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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소수로 살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중병을 앓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청천벽력 같은 말은 아닙니다. 이미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걱정하며 말하곤 했습니다. <어디 안 좋아요? 피곤해 보이네요> 그럴 때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자신도 이상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피곤했고, 여기저기 아팠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짐작을 의학적으로 확인해 준 것이었습니다. 이 환자는 누구일까요?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교회의 무질서, 비도덕적 모습, 본질에서 벗어난 행태를 염려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교회 스스로 증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증세는 이삼십 년 전부터 나타났습니다. <성장이 멈추었다>느니, <전도가 안 된다느니>, <신앙이 형식적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해 왔습니다. 주변에서 성장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혹 성도가 증가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이동 성장이 대부분입니다. 또 아이가 자랄 때는 키와 몸무게가 늘고, 머리도 커지고, 팔도, 다리도 길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만 성장하는 것은 몸은 그대로인데, 한쪽 다리만 길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랄수록 더 고통이 커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계가 개신교인의 감소를 보여줍니다. 통계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한국교회의 병을 확인해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는 코로나19를 겪는 과정에서 혐오 집단처럼 규정되어 더 고통받고 있습니다. 증세가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본래 교회는 사회에서 소수였습니다. 예수님 때부터 소수였고, 우리의 경우 구한말 선교 초기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가장 왕성했던 1980~2000년대에도 20% 주변에서 맴돌았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소수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숫자로는 소수였지만, 심정적으로는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후진 사회였을 당시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의료 등 전 분야에서 교회가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여론 주도층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힘 있는 다수!>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수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소외되는 외로움, 따돌림당하는 설움, 주류가 아닌 아픔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박해당하고, 욕을 먹는 일을 잘 견뎌야 합니다. 이 상황에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이것도 없었을 것이라 여기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큰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작은 회사로 옮기면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구멍가게 주인이 되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어야 합니다. 포기하면 끝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소수로서 잘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선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나 애굽에 비해 작았고, 초대교회 역시 로마 제국 안에서 아주 적었습니다. 그러나 선배들은 소수였으나 포기하지 않았고, 적었지만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생명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으스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웃음만 살 뿐입니다. 그 대신 깊이 기도하고 소자 하나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수라 생각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형식에 흐를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아픔을 느끼며 눈물로 드리는 기도는 진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수라 해서 무조건 인정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오히려 소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금이 귀한 것은 양이 적기 때문입니다. 소수라 낙심하지 말고, 고귀한 소수가 되어야 합니다. 멋진 소수로 정금처럼 존재합시다. 천국은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 중에 십사만 사천 명으로 상징되는 소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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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 [시사칼럼] 유레카, 아예카, 마레카
    최근 한 개그우먼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고(故) 박지선 양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했던가요? 그녀가 몸담고 있던 영역을 넘어 각계각층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장면들은 일면식도 없는 우리들까지 더 슬픔에 잠기게 만듭니다. 많은 이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이 가는 진술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모든 이들에게 깍듯했던 사람,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심지어 자신마저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밝고 건강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 스텝들뿐만 아니라 경비 아저씨들에게도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던 심성 고운 사람, 명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동료들과 책 나눔을 통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더불어 나누려고 노력했던 사람. 한 마디로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사람을 품는 일이 이 세상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 아닌가 하는. 참 좋은 사람이었던 그녀는 햇볕 알레르기(allergy)라는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피조물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 빛이 어떻게 그녀에게만은 독이 되고 해가 될 수 있었을까요? 