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7-29(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성서연구]어떻게 빛이 나는가(출애굽기 34장 29절)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란 작품을 아시지요? 남북전쟁 직후에 한 시골 마을에 살던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그런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도 큰 바위 얼굴 같은 부드러운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돈이 많은 부자, 전공을 많이 세운 장군, 유명한 정치인, 글 잘 쓰는 시인들을 만났지만,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작가는 위대한 인생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행이 일치하는 진실한 삶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었음을 말씀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그는 백성 앞에 나갈 때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많은 후보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후보들은 국민에게 큰 바위 얼굴처럼 보이길 원할 것입니다. 얼굴에 빛이 나길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장점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경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되면 국민을 위해 많은 정책으로 훌륭한 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과연 국민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광채를 볼 수 있을까요? 이들의 모습은 모세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후보들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빛이 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얼굴에 빛이 나게 하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 앞에 내려올 때까지 자기 얼굴에 빛이 나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후반부를 보면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빛이 날 때, 그게 진짜입니다. 둘째는 후보들은 자신에게서 빛이 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신경을 씁니다. 넥타이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준비합니다. 말도 품위 있게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국민의 귀에 닿는 공약을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여호와와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을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는 것>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모세의 얼굴에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 안에 외모를 보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목회자를 청빙할 때도 가문, 학벌, 외모, 경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중시합니다. 저는 종종 매우 훌륭한 조건을 갖춘 목회자가 부임했음에도 교회와 목회자가 어려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와 말하는 것>, 즉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핵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빛이 그의 인격과 삶에서 배어나고, 하나님의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모세처럼 가릴 것이며,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고, 늘 하나님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1-07-23
  • [시사칼럼]남겨진 시간을 위하여
    그분이 떠났습니다. 마지막 붙잡았던 손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참 무심히 흘러 벌써 달포가 지났습니다. “2001년 5월 31일, 꼭 기억해주세요. 제가 새롭게 태어난 날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전 나이로 치면 환갑을 지나 중생을 체험한 그는 20년 세월을 한결같이 살다가 새롭게 얻은 고귀한 두 번째 생일을 며칠 더 넘긴 어느 날 홀연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세상은 그를 잘 몰라도, 몇 차례 급습했던 병마의 가공할 기세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불굴의 사람 장 집사님, 일천 명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비장한 사명을 이제는 우리에게 맡겨둔 채로 어쩌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천국 소풍을 떠나셨겠지만, 우리는 그가 몹시 그립습니다. 역사학자 피터 래슬릿(Peter Laslett)은 인생 단계들이 보통은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만 반드시 살아온 햇수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면서 ‘제3연령기(Third Age)’라는 표현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앞선 두 단계와 달리 생물학적 나이나 개인적인 성취를 초월하는 몇몇 행동 요소를 기준으로 삼는데, 앞선 사례와 같이 비교적 노년의 때에 극적으로 맞이하는 신앙적 회심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제3연령기가 점차 부각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 단계를 유의미하게 거치지는 못하고 있고, 현대사회 역시 새로운 이 개념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지침이나 제도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노인의 죽음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사회가 이미 고령사회(Aged Society)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65세가 넘은 인구가 전체의 14% 이상을 차지할 때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제3연령기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기를 선용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기 일쑤입니다. 둘째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 현상 때문입니다. 