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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어떻게 빛이 나는가(출애굽기 34장 29절)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란 작품을 아시지요? 남북전쟁 직후에 한 시골 마을에 살던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그런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도 큰 바위 얼굴 같은 부드러운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돈이 많은 부자, 전공을 많이 세운 장군, 유명한 정치인, 글 잘 쓰는 시인들을 만났지만,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작가는 위대한 인생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행이 일치하는 진실한 삶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었음을 말씀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그는 백성 앞에 나갈 때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많은 후보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후보들은 국민에게 큰 바위 얼굴처럼 보이길 원할 것입니다. 얼굴에 빛이 나길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장점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경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되면 국민을 위해 많은 정책으로 훌륭한 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과연 국민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광채를 볼 수 있을까요? 이들의 모습은 모세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후보들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빛이 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얼굴에 빛이 나게 하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 앞에 내려올 때까지 자기 얼굴에 빛이 나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후반부를 보면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빛이 날 때, 그게 진짜입니다. 둘째는 후보들은 자신에게서 빛이 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신경을 씁니다. 넥타이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준비합니다. 말도 품위 있게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국민의 귀에 닿는 공약을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여호와와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을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는 것>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모세의 얼굴에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 안에 외모를 보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목회자를 청빙할 때도 가문, 학벌, 외모, 경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중시합니다. 저는 종종 매우 훌륭한 조건을 갖춘 목회자가 부임했음에도 교회와 목회자가 어려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와 말하는 것>, 즉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핵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빛이 그의 인격과 삶에서 배어나고, 하나님의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모세처럼 가릴 것이며,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고, 늘 하나님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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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2021-07-23
  • 노조 집행부 출신들 대거 승진
    과거 복음병원 민주노총 집행부 출신들이 금번 인사에 대거 승진한 이유 때문에 교단과 병원내 말들이 무성하다. 지부장 출신 A씨는 일반직 5급에서 4급(과장)으로, 사무장출신 B씨는 4급에서 3급(부장)으로 각각 승진하면서 병원 내 주요 자리에 임명됐다. 대의원회 의장과 부지부장을 맡은 바 있는 C씨도 병원 내 최고 행정직 위치까지 올랐다. 이들이 노동조합 집행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받아서도 안 되겠지만, 법인 이사회가 과거 교단의 큰 아픔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 조차 하지 않은 점은 의외라는 반응이다. 2002년 보건의료노조 사상 최장 파업(60여일)과 이 과정에서 교수협의회와 함께 교육부를 찾아가 임시이사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한 점, 그로인해 2003년 4월 1일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송했고, 2007년 4월 17일까지 약 4년 17일간 총회가 200억 원을 모금하고, 교단산하 모든 교인들이 새벽재단마다 눈물로 기도한 아픔을 벌써 잊었냐는 지적이다. 법인 인사소위원회 소속 모 이사는 “(과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인사위원회 당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이사회 석상에서도 이같은 문제제기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모 이사는 “병원장에게 힘을 실어 주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과거 사건이)시간이 오래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사들이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 이사는 오히려 기자에게 “A씨가 지부장 출신이냐?”고 물어볼 정도. 교단 내에서는 과거 교단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사건인데, 이사들이 언급(발언)조차 없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쏟아 내고 있다. 모 목사는 “교단의 아픔을 기억하고, 앞으로 (같은 사건들이)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사들)아무도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고 말했다. 병원내 모 관계자도 “당시 체불임금이 아직도 해소가 안된 상황이다. 그 사건이 2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아픔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C씨는 기자에게 “나와 A는 당시 파업에 반대했으며, 교육부 임시이사 파송 요청에 동의하거나 동행한 적도 없다. 또 천안 신대원 총회(52회 총회) 장소 점거 당시에도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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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1-07-23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4)
