중심입니다. 신앙고백의 요체입니다. 지상 모든 교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강력하고 유일무이한 메시지입니다. 새생명의 시작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우리 구주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맞이해야 합니까? 1.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송하며 환호하며 감격합시다. 메마르고 혼탁한 세대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모든 무질서와 어두움을 몰아내고 기쁨과 감격에 젖어 살도록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2. 부활하신 주님께 자원하여 순종합시다. 무릇 성도와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예수님 사랑이 일상의 순종으로 열매를 맺읍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3. 부활의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동역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4. 부활의 주님을 힘있게 전파합시다. 지상 교회가 세상에 외쳐야 할 복음의 중심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신약교회가 출발할 때 베드로가 외친 복음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고, 최종의 메시지는 당연히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상교회의 소망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강하고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롬 15:12) 5. 부활의 주님과 함께 일어나 승리합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목회자님들, 선교사님, 성도님 여러분!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며 가정과 교회와 우리나라와 선교지의 미래를 열어갑시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합시다. 마라나타.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주님과 교회를 위한 헌신과 수고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하늘 상급이 있음을 확신하며 초지일관 전진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7~58) 교회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일어나라! 성도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일어나라! 할렐루야! 아멘! 2024년 3월 26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 "부활 주님의 능력으로 나와 사회 치유 되길"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4~5)" 길었던 겨울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계절에 사망과 어둠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이 아침,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는 모든 노회와 교회, 온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추운 겨울동안 죽은 것 같았지만 숨죽이고 기다렸던 새싹들이 때가 이르러 푸른 잎을 펼치는 것처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늘의 소망과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2024년 부활절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많은 시련과 상처를 입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들어했으며, 자유주의, 세속주의, 인본주의와 이단사이비 단체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여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가정의 불화를 가져오거나 이웃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나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 치유의 물결은 우리와 가정과 교회를 넘어서, 사회와 온 세계와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흘러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2024년 봄노회로 모이시는 모든 노회들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산재한 안건들이 잘 처리되고, 노회 산하 모든 지교회들의 문제는 해결되고, 아픔은 치유되고 회복되어 다시 한 번 부흥의 꿈을 꾸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전쟁과 재난으로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까이는 아픔과 고통 속에 도움을 기다리는 이웃들에게도 치유의 강물이 흘러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물이 새롭게 소생하는 이 계절에 총회와 69개 노회, 9476개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 위에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4년 3월 3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의식 목사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도 세상은 여전히 국내외적인 문제들로 난리와 난리 소문으로 가득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투는 이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4.10 총선을 앞두고 정치색에 따른 대립과 혼란이 날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의대증원 추진을 이유로 의사들도 파업에 나섬으로써 언제 의료대란이 일어날지 모를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주님이 주신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2024년 부활절을 맞아 하나님의 참된 평화와 은혜가 세상 가운데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부활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며, 죄와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킨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도 작용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또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제공합니다. 부활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우리 영혼의 확고한 닻입니다. 부활절의 이 깊은 의미를 마음에 품고, 부활하신 주님의 빛 안에서 그분이 약속하신 소망을 굳게 붙잡읍시다.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용서, 능력, 그리고 희망을 실천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소망 없는 세상에 참된 소망을 전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죽음도 두렵지 않으니 오직 승리만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가득 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적이며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겨낼 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있는 생명의 능력으로 자기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셔서 자기를 따라 부활의 둘째, 셋째 열매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그 안에 천국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 안에 천국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어떤 것도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승리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엄중히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부여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이 부활의 소식은 바로 나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증거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제 모든 성결교회 교인들은 십자가 고난의 정신과 부활의 믿음으로 다시 무장되어야 합니다. ‘한 성도, 한 영혼 주께로’라는 제117년차 총회의 표어를 가슴에 품고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사회적 양극화와 불의한 현실 속에서 고난 받는 자들과 자연 재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 전쟁의 공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들처럼 그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합시다. 