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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한반도 트로이 목마
    1501년 1월 로마의 한 언덕 위 포도밭 주인 펠리체 데 프레디스(Felice de Fredis)는 오래된 나무를 파내려가다가 우연히 지하의 작은 방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조각상을 발견합니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작품 '라오콘 군상'이었습니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제사장으로 호메로스에 의하면 그리스 군대가 남기고 간 거대한 목마(木馬)를 속임수라며 반대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트로이 사람들은 라오콘의 경고를 묵살하고 목마를 전리품 삼아 성안으로 들이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그 밤, 야음을 틈타 목마 속에서 쏟아져 나온 그리스인들에 의해 트로이는 패망에 이르렀고, 라오콘 역시 두 아들과 함께 신의 저주를 받아 바다뱀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동시대 인물이었던 플리니(Plinius the Elder, 23-79)가 남긴「박물지(Natural History)」에 언급된 라오콘 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미켈란젤로(1475-1564)는 기록보다 훨씬 뛰어난 실물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었다지요? 그런데 트로이에서 목마를 경계했던 인물은 라오콘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왕의 딸이자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카산드라(Cassandra)도 목마로 인해 초래될 불길한 운명을 예고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녀 역시 망국의 공주로서 적국에 볼모로 잡혀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트로이 목마와 카산드라 이야기를 떠올린 까닭은 최근 벌어진 초유의 사건 때문입니다. 며칠 전 개성공단 내에 위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북측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6. 16. 14:29).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으로 설치된 지 꼭 800일 만입니다. 세계를 경악에 빠뜨린 이번 폭파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북한 정권의 실질적인 이인자로 이른바 백두 혈통이라 불리는 노동당 제1부부장 김여정이라고 봅니다. 사흘 전 “북남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공언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체제 속에서 우뚝 솟은 공동연락사무소를 북한판 트로이 목마에, 폭파를 주도한 그녀를 카산드라에 비한다면 지나친 유비일까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해서 작성한 서사시가 바로 호메로스의「일리아드 오디세이」입니다.「일리아드」는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전사 헥토르를 죽이고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서 전투 현장으로 끌고 다니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따라서 일리아드의 주인공은 유일한 약점이었다고 하는 발꿈치에서 유래한 아킬레스건으로도 유명한 아킬레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오디세이」는 목마를 만들어서 트로이를 혼란에 빠뜨리고 결국 무너뜨리는 주역 오디세우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10년 동안이나 전쟁만큼이나 치명적인 항해를 경험합니다. 이후로 많은 이들이 아킬레우스의 용맹을 '비에(bie)'로, 오디세우스의 지혜를 '메티스(metis)'로 부르며 비교하기를 즐겼는데, 호메로스 자신은 전자를, 로마의 베르길리우스는 후자를 높이 샀습니다. “지능과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적인 영웅주의가 아킬레우스의 팔팔한 영광보다 우위에 놓인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Jenny Clay) 반대의 견해들도 존재합니다(L. Freedman). 남북관계도 그 동안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역사가 오락가락하며 이어져 왔습니다. 2000년, 2007년, 2018년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그로 인한 결과물 특히 판문점 선언이나 평양공동선언과 군사합의서 등이 대표적인 오디세이적인 측면이라면, 여러 차례 시도되었던 북한의 핵실험과 핵개발 및 1999년과 2002년의 1, 2차 연평도 해전 그리고 2010년의 천안함 사건 등은 모두 대표적인 일리아드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편이 남북의 대립을 해소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며 한반도에 통일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고대 그리스 희곡에는 복잡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극적인 방식이 존재했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신이 개입해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일리아드도 아니고 오디세이도 아니요, 인류의 문제는 또한 한반도의 문제는 오직 대주재(행 4:24; 계 6:10)만이 온전하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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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소강석칼럼] 솔방울을 맺는 목회
