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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립 40주년 ‘늘노래’ 이제 다음세대 디딤돌로
    한국 최초 전업 음악전도 보컬 그룹으로 시작한 늘노래가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문화전도를 위해 헌신해온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장 유의신 목사(믿음찬교회)에게 지난 40년과 문화전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Q.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이하 늘노래) 창립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늘노래 역사와 현재의 사역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는 사실 음악으로 전도하는 순회전도팀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면서 시작된 사역입니다. 음악처럼 다양한 문화장르로 전도해야 한다는 연구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늘노래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음악전도 사역은 1976년 11월이었습니다. 사실 그전에 제가 1973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이사벨여고(그 당시) 교사로 복귀하면서 평신도 청년운동 ‘목견들’(1974)이라는 제자훈련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 이사벨복음학원에서 무궁화관을 개관하면서 관장직을 맡았는데, 그것이 또 다른 사역의 시작이 됐습니다. 바로 ‘늘노래음악전도단’이었습니다. 제가 1971년 도미하기 전에 평신도 청소년사역자로 양정복음교회(현 양정중앙교회)에 섬길 때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노문환 형제를 만나면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을 다녀오고 노문환 형제는 군복무를 한 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재회하면서 제가 인도하고 있는 목견운동에 가담하게 됐고, 자연히 같이 일하던 동료 이광무 형제와 서영식 형제를 인도했습니다. 말씀 가운데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으로 전도하는 전업팀(full time)으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창단된 후 1978년 동래중앙교회(당시 신동혁 목사)와 동광교회(당시 김정광 목사) 그리고 부산진시장선교회 중심으로 부산노래선교회라는 후원단체를 창립하면서 첫 단원들의 헌신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늘노래’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고 후원회와 선교단, 이원화된 조직으로 이어가면서 보내는 자들과 가는 자들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단체가 됐습니다. 1987년 5월에는 공식적으로 한 달 동안 69회의 집회를 기록하게 될 정도로 사역이 왕성해졌습니다. 1995년 이사장 신동혁 목사님의 소천과 갑작스런 노문환 단장의 사임 후 고광삼 단장 중심으로 늘노래 I, 늘노래 II, 김영국 단장(2000-2003)팀 그리고 늘노래뉴젠(NewGen) 김일영 단장(2004-2007)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노래의 정신과 그 사역을 위해 지속적으로 후원하시는 손길들이 있어 기도하는 중에 음악으로 전도해온 노하우를 나누고 2008년 다양한 문화장르로 전도하는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를 개소하면서 새로운 사역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34차에 걸쳐 격월로 문화전도 아카데미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1986년부터 정기간행물로 등록해 월보로 발행하는 소식지 ‘작은터 큰나라’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Q. 기독교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부산에서 문화사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과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A. 먼저 불모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산은 제법 괜찮은 문화 도시입니다. 사실 한국전쟁으로 팔도의 문화와 일본 문화가 비빔밥처럼 한데 어우러져서 지금의 부산문화가 되었습니다. 어느 도시도 가지지 못하는 특유의 문화입니다. 가장 확실한 예로 ‘늘노래’가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기독문화라는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보수적인 분위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노래의 음악형태가 기존 교회문화와 일부 충돌이 있었기는 하지만 늘노래 음악은 교회의 예배음악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전도를 위한 음악을 하는 팀이기에 차별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역을 거절 당하기도하고 교회의 후원과 지지를 받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노래 사역은 한국교회를 위해 사심 없이 사역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체 부동산이나 동산을 가지거나 단체 자체를 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단원들이 흩어질 때입니다. 평생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자고 뭉쳤지만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개인 사역자로 흩어질 때는 마음으로 많이 아플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흩어져 더 큰 사역들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 됐습니다. 오히려 흩어지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경기 침체와 불황으로 문화계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문화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시는지, 또 대안을 제시해주신다면. A. 문화이야기만 나오면 용어부터 신경이 쓰입니다. 기독문화냐 기독교문화냐. 쉽게 말하면 기독인 삶으로 드러내는 문화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산하는 문화라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문화라는 용어로 통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삶이 종교라는 틀에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예수님을 교주로 하는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다른 종교와 경쟁하며 교세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 비교하며 우월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문화라고 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지기가 쉬워집니다. 말하자면 경제에 함몰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현실가운데 전반적인 사회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 현상 속에서 함몰되기 보다는 초연하게 문화에 기름부음을 받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하위개념입니다. 자본을 포기하고도 얼마든지 기독문화는 왕성할 수 있습니다. 기독문화는 자본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지배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포함하여 기독문화는 돈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택하는 순발력을 가지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Q. 교회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A. 기독문화의 뿌리는 기독인이라고 할 때 기독인이 속한 지역교회가 베이스캠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역교회에서 양육하고 세운 기독문화사역자들을 세상에 파송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해외선교사들을 지원하듯이 지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 경험으로 보면 문화사역자들이 교회 밖에서 자생한 것 같이 교회와의 연계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문화는 교회에서 만들어져서 세상에 내보내져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 가는 유기적 관계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를 통해 교회는 세상을 만나고 세상은 문화를 통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문화를 교회가 세워가야 하며 기독문화사역자는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긴밀한 생명력이 살아있으면 돕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공생(共生)관계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Q. 최근 청소년 사역 단체 대표의 성 스캔들 등 한국교회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연일 발생하면서,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기독교문화를 주로 소비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문화사역이 더 위축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학원복음화에 앞장서신 다음세대 사역자로서 지금 시급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기독문화도 사람이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최근 벌어지는 일말의 사건들은 이미 있어 왔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된다든지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바뀌거나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그대로 있는데 직무와 사명이 달라지는 것뿐이지요. 그러니까 본인도 그 점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높은 기준으로 그들을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 사역을 하는가입니다. 그동안 기독문화는 번영신학과 맞물려서 유명해지고 커지고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면 세칭 성공이라고 하는 잘못된 의식과 동기에 함몰돼 있습니다. 이 시대에 젊은이들은 예수님처럼 죽는 사람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하면 그 뒤를 따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 시대(마지막 때)에 더 험한 일을 겪게 되고 희귀하고 훼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가는 넒은 길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들 보다는 아무도 안 가려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결국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하는 원리는 지금도 유효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지상주의로 인기와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은 엄격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대로 예수 믿는 자라면 제대로 된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역자로 마지막에 평가 받게 될 것입니다. Q. 