또한 항상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웃음을 안겨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던 그녀에게 존재했던 그런 내밀한 애환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극복의지를 가지고 무엇보다 낙천적인 마음가짐으로 대처하려 했던 그녀이기에, 결국 우리는 여러 가지 분석보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절감하며 애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길 없는 이런 일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떠올리는 말이 있습니다. ‘피니툼 논 포시트 카파레 인피니툼(finitum non possit capare infinitum)’, 유한은 무한을 채울 수 없다(Augustine),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Calvin), 유한은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문장입니다. 유한한 인생은 누구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모두가 인간의 유한성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속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십시오. 혁혁한 승리를 거두고서도 낙심한 엘리야는 남쪽으로 도피하다가 홀로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서 인생을 포기하기까지 이릅니다(왕상 19:4). 이후에 그는 동굴 속에 숨어서 그 이유를 묻는 신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제 자기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저들은 자신의 생명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깨달은 사실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지요. 바로 뒤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들을 칠천이나 남겨 두시리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어찌 자기 한 사람뿐이었겠으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보내시는 사명자인데 어찌 외인이 그 생명을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결코 엘리야의 무지나 경솔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대체 유한한 인생이 어찌 무한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때, 세미한 소리가 거듭해서 엘리야에게 들려왔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 13) 범상한 물음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마레카’라는 앞부분은, 아담에게 처음으로 떨어졌던 질문 ‘아예카’(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와 더불어 인생의 근원을 물어보는 신적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낙심한 인생은 엘리야만이 아닙니다. 욥도 예레미야도 심지어 자신의 태어남까지 저주하지 않았습니까?(욥 3장, 렘 20장) 우리가 때로 ‘유레카’를 외칠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획득했을 때의 외침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식과 능력을 초월한 무언가를 만날 때 인생은 낙심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런 인생이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아예카’ 그리고 ‘마레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엘리야에게 아직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서 기름을 부어 시리아와 이스라엘 왕 그리고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는 위대한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왜 거기 계십니까? 아직도 남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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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 [의학칼럼] “100세 시대” 대장을 건강하게 지킵시다!
    최근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OECD 보건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7세(남자 79.7세, 여자 85.7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현대 의학의 발전을 비롯한 의료 및 생활 여건의 발전으로 점차 기대수명이 길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100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기대수명이 늘고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성인병, 뇌·혈관질환, 관절질환, 치매, 각종 암 질환을 앓는 인구도 늘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노후를 건강하게 보내기위해, 건강 관련 지식을 자주 검색하고,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 및 건강식품 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3대 사망원인은 암, 심장질환, 폐렴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체 사망의 4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암은 사망률 1위인 질환으로, [2016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전체 인구의 3.4%(남자 3.0%, 여자 3.8%)가 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암 치료 후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특히, 65세 이상에서는 전체 인구의 11.0%(남자 14.5%, 여자 8.5%)가 암 유병자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에는 암에 대한 치료 성적이 개선되어, 암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암은 대면하기 싫은 질병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 대장암은 우리나라에서 최근 암 유병률이 빠르게 증가하는 암들 중의 하나로, [2016년] 자료에 의하면 위암 이어 2번째로 높은 암 유병률을 보이는 암입니다. 대장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대장암을 적절하게 예방, 관리하기 위해서는 대장암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대장암은 왜 생기나요? 대장암의 원인은 환경적 요인, 유전적 요인과 병적 요인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환경적인 요인으로는 대표적으로 식이 및 생활 습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물성 지방 또는 육류 섭취가 많은 경우, 채소와 과일 등의 식이성 섬유 섭취가 적은 경우, 음주나 흡연, 신체 활동 감소와 같은 생활 습관들이 대장암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환경적 요인 외에도 유전적 요인, 염증성 장질환 혹은 대장 용종(폴립)과 같은 병적 요인이 대장암의 발생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장암은 유전되는 병인가요? 대장암의 90%는 가족력, 유전과 상관없이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5% 정도는 가족력을 가지고 유전적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가족 혹은 직계의 가까운 친척 중에 2-3명 이상의 대장암 환자가 있다면, 전문의와 상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치질을 오래두면 대장암이 생기나요? 