    오랜만에 바다를 보았습니다. 총회 남전도회가 주최하는 전도대회 첫날 밤 저녁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부안 격포를 갔던 것입니다. 격포 해변의 바다는 옥구슬처럼 맑았습니다. 물결도 잔잔했습니다. 저는 푸른 바다를 낀 산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자세히 보니까 산딸기가 많이 열렸습니다. 어린 시절 따 먹던 산딸기의 추억에 매료되어 손이 가시에 찔리도록 산딸기를 따 먹었습니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추억을 먹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바로 인접한 나무들 가운데 유독 소나무가 지치게 보였습니다. 얼마나 바람을 많이 맞았는지 잎사귀 뿐만 아니라 가지도 상한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 소나무 가지에는 유달리 솔방울이 많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덜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같이 길을 걷는 서광수 장로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장로님, 왜 저 소나무만 저렇게 솔방울을 많이 달고 있을까요?” 그랬더니 서장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나무도 자기 죽을 날을 알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저렇게 솔방울을 많이 맺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서장로님의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같은 지역에 있는 소나무도 바람을 좀 덜 맞거나 지쳐 있지 않는 소나무는 솔방울을 그리 많이 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풍을 직접적으로 맞고 잎사귀와 가지가 상해 있는 소나무는 솔방울을 많이 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그래. 우리 교계도 마찬가지다. 반기독교적 사상의 바람, 교회 생태계를 공격하는 해풍을 느끼면 느낄수록 저 소나무처럼 활동을 많이 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많이 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소나무가 더 기특하게 보이고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해풍을 전면에서 맞으며 행여라도 자신이 너무 힘들어 지쳐 죽게 되면 솔방울을 통해서 다음세대를 이어가도록 하고 그리고 그 자리에 떨어져서 다시 태어난 솔방울은 어미 소나무의 자리를 대신해서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또 소나무가 지치고 힘들게 되면 많은 솔방울을 맺어서 또 그 자리에 소나무 숲을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 순간 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그 순간은 제 자신이 그 소나무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 반기독교적인 해풍과 교회 생태계를 공격하는 폭풍을 많이 겪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판소리의 고장인 남원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풍류의 즐거움과 문학적 감성, 예술적 멋을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도 이 바람을 직접 느끼지 않았으면 제 목회만 성실히 하고 또 개인적으로 문학적 감성과 고고한 예술적 향취를 깊이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저 바다와 제법 떨어져 해풍을 적절하게 맞으며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바다의 정치를 느끼며 지내는 나무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전면에 서 있는 소나무들은 얼마나 바닷바람에 시달렸겠습니까? 가지와 잎사귀는 잔뜩 지쳐 있고 솔방울만 가득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 삶과 목회 사역에 솔방울을 더 많이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솔방울을 맺는 사역 캠페인을 할 것을 다짐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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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성서연구] 가장 무서워해야 할 적
    북 왕국의 요람 왕은 아버지 아합을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약했고, 아람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그나마 이스라엘이 버틴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고, 엘리사 선지자의 역할이 컸습니다. 열왕기하 6장 8절 이하에 보면 아람이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침략했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 군대의 길을 막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아람 왕은 자신들 내부에 첩자가 있어서 비밀 작전이 이스라엘에 알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람의 모든 전략은 엘리사가 하나님을 통해 알았고, 요람 왕에게 알려 아람 군대를 막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엘리사는 잡기 위해 도단성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아름 군대는 도단성을 에워쌌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람 군인들이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드셨고,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성 안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자신들이 사마리아성 복판에서 포로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요람 왕에게 말하여 그들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 후에도 아람의 벤하닷 왕은 다시 침략하여 사마리아성을 포위했는데, 성안에 음식이 떨어져 어머니들이 아이를 잡아먹는 비극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아람 군인들의 귓가에 많은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두려움에 빠지게 하셨고, 아람 군대는 모든 무기와 식량을 버린 채 도망하였습니다. 성 밖의 나병환자들에 의해 이 소식이 성안에 알려져 굶주린 백성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요람 왕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요람 왕이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요람을 죽인 사람은 그의 장수 중 한 명인 예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람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이때는 엘리사도 요람을 돕지 않았습니다. 이때 요람만 죽은 게 아닙니다. 그의 어머니 이세벨도 죽었고, 그의 집안이 몰살하였습니다. 아람의 손에서 건지시던 하나님께서, 그리고 늘 돕던 엘리사 선지자가 왜 돕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요람과 그의 집안의 멸망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는 예후가 왕이 되어 아합의 가문을 심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하 19장 16절 이하입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리고 열왕기하 9장 1절 이하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는 제자 중 하나를 보내 예후 장군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했습니다. 