사랑하는 성결가족 여러분,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장 위에, 모든 성결교회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년 부활절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17년차 총회장 임석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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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코로나 이후 3040세대 신앙 약화 심해
    목회데이터연구소는 고신총회교육원과 함께 3040 개신교인 신앙의식과 생활 실태 조사를 진행하여 ‘한국교회 3040세대 트렌드’를 발간했다. ‘한국교회 트렌드 2024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가 향후 목회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세대는 바로 3040세대이다. 이들이 중요한 이유는 고령화 시대에 교회에서 허리 역할을 맡고 있으나 직장생활과 가사/육아에 지쳐 신앙 약화가 두드러지며 이러한 영적 침체는 곧 그들의 자녀인 다음세대까지 그 파장이 미치기 때문이다. 주요 결과를 살펴보면, 3040 개신교인의 삶의 만족도는 전 연령대 중 가장 낮았으며, 코로나를 지나면서 신앙 약화도 심하게 나타나 현장예배를 이탈하는 비율이 32%로 나타났다. 하지만 교회 이탈자 5명 중 3명(58%)는 다시 교회 복귀를 희망하고 있어 이들을 다시 유입하고 더 이상의 이탈을 막기 위한 교회의 노력과 역할이 필요해 보인다. 코로나 이후 신앙 변화, 3040세대의 신앙 약화 심해 • 이번에는 코로나 이전 대비 신앙 수준 변화를 살펴보았다. 대체로 전 연령대에서 코로나 이전에 비해 ‘신앙 약화’가 ‘신앙 강화’ 응답보다 많은 가운데, ‘코로나 이전보다 신앙 약화’ 응답이 전 세대 중 3040세대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3040세대 개신교인 3명 중 1명이 코로나 이전보다 신앙 수준이 떨어진 셈이다. 출석교회 만족도, 3040세대가 타 연령대보다 상대적으로 낮아 • 현재 출석 교회에 얼마나 만족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3040세대가 출석 교회에 만족(매우+약간)하는 비율은 59%로 다른 세대에 비해 가장 낮게 나타났다. 3040세대 3명 중 1명, 코로나 이후 현장예배 이탈 • 3040세대 개신교인을 대상으로 코로나 이후 현장예배 여부를 물은 결과, ‘현재 현장예배를 드리고 있다’ 68%, ‘온라인 예배로 이동’이 18%, ‘가나안 성도로 이동’ 14% 순으로 나타났다. 현장예배 이탈자는 모두 32%로 3명 중 1명에 달했다. 코로나 이후 3040 교회 이탈자, ‘다시 교회로 돌아가고 싶다’ 58% • 이렇게 현장예배를 이탈한 교인의 복귀 가능성은 어떠할까? 코로나 이후 교회를 이탈한 30~40대를 대상으로 교회에 다시 복귀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절반 이상인 58%가 ‘다시 교회로 돌아가고 싶다’고 응답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이들을 교회로 재유입 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권유와 함께 신앙적 필요를 채워줄 소그룹, 프로그램 마련이 절실해 보인다. 3040세대, “우리를 위해 교회에서 모임을 만들어 달라” • 앞서 직장/사회생활과 가사/육아는 3040세대의 신앙에 일정 부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3040세대는 그들 연령대의 교회 내 모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먼저 교회에 해당 모임이 없는 대상자에게 ‘3040세대를 위한 모임’과 ‘3040세대 부부를 위한 모임’의 참여 의향을 물어본 결과 각각 59%, 55%가 있다고 응답해 비교적 높은 수용도를 보였다. • 3040 관련 모임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직장인을 위한 모임’은 직장인의 70%가, ‘부부 및 육아를 위한 모임’은 기혼자의 80%가 필요하다고 응답해 같은 처지의 어려움을 함께 공감하려는 의지가 높았다. 또한 자녀가 있는 기혼자는 교회 내 탁아 역할 부서에 대해 대다수(86%)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전체적으로 자신들을 위해 교회 내 모임을 만들어달라는 목소리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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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 “복음에 기반한 윤리의 열매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부산기독교윤리실천운동 대표로 섬기고 계시는데, 그동안 소감이 어떠신지요? A. 중요한 시기에 중책을 맡아 거룩한 부담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는 사람인데 기독교윤리를 제대로 구현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기에 엎드릴 일이 많다 여기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른 믿음과 온전한 신앙생활이라는 가치에 대해 반대하실 분들은 안계실테니 교계의 많은 분들이 두루두루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Q. 부산기윤실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단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부산기윤실은 1990년도에 서울기윤실과 협의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부산에서 활동하던 예수시대 동인들이 뜻을 모아 출범하였습니다. 80년대부터 한국교회가 그 숫자와 규모가 급증하면서 세속사회의 윤리실종에 동화되어가는 위기감에서 출발되었습니다. 개혁교회의 복음 열매가 다양하게 발현되어야 하는데, 그중 복음에 기반한 윤리의 열매여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교회병행체인 기윤실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습니다. Q. 예전에는 다양한 세미나, 포럼 등을 개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활동들을 해오셨습니까? A. 3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진 부산 기윤실의 사역을 정리해 본다면 초기에는 문화대응전략에 집중했었습니다. 청소년 유해환경 제거, 해외 이주 노동 이주자 의료지원, 중기에는 한국사회외 기독교 사회의 분열이 이념 논쟁으로 발화되면서 혼돈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십여년간은 크게 네개의 분야와 영역에 집중해 왔습니다. 첫째는 해외 이주민을 위한 상호문화, 둘째는 남북한의 화해와 교류, 북한이해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살피는 환경과 에너지문제, 마지막으로는 목회자의 공적책임영역으로 세금, 정직성, 젠더이해, 세습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주로 포럼과 세미나에 집중했던 이유는 인식개선이 올바로 되어져야 그 다음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에서 그렇게 해왔던 바입니다. Q. 앞으로 어떤 계획들이 있으십니까? 