치질이 변해서 암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항문출혈, 항문통증, 항문돌출과 같은 치질 증상이 있을 때에 스스로 진단하기 보다는 전문의에게 진찰과 상담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50세 이상의 환자가 항문 출혈을 호소하는 경우에는 전문의와 상담하여 대장내시경과 같은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장암이 있으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나요? 직장암이 있으면 항문 출혈, 잔변감, 변비 혹은 설사와 같은 배변습관의 변화, 변이 가늘어지는 증상 등이 나타날 수 있으며, 대장암이 있으면 소화불량, 복부 팽만감, 복통, 체중 감소 및 빈혈과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대장암은 어떤 방법으로 치료하나요? 대장암의 치료법에는 대표적으로 수술요법, 항암화학(항암제)요법, 방사선요법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된 치료 방법은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수술 후에는 종양의 심한 정도에 따라 추가적으로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하기도 합니다. 수술방법은 로봇수술을 포함한 복강경수술과 개복수술이 있습니다. 복강경수술은 개복수술에 비해 수술 후 통증감소, 빠른 회복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거의 70∼80% 대장암 환자들에서 복강경수술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대장암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채소와 과일 등 섬유질을 충분히 먹고, 균형 잡힌 식단으로 식사를 합니다. 동물성 지방, 육류, 튀긴 음식 등을 적게 먹도록 합니다. 금주, 금연을 생활화 합니다. 주 3회 이상, 하루 30분 이상, 땀이 날 정도로 걷거나 운동을 합니다. 암 조기 검진 지침에 따라 검진을 빠짐없이 받도록 합니다. 대장내시경을 주기적으로 검사하여 용종이 있다면 적절하게 제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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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 [성경인물탐구]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른 라합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을 내려놓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줌으로 구원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에 유다 자손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땅 정복 전쟁을 시작할 때에 제일 먼저 이스라엘의 공격 대상이, 된 곳은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이미 애굽과 요단 동편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 성에서도 듣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공격할 때까지 성안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위해 두 명의 정탐꾼을 성안에 보냈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에서 유하게 되었는데 정탐꾼을 잡으려는 자들이 라합의 집을 방문했으나 라합은 그들을 숨겨 주는 기질을 발휘했습니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군대가 여리고를 진멸할 때 라합의 집 사람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했기 때문에 정탐꾼들을 숨겨 주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하여 생명을 걸고 숨겨 줌으로써 여리고 성의 진멸 중에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듣고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심판받아 멸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망설임 없이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여리고 성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라합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를 듣고는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라합만이 믿음의 행동으로 구원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는 믿음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행동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귀신들도 알고 떨었던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증거 합니다. 이는 라합의 행동하는 믿음이 실천되어졌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라합은 여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자신과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모험을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적 결단은 그와 그 가정에 구원의 복이 임하게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큰 결단이 요구됩니다. 때로는 신앙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믿음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결단은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하였던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가운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리를 좇는 행동하는 신앙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라합처럼 하나님을 향한 행동하는 신앙으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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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 [교회학교를살린다] “최고의 교육과정, 성경을 알자”
    일반적으로 교육의 3요소는 교사, 학생, 교육내용이다. 교실이 없어도 이 세 가지만 있으면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세 요소는 중요하다. 신앙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누가 학생인가도 잘 알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존재로서 평생 배우는 입장을 견지해야 하기에 우리는 모두다 학생신분이다. 동시에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교사이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교사 역할을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사이버 세상도 교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교사가 있고 학생이 있어도 가르침의 내용이 없다면 교육이라 할 수 없다. 이 가르침의 내용이 바로 교육과정, 영어로 커리큘럼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에서 성인교사로서 다음세대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독교교육의 내용, 또는 교육과정을 잘 알고 효과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흔히들 교육과정, 교육내용이라고 하면 가장 좁게는 교과서를 생각한다. 그런데 신앙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과서가 무엇인가? 많은 교회학교 교사들이 공과를 첫 번째 교과서라 여기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교과서는 성경 그 자체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학교 또는 주일학교를 통해서 부흥을 경험해 왔었다. 교회학교에 아이들이 넘쳐났고, 여름성경학교는 그야말로 전교회적인 축제의 장이었다. 