앨리사 선지자는 요람 왕을 도운 게 아니라, 그를 죽일 예후 장군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참 두렵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람 군대로부터 여러 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멸망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손에서 그들을 건질 자가 없었습니다. 위협하는 적이 사람일 때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적이 되면 누구도 건질 수 없습니다. 요람과 그의 가문이 멸망한 것은 그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 때부터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의로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는 등의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대한민국을 에워싼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부패와 죄악과 타락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면, 우리에게 심판의 채찍을 드신다면 누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북한의 무력 위협이 혹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가 생각되어 두렵습니다. 살길은 회개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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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부산기독교이야기] 이승만 대통령과 초량교회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거주하게 되고 주일에는 보통 미8군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그가 부산 초량교회를 방문한 일과 그 때의 사진은 널리 회자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하여 부산에 도착한 날은 1950년 7월 2일 새벽이었다. 일행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비롯하여 공보처장 이철원(李哲源), 비서 황규면(黃圭冕), 경무대 서장(지금의 경호실장) 김장흥(金長興)등 5명이었다. 사실은 이때부터 부산은 임시수도였고, 경남도지사 관사가 대통령의 관저가 된다. 부산 천도가 공식화된 것은 이 대통령이 부산에 온지 50여일이 지난 8월 18일이었다. 여기서 이 대통령의 서울 철수 이후의 이동에 대해 좀 더 부기해 두고자 한다.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날은 6월 27일이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박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이날 새벽 3시 용산역에 대기 중인 특별열차로 남쪽으로 향했다. 사실 이대통령은 국방장관의 건의를 받고도 서울 사수를 고집하며 떠날 수 없다고 외쳤으나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이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다) 참모의 뜻을 따랐다. 참모들의 입장에서 볼 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하다가 북한군에 생포되거나 사망하여 유고가 된다면 최악의 사태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탈출을 건의한 것이다. 서울을 떠난 대통령은 대구에 도착했는데, 전황을 보고받고 보니 너무 일찍 서울을 떠난 것 같아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수행원들의 반대로 대전까지 북상하여 그날 5시에 도청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무쵸 미국 대사는 대통령에게 대전 탈출을 건의했다. 이때에도 대통령은 물론 부인까지도 ‘도망치기 보다는 대전에서 죽겠다’고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군이 대전 북방에서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경북가도는 미군보급로로 사용될 예정이므로 전라도를 거쳐 목포에서 해로로 부산으로 가야 한다는 충고를 받고 7월 1일 새벽에 대전을 떠났고, 이리(익산)에서 특별열차 편으로 목포를 거쳐 그 다음날 진해에 도착했다. 곧 부산으로 이동했고, 일정기간 부산에 체류하게 된다. 그가 부산에 체류하는 기간 주로 미8군 교회당으로 가 예배를 드렸으나, 전화에 지친 피난민들을 만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양성봉 경남지사의 건의에 따라 1951년 4월 29일 주일 낮예배 때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의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양성봉 장로는 이 교회 시무 장로였기에 초량교회로 모시고 온 것이다. 이 때의 담임목사는 한상동 목사였는데, 대통령의 예배 참석을 사전 통보 받은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 서두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르 ㄹ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이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한상동 목사가 즐겨 봉독하던 본문이었다. 이 본문을 읽은 후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때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며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이날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다. 이날 예배를 폐한 후 이 대통령은 담임목사의 안내를 따라 인사하게 되었는데 강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한상동 목사는 ‘아래 강단에서 인사하십시오.’ 라는 말을 듣고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한다. 이날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면 대통령은 한상동 목사를 힐끗 쳐다보고 아래 강단에서 짧은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그 이후 한 번 더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때는 1953년 6월 7일이었다. 