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6-28(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소강석칼럼] 휠체어가 날개가 되다
    제가 예전에 명성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대통령 취임식에서 지휘하셨던 차인홍 교수님께서 지휘를 하고 바이올린 연주도 하며 미니콘서트를 하는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님은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걸을 수 없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부모님이 도저히 키울 수 없어서 재활원에 보낼 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재활원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바이올린을 접하게 됩니다. 끝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춥고 냄새나는 연탄 광에서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4세의 나이에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라이트주립대학교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교수가 되었 습니다. 제가 그분의 간증과 연주를 듣는데 너무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사님을 잘 압니다. 미국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갈 수 없었는데 새에덴교회 유튜브로 함께 예배 드리며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감동이 되어서 “저희 교회에도 한번 초청을 하고 싶으니 다음 주에 당장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교회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급하게 약속을 잡았어요? 다음 주일은 그다음 날이 6월 6일 현충일이어서 적지 않은 성도들이 금요일부터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주일예배만 드리고 오후에 휴일을 즐기러 갈 수 있는데 저녁예배에 성도들이 얼마나 오겠습니까? 교회 체면도 있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생각해 보니까, 집사람 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순간 저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차인홍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날짜를 옮겨 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지’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계획한 대로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차인홍 교수님께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요. 드디어 차인홍 교수님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성가대 지휘를 하시고 간증도 하고 연주를 하시는데 정말 큰 은혜와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분이 바이올린 연주만 해도 눈시울이 젖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그런지 몰라도 그분의 연주에는 삶의 애환이 느껴지고, 깊고 여리고 뭉클한 감동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할 때는 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정말 위대한 인생 역전이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이다.’ 차인홍 교수님은 간증하시는 내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님의 일생은 하나님 은혜와 그분의 최선이 만남으로써 위대한 걸작품을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달변가도 아니고 뻥을 치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순수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 그분이 쓰신 저서 ‘휠체어는 나의 날개’라는 제목처럼 두 다리를 못 쓰는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었고, 휠체어가 하늘을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가 된 것입니다. 그날은 아무래도 연휴가 있는 주일 저녁이라 더 많은 성도들이 오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많은 성도들이 오셔서 은혜를 받았고 주일 저녁이었지만 유튜브로 3,4000명 내외가 참여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약점이 없고 절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에게는 연약한 다리가 삶을 반전시키는 힘이 되었고, 휠체어가 오히려 인생의 날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약점이 강함이 되고 휠체어와 같은 불편함이 날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날아오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2-06-24
  • [시사칼럼]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제 코로나사태는 진정국면에 들어섰지만 다른 측면으로 세상은 또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이언트스텝(giant step)’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연준(Fed)의 금리인상조치가 있었고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라 불리는 물가상승현상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도사태에 직면한 국가들이 속출하고 있고,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과 내전과 전쟁의 위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문화평론가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러한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지금은 아주 흔치 않은 시기입니다...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제가 고른 키워드는 불안정상태(precarity)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아주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소득은 들쑥날쑥했고, 고용 상태는 불확실했으며, 이제 건강마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안 개념으로 “안전(security)”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어떤 “안전”인가가 중요합니다. 역사상 가장 안전해 보였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안전은 뭐니 해도 강력한 군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는 말이 탄생했는데, 이 평화를 지탱하는 힘은 다름 아닌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로마 시대에 오신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평화이자 보다 본질적이고 진정한 평화를 이 땅 가운데 구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곧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개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모든 담과 장벽을 허무셨고, 정복이 아니라 정복당하심으로, 지배가 아니라 지배당하심으로, 승리가 아니라 패배 당하심으로,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고 스스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평안(평화)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평화)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1207년 아시스라는 곳에 살던 25세의 청년 프란치스코(1182-1226)는 어느 날 십자가 밑에서 신성한 음성을 듣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지어라!” 그래서 맨손으로 흙과 돌을 나르며 교회를 보수(補修)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세상을 위해 역시 부패해버린 교회를 향한 혁신의 명령이었습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그는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s)’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표방한 바는 본질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본연의 사명을 저버렸던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병폐에 대한 가장 획기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비록 ‘개혁’이란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그는 무너져 가는 교회와 곪아가고 있던 세상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지는 거룩한 개혁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병을 앓고 있는 거지의 모습을 한 신비로운 존재의 방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깨달은 바로 남긴 기도가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문을 의지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는 세력이나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통해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저 멀리서는 전쟁의 포성소리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고, 점차 그 전선이 확대되려 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평화를 깨뜨리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눅 2:1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 땅에 당신의 평화를 이루어 주소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라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평화가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 사이에 당신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일을 위해서라면 오 주여, 우리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간절한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6-24
  • [은혜의말씀] 애굽에 내린 재앙(5) - 우박 (출9:22~26)