창립 40주년을 맞아 8월 1일부터 전도노래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전도노래 공모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최근 기독문화에서 사용하는 언어들 가운데 잘못 사용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찬양사역이라는 말입니다. 찬양은 찬양이지 사역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워십콘서트(worship concert)입니다. 예배를 공연하다니요. 웃기는 일입니다. 한 가지만 더 부언 한다면 예배음악과 생활음악과를 구분해야 합니다. 물론 찬송가 공회에서 출판한 찬송가에도 100% 예배음악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찬송가에 있는 곡은 예배에서 사용하고 그 외의 노래는 안 된다고 하는 분도 있더군요. 사실 늘노래는 생활음악(전도노래)을 해 왔습니다. 어떤 교회음악지도자는 우리나라 교회음악을 늘노래가 많이 망가뜨렸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교회가 분별을 못해서이지 늘노래 책임은 아니지요. 다시 말하지만 늘노래음악은 전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편곡하고 연주하고 프로그램과 설교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음악전도가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애절함이 있어서 이런 공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전도노래 공모 외 창립 40주년 기념행사가 있다면 소개해주십시오. A. 작년부터 부쩍 늘노래 노래에 관심을 보이며 그 당시 감동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아마도 인터넷과 SNS 등 연결되는 길이 많아져서 더 그런가봅니다. 자연히 늘노래 곡을 다시 듣고 싶어 하고 음원과 악보를 구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스스로 늘노래 키즈(Kids)라거나 늘노래 왕팬이라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작년에 이미 11월 7일(월)을 정하고 늘노래가 시작됐던 무궁화관에 예약했습니다. 이날 창단 멤버와 옛 단원들이 홈커밍으로 모이고 그때 그 노래를 목 놓아 부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선호하는 곡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날 홈커밍데이에서는 탑5곡들을 부르고 관객과 단원들이 무대와 객석 구분 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Q. 늘노래 향후 사역과 목사님의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늘노래가 음악을 통해 전도에 진력해왔기 때문에 다음세대에도 계속해서 음악전도팀이 전국에서 새롭게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이제는 교회가 전도팀을 만들어서 파송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문화장르에서 기독문화에 헌신하는 분들이 자신의 문화영역을 가지고 복음전하는 청춘이 많이 나서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런 분들을 위하여 코칭과 지원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봅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이번 기회에 다음세대에 좀 밟히자고 합니다. 디딤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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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탐방] 한국교회 위기, 신앙의 뿌리에서 답을 찾는 동래중앙교회
    이상규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776호)에서 “역사에 대한 무지는 단지 과거를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라며 “과거의 이해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말했다. 역사를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보존하면서 자녀들이 그것을 이어갈 수 있게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 동래중앙교회(정성훈 목사) 내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관장 안대영 장로)은 한국교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동래중앙교회 새 성전 ㆍ신앙의 전수, 한국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박물관2013년 동래중앙교회 예람비전센터 3층에 개관한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은 지난 해 부산광역시 제17호 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됐다. 박물관장 안대영 장로가 직접 수집하고 교인들이 기증한 고성서, 고찬송가, 잡지와 사진 등 한국교회 의미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성훈 목사는 박물관이 한국교회에 방향을 제시하고 다음세대에 신앙을 전수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장이라는 일방도로를 걸어왔다. 교회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사회적 책임에 소홀해졌고, 교회가 침체되면서 성장에 가려졌던 부정적인 측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결국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볼 수밖에 없다. 신앙의 뿌리, 신학의 뿌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이 뿌리를 찾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등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정성훈 목사 정 목사는 한국교회의 또 다른 위기의 요인으로 신앙의 전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라 지적하고 “염려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부모세대의 신앙이 아이들에게 전수되지 못하면서 아이들은 세상 문화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간다. 박물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론으로만 배웠던 어른들의 신앙이야기, 교회 이야기를 아이들이 직접 보고 들으면서 실감하게 된다. 신앙의 전수를 위해 한국교회가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박물관이 신앙의 전수를 위한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예람비전센터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에는 교파를 초월해 매주 전국의 3~4개의 교회가 방문하고 있다. 학생 수련회의 형식으로 박물관을 찾는다. 귀로만 듣는 집회에서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하고 경험하는 형태로 변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선조들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산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 내부 오는 8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유산 : 하늘의 말씀, 땅의 찬미’라는 주제의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찬송가학에 큰 공헌을 한 故 김이호 목사가 기증한 고찬송가, 전 세계 찬송가 등 100여 점이 전시된다. “양피지에 쓴 13세기 그레고리안챈트 찬송가를 비롯해서 한국교회 초기 찬송가 등 찬송가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성경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음악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찬송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번 특별전시 개막일인 8일 ‘하늘로부터 내려온 말씀, 땅에서 올라가는 찬미’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진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은 8월 8일 오후 2시에 열리며 ‘동래중앙교회 60주년과 김이호 목사 연구의 교회사적 의의’에 대해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가, ‘김이호 목사의 삶과 사역’에 대해 이상규 교수(고신대)가, ‘김이호 목사 소장품의 찬송가적 의의’에 대해 문성모 목사(전 서울장신대 총장)가 각각 발제한다. ▲ 새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모습 ㆍ말씀과 겸손이 있는 새 예배당동래중앙교회는 지난 4월 3일에 헌당감사예배를 가졌다. 새롭게 건축한 예배당은 말씀과 겸손이라는 콘셉트로 지어졌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전과 위도상으로 일치하는 동래중앙교회는 본당 전체가 말씀이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이사야 2장 3절의 말씀을 주제로 디자인됐다. 신약과 구약의 의미로 앞에 27개, 뒤편에 39개의 창문을 달고 본당의 이름을 예수살렘홀로 정했다. 또 교회 외관은 큰 십자가를 높이 올리고 압도적이고 웅장함으로 의연 중에 나타내는 과시함을 지양하고 겸손이라는 콘셉트로 소박하게 디자인했다. 십자가는 건물 꼭대기를 넘지 않고 가까이 와야 볼 수 있게 제작됐다. 그리고 교회 1층에 수공간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 15도 정도 기울어진 십자가를 세웠다. “교회가 배를 상징한다면 교회가 한 지역에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을 항해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물 이미지를 담은 수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울어진 십자가는 우리가 그것을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잃어버린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하고자 기울여 세우게 됐다” 교회 외관과 수공간에 세워진 나무십자가는 특별히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온 나무로 제작됐다. 보존처리로 4~5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나무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의 공격선에 사용됐던 것으로, 침략을 위한 도구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 새 성전 1층에 마련된 수공간 ㆍ교회의 본질을 찾아야 동래중앙교회는 새 성전을 헌당하면서 올해 4월부터 기독교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매주 목요일 저녁 강좌를 운영해왔다. 동래중앙교회 교인뿐 아니라 타교회 교인들도 참여했다. 정성훈 목사는 “한국교회 위기 속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해온 방법들은 교회 성장에 연결돼 교회의 정체성, 본질을 찾는데 큰 힘을 나타내지 못한다. 도덕성, 윤리성이 뒷받침되지 못해 기복신앙, 물질주의로 변했고, 그렇다보니 성장이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바탕이 확고해야 한다. 기독교인문학을 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바른 신앙에서 바른 신학이 나오고, 바른 신학에서 바른 생활이 나온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교회개혁은 근원으로 가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임이 필요하다. 신학자들은 현장에 없고 목회자들은 현장에 있지만 신학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다. 본질을 찾고 내실을 다지면서 이단의 활동을 막아야 한다. 성장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위기는 심화될 것이다. 이번을 시작으로 부산지역의 교회들에게도 이러한 운동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교회가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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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04