여름성경학교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여름에 더 집중적으로 성경을 배웠다. 참 열심히 이 일을 감당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돌이켜보면 우리가 성경을 가르치기는 열심히 가르쳤는데, 얕고 넓게, 단편적으로 가르쳐온 것은 아니었나 싶다. 성경을 깊이 있게 묵상하는 훈련이나 성경 그 자체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원래의 의미로 파악하려는 노력보다는 구절을 하나씩 떼어 외우거나 단순히 많이 읽는 위주였다. 아니면 단편적인 이야기 중심, 사건 중심으로 다윗 이야기, 요셉 이야기, 요나 이야기 등등 각각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전달되다 보니 소위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로 꿰뚫는 안목을 가지고 바라보는 능력을 길러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공과를 중심으로 배우다보니 성경이 오히려 공과의 보조물이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교육방법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 효과 있다는 방법을 찾아 순례를 해온 적도 있었다. 어느 교회 교회학교에서 이런 방법으로 해서 부흥을 했다더라 하면 우르르 몰려가 그 노하우를 배워 와서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정작 기독교교육과정의 핵심 중의 핵심인 성경을 깊이 있게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거나 교회 내부의 성도간의 다툼으로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사실 그 뿌리 깊은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선물로 성도가 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성경에 충분히 쓰여 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세상적인 욕심과 명예, 기타 모든 유한한 것들이 쓰레기로 보인다. 세상을 섬기게 되고, 교회 안에서 주인노릇이 아닌 지체로서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삶의 결과물이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한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고, 개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인의 삶도 부익부 빈익빈의 격차가 심해졌고, 앞으로도 더욱 이 격차는 가속화 될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전무후무한 상황 속에서 어떤 이들은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크리스찬처럼 이 세상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고 성경을 더욱 가까이 접하며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며 신앙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 박차를 가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더 아득한 무기력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기독교교육의 최고의 교육과정, 교육내용은 성경 그 자체이다. 노아 홍수의 시대와 같이 타락해가는 오늘날을 바라보며 경각심을 갖고 다음세대를 비롯하여 우리는 이 시기에 기독교교육 최고의 교육과정인 성경내용을 바르게 아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그 자체는 힘이 있어서 우리 다음세대를 가르쳐 변화시키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성인 신앙인들이여, 지금 여기에서부터 성경을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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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학교를 살린다
    2020-11-20
  • [목회자칼럼] 무서워 말고 무시하라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이 생전에 하신 간증을 들어보면 병은 무서워하지 말고 무시하라고 하였다. 간암 수술을 여섯번이나 하고 당뇨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당하며 며칠에 한번씩 투석을 해야되는 자기 몸을 걸레 같다고 표현하면서도 그는 병을 무서워하지 않고 무시하면 된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하용조목사님은 그런 몸을 이끌고 세계를 누비며 선교를 했다. 러브 소나타를 통하여 일본 선교에 힘썼고, 한국 교회에 찬양과 경배 바람을 일으켰다. 두란노서원을 세워 많은 신앙서적을 출판했으며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등 다양한 기독교 문화운동을 일으켰으며 일찍이 연예인 선교를 통하여 전문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건강에 신경을 쓰다보면 오히려 신경쇠약, 과민성 장염, 신경성 두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생긴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 염려증, 과민 반응, 과잉 진료로 병을 스스로 키운다. 세상만사가 마음먹기 나름이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담을 느끼고 압박을 받고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면 병이 되고 암이 된다. 불안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사람의 마음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이 더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점점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욥은 평소에 무서워했던 그것이 드디어 내 몸에 미쳤다고 탄식했다. 그래서 평상시에 두려워하는 마음, 무서워하는 마음을 걷어 치워야 된다. 그 이유는 무서워하는 마음이 가장 악성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어도 으르렁 거리며 덤비는 사자를 보지 않고 눈을 들어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을 바라보았기에 무서움을 극복하고 사자굴에서 살아서 나오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코로나 시대에 마음의 방역, 생각의 방역, 영혼의 방역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은 가까이 하고 사탄 마귀는 멀리해야 된다. 마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빈틈을 주지 말고 성령충만, 진리충만, 은혜충만 해야 된다. 기도할 때에도 의심을 버리고, 두 마음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기도해야 된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사탄 마귀는 겁내지 말고 대적해야 된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 나는 어릴 때 불신가정, 제사가 많은 집안에서 혼자 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복 나간다”, “재수없다”는 샤머니즘적인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혼자 교회를 다니니 온 집안에서 핍박을 하였다.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보니 가족들은 귀신 눈치를 엄청 많이 보면서 살았다. 나는 교회를 다니며 일찍이 주만 바라보고 핍박을 이기는 전투적인 삶을 살다 보니 상당히 담대한 사람이 되었다. 우상을 섬기다가 교회를 다니니 귀신이 꼼짝을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귀신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 “신경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과민한 것이 고통이다. 때로는 무신경하고 무심한 것이 평안의 비결이다. 집착이 정신병의 시작이다. 