특히 올해 준비 중인 사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이전에 해오던 일들을 계승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위원들과 협의하여 진행해 나가겠습니다만, 2024년을 기점으로 대 전환기에 직면했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출산(생) 문제, 세계적인 양극화 위기, 신냉전 기류로 인해 고조되는 전쟁위기,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 칭하는 인공지능의 약진으로 일자리 상실과 인성파괴의 위기로 공동체성이 급격하게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혹자는 신 러다이트 운동(컴퓨터 메인칩 제거와 파괴)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교회가 이를 위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여 전달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접근이 시급합니다. 하여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집합지성 활성화를 위해 애써야 하겠습니다. Q. 부산기윤실에 동참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A. 부산기윤실은 자체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목표나 수단을 강구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부산기윤실은 “우리 모두가 기윤실이다”라는 생각을 장착한 그리스도인들이 확산되기를 위하여 일합니다. 기윤실은 전국기관입니다. 서울 기윤실을 필두로 대도시들에서 활동합니다. 전체 기윤실의 방향이나 실천 목표는 서울과 지방 기윤실이 상호간 영향력을 주고 받으면서 지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과 카톡을 이용하여 소식과 정보를 나누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의 협력을 도모하기 위하여 인스타그램도 활용할 계획입니다.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홈페이지 기윤실 또는 부산 기윤실을 클릭하시면 접근할 수 있습니다. Q.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A. 기독교윤리의 핵심가치 중의 하나는 조화와 균형이라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바른 이론(orthodoxy), 바른 실천(orthopraxy), 바른 감성(prthopathy)을 아우르는 교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도로서는 판단의 가치와 기준을 항상 예수께 두어서 고전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예수시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를 끊임없이 묻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바람에 있다면, 우리 모두가 개혁의 정신 곧 잘못된 것을 고치고 본질로 회귀하는 아비투스(abitus of ad pontes)를 가지고, 또한 불의에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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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서임중칼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도 가까워 온다. 나라 안팎은 최근 들어 더욱 어둠이 짙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무엇보다 빛으로 충만해야 할 종교계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안방에 전달되는 정치권 소식에서는 밝은 내용을 접할 수가 없다. 백화점이든 재래시장이든 경제상황도 여전히 시린 겨울 소리를 내고 있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봄을 맞아 펴는 기지개를 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에 잡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두움이 깊어진 것 같지만 기어코 어두움이 빛으로 전환되는 부활의 아침은 오고 있다.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주간은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의 시간이다. 동시에 부활의 아침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은총을 체득하는 깊은 영성의 크로노스다. 부활신앙이란 부활절 중심의 몇 날 동안 하는 축하가 아니다. 오히려 1년 365일을 부활의 은총을 연주하는 삶이 곧 부활신앙이다. 바로 세상에 살면서 빛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활의 은총을 입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다. 빛은 비췸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사명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생명이며 빛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차이점을 보면 소금은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극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며,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한복음 9:5절).” 여기서 ‘세상’에 해당되는 Cosmo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바올람’이다. 원래 이 단어는 ‘영원’ ‘불변’ 등의 의미를 나타냈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고통의 현세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고통의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구원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빛의 의미는 3가지로 조명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둘째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善을 의미한다. 셋째는 영적인 관계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빛의 반대인 어두움의 3가지 의미로는 첫째, 자연계와의 관계에서 생명이 상실된 죽음이다. 둘째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악을 의미한다. 셋째 영적인 관계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요1:5). 그것이 부활의 은총이고 부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세상에서 빛으로서 삶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의미를 역설하면서 삶으로 이를 증거한 사도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바로 이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 되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삶이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본질적인 의미가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Doing이 아니라 Being, 다시 말하면 무엇을 행하느냐 보다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되어 있지 못하면서 되려고 하는 것을 ‘행동주의적 기독교(behavioristic Christianity)’라 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21:23).” 하고 책망하신 일이 있었다. 전형적인 Being이 아닌 Doing의 사건이다. 카오스현상이 되어가는 교회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기쁨을 위해 많은 사람이 아파하는 일을 행하는 것을 정당하고 의롭다고 항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를 공동체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Being의 사람이 아닌, 나에게 모든 사람이 맞추어 주기를 바람하는 Doing의 사람이다. Being의 사람은 무엇이 되었다고 다르지 않다. 변함없이 항상 그대로 주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Doing의 사람은 무엇이 되고 나면 변한다. 어제와 동일하지 않다. 