  • [탐방] 더디더라도 바른 길을 걷는 대양교회
    - 같은 자리 지키며 지역 복음화 위해 노력- 교회의 자랑은 ‘성도’- 개척부터 37년간 말씀과 기도로 목회 부산 온천천 옆으로 푸른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오가는 사람들의 땀을 닦아준다.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땀을 닦아주고, 그들의 눈물과 웃음에 귀 기울여주는 교회가 있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 위치한 대양교회(담임 김상석 목사)이다. 생각지 못한 교회 개척1980년 2월 10일 임병원 장로의 집 마루에 2가정이 둘러앉았다. 임병원 장로의 가족 8명과 김상석 목사의 가족 3명, 11명이 함께 앉아 개척예배를 가졌다. 이렇게 대양교회의 역사는 시작됐다. 임병원 장로는 당시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수정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김상석 목사에게 교회 개척을 권유했다. 1980년 2월 갓 졸업한 김상석 목사는 개척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느 신학생들처럼 졸업하고 부교역자로 사역할 생각이었지만, 임 장로의 권유로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비록 계획된 길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열심을 냈다. 이제 막 개척을 했기에 교회 사역이 바쁘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 동네를 다니며 전도했고, 기도원에 자주 찾아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당시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김상석 목사는 이사야 60장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삼았다. 이 말씀은 그의 평생 목회를 이끄는 비전이 됐고, 지금도 교회 성도들이 개업을 하거나 심방을 할 때면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을 전한다.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교회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준비되고 계획된 교회 개척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으로 믿고 매일 매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김상석 목사는 서울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2기 과정을 마치고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배운 제자훈련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어떻게 말씀을 가르칠지 고민하고 실천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운 성도들은 한 단계, 한 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 안에서 성장해갔다. 그런 성도들의 믿음은 헌신으로 이어졌고 교회 신앙생활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한 장소에 3번의 건축을 거치며40여 년 전만 해도 교회가 위치한 연산동이 이처럼 발전하지 못했다. 1982년 4월 교회당 신축 기공예배를 갖고 6월 입당예배를 가졌다. 당시 130평 대지 위에 67평 규모의 교회를 건축했다. 그리고 1993년 10월 다시 교회당 신축 기공예배를 갖고 새 성전을 건축했다. 이후 20여 년이 지난 2012년경 교회 리모델링 이야기가 나왔다. 20년간 한 번의 리모델링 없이 계속 사용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리모델링에 대한 제안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 성도들은 재정을 더 들여 이왕이면 새 성전을 건축하자고 제안했다. 이 안건이 여론화 돼 새 성전 건축에 90% 이상 성도들이 동의했고, 신축이 진행됐다. 김상석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사실 인간적인 마음에 심적 부담감과 자신감이 없었다. 젊었을 때라면 패기로 도전해 보겠지만, 나이도 들어 자신이 없었다”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 한국교회에서는 건축을 하면서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김 목사 역시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신축에 100% 모든 성도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김 목사는 “솔직히 건축하면서 교회를 빠져나간 성도들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재정도 힘들었다. 그러나 이상할 만큼 상황이 흘러갔다”고 말했다.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이 들어오고 인근 건물 지하에 마트로 운영되던 곳이 임시예배처소로 마련되는 등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건축하는 동안 후회할 때도 있었다던 김 목사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잘했다 싶다. 3년 뒤 은퇴할 때 빚 없이 후임자에게 교회를 물려주면 좋겠지만, 교회를 편하게 이용하는 성도들을 보니 행복하다”고 말했다. 편리하게 자주 교회를 찾는 성도들을 보며 아버지처럼 기뻐하는 김 목사였다. 취재차 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교회 1층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교회와 달리 담임목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어 의아해했더니 대부분이 교회 성도들이 아닌 지역 주민들이라고 했다. 교회 성도는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도 대양교회는 쉼터요, 자주 찾는 교제의 장소였다. 평안함을 추구하는 교회개척부터 37년간 한 목회자에게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교회의 자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상석 목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교회 성도들이라고 답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담임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따라와 주는 순수한 교인들”이라면서 교회 성도들을 자랑했다. 김 목사는 “다들 같은 말을 하지만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힘을 써도 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부족한 내가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교회가 여기까지 자라 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김상석 목사를 아는 지인들은 그의 온화한 성격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손꼽는다. 선후배간의 예의를 지키면서도 서로의 관계가 평안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고 한걸음 물러나 평안한 관계가 유지되길 바란다. 이런 그의 성품은 목회에서도 잘 녹아있다. “교회는 평안해야 유익하다. 교회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크게 성장해도 유익이 없다고 생각한다. 더디더라도, 비록 늦게 가더라도 평안하게 교회가 자라가야 한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대양교회 역시 뒤돌아보면 마찰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이런 김 목사의 목회철학이 지금의 대양교회를 이끈 것이나 다름없다. 더디지만 바른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는 대양교회. 이것이 대양교회의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 사랑의 바자회 ▲ 세례식 ▲ 실버대학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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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탐방] 다음세대에 투자하는 교회, 부산 성민교회
    ㆍ평안하고 든든히 서는 교회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 소재한 성민교회는 25년 전 광복교회에서 분리 개척한 교회로, 2000년 지금의 교회 건물을 세웠다. 교인들은 평안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왔고, 작년 원로목사로 추대된 양기수 목사도 교회의 화평을 위해 헌신해왔다. 홍융희 목사는 작년 11월 부임하면서 당회원들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교회가 5년 뒤, 10년 뒤 어떤 모습의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까”. 당회원들의 의견과 답변들을 모으자 ‘화평한 교회’라는 답이 나왔다. 홍 목사는 25년, 교회가 시작되면서 가진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교회의 청사진을 그렸다. 그렇게 올해 교회 표어를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행 9:31)’로 정했다. 홍융희 목사는 그동안 교회가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원로인 양기수 목사의 공헌이 컸다면서 양 목사의 목회 핵심이었던 성령사역, 기도중심사역, 선교사역이 지금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성민교회 부목사 2가정이 선교사로 파송받았고, 매년 단기선교로 인도네시아를 다녀오고 있다. 올해도 50여명의 성도들이 단기선교에 참여하겠다고 지원한 상태다. ㆍ말씀 중심, 변화되는 삶 ▲ 홍융희 목사 홍융희 목사의 목회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깊이 있게 알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양기수 목사의 핵심 사역을 이어가면서 말씀중심사역을 추가했다. 홍 목사는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주는 말씀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서 “‘좋은 말씀을 들었구나’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무엇이고, 왜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을 점검하는데 까지 이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민교회 셀 모임 교재는 홍융희 목사가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교재는 주일 설교 말씀으로 제작돼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대로의 삶의 실천을 고민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 말씀중심목회는 새벽기도를 활성화시켰다. 새벽기도를 ‘하루한장’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 1장부터 강해를 하고 있다. 성민교회의 새벽기도 ‘하루한장’의 특징은 매일 그날 새벽예배 설교를 녹음해서 홍융희 목사가 직접 유튜브에 올린다. 그리고 링크를 걸어 SNS를 통해 전교인에게 보내는 것이다. 홍 목사는 “새벽기도에 못 나오신 분들도 아침 7시면 그날 말씀을 듣게 된다. 출근길에, 아침식사를 하면서 듣는 성도들도 있다. 하루한장의 반응이 굉장히 좋다”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 성도가 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SNS가 익숙하지 않는 연로한 성도나 데이터 사용을 걱정하는 성도를 위해 USB로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새벽기도, 주일예배, 수요예배의 설교 말씀이 담긴 USB는 휴대폰, 컴퓨터, 차량 등에 꽂아 어디서나 말씀을 접할 수 있다. USB를 구입한 성도들은 대개 선물용 또는 전도용으로 사용하면서 호응을 얻고 있다. 또 ‘생명의 말씀’이라는 이름의 책자를 만들어 전도지로 사용하고 있다. 그달의 말씀을 작은 책자로 제작한 것이다. 먼저 성도들이 읽고 전도용으로 나누고 있다.