한 바이러스가 초래한 세상은 특히 노년층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훗날 제대로 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최근 노년층의 일반 장례를 상당히 많이 치렀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사회분위기와 외부 활동의 저하 그리고 교류 단절로 인한 고독감 등도 영향을 끼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모두가 ‘실버 쓰나미’를 두려워합니다. 유례없이 길어진 인간 수명과 그로 인한 인구 초고령화 현상이 우리 사회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거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1980년 서구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오늘날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같은 언론지나 뉴잉글랜드 메디슨 저널 같은 학술지는 물론 정부 문서에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개념입니다(루이스 애런슨, ‘나이듦에 관하여’(Being)). 물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국면인 “제4연령기”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하는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듦이 마냥 두려운 쓰나미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장면을 추모의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감염병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먹을거리들을 잔뜩 챙긴 채로 인근 중학교 하교 시간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손주뻘 아이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시던 장 집사님께서 마지막으로 제게 남긴 말씀은 이랬습니다. “이제 나 대신 맡아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슬퍼하지 마세요. 나는 천국으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만납시다.”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1-07-23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 7, 최의손
    부산 거제리에서 포로들을 대상으로 구호 및 선교활동을 전개한 또 한 사람이 윌리엄 치솜(William H. Chisholm, 1885-1951), 곧 최의손 선교사였다. 미국 미시간주 에머슨(Emerson)에서 1894년 2월 1일 출생한 최의손은 치과의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해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의료선교사를 자원하였고, 1923년 10월 9일 부인 베르타(Bertha Cowell)와 함께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평북 선천지부로 배속된 그는 미동병원(美東病院, In His Name Hospital) 제3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1940년 3월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16년간 활동했다. 미국에서 1920년대 이후 신학논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북장로교에서 분리하여 1936년 6월 ‘정통장로교’(OPC)가 조직되었는데, 최의손은 1940년 3월 북장로교를 탈퇴하고 정통장로교로 이적하면서 병원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는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던 의사였고, 직접적인 복음전도에 관심을 가졌던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선천과 그 주변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운이 감도는 시기, 출국을 권고 받고 1940년 3월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동병원에서 일하는 기간 동안의 자신의 의료 활동 경험을 나누기 위해 뉴욕에서 발행되던 주일학교신문(Sunday School Times)에 한국에서의 의료 활동에 대한 연재를 한 바 있는데, 이 원고는 1938년 한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그 이후 이 책은 여러 판본으로 거듭 출간되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의 생생한 경험’ Vivid Experiences in Korea이란 책이다. 이 책은 2006년 『청진기와 상경에 담긴 새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1940년 한국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그는 1947년 다시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고 부산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고려신학교와 부민동의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부산에서 포로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구제활동은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는 미약했다. 도리어 의료지원이 그의 중심 사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들을 진정한 형제애로 대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체워 주고자 노력했다. 그의 포로전도에 대해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약 측의 서울 신촌 창광교회의 이병규 목사의 증언이 남아있다. 창광교회의 ‘빛의 소리’ 1996년 5호에 게재된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부산에 체류할 때 최의손 선교사와 더불어 포로들을 위해 전도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6.25 사변 때 포로수용소가 두 곳 있었는데 거제도 거제리라는 곳에 하나 있었고 또 부산 동래 거제리라고 하는 곳에 하나 있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최의손 선교사와 목사님 몇 분이 약 2년간 전도 했다. 그중에 처음에는 다 인민군으로 나왔으니까 믿는다고 하지 못하고 나왔지만 우리가 전도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 성경책도 많이 배부를 했고 수용소 안에 들어가서 성경공부도 시켰다. 그래서 그분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 석방할 때 한국에 많이 석방돼서 신학교 하고 목사 된 사람도 많다. 포로수용소에서 전도한 보람을 느끼고 있고 여자들도 포로가 있었는데 그분들도 석방이 되어서 전도부인(전도사)으로 일하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1-07-23