    독일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냉철하고 끈질기게 파헤치고, 또 과오에 대해서 처절하게 반성하는 예는 드물 것이다. 어느 나라나 자랑스러운 역사뿐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역사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강대국인 경우 분명 근대사에서 다른 민족을 약탈하고, 이웃 나라들을 괴롭힌 흑역사들이 많이 있다. 때로 양심적인 학자들이 그것을 파헤치고 드러내지만, 국가가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고, 국가 내에서도 서로 상반된 정치이념들로 인해 역사가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독일은 이점에서 확실히 달랐다.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반인륜적인 사건들을 숨기지 않고 낱낱이 파헤쳐서 전시하였고, 이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극우세력이 발을 붙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의 가장 핵심인 인적청산을 철저히 했다. 전후 수많은 나치전범과 그 동조자들을 찾아내어 재판하였는데,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은 지속되고 있다. 올해 2월 독일 검찰은 나치 수용소에서 비서로 일했던 여성과 경비원이었던 남성을 기소했는데, 둘의 나이는 각각 94세, 100세였다. 아무리 고령자라해도 재판정에 세울 정도의 건강이면 반드시 세웠고, 수용소에서 직접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방조한 책임을 물어 낮은 직급의 관리자·경비원·비서 등도 사법처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집요하게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는지 그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독일은 국가지도자가 매년 반복되는 홀로코스트나 전쟁 기념일마다 참석하여 사과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빌리 브란트 수상이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서의 화해를 이루려했던 그는 1970년 폴란드 방문 시 과거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두어 살게 했던 게토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세운 기념비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그가 결단하고 행한 이 ‘바르샤바에서의 무릎 꿇음’ (Warschauer Kniefall)은 이후 독일의 진정한 참회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뼈아픈 과거청산의 용기와 진정성은 주변국가들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게 하였고, 이것이 훗날 독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경제, 군사, 외교면에서 다시금 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하게 누리게 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나라가 스위스이다. 나치가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금괴를 거래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나치에게 전비를 마련해준 스위스는,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하고 참회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면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스위스의 저술가 아돌프 무쉬그가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지에 이런 글을 썼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마치 마취가 풀릴 때처럼 먼저 고통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는 종종 아픔이 따르지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런 자에게 또한 바른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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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7-23
  • 선택의 순간,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코로나 확산이 심상치가 않다. 서울과 수도권은 이미 거리두기 4단계로 들어섰고(최대 19명까지 허용) 부산도 지난주 3단계로 강화했으며 확산세가 꺾이지 않을 경우 4단계로 갈 것이라 말한다. 이미 지난해부터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몇 차례의 변곡점을 지나와서 알고 있지만, 이런 추세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 교회는 또 다시 비대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고 실제로 서울은 지금 비대면 예배 중이다. 그런데 비대면 예배라는 단어만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부 방역 체계에 저항하는 무리들이 있다. 실제로 지난 7월 18일 주일에 서울은 전면 비대면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는 대면예배를 고집하며 시민 및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물론, 성도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고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는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정부의 방역 수칙을 위반하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지금은 전 세계가 비상 사태이고, 의료진 및 국민들이 하루빨리 코로나를 종식시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노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이웃들을 나몰라라하고 내 갈길을 가는 대면예배를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사랑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어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아집과 독단에 둘러싸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고통 받는 이 때, 교회가 바른 선택을 해서 다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또 사랑을 받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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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7-23