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택시기사인 성도들은 손님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말씀중심의 또 다른 사역은 말씀묵상훈련학교다. A, B, C, D형 큐티로 단순히 말씀을 읽고 느낀 점만 적는 큐티가 아니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제적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적용, 실천하도록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말씀묵상훈련학교를 이수하면 기도훈련학교로 이어진다. 말씀의 감동을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지, 하나님과의 원활한 대화, 소통이 되도록 훈련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학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것인지 훈련하는 전도훈련학교를 마치게 된다. 성민교회의 항존직은 이 과정을 꼭 거치게 된다. 또 하나의 과정은 교회를 처음 온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으로’라는 과정을 거친다. 일명 ‘하사품’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고 마음껏 배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홍융희 목사는 성민교회의 장점으로 중직자들의 높은 헌신도를 꼽았다. “원로, 은퇴, 시무 장로님 부부가 새벽기도에 거의 개근을 한다. 하사품과 말씀중심훈련학교에도 장로님들이 참여하고 계신다. 양기수 목사님이 하신 제자대학을 수료하신 분들도 다시금 참여하셔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 말씀중심의 삶을 위해 말씀묵상훈련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ㆍ교회학교를 살리는 ‘분홍목사’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교회학교는 점점 줄고 있는 상황이다. 홍융희 목사의 지난 20여년 간의 사역의 중심은 어린이사역이었다. 어린이예배 자료들을 직접 제작 보급하면서 다음세대를 살리는 일에 헌신해 왔다. 성민교회 본당 입구에는 ‘성민교회 다음세대’라는 커다란 게시판이 있다. 0세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교회학교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 장래희망이 붙어있다. 교인들이 본당으로 들어올 때마다 다음세대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성민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어른 예배시간과 교회학교 예배시간이 겹치지 않는다. 시간대를 완전히 분리시켜 교사 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교회학교를 찾아가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교회학교의 모든 행사를 어른 예배시간에 광고를 한다. 홍 목사는 “매년 교회 청년, 청소년들이 감천문화마을에 연탄배달을 한다. 광고시간에 아이들이 좋은 일을 하는데 지원해 달라고 말했다. 많은 분들이 후원해 주셨다. 아이들은 힘이 생겼고,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계획하고 무엇인가 해내고 있다는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됐다. 그러다보니 교회학교 교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서 성민교회 전 교인 4분의 1이 교사라고 덧붙였다. 홍융희 목사의 별명은 ‘분홍목사’다. 교회학교에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면 꼭 분홍셔츠에 분홍자켓, 붉은 색 넥타이를 맨다. 분홍목사는 ‘어린이를 사랑하는 분, 그 분을 전하는 홍 목사’라는 의미다. 아이들은 분홍목사를 쉽게 각인했고, 더 친근하게 느끼게 했다. 홍 목사는 다음 삼대예배 때는 검정 가운이 아니라 분홍색 자켓을 입고 강단에 설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 아이들은 귀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홍 목사의 별명은 '분홍목사'다. ㆍ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더 좋은 교회로 또 다른 특징으로 1년에 5번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본당에서 ‘삼대예배’를 가진다.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그 가운데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자는 의미에서다. 홍 목사가 다음세대에 집중하는 모습에 성도들도 함께 마음을 모으고 있다. “다음세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교회다. 우리 교회는 10년 후가 더 좋을 교회, 20년 후, 30년 후가 더 좋을 교회로 함께 뜻을 모으고 있다. 청년, 청소년, 어린이에게 투자하는 교회다. 온 성도들이 마음을 합하고 있다. 삼대예배를 통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고 더 나은 미래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꿈을 가지는 예배로 준비하고 있다. 1년에 5번이지만 온 교인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하는 기회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융희 목사는 장차 한국교회의 기반이 되는 교회, 한국교회를 키워내는 교회가 꿈이라고 말했다. 홍 목사는 “부산의 지역적인 특색은 사람을 키워서 수도권이나 영호남 등 타지역으로 보내는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다음세대 사역의 특징은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자라서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은 청년이, 청년은 군대, 대학, 회사, 유학 등 이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내 교회로 붙잡아 놓는 사역을 많이 해왔다면, 앞으로는 보내는 사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한국교회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면서 “그동안도 우리교회가 그런 역할을 해왔다. 교회에서 많은 교역자들이 나왔고, 여러 교회 중직자들이 나왔다. 그런 것을 확대해서 이 지역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씀으로 훈련된 사람들로 된, 여러 지역들을 살리는 차세대 신앙의 리더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우리교회 출신 청년들 중 타지역이나 해외에 나가 있는 청년들에게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청년들이 아직도 교회가 자신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좋아했다. 그들의 신앙의 뿌리이자 믿음의 고향이 있다는 것, 우리 교회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지지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그들도 힘을 얻었다. 꼭 머물러 있게 해서 우리 사람으로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마음껏 나아갈 수 있도록 믿음의 터전의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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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탐방] (재)21세기포럼 비전100인위원회
    ▲ 제4회 청소년 청년 비전 컨테스트 (재)21세기포럼(이사장 강판녕 장로) 산하 비전100인위원회는 교육, 의료, 법률, 사업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40~50대 젊은 크리스천 기독인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에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매년 대회를 통해 다음세대에 비전을 심어주고 있다. 비전100인위원회 4대 회장을 맡고 있는 윤여준 변호사(양정중앙교회 안수집사)를 만나 비전컨테스트를 비롯한 여러 활동에 대해 들었다. 5회째를 맞은 ‘청소년청년 비전 컨테스트’(재)21세기포럼 비전100인위원회는 오는 5월 8일(주일)까지 제5회 크리스천 청소년·청년 비전 컨테스트를 개최한다. 21세기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다음세대의 꿈과 비전을 발견하고, 크리스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획된 컨테스트는 부산지역 소재 학교에 재학을 하거나 주소를 둔 중고등생, 대학청년을 대상으로 오는 5월 8일까지 에세이 응모를 받는다. 참가 방법은 1차 ‘나의 꿈 나의 비전’ 제목의 에세이를 5천자 이상으로 작성해 제출하며, 2차 에세이 수상자에 한해 스피치 컨테스트를 실시한다. 스피치컨테스트는 5월 21일(토) 오후 2시 동서대 민석도서관 6층 국제회의실에서 열린다. 심사기준은 첫째, 창의성이다. 과거 발표되지 않은 독창적인 내용, 표현이 진솔하며 응모자가 직접 작성한 글인지 심사한다. 둘째, 구체성이다. 비전수립의 계기와 과정, 자기성찰, 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 있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예배참여, 활동, 비전관 등 신앙고백을 살펴보고 넷째, 기타 문장의 구성과 전개과정, 표현력 등 우수성을 살핀다. 시상은 청소년부문과 대학청년부문으로 나뉘며 부문별 대상(100만원 상품권), 금상(50만원 상품권), 은상(30만원 상품권) 각 1명을 선정해 시상한다. 이 외 10명(10만원 상품권)의 참가자들에게 장려상을 시상한다. ▲ 컨테스틑 수상자에게 시상하는 모습 수상자는 멘토-멘티 관계로 ▲ 비전100위원회장 윤여준 변호사 지금의 청소년들은 여느 어른들보다 바쁘다고들 말한다. 학교, 학원 등 빼곡한 일정 속에 매일 바쁘게, 경쟁하듯 살아가는 청소년들, 학업과 취업에 고민하고 쉴 틈 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청년들의 모습이다. 삶이 바쁘고 현실이 고되기에 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말하는 것이 사치일 수 있지만 인생선배, 신앙선배로서 비전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비전컨테스트이다. 회장 윤여준 변호사는 “지금의 청년들, 청소년들은 마치 쫓겨서 생활하듯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낸다. 길게 생각할 시간도 드물고, 꿈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다. 그래서 글을 쓰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고민하고, 타인 앞에서 발표해봄으로 그 비전을 마음에 되새기도록 기회를 주고 싶었다”며 비전컨테스트의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일정이 당겨져 진행된다. 보통 7월에 대회를 열었지만 참가 학생들의 시험기간을 고려해 5월로 일정을 변경하게 됐다. 비전컨테스트는 단순한 일회성 행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상자들은 비전100인위원회와 멘토-멘티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생긴다. 비전100인위원회는 매년 여름을 맞아 가족수양회를 개최해 왔다. 이 수양회에 비전컨테스트 수상자들과 부모님들을 초청해 함께 시간을 갖는다. 해당 연도 수상자는 물론 과거 수상자들도 초청하기 때문에 또래 간의 친목이 형성된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또래만의 고민과 경험들을 나누며, 선후배간의 깊은 조언도 오가게 된다. 각자의 비전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나누며 진솔한 대화의 장이 마련된다. 수상자들 간의 관계가 깊어지다 보니 SNS 밴드를 통해 꾸준히 교제가 이어지고 있다. 스피치대회에 앞서 진행되는 찬양시간에는 전년도 수상자들이 찬양팀을 구성해 찬양인도를 맡는다. 또한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 중인 비전100인위원회 회원들이기 때문에 수상자들의 궁금증과 고민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이렇게 멘토-멘티로서의 교제 기회가 주어지다 보니,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관계’로 자리 잡게 됐다. 비전컨테스트의 어런 방식의 진행에 참여 학생들보다 더 큰 호응을 보내는 이가 부모들이다. 스피치대회와 수양회에 함께 참석해 비전컨테스트에 대해 호응을 보내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비전컨테스트 외에도 강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회원들의 재능기부를 통한 봉사활동, 가족수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봉사활동을 통해 무료진료, 법률상담 등 재능기부를 하기도 하며, 올해는 장애인시설을 찾아 가족들과 함께 봉사할 계획을 갖고 있다. ▲ 강사 초청 세미나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것은 (재)21세기포럼 설립자인 장성만 목사의 설립취지 때문이다. 40~50대 젊은 크리스천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전100인위원회는 기독교인이 모였지만,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에너지를 쏟자는 장성만 목사의 생각이 담겨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자는 장 목사의 말이다. 비전100인위원회 회원들 모두 그야말로 한창 일할 때다. 사회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바쁘게 활동하다보니 비전100인위원회 모임까지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또 가끔 오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윤여준 변호사는 “바쁜 와중에도 회원들간의 친목과 영적 성장,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동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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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 [탐방] 부산 장대현학교에서 통일한국을 꿈꾼다