  • [은혜의 말씀]성전된 자기 육체(요 2:13-22)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 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13절)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의 이미지하고는 너무 다릅니다. 분노하시며, 채찍을 휘두르시고, 사람들을 내쫓고, 상을 뒤엎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는, 무서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러실까요? 당시의 유월절 모습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14-16절) 유월절은 이스라엘 전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까지 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먼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부터 제사 드릴 짐승을 끌고 오기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에 쓸 짐승을 사고파는‘매매’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 입장하려면 ‘종교세’를 내어야 하는데, 세겔이라고 하는 유대 돈만 받습니다. 그러니, ‘환전상’이 성전 안에 진을 치고 앉아서 장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부패 구조를 보시면서 참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야 할 거룩한 곳이 욕심을 채우는 시장 바닥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돈 벌기에 눈이 멀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도 있습니다. 바로 편의주의입니다. 요즈음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예배 숫자가 확 줍니다. 주일 낮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예배생활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인들이 왜 대형교회를 선호합니까? 또, 가나안 신자가 급증한다고 합니다. 그런 편의주의는 우리의 영을 죽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점은 물질주의입니다. 유대교는 제사장들의 돈 욕심 때문에 망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교단이 이렇게 난립하고 장로교단만 백 개가 넘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왜 발생합니까? 결국은 지도자들이 눈이 어두워서 틈만 있으면 쪼개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나고, 그래서 이웃 주민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고, 전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그런 일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교의 부패상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교회가 교회다운 본질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잘못을 범하는 교회, 편의적이고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모하는 교회,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묻자(18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19절) 그리고 이 말씀의 진의가 무엇입니까?(2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구약의 성전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니까 자꾸 건물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렇게 예배로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고 교회인 우리는 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도는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재해 계십니다.(고전 3:16)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에,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세상 속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1-07-23
  • [서임중 칼럼]이슬은 밤에 내린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슬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슬은 지표면(地表面) 가까이의 풀이나 물체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생긴 물방울인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즉 야간의 복사냉각(輻射冷却, radiational cooling)에 의하여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이슬은 비록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식물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사막지역 등지에서는 식물의 생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이슬(Dew, 露)이 사용될 때도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축복의 의미로 조용히 내린 이슬이 갈한 식물을 적셔 초목에 생명을 줌과 같다. 둘째는 덧없는 표상으로서의 이슬로 해가 돋으면 금새 증발하여 사라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바알과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이슬과 같으리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이슬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과 같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는 살리는 생명이 된다. 초목이 자라는 데는 물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 이슬은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팔레스틴 지방의 식물과 초목에 있어 이슬은 그야말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슬은 낮에 내리지 않고 밤에 내린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도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다. 역경과 환난, 고난과 아픔, 슬픔과 실패를 만나는 때가 그것이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은 때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의 때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불행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시냇물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그 물 아래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 없는 골짜기를 흘러가는 시냇물은 소리가 없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었다고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다시 온 대지에 빛을 뿌린다.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제비가 죽은 것이 아니다. 겨울이 가면 제비는 봄과 함께 다시 돌아온다. 추운 겨울이라고 앙상한 모든 나무들이 죽은 것이 아니다. 봄 돌아오면 앙상한 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새 생명이 약동한다. 세상살이가 날마다 좋기만 하겠는가? 아니다. 