대통령의 출석 소문을 들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의자를 정리하고 예배당에 입장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확성기를 설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10일 후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큰일을 앞두고 초량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자신의 결의를 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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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교회학교를살린다] 신앙의 재개발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책 중에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영국의 오래된 민담으로서 아기 돼지 삼형제가 각자 독립을 하여 집을 짓고 살다가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늑대로 인해 첫째와 둘째의 대충 지은 집은 날아가 버리고 셋째의 벽돌집 덕분에 늑대를 물리친다는 이야기이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이 이야기가 자꾸 떠오른다. 이야기 속에서 궁금한 게 있다. 첫째와 둘째 돼지는 자기가 살 집인데 왜 그렇게 부실한 집을 지었던 것일까? 이 두 돼지는 인생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돼지는 집을 짓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인생이 꽃길만 계속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쉽게 내 맘대로 펼쳐지는가? 살아보면 사방이 폭탄이요 지뢰밭이다. 그래서 유명한 드라마 대사가 있다. “회사가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다.” 그만큼 산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만약 이 두 돼지가 인생에서 늑대라는 복병을 곧 만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허술한 집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셋째 돼지처럼 튼튼한 집을 지어 대비를 잘 했을 것이다. 원래 튼튼한 집을 손수 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힘들고 고달픈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셋째 돼지는 평상시에도 안전에 대한 고민, 적과 위협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튼튼한 집으로 대비한 것이다. 이 동화를 아이에게 들려주며 인간에게 필요한 성실성, 현실감각, 미래예측, 자아성찰과 같은 다양한 덕목들을 부모로서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이야기가 비단 미취학 아동의 생활습관을 지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과 같은 대혼란의 재난 상황 속에서 신앙인들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신앙과 삶의 정비가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사실 재난이 닥치기 전에 재난에 대비하는 자세가 이미 우리에게는 필요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학계에서 여러 차례 이러한 재난과 자연재해에 대한 이야기, 테러와 같은 사건 사고를 예상해왔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판데믹이 코앞에서 터지자 그제서야 교회와 교회학교는 대비를 시작하였다. 그나마 대비를 하고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속수무책 손 놓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가 여기저기에서 대비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이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 예배를 준비하고, 교회학교는 가정 중심의 신앙교육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안전하게 모여서 할 수 있는 방안도 계속 강구 중이다. 한국교회 교회학교 다음세대에 대한 위기의식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확실한 재난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충격과 공포를 현실로 맞이하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그나마 나은 것이다. 다시 소를 키우겠다는 의지라도 있지 않은가? 현재 상황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매우 우려가 된다. 많은 교회학교가 현재 제대로 신앙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여름성경학교와 여름행사를 취소하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신앙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다음세대들은 여전히 지도가 필요한데, 어디에서 뭘 하고 사는지 생존확인조차도 안 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된다. 지금이야 말로 신앙교육의 골든타임이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살리기 위해서 뭐래도 해야 한다. 액션이 필요하다. 우리는 안 하면 절반이라도 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하면 끝장이다. 이 사실을 담임목회자부터 인지했으면 좋겠다. 어느 교회는 다음세대들에게 성경공부 자료와 간식 등을 드라이브 쓰루로 전달해주고 가정에서의 DIY성경학습을 독려하고 있다. 또한 어느 교회는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와 찬양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사진과 동영상의 피드백을 받아 서로 공유하며 격려한다. 그리고 철저한 방역과 거리두기, 칸막이 등을 준비해서 안전한 소그룹으로 모여 교재와 성경공부를 이어가는 교회도 많다. 이런 노력들은 대단한 기술이 있어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관심과 노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다. 또 다른 창의적인 노력들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 대비하고 액션을 취하면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는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넋 놓고 있으면 살릴 방도가 없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지금이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를 위한 마지막 신앙의 재개발 기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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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학교를 살린다
    2020-06-24
  • [은혜의말씀] 모든 은혜에 충만하라(고후 8:7, 9:8)