    탈북민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TV에서 탈북민들을 보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됐다. 통일한국의 염원이 한국 사회에 퍼지고 있지만 그래도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얼마 전 인권위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탈북민 25%가 차별과 무시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부산에 탈북민의 안정적인 남한 정착을 돕고 통일한국의 시대를 준비하는 기관이 있다.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통일한국의 소망이 될 탈북민청소년을 기독인재로 양성하는 대안학교, 부산 장대현학교다. 그동안 서울, 경기지역에 편중됐던 탈북민청소년 대안학교가 2014년 부산에서 개교하면서 영호남지역 최초 탈북청소년 대안학교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됐다. 하나님이 주신 일, 탈북청소년 대안학교부산장대현학교는 교장인 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임창호 교수로부터 시작됐다. 임창호 교수가 2006년 미국에서의 목회를 마치고 고신대학교 교수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미국에서 했던 북한과 탈북자들을 위한 통곡기도회의 한국대표를 맡게 됐다. 한국에서 사직동교회 협동목사로 섬기면서 탈북자들을 상담하기 시작했고, 주일을 온전히 탈북민들을 위한 시간으로 섬겼다. 2007년 1월 한 식당을 빌려 첫 예배를 드리게 됐는데 이것이 탈북민 교회, 장대현교회의 첫 예배였다. 자녀교육은 전 세계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장대현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창호 교수는 “약 30%의 탈북민청소년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학교를 안 가는 아이들도 생긴다. 일반학교는 물론 대안학교도 적응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 부모의 고충을 들으면서 자녀교육의 절실함을 알았다. 고민 끝에 재단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어야겠다고 싶어 주위에 말을 하고 다녔다. 그때, 뜻있는 분이 10억이 넘는 4층 건물을 기증해주셨다. 어떻게 쓸지 고민하다가 구조 변경을 하고 통일부 소속 법인을 만들어 2013년 말에 학생들을 모집했다”고 설명했다.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학교를 시작하면서 3억이라는 돈이 들었고, 임 교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면서 준비했다. 학교 운영을 위해 우선적으로 교사가 필요했다. 장대현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사자격증 소지자로 교사 경험이 있는 기독교인, 북한과 통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자격에 충족하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창호 교수는 옛 제자가 떠올라 그에게 연락을 했고 흔쾌히 응해준 제자는 동료 교사와 함께 장대현학교로 와주었다. 임 교수는 “영어교사도 필요했다. 그때 학교 고문으로 계신 분이 딸이 얼마 전 미국에서 왔는데 탈북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면서 소개를 해주셨다. 그렇게 교사들이 한둘씩 채워졌다. 여러 곳의 도움이 있었다. 학교에 대해 듣게 된 디자인 회사 사장님의 재능기부로 학교 로고와 교복 등이 제작됐고, 한예종 교수님의 제의로 설립 후원음악회도 개최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나를 믿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교복과 신발을 후원해주신 분, 학교 카페를 열 수 있도록 후원해 주신 분 등 그분들 덕분에 그렇게 3억이라는 돈이 채워졌고 2014년 3월 13일 학교를 개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탈북학생 전담 대안교육 위탁교육기관장대현학교는 2014년 부산시교육청으로부터 탈북학생 전담 대안교육 위탁교육기관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임창호 교수는 학교 인가받을 수 있었던 요인으로, 100% 교사자격증이 있는 교사들과 눈높이에 맞는 교육, 그리고 커리큘럼을 꼽았다. 장대현학교는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한 교육으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체득케 하고, 통일한국을 위한 기독인재로서 세계 인류평화를 위한 국제 감각과 능력 함양 고취를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중등과정으로 기숙이라는 공동체 생활 경험을 통한 전인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원어민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기숙생활을 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또 풀타임 전임교사와 파트타임 교사들이 탈북청소년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면서 치유적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교육과정으로는 보통교과, 대안(특성화)교과, 창의적 체험활동, 토요프로그램으로 나눠, 일반교과수업, 특성화수업, 영성수업, 체험학습 및 해외 이동식 수업, 통일수업, 지역사회와 연계한 교육활동 등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통일을 준비하는 많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재학생 전원 장학생제도를 실시,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통일시대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12월부터 시와 구청에서 후원금이 지급되고 있고, 올해부터 교생 실습이 가능한 학교가 됐다. 지난해 1월에는 미국 국무부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장대현학교를 사례로 강연해달라는 요청들이 많다. 이번 1월 중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에서 세미나를 가질 예정”이라는 임창호 교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기적의 연속이다. 부산에서 5번째로 인가받은 대안학교다. 2년밖에 안 된 학교지만, 이 시대에 필요한 좋은 사역으로 인정받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학교는 100% 시민운동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30여 교회가 장대현학교를 돕고 있다. 내적 회복을 위한 눈높이 맞춤교육장대현학교가 무엇보다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내적치유다. 다른 학습 능력보다 내적치유, 자존감 회복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이 같이 기숙생활을 하면서 신앙과 눈높이 교육으로 빠른 회복을 돕고 있다. 학생수가 18명인데 자원봉사자는 50여명이다. 그만큼 학생 한명 한명을 더 집중할 수 있다. 집중된 교육과 치유를 받은 아이들은 내적인 회복과 학업에서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다. 8명의 아이들이 각종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2015년에 브니엘고등학교와의 협약으로 한 달에 한 번, 두 학교의 아이들이 함께 수업을 하고 있다. 또 지역의 각 교회 중고등부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남한의 아이들과 자연스러운 사귐을 통해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 임창호 교수는 “아이들은 자신들, 탈북한 사람들을 남한에서 가장 밑바닥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탈북한 부모, 그들 스스로 탈북을 하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고, 한국에 와서도 그렇다. 이 아이들을 회복시켜 한국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 학교가 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탈북청소년을 위한 장대현학교에는 좀 특별한 학생이 있다. 임 교수는 “유일한 남한 출신 여학생이 있다. 특별한 케이스다”면서 “그만큼 입학할 때 조건이 있다. 이 아이가 남한의 대표 친구가 된다. 그래서 책임감이 필요하다. 북한과 통일에 대한 관심, 그리고 편견없이 탈북한 친구들을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임창호 교수는 장대현학교의 학생들이 통일한국시대 복음의 전도사라고 표현했다. “학생들은 각자 사명이 있다. 통일이 됐을 때, 탈북 했던 이 아이들이 본인들의 사명을 가지고 다시 북한에 갈 것이다. 통일이 가까이 왔다. UN을 비롯한 전 세계가 북한과 통일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그 당사자다. 왜 교회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지 모르겠다”면서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살아남으면서 다시 위로 올라 갈 수 있었다. 통일도 부산에서 시작되어 위로 올라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청소년은 꿈나무다. 부산과 경남 일대의 교회들이 통일을 준비하는 이 일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꼭 필요한 일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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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탐방] 부산 도심 지역에 세워진 선교하는 ‘온종합병원’