죄의 강퍅함이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 합리화가 죄이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감정 소모를 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힘을 내어야 된다.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 사역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된다. 갈렙처럼 85세에도 독수리 날개침 같은 청춘이 될수 있다. 하나님만 무서워하고 사람은 무서워 할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365번 나오는데 이것은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된다는 것이다. “무서워말라”는 말은 성경 여러 곳에서 천사가 외친 소리이다. “무서워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마를 금강석 같이 단단하게 만들어 줄테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심장을 만들어주고 큰 사명을 맡기셨다. 죽음을 겁내며 가슴 졸이는 삶을 살지 말고 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자. 괜한 피해의식 때문에 서러움에 빠져있지 말고 설레이는 시간을 가져라.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을 가지고 추월하지 말고 신앙심을 가지고 초월하라. 사람들 앞에서 수다 떨지 말고 하나님과 나만의 내밀한 시간을 가져라. 기죽지 말고, 위축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떨지도 말고, 쫄지도 마라! 하나님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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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 [부산기독교이야기] 한경직과 다비다 모자원 부산서 시작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 널리 알려진 한경직(1902-2000) 목사는 목회와 구제 혹은 목회와 사회사업, 두 가지 영역에서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2년 평안남도 평원(平原) 출신인 그는 오산학교(1919), 평양 숭실(1925)을 거쳐 미국으로 가 엠포리아 대학(1926)을 거쳐 프린스톤신학교(1929)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2년 평양숭인학교 교사 겸 숭실전문에서 강사로 일하던 중 1933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1939년에는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시설인 보린원(保隣園)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였다. 처음부터 이런 시설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김복순 이라는 8살의 장애 아이를 돌봐야 했기에 고아원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보린이란 이름 그대로 이웃(隣)을 보살핀다(保)는 뜻이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사회 복지 사업이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는 등 건국운동에 참여하려 했으나 공산정권의 탄압에서 신앙생활조차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45년 10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했다. 12월 2일에는 베다니교회를 설립했는데 지금의 영락교회의 시작이었다. 곧 그는 신의주에 두고 온 보린원을 잊지 못해 서울 충무로에서 10여명의 고아들을 모아 다시 보린원을 시작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학교를 설립하거나 북한의 숭실대학을 서울에 재건하는 등 여러 선한 사업에 관여하였으나 그는 두 가지 일, 곧 복음전도와 구제에 온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과 빵을 동시에 제공하고자 했다. 해방 당시 서울에서 대표적인 목회자는 한경직과 김치선이었는데, 한경직은 한손에는 복음을 다른 손에는 빵을 들고 일했으나, 김치선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복음만을 외치며 300만구령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해방 후 첫 민족복음화 운동이었다. 해방 후 1949년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내한하여 한경직과 김치선 두 사람과 접촉하고, 9월에는 김치선의 남대문교회에서 집회하기도 했으나 피어스 목사가 한경직과 협력하게 된 것은 한경직은 두 가지 일에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경직과 피어스는 앞에서 소개한 바처럼 공동으로 한국선명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경직은 피어스와 협력하면서 여러 사회 복지기관 설립에 관여하였는데, 그 중 중 하나가 ‘다비다 모자원’의 설립이었다. 이 모자원이 서울에서 시작된 것으로 아는 데 사실은 이 모자원은 전란 중인 1951년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사수하고자 했던 한경직 목사는 피란길에 올라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그리고 대구로 갔고 다시 부산으로 왔다. 9월에는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이 때 피어스 목사를 다시 만났고 이런 연유로 피어스는 피난민과 전재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그런데 한경직은 1951년 부산에서 피난해 온 영락교회 교인들을 주심으로 1월 7일 광복동의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30여명이 모여 부산영락교회를 설립했다. 14일 주일에는 대청동의 고아원인 ‘새들원’ 강당에서 모이면서 교인수는 점점 증가해 갔다. 이런 와중에서 서울의 보린원도 부산으로 옮겨 부산을 본원으로 하고 제주도에는 분원을 두기로 했고, 특히 새로운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했는데 그것이 ‘다비다 모자원’이었다.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온 살길이 막막한 전쟁미망인과 그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를 위해 이사회를 구성했는데, 한경직 목사를 이사장으로, 이사로는 고한규 백영엽 원석화 이경화 이순경 이응화 정용태 최중해였고, 감사는 김행경 윤치호였다. 이 다비다 모자원이 시작된 곳이 지금의 서대신동인 구덕교회에서 구덕산쪽으로 약간 올라가 비탈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자원은 22명의 전쟁 미망인과 82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시작되었는데, 이 사역을 지원해 준 이가 피어스 목사였다. 모자원의 대지는 부산시에서 제공하고, 천막은 군대에서 제공해 주었다. 그 외의 필요한 경비는 피어스 목사가 제공했는데, 미화 700백 달러를 제공해 주었다. ‘다비다 모자원’의 다비다는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언급된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의 이름이다. 다비다는 아람어식 이름인데 이를 히브리어로 말하면 도르가인데, 이름의 뜻은 ‘눈이 아름다운 양(羊)’이란 뜻이다. 이 모자원에서 처음으로 보호받은 여성인 30세의 백옥현과 어린 4딸이었다. 백옥현의 남편 김창화(1915-1950) 집사는 평북 의주출신으로 선천의 신성중학교, 평양사법에서 수학하고 교사로 일하던 중 1946년 3월 월남했고, 서울사도부속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하던 중 6.25 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인인재판 끝에 총살된 진실된 믿음의 사람이었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부인은 부산으로 피난 와 다비다 모자원에서 보호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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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 [서임중칼럼] 말 하는 대로 된다