곤고한 날, 실패의 날, 외로운 날, 아픈 날, 고통의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우리 인생의 밤이다. 이 밤 같은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내린다. 캄캄한 밤일수록 빛이 더욱 찬란하듯 우리 인생도 캄캄한 밤일 때에 하나님의 광명한 진리의 빛이 더욱 보인다. 내 영혼이 어두울 때 은혜의 빛이 보인다. 내 삶이 지쳐 어두운 밤 같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것이다. 안동에서 목회를 할 때 대학교수로서 한국 농학(農學)의 권위자인 조 박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 이 일은 어두운 밤과 같은 상황이었다. 대학 강단에도 설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앞이 보이지 않고 살 소망이 끊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절망의 때에 조 박사가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의 아내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오직 믿음으로 남편을 내조했다. 예배 시간이면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축도를 마치고 내려가면 나는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오른손으로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은혜의 이슬이 메마른 그의 영혼을 적셨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메마른 광야 같은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슬처럼 임하며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걷고 말하며 다시 강단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회복되면서 잃었던 영적 생명을 다시 찾았다. 칠흑 같던 잠깐의 어두움은 새 빛에 물러갔고 그들은 안수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아름답게 교회를 섬기며 교수로서 존경받는 사명도 잘 감당하셨다. 필요악이란 말이 있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란 말도 있다. 파스칼의 병약함은 모든 사람의 심혼을 정화시키는 ‘팡세’를 세상에 내놓게 했다. 십여 년을 결핵성 골수염으로 투병한 미우라 아야꼬의 고통은 인간의 본질을 깊이 파헤친 ‘빙점’의 명작을 쓰게 했을 뿐 아니라 병상에서 영생할 수 있는 신앙을 얻게 했다. 부서진 질그릇 같은 훼니 제인 크로스비, 남의 실수로 눈이 멀어 평생 시각장애인이 된 그 가냘픈 여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수많은 찬송시를 썼다. 질고의 대명사 송명희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다. 육신이 병들고 눈물을 음료로 대신하던 고난의 때를 지나며 살 소망마저 끊어졌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렸다. 우상을 섬기는 가정의 아들인 내가 목사가 되었다. 목양길 걸으며 한 걸음도 더는 앞으로 내딛지 못할 것 같은 그 밤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려주셨다. 그 속에서 나는 용서를 배웠고, 감사를 배웠고, 사랑과 소망을 배웠으며, 기도와 겸손을 배웠다. 그렇다. 우리의 삶이 상처투성이로 소망이 없을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메마른 땅일지라도, 비록 육신은 깨어진 옹기 같을지라도, 삶의 자리가 칠흑 같은 밤일지라도, 이슬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날마다 축복을 노래할 수 있다. 인생들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고난의 날들은 어두운 밤과 같지만 그 밤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 밤에도 이슬은 내린다. 그러나 이슬이 내리지 않는 밤이 있다. 구름이 낀 날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구름이 끼여 있으면 은혜의 이슬은 내리지 않는다. 이슬은 밤에 내린다. 구름이 없는 맑은 밤에 이슬이 내린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1-07-23
  • [목회자 칼럼]사가지 축복
    옛 사람들이 인물을 평가할 때에 신언서판(身言書判), 네 가지를 보았다. 그것이 사가지이다. 발음을 강하게 하면 싸가지가 된다. 인물 좋고 말 잘하고 학식 많고 똑똑한 사람을 말한다. 몸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글 솜씨가 뛰어나고 판단력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해도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인생은 네 박자라는 유행가도 있다. 언행심사도 네 가지다. 요한삼서에서는 네 가지 축복이 있다. 첫째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편지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셋째는 형통의 복을 받는 것이다. 넷째는 자녀의 축복이다. 첫째, 요한의 별명은 우뢰의 아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 사랑받는 제자가 되니 변화가 되어 성경을 다섯 권을 기록하고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모친 마리아를 부탁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천국의 비밀을 가르쳤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한 것이다. 사랑의 힘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받지 못할 때 모든 문제가 생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 받은 자이다. 둘째, 요한삼서는 편지이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 오고 불통하면 불행하다. 세 가지 필통이 있어야 된다. 반드시 통해야 되고 느낌(Feel)이 통해야 되고 필기도구를 넣을 수 있는 필통이 있어야 된다. 적자생존이라고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 기록이 기억보다 오래간다. 소통이 어렵고 공감이 부족할 때에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피가 통해야 건강하고 말이 통해야 행복하고 돈이 통해야 부자가 된다. 셋째,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온몸이 강건한 삼중축복, 사차원의 영성, 오중 복음이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더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기는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처럼 복을 받되 다중적인 복을 받는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듯이 복을 받은 자가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고 섬기는 자가 크다. 건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간호하고 강한 자가 더 연약한 자에게 돕는 배필이 된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다.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다. 