    △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지난 4월 발생했던 네팔 대지진 당시, 그린닥터스는 정근 이사장(온종합병원 설립자, 정근안과병원 원장, 백양로교회 장로)을 단장으로 긴급의료구호단을 파견했다. 현지 선교사와 함께 신두팔촉 지역으로 향했다. 척박한 산간지대로 구호단체의 손길이 미치지 않던 곳에 버스를 타고 5시간, 다시 트럭을 타고 3시간가량 이동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재난현장으로 다닌 봉사단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곳에서 만난 10살난 여자아이 수실라 기니는 무너진 잔해에 맞아 이마에 큰 상처가 났지만 그린닥터스 의료봉사단을 만나서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정근 원장은 당시를 생각하면서 “수실라 기니가 사고 후 9일 만에 치료를 받았다. 파상풍으로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긴급하게 수술을 했다. 현장에서는 기적이라 할 만큼 놀라운 일들이 많았다. 청년 4명에 의해 담요에 싸여 들려온 한 80세 할머니가 치료를 받고 두 발로 걸어 귀가했다.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내려 보내 치유 받은 성경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선교현장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현지 사람들은 수실라 기니가 교회 때문에 살아났다고 말했다. 현지 선교사님을 통해 수실라 기니와 그 어머니가 교회에 출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린닥터스 의료봉사단이 지난 8월, 이후 경과 확인을 위해 신두팔촉 지역을 재방문했을 때 디펜드라라는 소년을 만났다. 아이가 열 살 때 수숫대를 가지고 놀다가 눈을 찔렸지만, 카스트 제도에서 최하층민 수드라에 속하는 디펜드라의 가정은 아이의 눈 수술을 할 수 없었다. 현지 선교사의 도움으로 정근 원장에게 소개됐고, 현지 사정상 부산으로 초청해 수술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디펜드라는 출생신고도 안 되어 있었고, 디펜드라의 엄마는 한국으로 떠난 사이 남편이 바람이 날 것이라며 갈 수 없다고 했다. 설득 끝에 부산에 오기로 했고, 행정처리를 빠르게 진행했다. 디펜드라는 11월 3일 1차 수술을 받았다. 평화교회(임영문 목사)에서 제공한 숙소에 머물면서 온종합병원과 정근안과 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11월 말, 의안을 삽입하는 2차 수술을 할 예정이다. 정근 원장은 “진정한 의료선교는 한 생명을, 한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다. 디펜드라가 교회에서 머물면서 말씀도 배우고 있다. 육안만 떠지는 것이 아니라 영안도 떠져야 한다”면서 “한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선한 영향력을 받을 수 있다. 한 사람을 통해 그 가정이, 그리고 그 마을이, 더 나아가 그 사회가 영향력을 받을 수 있다. 히말라야 산속마을 한 소년을 통해 그 마을에 예수님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네팔에 학교와 병원을 짓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정 원장은 “100여 년 전 이 땅을 위해 왔던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짓고 희망을, 복음을 전했다. 이제 우리가 갚아야 한다.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선교의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료선교다. 생명을 살리는 이 일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꼭 해야 하는 ‘달빛어린이병원’온종합병원은 지난 9월 1일 부산 도심지역 최초로 소아청소년 질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어린이병원을 개소했다. 황규근 원장을 비롯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5명이 365일 밤12시까지 환자들을 진료한다. 온종합병원은 어린이병원 개소에 앞서 지난 2013년부터 소아청소년정신건강센터를 운영해왔다.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보건복지부 달빛어린이병원을 운영하면서 휴일 없이 매일 밤 12시까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진료를 시행해왔다. 야간시간대 경증질환으로 병원을 찾는 소아환자의 비율은 굉장히 높은 편이다. 야간에 응급실을 통해서만 입원이 이루어졌지만 달빛어린이병원 시행 후 그러한 불편이 없어졌다. 자연스럽게 보호자들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환자의 회복도 빨라졌다. 하지만 시행 초반에는 어려움이 없진 않았다. 정근 원장은 “주변 소아과의 반발도 있었다. 야간시간 온종합병원 달빛어린이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다음날이면 환자가 살고 있는 동네 병원을 찾게 된다.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제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익적인 면에서도 손해였지만, 적자를 보더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온종합병원은 선교병원으로 세워졌다. 수많은 돈을 들여 해외선교도 가는데, 우리 아이들을 치료하고 봉사하는 일에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고 시작했고, 실제로 채워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귀하게 여기셨다. 달빛어린이병원은 그 뜻을 잇는 일이다”고 말했다. 온종합병원 설립자 정근 장로(정근안과병원) △ ‘선교’를 목표를 세워진 병원결핵을 앓던 한 소년이 열심히 공부해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생이 된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선교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드렸다. 정근 원장의 이야기다. 정근 원장은 “청소년 시절 결핵으로 죽을 뻔했다. 183cm 키에 몸무게는 53kg이었을 정도였다. 의대에 들어갔지만 몸과 정신은 폐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선교회에서 활동하며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선교라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지금은 많은 선교사들을 돕고 있다. 각자의 달란트가 있다.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위해 시스템과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개인이 하는 것이 힘들다고 느꼈다는 정 원장은 “새벽까지 아내와 둘이 약을 싸기도 했고, 늘 주변에 여러 도움을 요청하러 다녀야 했다. 현장에서는 의료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었고, 많은 역할들을 하면서 온종합병원을 세우게 됐다.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교사역에 더 큰 힘을 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최근 한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정근 원장은 “교회가 배척받는 이유가 너무 교회 내에 머물러 있어서 그렇다. 외부에서는 기독교가 자기 교회 밖에 모른다고 말한다. 과거에 기독교는 3.1운동, 독립운동, YMCA운동 등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그런데 교회가 건물이나 내부에 집중하면서 타 종교가 그 자리에 섰고, 기독교는 비난을 받게 됐다”면서 “다른 종교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함께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사회현상, 시스템을 위해 일해야 한다. 선교의 목표에 따라 목적이 만들어지고 행해져야 한다. 병원 자체도 선교고 전도다. 병원이 해야 하는, 더욱이 선교병원이 해야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종합병원의 목표다”고 말했다.결핵을 앓던 한 소년이 열심히 공부해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생이 된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선교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드렸다. 정근 원장의 이야기다. 정근 원장은 “청소년 시절 결핵으로 죽을 뻔했다. 183cm 키에 몸무게는 53kg이었을 정도였다. 의대에 들어갔지만 몸과 정신은 폐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선교회에서 활동하며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선교라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지금은 많은 선교사들을 돕고 있다. 각자의 달란트가 있다.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위해 시스템과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개인이 하는 것이 힘들다고 느꼈다는 정 원장은 “새벽까지 아내와 둘이 약을 싸기도 했고, 늘 주변에 여러 도움을 요청하러 다녀야 했다. 현장에서는 의료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었고, 많은 역할들을 하면서 온종합병원을 세우게 됐다.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교사역에 더 큰 힘을 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최근 한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정근 원장은 “교회가 배척받는 이유가 너무 교회 내에 머물러 있어서 그렇다. 외부에서는 기독교가 자기 교회 밖에 모른다고 말한다. 과거에 기독교는 3.1운동, 독립운동, YMCA운동 등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그런데 교회가 건물이나 내부에 집중하면서 타 종교가 그 자리에 섰고, 기독교는 비난을 받게 됐다”면서 “다른 종교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함께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사회현상, 시스템을 위해 일해야 한다. 선교의 목표에 따라 목적이 만들어지고 행해져야 한다. 병원 자체도 선교고 전도다. 병원이 해야 하는, 더욱이 선교병원이 해야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종합병원의 목표다”고 말했다. ▲ 지난 4월 네팔 대지진 발생 후 그린닥터스 긴급의료구호단은 네팔 신두팔촉 지역을 방문했다. 잔해에 이마가 찢어졌던 수실라 기니(위)와 4명의 청년들에게 담요에 싸여 왔던 80세 할머니(아래)가 치료를 받고 있다. ▲ 네팔 신두팔촉 2차 방문 때 만난 디펜드라 라사일리. 지난 11월 3일에 1차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정근 원장과 함께 있는 디펜드라 ▲ 지난해부터 온종합병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달빛어린이병원 ▲ 지난 2005년부터 8년간 개성공단 내 남북 의료진 협력진료를 했다. 개성교회를 세워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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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탐방] ‘손양원기념관’ 드디어 모습 드러내
    - 3가지 테마룸의 나라사랑, 인간사랑, 하늘사랑‘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정신 고스란히 담아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가 이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지로 거듭난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생가와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한국교회 성도들의 발길이 이어질 예정이다. 지난 2014년 4월 착공식을 갖고 시작된 손양원기념관이 완공됐다. 오는 10월 20일(화) 개관식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손양원기념관을 찾았다. 용서와 화해를 상징하는 성지 경남 함안군 손양원 목사의 생가 터(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29-1) 위에 기념관 및 복원된 생가가 우뚝 들어섰다. 3,655㎡(1,100평)의 대지 위에 30㎡(8평)의 복원된 생가와 약 727㎡(220평)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규모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푸른 숲을 뒤에 둔 기념관은 마치 여느 예술관 같은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손양원기념관의 설계자인 이은석 교수(경희대, 코마건축사사무소)는 손양원 목사를 지칭하는 ‘사랑의 원자탄’을 그대로 표현했다. 원자탄을 형상화해 둥근 모양의 건물에 땅에는 물이 있고, 지붕이 없는 건물 위로 낮에는 해와 밤에는 달이 비추는 빛이 늘 어우러지는 평화를 상징화 했다. ‘나라사랑’ 화이트룸 고난의 길을 표현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처음 만나는 곳이 화이트룸, ‘나라사랑’이다. 