    우리는 말세의 타락성을 탓하고 국가와 사회와 죄인들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이 모든 은혜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충만한 모든 은혜를 받으면, 능히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죄악과 사탄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1. 능히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시오 주인이시오 흥하게도 망하게도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시는 만복의 근원과 수여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요 천산생축이 다 하나님 것이라’ 하십니다.(시 50:10-12) 1) 풍성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하나님’=‘풍성하신 하나님’, ‘야훼 이레’=‘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요1:16-1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충만케 하십니다. 2)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도록 ①모든 일에 넉넉하게 채우시며, ②항상 넉넉하게 채우시며, ③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넉넉하게 채우십니다. 2. 하나님은 누구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십니까? 1)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2) 사모하는 자에게 (시81:10), 3) 구하고 찾는 자에게 (마7:7-11, 요16:24, 렘33:2), 4)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 (고후6:1-2, 고전4:1-2)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3. 모든 은혜란 어떤 은혜입니까? 바울은, 이 모든 5가지 은혜에 풍성하라고 성경에 권면합니다. (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1) 믿음에 충만하라! 의의 선물이 넘치게(롬5:17)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의 역사를 활용하라. 2) 말에 풍성하라! 내 마음에 좋은 말이 넘치게(시45:1), 기쁨이 넘치게(고후8:2), 감사가 넘치게(골2:7), 소망이 넘치게(롬15:13), 3) 영적지식에 풍성하라! 성령 충만하라(요7:37), 내 잔이 넘치게(시23:5), 4) 모든 간절함에 풍성하라! 사랑이 넘치게(살전3:12), 새 포도즙이 넘치게(잠3:10), 5) 연보에도 풍성하라!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님과 바울에게 큰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극한 시련과 가난 가운데,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고후8:1-6) 왜 우리가 모든 은혜에 풍성해야 하느냐?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요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범사에, 육신의 강건함도 받았습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말세의 타락성을 탓하고 국가와 사회와 죄인들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이 모든 은혜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충만한 모든 은혜를 받으면, 능히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죄악과 사탄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1. 능히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시오 주인이시오 흥하게도 망하게도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시는 만복의 근원과 수여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요 천산생축이 다 하나님 것이라’ 하십니다.(시 50:10-12) 1) 풍성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하나님’=‘풍성하신 하나님’, ‘야훼 이레’=‘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요1:16-1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충만케 하십니다. 2)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도록 ①모든 일에 넉넉하게 채우시며, ②항상 넉넉하게 채우시며, ③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넉넉하게 채우십니다. 2. 하나님은 누구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십니까? 1)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2) 사모하는 자에게 (시81:10), 3) 구하고 찾는 자에게 (마7:7-11, 요16:24, 렘33:2), 4)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 (고후6:1-2, 고전4:1-2)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3. 모든 은혜란 어떤 은혜입니까? 바울은, 이 모든 5가지 은혜에 풍성하라고 성경에 권면합니다. (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1) 믿음에 충만하라! 의의 선물이 넘치게(롬5:17)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의 역사를 활용하라. 2) 말에 풍성하라! 내 마음에 좋은 말이 넘치게(시45:1), 기쁨이 넘치게(고후8:2), 감사가 넘치게(골2:7), 소망이 넘치게(롬15:13), 3) 영적지식에 풍성하라! 성령 충만하라(요7:37), 내 잔이 넘치게(시23:5), 4) 모든 간절함에 풍성하라! 사랑이 넘치게(살전3:12), 새 포도즙이 넘치게(잠3:10), 5) 연보에도 풍성하라!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님과 바울에게 큰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극한 시련과 가난 가운데,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고후8:1-6) 왜 우리가 모든 은혜에 풍성해야 하느냐?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요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범사에, 육신의 강건함도 받았습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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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의학칼럼] 안구건조증(2)