어떤 애비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으며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 복 있는 사람이 또 다른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영혼이 잘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온 몸이 건강한 것이 순리이다. 신통, 인통, 물통, 사통이다. 모든 것은 영적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나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내가 통하면 인간관계가 풀리고 물질 문제가 해결되고 일이 성사된다. 그 순서가 중요하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관계, 물질관계, 일처리가 순적하게 되고 소화도 잘되는 베스트 컨디션이 되기 때문에 신통하면 인통하고 물통하고 사통하고 밥통 문제가 잘 되어 진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절반 이상이 부정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부정적으로 나아간다. 사고방식이 부정적이고 언행심사가 삐딱하고 까칠해지기 쉽다. 하나님께 은총(은혜와 사랑)을 받고 말씀과 기도로 통하면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주님은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된다. 믿음, 소망, 사랑의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직하며 견딜만하며 사랑스러워진다. 주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넷째,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요한삼서는 기록하고 있다. 아이야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순종, 야곱의 기도가 이어져서 샘곁에 심기운 가지가 담을 넘어서 뻗어나가는 요셉의 축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수천 대까지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미워하고 죄를 짓는 자는 삼사대에 망하는 것이 십계명을 주실 때의 약속이다. 자식농사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녀들이 곁길로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가. 자녀들이 신앙생활 잘하고 반듯하게 의인의 길에 선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소식이 없으리라.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인도하는 전도,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예배, 진리를 파수하는 자녀들이 아름답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부모들의 믿음이 다음 세대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 이후에 솔로몬, 모세 뒤에 여호수아, 엘리야를 이은 엘리사,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처럼 바통이 이어지는 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찾는 자를 만나 주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신다. 주님 앞에 갈급한 심령으로 부르짖을 때 그 중심, 싸가지를 보시고 마침내 복을 내리시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1-07-23
  • [의학칼럼]내 몸의 면역력 방패, 지금 챙겨야 할 비타민·미네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되면서 이제 생활환경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 마스크 착용이 생활화되면서 감기나 폐렴 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고, 알레르기성 비염 등 환절기 증상도 줄고 있다. 직장 회식은 사라진 지 오래고, 모임도 최소한으로 줄었다. 이러한 코로나19 뉴노멀로 우리 몸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운동 및 활동 시간이 많이 줄어 소위 ‘확찐자(갑자기 살이 찐 사람)’가 늘고 있다. 주말에도 외출이 줄어 햇빛 쬐는 시간이 감소했다. 이로 인해 피부에서 비타민 D의 합성이 줄어 비타민 D 결핍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비타민 D의 결핍이 장기화되면 우울감·무기력감·근육통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지금 원인 모를 우울감이나 무기력감, 전신 근육통이 지속된다면 혈액검사를 통해 비타민 D 결핍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운동량이 줄어 신체 면역력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주목해야 할 점은 확진자와 접촉한 모두가 감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개인이 가진 ‘면역력’의 차이에 따라 감염 여부, 감염 후 증상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코로나19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손 씻기,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서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면역시스템 강해야 감염 안 돼 신체 면역력이란 외부의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등과 같은 다양한 균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켜주는 인체 방어시스템이다. 면역시스템이 건강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가 주변에 떠돌아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그럼 신체 면역력이 저하돼 있는 현대인에게 코로나19를 막아줄 수 있는 비타민과 미네랄은 뭘까. 비타민은 비타민 C, D가 있고 미네랄은 아연, 셀레늄이 있다.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제1차 면역반응세포인 대식세포(Macrophage), 자연살해세포(NK cell), 호중구(neutrophil)가 바이러스를 파괴한다. 하지만 면역반응세포가 부족해 관문이 뚫리면 제2차 면역반응세포인 B세포, 림프구가 격렬하게 싸워 염증을 유발하는 사이토카인을 분비시킨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이러한 사이토카인이 심하게 분비돼 폐렴 등의 염증반응을 일으킨다. 즉, 1차 면역반응과 관련된 면역세포들이 충분히 있었으면 염증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1차 면역반응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비타민 C, D와 아연, 셀레늄이다. 비타민 D는 바이러스 종류와 상관없이 몸 안의 유해 바이러스나 세균과 싸울 수 있는 생리적 항생제인 카텔리시딘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면역기능을 총괄해 면역력을 높여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통 성인의 비타민 D 정상 혈중농도는 30ng/㎖ 이상이며, 40ng/㎖ 이상을 유지하게 되면 신체 면역력은 활성화된다고 한다. 한국인의 경우 30ng/㎖ 미만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타민 D의 혈중농도를 40ng/㎖ 이상 유지하려면 초기엔 하루에 3000~4000 IU 복용하든지 고용량 주사(20만~30만 IU)를 맞는 것이 좋다. 비타민 C의 경우 직접 초기 면역세포 중의 하나인 식균세포와 자연살해세포를 활성화시켜 바이러스나 세균을 죽게 해 우리 몸의 염증반응을 억제해 감기나 인플루엔자 증상을 완화해준다.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 증식하는 것 자체를 막아주기도 한다. 바이러스 억제를 위해선 적어도 하루에 총 6g 정도를 세 번에 나눠 복용하는 것이 좋다. 셀레늄은 대식세포와 자연살해세포를 활성화시키고, 면역수용체인 인터루킨2 수용체를 발현시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직접 죽이는 T세포 생성을 촉진시킨다. 직접 NF-kB(염증 신호 전달물질) 활성을 억제해 염증을 제어하기도 한다. 아연도 1차 면역기관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운동은 면역력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지만 1시간을 넘기는 등 지나치면 되레 면역계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약간 빠르게 걷는 것이 좋다.