  •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
    정치권에서 여성가족부 존폐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권 내에서 다양한 문제제기와 여기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문제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교계내에서도 과거부터 여성가족부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안)’을 수립하면서, 그 동안 ‘양성평등’으로 되어있던 것을 슬그머니 ‘성평등’으로 고치는 작업에 들어갔다. ‘양성평등’과 ‘성 평등’은 글자 한 자차이 같지만, 엄청난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즉 여가부가 여성들의 여권 신장을 위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남녀 간에 ‘평등’을 주장해 왔는데, 이것을 ‘성 평등’으로 바꾸면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50여 가지의 사회학적 성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되므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현행 우리 헌법이 가진 ‘양성’(남녀)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며,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유발시키는 것은 물론,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세계 어느 나라 정부 조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가족부’가 이 나라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려는 발상으로, 일시에 대한민국을 ‘성 평등 국가’와 ‘동성애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양성 평등’이 ‘성 평등’으로 바뀌게 될 때, 수 많은 사회적 혼란과 혼선이 올 것은 뻔하다. 우리 사회는 ‘남’과 ‘여’로 2개의 생물학적 성을 가지고 있는데, ‘성평등’ 상황에서는, 약 50여 개의 사회학적 성을 갖게 되므로, 우리 사회는 뒤죽박죽의 사회로 돌변하고 말 것이다. 또 모든 성관계를 인정해야 하므로, 동성애, 근친상간, 수간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성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거기에다 남녀의 결합에 의한 결혼만이 인정되던 것이, 다양한 성의 결합으로,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막기 어려워진다. 여가부가 이렇듯 동성애를 지지하고 변형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 정책을 즉각 폐기하고, 종전의 양성 평등정책을 추진하던지, 아니면 국민들의 건강과 사회적 질서와 가정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일을 즉시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계도 여성가족부 해체운동에 돌입할 것이며, 그 책임은 정부가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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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7-23
  • [시사칼럼]남겨진 시간을 위하여
    그분이 떠났습니다. 마지막 붙잡았던 손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참 무심히 흘러 벌써 달포가 지났습니다. “2001년 5월 31일, 꼭 기억해주세요. 제가 새롭게 태어난 날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전 나이로 치면 환갑을 지나 중생을 체험한 그는 20년 세월을 한결같이 살다가 새롭게 얻은 고귀한 두 번째 생일을 며칠 더 넘긴 어느 날 홀연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세상은 그를 잘 몰라도, 몇 차례 급습했던 병마의 가공할 기세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불굴의 사람 장 집사님, 일천 명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비장한 사명을 이제는 우리에게 맡겨둔 채로 어쩌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천국 소풍을 떠나셨겠지만, 우리는 그가 몹시 그립습니다. 역사학자 피터 래슬릿(Peter Laslett)은 인생 단계들이 보통은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만 반드시 살아온 햇수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면서 ‘제3연령기(Third Age)’라는 표현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앞선 두 단계와 달리 생물학적 나이나 개인적인 성취를 초월하는 몇몇 행동 요소를 기준으로 삼는데, 앞선 사례와 같이 비교적 노년의 때에 극적으로 맞이하는 신앙적 회심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제3연령기가 점차 부각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 단계를 유의미하게 거치지는 못하고 있고, 현대사회 역시 새로운 이 개념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지침이나 제도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노인의 죽음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사회가 이미 고령사회(Aged Society)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65세가 넘은 인구가 전체의 14% 이상을 차지할 때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제3연령기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기를 선용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기 일쑤입니다. 둘째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 현상 때문입니다. 한 바이러스가 초래한 세상은 특히 노년층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훗날 제대로 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최근 노년층의 일반 장례를 상당히 많이 치렀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사회분위기와 외부 활동의 저하 그리고 교류 단절로 인한 고독감 등도 영향을 끼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모두가 ‘실버 쓰나미’를 두려워합니다. 유례없이 길어진 인간 수명과 그로 인한 인구 초고령화 현상이 우리 사회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거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1980년 서구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오늘날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같은 언론지나 뉴잉글랜드 메디슨 저널 같은 학술지는 물론 정부 문서에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개념입니다(루이스 애런슨, ‘나이듦에 관하여’(Being)). 