모든 기준이 자기가 되어 간다. 중요한 것은 “주여 나는 빛입니다.”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어두움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죄인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빛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 실제는 빛이 되어지는 것이며,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 순간 이미 그는 의인으로 칭함받는(Justification) 은총을 입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빛이 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이 아닌 자신을 높이려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참 빛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무엇이 되겠습니다.”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이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Doing이 아닌 Being의 의미를 깨달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부활 신앙인의 삶이다.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을 앙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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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성서연구] 부활이 주는 자유
    <“어이, 훌륭해!”촌장이 외쳤다.“많은 땅을 차지했군!”빠홈의 일꾼이 달려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빠홈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엎드러져 죽었다. 바시끼르인은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 일꾼은 삽을 들고 빠홈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빠홈은 정확하게 머리에서 다리까지 들어갈 수 있는 2미터가량의 무덤에 묻혔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단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중에 나오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빠홈은 작은 무덤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기쁨에 겨워 달리기 시작하던 그 날 아침에 이미 그의 영혼은 땅에 대한 욕심에 갇혀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족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라는 감옥에 갇혀 삽니다. 무덤은 죽은 후에만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욕망을 품는 그 순간 이미 갇혀버립니다. 그래서 무덤이라 불리는 좁은 욕망의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생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19세기에 살았던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 학자이며, 목사로서 당대 비견할 인물이 없을 정도의 성경학자요, 교회사가였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 『유대인 스케치』(1867년)가 있는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삶과 환경에 대해 1차 사료에 입각해 저술한 탁월한 저서입니다. 그는 팔레스틴 땅을 <그 땅>이라 부르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 땅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래된 히브리 문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날 랍비 요나단이 제자들과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위쪽에 달려 있던 농익은 열매가 갑자기 터지더니 달콤한 즙이 바닥으로 주르르 쏟아졌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암염소의 불대로 분 젖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두 줄기가 하나로 섞이는 것을 지켜 보던 랍비가 외쳤다.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약속이 말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유대인들이 얼마나 광적으로 팔레스틴 땅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쉐키나(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는 오직 팔레스틴에만 있다’‘팔레스틴의 공기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 ‘팔레스틴에 사는 것만으로도 모든 계명을 준수하는 것과 맞먹는다’‘팔레스틴에 사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이스라엘 땅에 묻힌 자는 제단 아래 묻힌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 그 땅에서는 평화와 행복의 웃음소리 대신 참혹한 전쟁 소식만 들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마스에 의해 무참하게 폭행당하고 살육되었는지 듣고 있습니다. 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벌써 여러 달이 지나도 멈출 기색 없이 확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떠나려던 성지 순례는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이미 그 땅은 성지가 아닙니다. 폭력과 전쟁의 땅으로 전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갇히셨습니다. 그랬기에 무덤은 예수님께 갇힌 곳이 아니라, 위대한 부활을 위한 전초기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후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 무덤은 예수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부활은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는 다락방에도 나타나셨고, 시공을 초월하는 완전한 자유를 보이셨습니다. 부활은 자유입니다. 얽매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자신도 부활할 것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선 욕망 때문에 갇히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갇힌다면 사랑 때문에 갇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바울 사도처럼, 선배들처럼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무덤 같은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 훨훨 날아야 합니다. 그 자유가 나중에는 육체의 부활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터전이야말로 성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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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시사칼럼] 부활을 둘러싼 부활들