    • 오피니언
    • 칼럼
    • 의학 칼럼
    2021-07-23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6, 밥 피얼스, 하워드 마펫
    피난민을 구제하고 선교했던 밥 피얼스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좀 더 정리해 두고자 한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한국의 전쟁 실상과 참담한 현실을 보고 전쟁 피난민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집단 학살된 후 방치된 기독교인들, 고아들과 과부들, 버려진 아이들의 딱한 현실을 보고하면서 “이 글이 독자들에게 공분과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가 목격한 피난민의 고통과 처참한 참상을 보고 구호단체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것이 1950년 9월 22일 조직된 월드비전(World vision)이었다. 이 조직은 그 이후 가장 큰 기독교 구제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보고서 작성 외에도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첫 번째 영상이 ‘38선’(The 38th Parallel)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한 영화였다. 두 번째 영상이 1952년 제작된 ‘불꽃’(The Flame)인데, “시대를 초월한 한국 전쟁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독교 영상물”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기록 영화였다. 피얼스는 이 영상을 미국 전역의 교회나 기독교 기관에서 상영하고 피난민들과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미국 전역에서 후원자를 얻게 되었고 월드 비전의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전쟁 이후 월드비전은 한국의 많은 고아원을 지원하고 고아들을 위해 후원의 손길을 보냈다. 구호활동을 전개한 또 한 사람이 하워드 마펫(Howard Moffett, 1917-2013)이었다. 초대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 1864-1939)의 4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여 17세까지 한국에서 성장은 하워드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1948년 31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해군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봉사했다. 그는 이미 군 복무를 마쳤으나 다시 군 복무를 자원한 것이다. 9.28 서울 수복에는 평양까지 가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인데, 의료 분야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아스피린, 페니실린 등 의약품을 제공하고 피난민을 구호했다. 의료 활동은 난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요청이었기에 그는 이런 필요에 응답한 것이다. 또 하워드는 의료 활동 외에도 교육·사회봉사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전쟁 이후 고아와 난민, 전쟁미망인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1953년 9월 제대 후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1956년 재내한하여 대구 동산병원에서 일했다. 1959년에는 동산병원장에 취임하여 일하는 등 학교법인 계명기독대학 이사장,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협동의료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45년간 한국에서 봉사했다. 불과 60병상이던 동산병원을 1000여 병상의 대형 의료원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하워드였다. 그는 2013년 6월 2일, 97세 나이로 미국 산타 바바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유언에 따라 아내 마가렛 마펫 여사와 함께 그해 9월 25일 계명대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장되었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1-07-09
  • [시사칼럼]선한 사마리아인이여 여인인지 확인 바람
    얼마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에서 한 여성이 쓰러졌는데,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남자들 아무도 선뜻 도와주려 나서지를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반 언론들까지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고, 요즘 민감한 주제인 ‘페미-반페미 논쟁’으로 격화될 조짐까지 보였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괜히 나섰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니 그럴 수 있다’는 말부터 ‘남성이 여성을 꼭 도와야 하나’는 의견까지 등장했는가 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일종의 여혐(女嫌)이다’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초 신고자가 “사람이 쓰러졌는데 남녀가 어디 있나요, 남녀 가릴 것 없이 시민들이 쓰러진 분을 도왔습니다”라며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글을 재차 올려서 웃픈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만, “(선정적인 제목까지 쓰면서) 언론이 더 남녀 분쟁을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그의 마지막 언급은 개운치 않는 또 다른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빈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른바 ‘젠더 갈등(Gender Trouble, Judith Butler)’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여당의 유력한 여성 정치인은 자신을 ‘반페미니스트’라고 비판한 목소리에 대해 “내가 문제 삼은 건 남성 배제적 ‘페미의 극단화’를 경계하는 것이고 독선적이고 혐오적으로 오해 받는 페미 현상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반박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격적인 ‘30대 기수론’을 현실화시켜버린 야당의 젊은 대표는 일부 당내 대선 주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여가부(여성가족부) 폐지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갈등 속 폭풍의 눈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상 ‘이대남(20대 남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그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당권을 장악한 이력 탓인지 당내 안팎으로 다음과 같은 반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당의 내부 견제가 ‘이대녀(20대 여자)’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서울신문 김균미). 