손양원 목사의 애국심을 표현한 곳으로 박시영 목사(기념관건립본부장)는 “경남 함안지역에서 발생한 독립운동의 주도자였던 손종일 장로는 손양원 목사의 부친으로, 아버지 손종일 장로의 나라사랑의 의와 아들 손양원 목사의 신앙적인 의가 마주친 곳”이라고 설명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됐던 손양원 목사를 기리기 위해 감옥을 연출했다. ‘인간사랑’ 스톤룸 다음 만나게 되는 곳은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헌신한 손양원 목사를 기린 스톤룸, ‘인간사랑’이다. 손양원 목사는 경남지역 순회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부산 상애원의 한센병 환우들을 섬겼다. 침이 한센병에 효과 있다는 말에 호주선교사 맥켄지 선교사가 입으로 직접 피고름을 빨아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맥켄지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손양원 목사 역시 이후 직접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며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 해방 후 출옥성도로서 환호 받는 길을 마다하고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우들에게 돌아갔다. 손양원 목사에게 병이 전염될까 환자들의 접근을 막았을 때도 손 목사는 “차라리 나도 전염이 되어 더 가까이에서 저들을 돌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이웃을 향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정신을 기렸다. 스톤룸은 백범 김구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손양원 목사를 표현했다. 김구 선생은 이화여고 교장으로 손양원 목사를 초빙하려 했으나 목회자인 손 목사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친구였던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을 그대로 본 떠 밀랍인형으로 제작해 전시했다. ‘하늘사랑’ 레드룸 스톤룸을 나와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곳은 십자가의 사랑을 표현한 레드룸, ‘하늘사랑’이다. 이곳은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진 방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용서의 정신을 기렸다. 1948년 10월 이른 바 ‘여순반란사건’으로 손 목사의 두 아들인 손동인, 손동신 형제가 순교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구명운동해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양원 목사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용서를 보인 손양원 목사를 소개하는 수묵화 영상이 레드룸 벽면에 상영된다. 2~3분 가량의 영상을 통해 손양원 목사의 기독교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2층 구조로, 구름다리로 지나갈 수 있다. 삶의 집약체 ‘생가’ 복원 3가지의 대표적인 테마룸 외에도 1층에는 갤러리가 자리잡고 있다. 유명 화가인 최미경 작가(전주대 교수)가 그린 7m 규모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단일 기념관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그림으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장례식, 마지막 심판 날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손양원 목사의 세 부자에게 면류관이 내려오는 모습,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이 작품이 전시된 상설 갤러리가 자리잡고 있다. 또 2층에는 생가이야기로 손양원 목사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소개했다. 독립운동으로 나라사랑을 가르친 아버지 손종일 장로, 경남성경학교 교사로 애국심과 굳건한 믿음을 가르친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에게 세례를 준 호주선교사 맥크레이 선교사, 상애원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섬긴 맥켄지 선교사를 조명했다. 특히 호주선교사 맥크레이(맹호은) 선교사는 손양원 목사에게 세례를 주고,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학교에서 중퇴한 손 목사를 일본 동경 쓰가모중학교에서 수학하도록 도운 이가 맥크레이 선교사다. 기념관 밖을 나오면 손양원 목사의 생가를 복원해 놨다. (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만열 교수는 “손양원 목사의 생가와 기념관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오늘날 혈연, 지연, 학연과 이념으로 분열되고 갈등과 투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이곳이 용서와 화해, 평화를 상징하는 귀한 성지가 되었으면 한다. 그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이 이곳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로 널리 꽃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념관건립본부장 박시영 목사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신앙은 물론 원수까지도 용서한 그의 사랑은 이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신앙의 유산으로 삼아야 하며, 믿음의 후대까지 이어가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이 기념관이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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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탐방] 비전도 실력도 1위 굿모닝성모안과
    보건복지부 통계(2008~2010년)에 따르면 백내장 1차 의료기관으로 안과수술 전국 1위를 차지한 병원은 부산 서면에 위치한 굿모닝성모안과다. 이곳은 3년 연속 부산 1위에 선정되는 명예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진심이 쌓이고 쌓여 1위굿모닝성모안과(대표원장 박진용)는 부산 유일 7개 센터의 완벽한 협진시스템으로 높은 수술실적과 평생 보장 주치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000평 규모의 병원과 100여명의 직원들이 환자 ‘한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 결과, 고객의 만족을 얻고 있다. 라식 센터, 안내렌즈 센터, 백내장/녹내장 센터, 노안교정술 센터, 망막센터, 안성형안과 센터, 소아안과 센터 등 총 7개 센터의 협진시스템과 20년 이상 경력을 지닌 베테랑 전문의들이 직접 수술을 집도한다. 전 대한안과학회장 및 백내장 굴절수술학회장, 망막학회 회장직을 역임한 임상경험과 수술 및 진료 노하우가 뛰어난 대학교수 출신의 전문의료진으로 구성돼 있다. 또 전국 1위 병원답게 대학병원급의 첨단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ALL CARE SERVICE’ 시스템을 실현하고 있다. ‘ALL CARE SERVICE’는 가장 안전한 수술을 위해 개인별 맞춤 수술을 진행하고, 수술 후에는 완벽한 시력유지를 위해 눈 전체의 질환을 케어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박진용 원장은 환자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의사와 직원들은 매일 수십, 수백명의 환자를 만나지만 환자들은 의사를 한 번 만나는 것이므로,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환자의 입장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대표원장이 직접 라식 수술을 받은 경험은 환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발판이 됐다. 박 원장은 “직접 수술을 받기 전과 후에 환자를 대하는 방식에 차이점이 생겼다. 수술 후에는 환자들이 수술과정에 있어 왜 불안하고, 어떤 점이 어려운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수술하기 전에 항상 수술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단계마다 주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침대에 누운 환자들에게 어떤 심정이 드는지,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노안교정술에 월등한 수술 결과대개 여름이면 병원을 찾는 환자가 감소한다. 특히 더운 날씨 때문에 수술을 받으려는 환자는 감소하지만, 오히려 굿모닝성모안과는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여름 시즌만 비교해도 지난해 대비 30% 증가했다. 비결은 노안교정술이다. 노안이란 눈의 조절력이 떨어져 가까운 곳을 볼 때 특히 글을 읽기가 힘든 현상으로, 눈으로부터 25~35cm 정도에 있는 물체가 잘 보이지 않는 상태를 노안 또는 노시(老視)라고 한다. 대체로 눈의 조절력은 40세가 되면 20세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노안을 치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돋보기 착용이다. 젊은 나이에 돋보기를 쓰는 것이 꺼려진다면 수술을 하거나 다중 초점렌즈(일명 누진 초점 렌즈)를 착용하는 방법도 있다. 수술로 노안을 교정하는 방법은 각막의 모양을 변형시키거나 인공수정체를 이용하거나 공막(흰자위)에 시술하는 방법 등이 있다.굿모닝성모안과는 노안교정술에 탁월한 성과를 보이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타 병원에서도 노안교정술을 하지만, 수술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굿모닝성모안과만의 임상경험과 안전에 완벽을 더한 수술 결과로 환자들이 매우 만족하고 있다. 노안교정술 실력이 소문 나면서 여름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병원을 찾고 있다. 박진용 원장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른 의사들의 눈을 잠시 가리신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노안교정술 결과가 매우 좋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청지기어머니의 믿음으로 모태신앙으로 자란 박진용 원장(수영로교회 안수집사). 그러나 교회만 출석하던 그에게 하나님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83년 충북 영동에서 열린 CCC 수련회에 참석했다. 맨 앞줄에 앉아 김준곤 목사의 설교를 듣던 중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죄에 대해 깊이 회개하는 경험을 했다. CCC 수련회에서 회심한 박진용 원장은 이후에도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며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구원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한 박진용 원장은 3가지 삶의 원칙을 세웠다. 술을 마시지 않고,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며 새벽제단을 쌓는 것이다. 의사로 지내면서 종종 생기는 술 자리에서도 그는 믿음을 지켰다. 술을 마셔야만 일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일을 그만두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이었다. 또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말한 박진용 원장은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다. 14년이 넘게 소나타 차량을 타면서 물질을 낭비하지 않았다. 자동차에 관심도 많고, 더 좋은 차량을 구입할 수 있지만 청지기로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굿모닝성모안과가 개원하던 당시 4명의 의사들이 동업해 시작됐다. 병원이 성장하면서 처음엔 한층을 사용하다가 3개층을 사용하게 됐다. 그러던 중 병원을 한 사람이 맡아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도출됐고, 박진용 원장이 병원을 인수하게 됐다. 박 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적 있다. 한 층을 제가 쓰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다른 의사들의 마음을 만져 주셨다. 그래서 한 층이 아닌 병원 전체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2년 전 병원을 인수할 때, 믿음 좋은 아내의 기도 때문에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다. 