    예나 지금이나 “부활”이란 종교와 학문과 일상을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나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올해에도 서구와 한국 기독교계에서 지키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쩍 “부활”이란 말이 각 영역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부활절 특수를 노리기라도 하듯 부활주일 이틀 전에는 「7인의 부활」이라는 드라마 방영이 시작됩니다(SBS). 덧붙인 제목들도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욕망의 진화인가 참회인가?” “악인들은 속죄할 수 있을까?” 세속적인 이 드라마가 과연 얼마만큼의 부활절 프리미엄을 누릴지 궁금합니다. 종교적인 작품이라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2021년 고(故)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부활」도 당시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개봉되어 상당한 반향을 불러온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2월에 개봉되었던 미국 영화 「예수 혁명」도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거치면서 엄청난 화제몰이와 흥행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부활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개념입니다. 썩 좋지 못한 관례나 전통이 부활한다면 반길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반대로 되살아난다면 좋을 제도나 현상이 부활한다면 많은 이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경제계로부터도 이번 부활주일을 둘러싸고 두 가지 부활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는 ‘K-방산의 부활’입니다. 1971년 북한은 화포에 탱크까지 생산하는데 한국은 소총 한 자루 만들 능력이 없는 나라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최근 한국 방위산업의 발전은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미국의 한 방송(CNN)은 “한국 방위산업이 이미 메이저리그(defense major league)에 진입했고 미국과 NATO를 대신해 ‘자유민주주의의 무기고’(arsenal of democracy)’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2022. 8. 17). 하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 탓으로 한국 방산업계가 위기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으나 최근 들어 다시 기술 혁신을 이루어낸 몇몇 업체의 분발로 ‘K-방산의 부활’을 꿈꾸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일본 발 경제계 뉴스도 하나 있습니다. 지난 달 일본 정부는 규슈의 양배추밭이었던 곳에 세워지는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업체) TSMC의 제2공장 건설에 6조 5천억을 투자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미 구마모토에 위치한 제1공장에도 4조 이상을 투자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본 정부는 한 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위해 다양한 업체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반도체 산업만큼 경쟁이 치열한 분야도 드문데,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는 그리 반가운 소식만은 아닐 테지요. 물론 협력하는 분야도 많고 또 저마다 경제가 살아나야 동아시아 및 세계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윈-윈(win-win) 게임이나 다름없는 살벌한 경제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본의 부활은 한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의 전쟁 같은 의료 대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진료권 부활”이라는 개념이 간혹 지면에 다시 등장하곤 합니다. 건강보험 통합과 의약분업 및 고속철도 도입으로 인한 전국 일일생활권화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있기 때문에 풀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의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기되어 왔던 대안의 하나인데 일정 지역을 벗어나서 진료를 받고자 하는 경우 추가 비용을 부담하게 함으로써 일부 지역을 향한 의료 과잉 수요를 줄여보고자 하는 방안입니다. 단순히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어서 복잡한 국면입니다만, 진료권의 부활이나 어떤 식으로든 국민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번 논쟁이 서로 간 협의와 조정으로 인해 조속한 시간 내에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기왕 정치 이야기를 꺼냈으니 지금 모든 화제의 초점이 되어 있는 선거에 관한 부활 소식을 하나 더 전합니다. 작년부터 ‘지구당의 부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해방 후 수십 년 존속했으나 불법적 정치자금의 온상으로 퇴출되어 버린 지구당 시스템의 부활을 현재 소위 ‘팬덤 정치’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둘러싸고 혹은 추후 과연 지구당은 부활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부활을 둘러싼 몇 가지 부활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부활은 무언가의 가치 추구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고, 이익이나 특수와 거리가 먼 그 자체로 진정한 목적이요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은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신앙적 논쟁은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는 죽음에서 부활이란 기쁨을 모든 이들에게 선사하는 좋은 가치를 지닌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앙숙과 원수를 오히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윈-윈(win-wim)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의 몸의 부활 소식은 질병이나 고통이나 우울이나 심지어 사망까지도 초월하게 만드는 가장 건강한 소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이란 모든 부패와 타락을 씻어 정결하게 만드는 지극히 순수한 정치적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부활을 둘러싼 부활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부활을 더욱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진짜 부활을 닮아 모든 영역에서도 참된 부활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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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영화] 부활 Risen
    부활 Risen, 2016 드라마 미국 107분 2016.03.17 개봉 감독 : 케빈 레이놀즈 주연 : 조셉 파인즈(클라비우스), 톰 펠튼(루시우스), 클리프 커티스(예슈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모체며 이로 인해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기초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에 새기고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 시대의 감상적 느낌과 달리, 십자가는 고대 사회, 특히 로마 사회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다. 주지하듯 십자가형은 로마가 살인이나 무엇보다 로마 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는 극심한 고통 및 수치를 주기 위해 행하던 방식이었다. 예수님만 십자가 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십자가 형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게르트 타이센 등의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후 6년 경 갈릴리의 세포리스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군이 일어났고, 시리아 주둔 로마군이 진격해 와서 반란군을 제압했고, 당시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 남자 약 2천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끔찍함이자 저주의 상징이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다른 죄수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의 백부장의 증언을 기록한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마가는 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한다. 