    ■안구건조증이란? 안구건조증이란 눈물이 부족하거나, 눈물이 지나치게 증발하거나, 눈물 구성성분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안구 표면이 손상되고 눈이 시리고 자극감, 이물감, 건조감 등의 자극 증상을 느끼게 디는 눈의 질환을 말합니다. 보통은 기후적 특성상 대기가 건조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지만, 최근에는 미세먼지의 영향과 선풍기, 에어컨 바람 등의 영향으로 4계절 내내 환자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구건조증의 증상은 어떻습니까? 눈이 뻑뻑해지고 이물감이 느껴지거나 눈 안쪽이 살짝 가렵거나 혹은 따가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눈꺼풀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빨갛게 충혈이 되기도 합니다. 시야가 살짝 흐려지거나 평상시보다 빛이 눈부셔 보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건조감이 며칠간 지속된다면 안과에 오셔서 진단을 받으셔야 합니다. ■안구건조증의 원인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원인을 크게 나누면 눈물이 적게 나오는 경우와 눈물이 빨리 증발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눈물이 적게 나오는 경우는 노화, 자가면역질환등으로 눈물샘의 기능이 저하되는 것이 있고 눈물이 빨리 증발하는 경우로는 컴퓨터를 많이하거나 스마트폰을 많이 해서 집중하게 되면 정상적인 눈 깜박임을 하지 않고 오래 뜨고 있기 때문에 증발되어서 건조증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마이봄샘질환인 눈꺼풀염증질환에서 눈물의 지방층을 유지 해주지 못해 안구건조증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안구건조증을 방치할 경우 다른 안과질환으로 발생할 수 있나요? 안구건조증을 방치할 경우 각결막염이나 안검염으로 진행되어 만성화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안구건조증이라는 용어보다 건조 각결막염이라고도 하자는 안과학회 차원의 논의가 있습니다. 단순히 건조로만 보기에는 만성화되어 잘 낫지 않는 난치성질환이 될 수 있다고 생각 됩니다. 다른 안질화과 증상도 유사하여 감별하기 곤란하므로 병원에 방문하여 진단을 받는게 좋겠습니다. 특히 백내장과 녹내장등도 눈이 뻑뻑해지거나 이물감을 느끼기 때문에 주의해야겠습니다. ■안구건조증은 어떻게 검사하나요? 안과에 방문하게 되면 우선 증상에 대한 진료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양상으로 증상이 나타나고 불편한 지, 생활방식이나 컴퓨터 사용시간 및 스마트폰 사용시간, 면역질환이나 전신질환이 있는지 복용하는 약제가 있는지도 물어보게 됩니다. 눈의 건조상태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눈물띠의 두께, 눈물 분비량, 눈물이 증발하는 시간, 눈의 충혈, 염증 유무와 눈꺼풀테의 염증 유무가 중요한 검사입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복잡한 검사를 단순화해서 수치로 보여주는 검사장비들이 많이 도입되어 안구건조증의 진단, 치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물층 중 지질층에 대한 검사 및 치료를 하는 장비가 병원마다 도입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위에 안구건조증으로 진단받고 인공누액을 넣으시는 분들이 많던데요, 치료법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인공눈물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증상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인공눈믈은 눈물을 보충하는 역할이지 눈물의 분비를 촉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검사를 통하여 전문의의 처방을 받아야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건조의 원인에 따라 눈물이 부족하다면 인공눈물을 보충해줘야 하고 눈물의 생성을 촉진하고 염증을 조절하기 위해 건조치료제를 사용해야 할 수 있고 심한 경우 안연고를 사용하거나 눈물의 배출을 막고자 눈물이 배출되는 눈물점을 플러그로 막기도 합니다. 그 외 지방층을 생성하는 마이봄샘의 치료를 위해 온찜질을 하고 마이봄샘 입구를 청소하기 위해 짜주거나 안검 마사지등도 시행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병원뿐만 아니라 집에서 직접 홈케어를 할 수 있도록 온열 마사지기구나 세척액이 나와 있으므로 병행한다면 치료가 효과적일 것입니다. ■안구건조증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 안건강에 신경을 써야겠지요. 영양공급을 위해 식품을 가려서 섭취하고 눈을 혹사시키지 않는 생활습관이 중요하겠습니다. 눈을 청결한 상태로 유지하여 염증이 생기는 것을 차단하고 가습기를 사용하여 습도를 올리거나 온열기구의 사용을 줄여 실내온도를 낮추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무엇보다 장시간 독서나 TV 시청,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오랜 사용 및 청소년들의 경우 장시간 게임등은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으니 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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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서임중칼럼] 나는 보았습니다(2)
    얼마 전 편지 한통을 받았다. “목사님과 함께 한 세월이 26년이 되어갑니다. 내가 포항중앙교회에 가족이 된 것이 행복했고, 아팠고, 다시금 축복이라는 꿈을 키우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략) 26년 동안 저는 하나님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세월도 26년이 되어 갑니다.” 잠간 눈을 감고 돌아보니 뚜렷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사람인데 빛바랜 교회요람을 펼쳐놓고 사진을 찾아보면서 어렴풋 누군지 생각이 났다. 포항에서 생활한 20년은 항상 행복했다. 포항을 떠나서 생활하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행복한 하루를 열고 닫는다. 그러면서도 늘 포항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속일 수 없다. 은퇴한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 52주일 말씀 사역을 하면서 변함없는 메시지이지만 담임목사로 시무할 때 언제나 53만 시민들이 포항중앙교회를 어떻게 볼까? 그것을 강조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포항중앙교회를 어떻게 볼까? 그것을 강조했다. 그러기에 내면에는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생활이 연주되었고 그래서 교회는 사도행전 2:47절 말씀처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면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 하나가 요한복음 13:2절이었다. 