물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국면인 “제4연령기”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하는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듦이 마냥 두려운 쓰나미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장면을 추모의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감염병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먹을거리들을 잔뜩 챙긴 채로 인근 중학교 하교 시간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손주뻘 아이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시던 장 집사님께서 마지막으로 제게 남긴 말씀은 이랬습니다. “이제 나 대신 맡아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슬퍼하지 마세요. 나는 천국으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만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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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 7, 최의손
    부산 거제리에서 포로들을 대상으로 구호 및 선교활동을 전개한 또 한 사람이 윌리엄 치솜(William H. Chisholm, 1885-1951), 곧 최의손 선교사였다. 미국 미시간주 에머슨(Emerson)에서 1894년 2월 1일 출생한 최의손은 치과의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해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의료선교사를 자원하였고, 1923년 10월 9일 부인 베르타(Bertha Cowell)와 함께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평북 선천지부로 배속된 그는 미동병원(美東病院, In His Name Hospital) 제3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1940년 3월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16년간 활동했다. 미국에서 1920년대 이후 신학논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북장로교에서 분리하여 1936년 6월 ‘정통장로교’(OPC)가 조직되었는데, 최의손은 1940년 3월 북장로교를 탈퇴하고 정통장로교로 이적하면서 병원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는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던 의사였고, 직접적인 복음전도에 관심을 가졌던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선천과 그 주변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운이 감도는 시기, 출국을 권고 받고 1940년 3월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동병원에서 일하는 기간 동안의 자신의 의료 활동 경험을 나누기 위해 뉴욕에서 발행되던 주일학교신문(Sunday School Times)에 한국에서의 의료 활동에 대한 연재를 한 바 있는데, 이 원고는 1938년 한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그 이후 이 책은 여러 판본으로 거듭 출간되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의 생생한 경험’ Vivid Experiences in Korea이란 책이다. 이 책은 2006년 『청진기와 상경에 담긴 새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1940년 한국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그는 1947년 다시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고 부산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고려신학교와 부민동의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부산에서 포로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구제활동은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는 미약했다. 도리어 의료지원이 그의 중심 사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들을 진정한 형제애로 대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체워 주고자 노력했다. 그의 포로전도에 대해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약 측의 서울 신촌 창광교회의 이병규 목사의 증언이 남아있다. 창광교회의 ‘빛의 소리’ 1996년 5호에 게재된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부산에 체류할 때 최의손 선교사와 더불어 포로들을 위해 전도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6.25 사변 때 포로수용소가 두 곳 있었는데 거제도 거제리라는 곳에 하나 있었고 또 부산 동래 거제리라고 하는 곳에 하나 있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최의손 선교사와 목사님 몇 분이 약 2년간 전도 했다. 그중에 처음에는 다 인민군으로 나왔으니까 믿는다고 하지 못하고 나왔지만 우리가 전도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 성경책도 많이 배부를 했고 수용소 안에 들어가서 성경공부도 시켰다. 그래서 그분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 석방할 때 한국에 많이 석방돼서 신학교 하고 목사 된 사람도 많다. 포로수용소에서 전도한 보람을 느끼고 있고 여자들도 포로가 있었는데 그분들도 석방이 되어서 전도부인(전도사)으로 일하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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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1-07-23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직박구리가 나에게 깨우쳐 준 것들