이러한 움직임들과 관련하여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원래는 나사와 나사 사이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약간의 틈을 의미합니다. 기어나 톱니바퀴가 진행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흐름을 더 매끄럽게 만들어 주지만, 반대 방향으로 가려하면 오히려 심한 소음과 마모 등으로 흐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는 공학적 단어입니다. 그런데 199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Susan Faludi)는 이를 당시 불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대중적 역풍을 상징하는 사회공학적 개념으로 썼습니다. 지금 야당 대표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의 공공연한 반페미적 발언과 태도를 일각에서 ‘백래시 운동’의 일환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상기의 과정을 넘어서 이 단어가 갑자기 정치공학적 개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흔히들 거론하는 몇 가지 이론들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백소영), 이 문제가 더 이상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논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지하고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모색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분야의 고전인『가부장제의 창조』(거다 러너)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는 남자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여자가 만들었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아마도 대부분의 생활 토기들은 여인들이 만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성의 공헌들이 은폐되거나 사라지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역사가 정말 오래 되었겠구나”, 이런 견해를 피력합니다. 읽다 보니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 준 강도 만난 이웃은 남자였을까요? 여인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요?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비유나 상징이었을 터, 그렇다면 그 이후 역사의 현장에서 숱하게 나타났던 연약한 이웃에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퍼뜩 떠오른 재미있는 단상(斷想)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라면 한 마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워있는 그 사람이 여인인지 확인해 보았습니까?’ 선행도 신중하게,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1-07-09
  • [은혜의 말씀]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14)
    요한복음은 성경 중에서도 참 소중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이 우리에게 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권세 있는 말씀으로 교훈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엄청난 사건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격한 것을 여기 요한복음에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요한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합니까? 그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입니다. 아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과 인생들 사이에 최대의 문제는, 소통.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방편을 마련하셔도 그걸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5절)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 14절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이제 조금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 말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18절) 인간은 죄에 빠져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낱낱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운 분인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길을 마련해놓으셨는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참된 중보자가 되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딤전 2:5)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중보자를 필요로 합니다. 중보자의 제일 되는 조건은, 인생의 문제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이해하는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히 4:15) 셋째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마 20:28) 인생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히 9:22) 피를 흘려 죗값을 치러야 사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늘의 권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요 1:12) 이제는 예수님만을 굳게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1-07-0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