    포항에서 사역할 때 TV를 시청하다가 눈과 귀를 쫑긋하게 하는 광고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포스코>라는 광고인데 이것을 자꾸 보고 듣다보면 포항제철은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된다. 내가 아는 고 박태준회장의 정신을 함께 느끼게 한다. 그것이 광고의 힘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라는 광고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이 광고 때문에 초등학교 시험 문제에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 이라는 문제에 많은 아이들이 침대에 동그라미를 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만큼 광고효과가 크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듣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생활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옷을 입고 표현되는 것이 말이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삶과 신앙을 표현한다. 얼굴이 마음의 거울이듯 말은 생각의 거울이다. 여의도 1번지를 두고 쉽게 표현하는 언론의 보도는 선량(選良)의 센터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선택된 양심의 센터에서 날마다 방송 뉴스에 표현되는 그분들의 언어는 차마 듣기에 민망스럽기 그지없는 말들로 생생하게 안방에까지 여과없이 전달된다. 그러다보니 이 나라 입법기관은 좋은 법을 만들어내는 센터가 아니라 비아냥, 폭력적, 폄훼, ‘아니면 그만’이라는 타락한 언어문화를 만들어내는 센터가 되어가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아파하는 것이다. 잠언 6:2절은 말의 위력에 관해 교훈한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민수기 14:28절에서도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셨다. 마음이 후들거리는 무섭고도 중한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하여 시나이 반도를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왔을 때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가나안으로 보냈다. 정찰을 마치고 40일 만에 돌아온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대성통곡을 한다. 왜냐하면 정탐한 그 땅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땅이라고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민수기 13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결정적인 내용이 그 땅을 악평한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땅을 악평하여 말하기를 ‘거주민을 삼키는 땅, 그 땅의 거민은 네피림의 후손으로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 같은 존재라’고 했다. 역설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올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앙에서 표현된 말이다.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이 일어서서 변론을 한다. “우리가 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 증거로 혼자 들고 올 수 없는 만큼의 충실한 포도송이를 보라. 그 땅의 사람들이 거민(巨民)인 것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은 우리의 밥이 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 땅은 우리 민족이 거할 땅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말도 그렇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며,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말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다. 좋은 생각을 갖고 있으면 좋은 말이 나온다. 건강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 말이 건강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마음이면 믿음이 있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악평을 한 열 명의 결과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없는 역사를 만들었다. 믿음 없음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40년을 광야생활을 하면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게 하셨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시는 것이 불신앙적 언행이다.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지도자는 말을 잘 해야 한다. 내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건강해질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은 그 사람의 신앙이다. 인격이기도 하고, 사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말에 대하여 끊임없이 교훈하며 경고하고 있다. 핵심은 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까지도 다 들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내가 말 하는 대로 행하신다(민14:28). 원망하면 원망할 일이 되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했더니 그대로 되었다.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붙여 꾀는 말을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 한다.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한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하는 것을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한다.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는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한다. 거짓말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서동부언(胥動浮言)이라 한다.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을 때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한다. 터무니없는 말로 헐뜯거나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미는 것을 중상모략(中傷謀略)이라 한다. 과장해서 말함을 침소봉대(針小棒大)라 한다. 이런 말에 익숙하면 안 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고린도후서 14:19절의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는 교훈을 일상의 언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깨달은 마음의 다섯 마디가 무엇인가? 기도, 찬송, 축복, 감사, 아멘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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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3
  • [소강석칼럼] 영적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라