그래서 늘 다윗이 고백한 시편 51:10~11절을 강조했던 것이고,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는 산위의 동네요 등경위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거울처럼 역사에 세워놓는 목회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피를 흘려 세우신 교회를 어둡게 하는 일이 지상교회에서는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리라.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을 보내던 5월 어느 날, 지금은 담임목회를 하지만 부목사로 함께 동역하던 목사가 문안을 왔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건넨 추억담 한마디가 내 가슴을 적셨다. “언젠가 교역자 주례모임에서 교훈하신 말씀을 평생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신선한 충격과 감동 때문에 지금도 최선을 다하여 凩會가 아닌 牧會를 위한 牧者의 걸음을 걷고자 합니다.” 아들 같은 목사의 손을 잡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지만 수천만 마디 대화가 오갔다. 공감이란, 말은 쉽지만 느낌은 쉽지 않다. 공감할 수 있는 관계는 숱한 미사여구가 필요 없는 사랑이며 행복이다. 삯 값도 못하는 목사 이야기를 종종 듣는 이 시대에 목자가 되려고 몸부림하는 그 마음을 보고 모습을 보면서 고마웠다. ‘본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에 따라서 상황은 180도 다르게 전개된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을 보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보는 각도는 달랐다.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보는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각도는 달랐다. 창녀와 세리와 나병환자를 보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보는 각도는 달랐다. 사도 바울의 목회 현장에서 바울을 보는 뵈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에바브로디도와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부겔로가 보는 각도는 달랐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그 사람의 관점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생각이 은혜로 충만하고, 생각하는 대로 보게 되고, 보는 대로 말하게 되고,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실체는 하나인데 보는 각도는 천양지차가 된다. 일본 교토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할 때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의 천불상을 보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김천 직지사에도 비로전에 천불상이 있고, 해남의 두륜산 아래 대흥사, 지리산 화엄사, 강화도의 보문사 천불전이 대체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교토의 천불상은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불자들은 이 천불 가운데 자기와 인연을 가진 부처님이 딱 한 분 계시는데 그 부처님을 찾는 비결은 먼저 예불을 올리고 눈을 들어 수많은 부처님 중에 나와 첫눈에 딱 마주치는 분이라고 한다. 이 내용의 중심이 무엇인가? 자기 마음에 드는 불상이 진짜 자기와 관계있는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귀히 보시면 그 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귀히 보게 되는 이치를 창세기 39장을 통해 깨닫게 된다. 나는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오늘의 요셉을 본다. 그리고 목회일기장에 오늘의 요셉이야기를 써간다. 그 요셉 곁에는 형들이 있고, 미디안 장사꾼이 있고, 보디발의 아내가 있고, 바로가 있는 것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교회생활을 하는 오늘의 요셉을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것을 나는 본다. 중요한 것은 요셉의 삶의 과정은 간과하고 요셉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결과만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의 요셉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형통한 자가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있는 곳, 그 사람이 함께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 사람이 함께 하는 그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창세기 39장에서는 요셉이다. 그런데 오늘의 요셉은 누구인가? 보디발은 보았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내리심을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복을 내리시는 요셉을 본 보디발은 그 요셉과 함께 함이 자기에게도 복이 됨을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오늘의 요셉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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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통일칼럼] 헌법적 요구로서의 통일
    1948년 8월 15일, 기도로 출범한 대한민국 제헌국회 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언하는 내용이 표기되었고(1조,3조) 그 항목은 지금까지 72년 동안 한 번도 수정되지 않았다. 1948년 12월, 유엔은 이 헌법을 인정하고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선포했다. 그 항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1987년에 추가된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고. 첫째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을 택했으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택하지 않았다. 둘째로, 대한민국 영토는 남한과 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 전체를 포함함을 의미한다.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되어 있는 독립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북한 땅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영토요 북한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북한을 떠나 한국 땅에 입국하는 탈북자라는 이름의 모든 북한주민들에게 즉시 대한민국 여권을 발급하여 한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근거가 바로 대한민국 헌법 3조의 정신이다. 