    토요일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여유롭게 시작하는 토요일 아침에 아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로 했다. 날도 화창하고 기분도 좋아 아이들을 연신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한 20분쯤 길을 걸었을까, 갑자기 제일 앞서 가던 셋째가 소리를 지르며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 셋째 옆에 가서 자세히 보니, 새 한 마리가 뒤집혀서 퍼득퍼득 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새가 (사람이 누워 있는 모양처럼) 뒤집힌 것을 보지 못해서 아픈 새가 불쌍하기보다 징그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아이들은 아픈 채로 힘없이 쓰러진 새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가 구해야 한다’고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길 바랐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엄마인 나는 거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새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렁이와 개미의 공격에 누워 있는 새의 날개가 잠깐 퍼득일 때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 뒤로 숨기도 했다. 그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저 적당히 동물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다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그 자리를 뜨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30분 즈음이 흐른 후부터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여기에 계속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어. 이제 그만 산에 가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완강했다. 특히 둘째 딸은 금새 눈물이라도 뚝뚝 흐를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내게 동물병원에 전화를 하든, 어떻게 하든 이 새를 돕기 전에는 절대 산에 가지 않을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정말 난감했다. 특히 아이들이 “엄마는 교회도 다니면서 어떻게 이렇게 아픈 새를 보며 그냥 갈 생각을 할 수가 있냐”고 말할 때는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19에 전화를 했다. 모르겠다. 왜 하필 그 때 119가 생각이 났는지, 119로 전화하면 이런 위급 상황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19에 전화해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민원 상담하는 곳인 110에 전화를 하란다. 119를 끊고 다시 110에 전화를 하니 야생동물 구조와 관련된 것은 관할 구청에 알아봐야 한단다. 그리고 덧붙여서 오늘이 토요일이라 관련 민원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할 수 있다는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다시 또 영도구청에 전화를 하니, 야생동물 긴급구조대로 연락해 드디어 담당자와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 담당자에게 누워있는 새 사진을 문자로 보내주니 어딘가에 부딪힌 ‘직박구리’라며 상자를 구해 옮긴 다음 잘 보관하고 있으면 오후에 구조하러 오겠다고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하자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상자를 구하는 일도, 새를 보호하는 일도 아이들이 알아서 다 했다. 나는 징그러워 차마 직박구리 근처에 가기도 싫은데 둘째는 맨손으로 그 새를 만지며 상자에 담아 집까지 모시고(?) 왔다. 아이들은 집 앞 놀이터에 직바구리를 두고 눈을 떼지 못하며 긴급구조원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 2시간 후 긴급구조차량(야생동물-천연기념물) 이라는 마크가 붙은 차가 와서 직박구리 상태를 확인하고는 잘 치료하겠다고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그제야 안심하며 놀이터에서 돌아와 밥도 먹고 자기들끼리 직박구리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 작은 해프닝으로 인해 나는‘당황스런 사건을 만날 때 나의 말과 행동’을 직면하게 되었다. 아픈 새를 볼 때 아이들이 한 말은 “어떻게 해서든 구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라는 것이었고, 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며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기를 바랐다. 또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아파 누워있는 새를 보고 그냥 갈 수는 없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집에 데려가서 키울 수도 없지 않냐”며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했다. “할 수 있을 만큼 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쓰지 말라고 했던 문장들을 내가 계속 쓰고 있었다. 그날 밤 혼자 많은 생각들을 했다. 이론과 실제의 간극,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 등에 대해 아이들을 통해 배웠던 점들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육아 15년 차이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들을 통해 오늘도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함을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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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7-23
  • [신앙교육 나침반]세대를 분리하는 예배의 결말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몇몇 교회들은 베이비부머(Baby Boomer) 세대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분리하여 예배드리고 교육받는 시스템의 마련이다. 혁신적인 교회들은 전 연령이 함께 예배드리고 교육받던 형태에서, 부모가 예배할 때 동시에 운영되는 주일학교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부모세대들과 자녀세대들이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각 세대별로 분리된 예배와 교육은 개인의 경건에 매우 유익하다고 판단되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세대를 분리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1부 예배는 40-50대 성도들을 위한 클래식 고전예배, 2‧3부 예배는 현대인들의 취향을 조금 더 배려한 세미클래식한 분위기의 예배, 4부 예배는 20-30대 젊은 세대를 위하여 워십팀과 드라마팀을 동원하여 모던 예배로 드린다. 이러한 세대분리 예배는 회중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켜서 전통적인 형태의 예배보다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ἐκκλε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 부활에 응답하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고린도전서 12장 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의 말씀과 같이 세대와 계층과 문화를 뛰어넘고,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의 몸이 된 신비로운 연합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 안에서 이러한 다양성이 하나 되는 신비로운 연합이 경험되어져야 한다. 