로마 백부장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자신이 집행하던 그 어떤 죄수와도 달랐음을 그는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 위에서 자신과 타인을 저주하는 대신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하셨다. 그 남다름, 그 위대한 선언에 백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로마 사람들도 ‘신의 아들’을 숭배했다. 어떤 이는 황제 가이사가 죽지 않았다고 했고, 네로가 부활했다고 믿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 말했다. 만약 누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진정한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통치자로 증명된다. 이것이 로마 사회의 중요한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추적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제 삼자, 로마의 호민관 클라비우스를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시킨다. 클라비우스는 총독 빌라도의 요청에 따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잠재우라는 명령을 듣고 조사에 나선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부터 꼼꼼히 조사한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조사하고, 이어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비밀 공동체를 추적해 들어간다. 또한 클라우비스는 로마의 관료로써 골고다의 다른 시체들과 무덤들까지 정밀하게 조사한다. 혹시나 시신을 유기하고 거짓말 한 것이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함이다. 클라우비스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은 엉터리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클라우비스의 극적 체험을 다룬다. 제자들을 쫓던 클라우비스는 제자들 사이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라고,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놀란다.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그들의 사랑에 놀란다. 결국 클라비우스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진다. 그가 든 칼 뿐 아니라 그의 가치관 자체가 무장해제 된다. 로마의 정신 PAX ROMANA의 허상을 깨닫는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희생이요 사랑임을 체화해 간다. 그 과정은 영화를 통해 직접 보면 좋을 듯 하다. 영화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꼼꼼하게 추적해 보았느냐고 묻는다. 의심의 터널을 거쳐서 확신의 빛에 이르렀냐고 묻는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부활을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자기 확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부조리의 신앙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또한 영화 ‘부활’은 묻는다. 만약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당신은 클라우비스처럼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냐고, 클라우비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랑의 길로 갈 수 있냐고 묻는다. 로마의 장교였던 클라비우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삶이 극적으로 바뀐다. 사도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유대인을 세계 위에 세울 날 이루어질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 전에 누군가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분명히 죽었다고 여겼던 그 분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변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부활을 전하고 다녔던 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가 도리어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는 사도가 되었다. 오랜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 [죄와 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 자신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죄를 숨긴 채 살아가지만, 결국 하숙집 소녀 소냐가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엎드렸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고 내면에서 새로운 삶이 살아났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즉시 경찰서로 향하여 자수하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가는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났다. 살았으나 죽었던 삶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시베리아 행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라스콜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삶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 후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 역시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제목을 [부활]로 정한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소설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대역인 네흘류도프 공작은 복음서를 읽던 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접한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내면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형제다. 형제 자매가 된 자들에게 네흘류도프 공작은 땅을 상속한다. 분배한다. 왜냐면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면의 부활은 외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클라비우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도 바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고, 라스콜니코프처럼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되고, 네흘류도프처럼 형제애가 살아난다. 삶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가? 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나는 변화되었는가? 삶의 열매가 맺어지는가? 부활은 결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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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2024-03-25
  •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일...?