박 원장의 아내는 기도하며 거액의 금액을 제시했다. 생각하던 금액의 2배 가격을 말하면서, 이 금액에 인수하라는 것이다. 박 원장은 황당해 웃을 뿐이었다. 수중에 가진 돈도 없었고, 너무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평소 기도에 힘쓰던 아내를 알기에 따랐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시면서 비용을 채워주셨다. 병원을 인수하던 때, 교회 원로목사인 정필도 목사가 박 원장에게 조언했다. “병원을 인수하고 나면 이전보다 더 큰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주신 비전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 인수 후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언론에서 라식수술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잇따르면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 불안한 마음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위장도 나빠져 매일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박 원장의 변함없는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다. 생각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노안교정술에 길이 열렸고, 병원 성장에 도움이 됐다. 힘들었던 시기를 “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었다”고 말한 박 원장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병원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병원 규모도 커졌고, 직원도 늘어나면서 병원 외형이 2배로 성장했다.열방을 섬기는 병원이 되기를 기도하는 박진용 원장. 그는 세계에 병원을 세우고, 이를 통해 현지 선교사들을 돕고, 학교와 고아원 등 사역이 확장되기를 꿈꾸고 있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모태신앙으로 자란 박진용 원장(수영로교회 안수집사). 그러나 교회만 출석하던 그에게 하나님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83년 충북 영동에서 열린 CCC 수련회에 참석했다. 맨 앞줄에 앉아 김준곤 목사의 설교를 듣던 중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죄에 대해 깊이 회개하는 경험을 했다. CCC 수련회에서 회심한 박진용 원장은 이후에도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며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구원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한 박진용 원장은 3가지 삶의 원칙을 세웠다. 술을 마시지 않고,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며 새벽제단을 쌓는 것이다. 의사로 지내면서 종종 생기는 술 자리에서도 그는 믿음을 지켰다. 술을 마셔야만 일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일을 그만두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이었다. 또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말한 박진용 원장은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다. 14년이 넘게 소나타 차량을 타면서 물질을 낭비하지 않았다. 자동차에 관심도 많고, 더 좋은 차량을 구입할 수 있지만 청지기로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굿모닝성모안과가 개원하던 당시 4명의 의사들이 동업해 시작됐다. 병원이 성장하면서 처음엔 한층을 사용하다가 3개층을 사용하게 됐다. 그러던 중 병원을 한 사람이 맡아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도출됐고, 박진용 원장이 병원을 인수하게 됐다. 박 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적 있다. 한 층을 제가 쓰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다른 의사들의 마음을 만져 주셨다. 그래서 한 층이 아닌 병원 전체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2년 전 병원을 인수할 때, 믿음 좋은 아내의 기도 때문에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다. 박 원장의 아내는 기도하며 거액의 금액을 제시했다. 생각하던 금액의 2배 가격을 말하면서, 이 금액에 인수하라는 것이다. 박 원장은 황당해 웃을 뿐이었다. 수중에 가진 돈도 없었고, 너무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평소 기도에 힘쓰던 아내를 알기에 따랐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시면서 비용을 채워주셨다. 병원을 인수하던 때, 교회 원로목사인 정필도 목사가 박 원장에게 조언했다. “병원을 인수하고 나면 이전보다 더 큰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주신 비전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 인수 후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언론에서 라식수술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잇따르면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 불안한 마음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위장도 나빠져 매일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박 원장의 변함없는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다. 생각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노안교정술에 길이 열렸고, 병원 성장에 도움이 됐다. 힘들었던 시기를 “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었다”고 말한 박 원장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병원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병원 규모도 커졌고, 직원도 늘어나면서 병원 외형이 2배로 성장했다.열방을 섬기는 병원이 되기를 기도하는 박진용 원장. 그는 세계에 병원을 세우고, 이를 통해 현지 선교사들을 돕고, 학교와 고아원 등 사역이 확장되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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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탐방] 가음정교회, 109년 전 창원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1906년 권재학 씨 집에서 시작된 자생교회-국내 미자립교회 지원, 해외 미전도종족 입양선교-새 성선을 통한 또 다른 100년의 역사를 소망 ▲ 가음정교회 새 성전 전경 △ 가음정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1900년 초기, 경남 창원 가음정 안골에 살던 보부상 권재학 씨는 마산, 김해, 동읍, 북면 등의 시장을 다니면서 ‘예수쟁이’, ‘노랑머리 선교사’, ‘예배당’의 소식을 듣게 됐다. 그의 마음에 복음이 파고들면서 김기원, 권종석, 김문익 씨 등에게 복음을 나눴다. 그들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되고 권재학 씨 집에서 예배를 가졌다. 이것이 가음정교회의 첫 시작이다. 1906년 6월 세워진 가음정교회는 대표적인 자생적 교회다. 최초로 모여 예배를 드린 곳이 권재학 씨의 집이었다. 교인수가 늘어나자(세례교인 수 43명) 1914년 가음정리 102번지에 교회당을 구입하고 예배 처소를 옮겼다. 일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에 낡고 좁은 교회를 수선해가면서 신앙을 지켜왔다. 당시 가음정교회는 창원군 상남면의 유일한 교회로, 교인 분포가 상당히 넓었다. 1921년 정동, 토월, 남산 3곳에 기도소를 설치해 원거리 교인들이 주일 저녁과 수요일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가음정에 뿌려졌던 복음의 씨앗은 그렇게 뿌리를 내려갔다. 황국신민화정책으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때, 교편에 서서 일제를 비판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43년 옥중 순교했던 최상수 전도사, 1950년 한국전쟁 때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귀신 잡는 해병’이라 말을 탄생시킨 믿음의 명장 김성은 장군 등이 가음정교회 출신이다. △ 선교를 지향하는 교회로 1980년대 초 교회안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 강영식 목사가 부임해 오면서 교회는 점점 회복하기 시작했다. 교인수도 늘어나 주일예배를 1,2부로 나눠 드리게 됐다. 1983년 가음정 12-5번지에 부지를 구입, 교회 건물을 신축했다. 그리고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1992년 가음정선교대회를 실시하고 미전도종족 입양선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선교운동에 참여했다. 입양선교는 교회나 선교단체가 미전도종족을 맡아 그 종족 안에 교회가 세워질 때까지 책임지고 지속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음정교회는 1995년 M국 미전도종족을 입양하고 집중적인 선교에 들어갔고 2000년 신학교를 세우게 됐다. 신학교는 금년 제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2009년 동남아 3개국 미전도종족에 대한 입양예배를 가지고 선교정책을 펼쳐가고 있다. 가음정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까지는 강영식 원로목사의 열정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은퇴한 강영식 원로목사는 73세의 나이로 현재 캄보디아 바탐방 지역에서 선교센터와 교회를 세우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가음정교회는 국내 미자립교회 지원 활동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 가음정 33번지, 새로운 한 세기를 향해 ▲ 가음정교회 담임 제인호 목사지난 6월 28일 가음정교회는 새 성전(가음정 33번지) 준공감사예배를 가졌다. 가음정 제6지구 재건축사업과 함께 가음정교회는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게 됐다. 가음정교회 담임 제인호 목사는 "예수님이 피 로 값 주고 사신 것이 교회이기에 교회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니까 교회의 핵심은 주인이신 예수님이고 그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가', '성도들이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인인가' 늘 고민해야 한다"면서 예배당보다 교회가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 목사는 "가음정교회가 좋은 예배당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 교제, 전도(선교), 교육과 훈련, 봉사와 섬김이 풍성한 참 좋은 교회가 되길 바란다"면서 성도들을 향해 "정통적인 신앙과 순결한 생활에 더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가자"고 전했다. 한 세기의 역사를 가진 가음정교회는 12-5번지의 성전(현 성전)에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 성전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길 소망했다. ▲ 지난 6월 28일 가진 새 성전 준공감사예배 ▲ 1960년 가음정교회 제직들 모습 ▲ 1961년 1월 19일 상남지구 학생신앙운동연합회 창립총회(1965년 본동 교회당을 건축하기 전의 초가를 개축하였던 교회 내부모습을 볼 수 있다). ▲ 1966년 경 여름성경학교 사진 ▲ 1975년 가음정교회 성도들 모습 ▲ 2006년 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 전교인 체육대회 ▲ 2006년 4월 9일 100주년 기념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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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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