    마케팅 전문가이신 최명화 교수의 ‘지금 잘 팔리는 것들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명화 교수는 저에게 일정영역에서 자문역할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책에서 코로나 사태 때부터 이 세상은 새로운 부족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예견을 했습니다. 그는 실례로 마켓컬리를 예로 듭니다. 마켓켈리의 샛별 배송을 550만명이나 이용을 하는데, 이거 역시 새로운 부족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20만명이 골수 팬덤을 이루면서 마켓컬리의 직원처럼 충성을 합니다. 옛날에는 파레토의 법칙이 대세였다면 지금은 골수 팬덤의 원리가 대세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고객 중 2%만 확실하게 잡으면 2%가 20%를 움직이고 20%는 80%를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CEO는 먼저 제품을 팔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믿게 하고 제품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이루려고 한다고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교회도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미 공간의 권위, 전통과 제도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때 흑사병이 닥쳐서 사람들이 모이지를 못하니까 공간과 전통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코로나 초기 때부터 이러한 현상을 간파하고 공간 공동체를 넘는 역설적 영적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코로나가 광풍처럼 몰아칠 때 당연히 현장예배를 지키면서도 한국교회 최초로 화상 줌 예배를 도입했습니다. 공간을 초월한 역설적 영적 커뮤니티를 이룬 것이죠. 그러자 유튜브로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이 유튜브 예배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와 현장예배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대본의 지침과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도 평일에 끊이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자유롭게 릴레이 기도회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들 스스로 온라인으로 성전사모헌금을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일에 온 분들은 평일에 교회에 와서 드리고 어떤 주일날 교회 주차장 입구까지 헌금을 드리며 교구 교역자들의 기도를 받고 돌아가서 유튜브로 예배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현장에 모인 공간 공동체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더 뜨거운 영적 역설적 공동체를 이룬 것이죠. 그러니까 이 어려운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 교회는 결코 재정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운영 뿐만 아니라 총회를 준비하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저는 클래식한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저의 온 몸으로 설교의 온도와 몸짓, 눈짓을 다하여 몸부림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2%의 골수 팬덤 성도들이 20%를 움직였고 그 20%가 온 성도들을 움직인 것입니다. 예배 때면 화상 줌과 유튜브를 통하여 온 성도들이 함께 웃고, 울고, 감동하는 영적 역설적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최명화 교수님의 말대로 새로운 부족사회가 온다면 저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붙잡으면서 우리 교회를 더 응집력이 강한 새로운 영적 역설적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사랑하는 새에덴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전히 꼰대의식에 사로잡혀서 코로나 이전의 모습만을 지키려고 했더라면 우리 교회는 오늘의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 역설적 교회를 이룬 교회는 코로나가 종식되고 대면사회가 오게 되면 코로나 이전의 교회보다 훨씬 더 폭발적인 강력한 슈퍼 처치로 재탄생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적 역설적 슈퍼 처치를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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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3
  • [성서연구] 말씀, 사랑과 순종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교제의 매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잘 듣고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아멘. 여기서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등의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말씀으로 이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떠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본문은 말씀을 통한 신앙생활의 모델을 보여주는데,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우선 말씀대로 신실하게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창세기 21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신 바 있지요. 창세기 18장 14절을 보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 말씀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말씀을 그대로 이루심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사라를 돌보시고 행하신 결과, 창세기 21장 2절을 보면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을 때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때는 약속이 되고, 사람이 그 말씀을 받을 때는 명령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21장 4절을 보면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 10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로써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려면, 즉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하고, 그 말씀대로 준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신뢰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말씀대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말씀과 삶이 따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10월 25일은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주일이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교회들이 들썩였던 데 비하면 올해는 너무도 조용합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말씀으로!>의 기초에 서 있습니다. 우리 개인과 한국교회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출발점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펼칩시다. 읽고 묵상합시다. 그리고 믿읍시다. 그대로 될 줄 신뢰하고 행동합시다. 그리고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순종합시다. 어린 아이같은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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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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