    고신총회는 최근 몇 년간 신대원 기수별로 부총회장을 당선시켜 왔다. 전임 총회장 권오헌 목사가 40회, 총회장 김홍석 목사가 41회, 부총회장 정태진 목사가 42회 출신이기 때문이다. 교단 안에서도 신대원 기수별로 부총회장을 맡자는 정서가 강하게 흐르고 있고, 대부분 동기회 안에서 출마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에 대해 교통정리 등을 통해 후보를 추천하고 있다. 그런데 금년 차례라고 할 수 있는 43회가 최근 ‘후보를 추천하지 않기로 했다’는 대외적 선언을 했다. 모 언론사 두 곳에 ‘43회 동기회는 금년 부총회장 후보를 추천하지 않기로 했다’와 ‘그러나 개인이 출마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는 광고를 게재했다. 지금까지 동기회가 동기 중에서 특정인을 추천하거나, 지지하는 모습 등은 비춰왔지만 ‘추천하지 않기로 했다’고 대외적으로 선언(광고)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다. 문제는 이 내용이 동기회 결의없이 진행되었다는 것. 43회 A 목사는 “이 내용은 동기회 결의없이, 회장이 독단적으로 광고를 한 내용이다. 동기들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아직 아무런 해명이나 사과가 없다.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B 목사도 “(43회)임원회 자체적인 결의가 있었는지 몰라도, 이런 사안은 전체 동기회의 결의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그런 결의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또한 동기회 회장의 선언과 달리 43회 동기회는 2년 전 ‘차기 부총회장 후보로 43기를 대표하여 정00 목사를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A 목사는 “2년 전 정00 목사를 우리 동기를 대표해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와서 회장의 독단적인 선언(광고)은 동기회를 무시하는 처사이고, 모종의 정치적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43회 동기회는 동기 48인의 이름으로 ‘임시총회 소집 요청’을 한 바 있다. 안건으로는 ‘기존의 임원 해임의 건’과 ‘차기 부총회장 후보로 43기를 대표하여 기존 결의대로 정00 목사를 추대하는데 대한 재확인 건’이다. 만약 현 임원회가 임시총회 소집을 불응할 경우, 비상총회를 열어 새로운 동기회 임원을 구성하겠다는 의지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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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신천지 이만희 건강 이상설 확산
    신천지 이만희 교주의 건강이상설이 붉어지고 있다. 지난 3월 9일 열린 전국 신천지 담임강사 대상 교육에서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이만희는 연설 도중 “그런데......”라고 말을 한 뒤 약 20초 정도 말을 잇지 못하거나, “누가복음 32장을 봐 줘야 돼”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속삭이는 말투로 “누가복음은 32장이 없습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쓴 글을 읽다가 “내가 쓴 게 아닌 것 같은데....”라며 자신이 쓰고 읽은 글을 잊어버리는 모습을 비추기도 했고, 천지창조를 설명하던 중 느닷없이 천지일보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이날 교주의 돌발 행동에 신천지 지파장들과 강사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비춰지는 등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 신천지 측은 이만희 교주의 실언이 계속 이어지자 온라인 실시간 방송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이단전문가들은 “고령으로 인한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장면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며 “최근 신천지 내부에서 이만희 사후를 대비하는 모습들이 포착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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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2024년 부활절과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와의 48년 목회 여정