예배가 다양한 지체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분리된 예배의 결과는 참혹하다. 세대 간 신앙교류의 부재로 인해 신앙의 공동체성이 약화되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 공동체의 집합이며, 교회 신앙공동체의 붕괴는 작은 단위인 가정 신앙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세대분리예배는 가정 내 부모와 자녀의 분리를 가져오는 비극을 낳게 된 것이다. 세대가 분리되어진 예배와 교육체제 안에서는 신앙의 대 잇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교육학자 존 웨스터호프 3세는 신앙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세대를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자로 받아들이며 끌어들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참된 예배란 1세대부터 3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교류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다음 세대를 통해 잃었던 비전을 회복하고, 젊은 세대의 열정에 참여하며, 앞선 세대들의 역사적 교훈과 신앙의 유산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세대 간의 매듭이 끈끈하게 묶여지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예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예배, 곧 ‘세대통합예배’(Intergenerational Corporate Worship)이다. 세대를 통합하는 예배의 결말은 어떠할까? 세대통합예배의 결말은 ‘가정의 회복’이다. 가정은 예배 안에서 부모와 자녀의 연합을 경험하게 되어 점차 참된 성소로 세워져간다. 온 가족이 하나의 말씀을 담아서, 삶속에서 그 말씀으로 살아내려는 동일한 열망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세대통합 예배는 경건한 가정을 세우고자 하는 교회비전의 심장이 된다. 하나님은 부모세대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자녀세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전수하도록 명령하셨다(신명기 4:9-10). 우리가 자녀세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는 최고의 방법은 예배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세대와 문화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는 예배의 자리에서 비로소 복음의 능력을 몸소 경험하게 되며, 그러한 복음 안에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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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다음세대 칼럼]목사님 제가 꼭 한번 쏘겠습니다
    오늘날 입시 제도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많이 달라졌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가 필수이지만, 봉사 활동과 같은 이른바 ‘스펙’들도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리 저리 방법을 알아보던 중 우연히 ‘밥퍼(밥퍼나눔운동)’를 알게 되었다. 마침 서울 다일교회 담임 목사로 계신 김유현 선배의 도움으로 밥퍼 본부를 소개받고 2010년부터 2017년까지 봉사활동을 했었다. 본부장님이 우리 학생들 20명을 매주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밥퍼 봉사는 매주 토요일 오전 부산 시청 광장에서 노숙인들과 노인들에게 밥을 퍼 주는 사역이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여기에 동참하여 설거지, 식판 나르기, 어르신들 안내하기 등의 봉사를 했다. 섬김의 정신을 배우면서, 아울러 봉사 시간도 덤으로 얻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봉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매주 참석했지만, 학교 업무가 많아지고 다른 봉사 단체와도 연결되면서 매주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학생 중 S를 팀장으로 세워 그에게 밥퍼 봉사의 인솔을 맡기고, 나는 다른 봉사 활동을 진행했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 뜬금없이 봉사팀장으로 임명했던 S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여기 오신 어르신들 밥값이 얼마나 드나요?” 나 역시 모르는 사항이었기에 국장님께 물어보았다. “국장님, 이렇게 어르신들 식사 대접을 하면 하루에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음, 300만 원 정도 듭니다.” 국장님과 내가 대화하는 것을 듣더니 S가 끼어들었다. “목사님, 15년 안에 제가 한번 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저분들께 밥을 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참 귀한 말이다. 그동안의 봉사 활동을 통해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았다. 물론 S의 말이 지켜질지는 이제 7년 후(위의 약속을 한 후 8년의 시간이 흘렀다)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려운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쏠 수도 있고, 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의 목적과 돈을 버는 목적이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S는 앞으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이들의 스펙을 쌓게 해 주기 위한 도구로 봉사 활동을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작은 섬김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있었다. 나는 S가 대견스러웠다. “짜식, 꼭 그렇게 해라.”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걸작이다. “네, 목사님. 오천 명을 먹이겠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가치가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삶의 모토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대학 입시에서 면접관들을 대할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단다. 이는 분명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면접관들이 면접 중에 칭찬하더라는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듣는다. 가치교육은 이런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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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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