셋째로 대한민국은 김일성주의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섞어 놓은 연방제 통일이 아니라, 오직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근간으로 하는 평화적 통일국가를 지향한다. 헌법 4조의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 안에 김일성(독재)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각각 인정하는 연방제 통일을 전제로 하는 6.15선언이나, 이것을 재확인한 10.4선언은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통일문제는 대한민국의 합헌적, 국가적, 민족적 과제이다. 헌법 66조 대통령의 직무 3항에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정신에 따르는 통일 노력은 대통령의 엄중한 직무사항인 것이다. 정부는 1969년도부터 통일부를 설치하여 지금까지 초중등학교에서 통일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해마다 수백억의 세금을 별도로 책정하여 국민대상 통일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탈북민들의 안정된 정착을 돕고 있다. 통일부장관이 있고, 시도교육청에 통일교육 담당 장학사가 있고, 교육부는 해마다 통일교육시범학교를 지정하여 학교별로 통일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통일교육은 국민적 기본교육이기 때문이다. 분단국가 대한민국 땅에 세워진 한국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통일을 향한 북한선교 사역에 전 교회적 차원에서 진지하고 적극적인 실천을 보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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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성서연구] 시대를 위한 고민을 품고
    세상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이 듭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실체 없는 말들만 난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장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을 구덩이에 내리기 전에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조의를 표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풍속에 따라 1불, 혹은 10불씩 돈을 관 위에 얹으면서 조의를 표했습니다. 한 유대인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보게, 자넨 내게 정말 좋은 친구였지. 난 자네 관에 적어도 50불은 놓고 싶네. 내 마음 알거야. 현금이 없어서 수표를 놓네.> 그는 수표에 100불을 써서 관 위에 놓더니 50불을 거슬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는 사람들 앞에서 50불을 냈다고 생색도 내고, 관과 함께 흙에 묻힌 수표는 돌아올 염려도 없고, 오히려 50불의 수입이 생겼으니, 그의 처신이 얼마나 약삭빠릅니까? 알맹이는 없이 공허한 논리와 체면과 말들만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그 흐름에 삼켜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유대 사회를 보면 이런 실체 없는 거짓이 가득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그 대표적 예 중 하나입니다.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지도자였고, 더구나 종교지도자들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참되게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 평강으로 백성들을 호도했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을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 했습니다. 평강의 메시지는 누구나 듣고 싶어 합니다. 말하기도 좋습니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회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평강은커녕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치기 위해 사용하시는 채찍이었습니다. 얼마 후 바벨론 군대는 유다를 침략해서 약탈하고 포로를 끌어갔고, 주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하여 성전과 궁궐과 성벽을 모두 허물어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시신이 길거리에 즐비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식들이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고, 그 후엔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지도자들은 거짓 평강을 외쳤습니다. 이 무서운 결과에 대해 6장 11-1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처럼 거짓평강을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탐욕과 거짓 때문이었습니다. 6장 13절은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도 거짓 평강이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위태하기 그지없습니다. 북한 핵, 코로나 바이러스, 정직과 양심이 실종된 정치판,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는 교계의 상황 등이 그렇습니다. 이 와중에 교회의 메시지는 어떤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두신 목적은 거짓 평강을 외치면서 눈을 흐리게 하려는 게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잠든 자를 깨우고, 취한 자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 방향을 잃은 자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어야 합니다. 변치 않는 잣대이어야 합니다. 인기가 없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는 행동이 뒷받침되어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고민이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그 고민이 기도가 되어 우리 모두가 가정과 주변에서 작은 예레미야로 살길 원합니다. 어려운 시대인데,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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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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