    2024년 사순절은 2월 14일에 시작하여 3월 31일이 주일이자 부활절이다. 40일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일, 고난의 행군이고 사순절을 보내고 종려주일이 끝난 바로 하루 3월 마지막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을 기념하는 날이다. 10년이 4번씩이나 거듭해 오던 목회 48년이란 한국교회 그리 흔치 않는 긴 세월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하는 것이 보기드문 역사의 현장에서 윤성진 목사(부산영락교회 담임)를 우연히 만났다. 3월 14일 오전 윤성진 목사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필자 역시 교계 신문에 몸담고 있은지 근 50년 전 젊은 윤 전도사를 만난 인연이 이어져 오늘까지 지켜왔다. 부산영락교회 전도사로 초임 부임하여 부산고등공민학교와 주일 교회학교 학생들을 섬겨 왔다. 한 교회에서 이런 오랜 세월동안 부임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 퍽 드문 일이다. 위임목사로 32년, 현재에도 목회 2~3년 마지막 길을 걷고 있다. 부산영락교회 하면 6.25 전쟁으로 인해 남하한 한경직 목사님과 30여명의 피난민 성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이다. 72년이 된 오늘에 부산영락교회는 코로나 감염 사태 전에는 성도 2500여명이 출석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교회였다. 교회당 수용 인원은 불과 1000명 수준 공간이다. 이 교회는 고현봉 목사 총회장 취임 1년 전에 새 성전을 건립한 1000여평 공간에 부산 사법부가 중심이었던 서구 부민동 중간에 위치한 교회이다. 그 당시 두 개의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어 두 십자가를 둘러싸고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항간의 루머를 말해주듯이 한때는 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고 목사를 비롯하여 윤성진 목사도 두 번씩이나 목사 징계를 당한 예장통합측 교회 가운데 경남 마산 문창교회 다음가는 교회분쟁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교회이다. 결국엔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백석교단으로 교단을 가입했다. 지금도 부산 안에 부민동 소재 부산영락교회와 하단동 소재 부산영락교회 같은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들 두 교회는 한 뿌리로서 서로 아픔을 치유하는 화해로 모든 문제를 풀고 서로를 위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들이 많이 배출된 특별한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현재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는 “이제 불과 은퇴 2~3년 남겨두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은퇴 마무리를 짓고 물러날까 고민하고 있다”고 귀뜸 해 주었다. 가장 아쉬었던 것은 교회 옆 건물 부산은행 자리를 아깝게 구덕 신협에서 경매를 낙찰받아 사지 못하였고 바로 길 건너 골든오피스텔 건물 20층 자리도 사실상 통일교에 넘어간 상태라 이것마저 놓쳐 현 위치에서 지하 주차장과 10층 규모의 새성전을 신축하는 방안을 놓고 기도하며 당회와 숙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윤성진 목사는 일찍이 거제 하청이 고향으로 어릴 때부터 하청교회에 출석하면서 부산장신대학교 통합교단에서 줄곧 학업을 연마했던 골통 통합맨이다. 지금도 적(교단)은 백석이지만 백석교단 수뇌부에서 교단 부총회장 출마 권유도 수없이 받아 왔지만 정중히 거절한채 오로지 교회 부흥에 올인하고 있다. 부산교계에 여러 연합체 대표회장 권유도 모두 사양하고 여러 교회 집회나 부흥 사경회 강사 초청도 모두 거절하고는 오로지 교회 한 곳에만 목회 전념하는 보기 드문 순수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장로들이나 집사, 권사와 일반 성도들에게는 겸손하고 친절하며 정이 넘치는 목회자로 소문난 70대 목회자다. 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장신대학원을 거쳐 서울 소망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미국으로 학업을 위해 유학 중이고 딸도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제자들을 양육하고 있다. 서울 소망교회에서 유학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 제공 약속마저 사양하고 박사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항간에 윤목사의 뒤를 잇는 세습 운운하는 소문에 윤 목사는 “그런 기우는 내가 살아있는 한 일체 없을 것이다”고 반박했다. 일찍이 양산 지역에 큰 대지를 구입하여 양산지역 복음화에 주력하기도 했다. 양산성전도 날로 부흥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현 성전을 놓고 결정 여부에 주력하면서 조용히 은퇴 마무리를 지어 소망이 실현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윤 목사는 48년 인연이었던 필자와의 대화에 부활의 꽂망울을 피울 준비에 부담없는 담소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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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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