    지금까지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나 같은 말씀을 전하여도 바로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로를 한 번에 끝내시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긍휼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14절) 하나님은 계속되는 재앙을 통해 바로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에게 조차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같은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아무리 큰 시련과 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우리가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바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이러한 교만과 불순종이 우리 믿는 자의 거울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이런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내 생각과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깨닫고, 우리의 의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의 독특한 점은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주셨다는 것입니다.(19절) 그런데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20, 21절) 결과는 어떻게 되지요? 결국 결과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자신을 얼마만큼 잘 보호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자, 드디어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자, 우박과 함께 천둥 번개가 애굽 온 땅을 어지럽게 합니다.(23, 24절) 하늘에서 불이 내려 땅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만 이러한 우박의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계 16장)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25절) 우리 안에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구별되어,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지는 줄 믿습니다. 바로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27절) 그러나 이 고백은 진실된 회개가 아니라, 죽음의 위협에서 나온 일시적인 반응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변화가 없는 삶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변화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진정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6-24
  • [교회음악]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갱신과 회복을 소망하며(2)
    오늘날 희미해져가는 예배와 찬양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적을 무척 부담스러운 판단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워질 방법은 찾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는 종합적으로, 복합적으로 생각한다고는 하나 그렇지 못하고 편협하거나 단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에 관하여서는 끊임없는 고민과 변화를 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예배와 찬양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정확한 답은 성경에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의식행위 즉 예배와 찬양을 위하여, 이것을 제대로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아예 한 지파를 통째로 그 일에만 전념토록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이 당신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또 중하게 여기시고 좋아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다양한)을 강조하고 이를 행할 것을 권고하시고 명령하셨는데 사실 이것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바르고 진실되게 행하였을 때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크고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이자 책임인데 더할 수 없는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배만 잘 이뤄진다면 속된 표현일지 모르나 개인은 물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사형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거룩한 백성으로 풍성함을 누리며 우아하게 이 땅위를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잠깐 시간을 되돌아보면 음악적으로 바로크시대, 고전시대를 지나면서 예배에도, 그 속에서 행해지는 음악 즉 찬양의 경향도 많은 변화와 함께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 의식에서나 음악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졌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낭만시대를 거치고 현대에 와서는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윤택하여졌으며, 믿는 자의 수가 나날이 더하여지고, 세상은 주의 뜻대로 바르고, 정의롭고, 평안하여졌는가? 그 반대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음에 주목하고 긴장하는 것이다. 축약한 시대현상의 요약이지만 실로 수많은 일들이 교회공동체 내외로 일어났다.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부정적이고 교회답지 못한 사건들도 실로 많았다. 지금으로서는 한마디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상황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혹이라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까 고심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영적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 그럴듯한 탈을 하고 교회공동체로 들어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심각성을 가지고 오늘날 반듯이 유념하고 경성하여 주의해야할 일이다. 영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기에 따라 이해와 해석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영적으로 매우 지혜롭고, 맑았음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그 어렵고 힘든 사명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신실한 예배자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확신한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았으니 무엇이 무섭고 두려웠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너무나 나약하고, 맥없고, 힘없는 크리스챤들은 혹 아닌가? 이 시대에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 아니 지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별히 예배와 찬양의 갱신은 반듯이 있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형식의 변화를 포함한 예배 속 음악의 사용도 심도있게 고려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모든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집중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절실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소원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음악칼럼
    2022-06-24
  • [목회자칼럼] 감정과 행동 사이에는 ( 괄호 )가 있다
    신약과 구약 사이에는 신구약 중간사가 있고, 눈과 눈 사이에는 미간이 있다. 그렇다면 사건과 행동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감정과 행동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사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짜증을 내면서 투정을 부린다. 이런 상황일 경우, 아내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니, 하루 종일 밖에서 잘 있다가 집에 오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왜 짜증을 내요? 내가 집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고... 내가 당신의 짜증을 받아주는 사람이에요?”라며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는가보네요. 일단 내가 준비한 맛있는 저녁 먹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요”라며 남편의 마음을 읽고 감정을 풀어주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아내가 더 큰 소리로 화를 내자 남편은 마음의 문과 함께 자신의 방문도 닫아버리며 화가 난 행동을 보였고, 후자의 경우, 감정이 풀어지자 다시 온화한 모습으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일상의 저녁으로 돌아왔다. 이 예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감정을 받아주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물질, 시간과 같은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단지 화나고 억울한 감정을 읽어주고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의미치료(logo therapy)의 주창자는 빅터 플랭크는 자신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힘, 자유 의지 등의 선택이 있으며 우리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 행복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에 던져진 명제 앞에 돌아가 생각해보자. 빅터 플랭크가 말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고, 결국 그 선택으로 인해 인간이 행복해 진다면, 감정과 행동 사이 역시 선택이 존재해 그 선택으로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온 종일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며 자신의 시간은 전혀 없이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복잡해 질 때, 즉 슬픔과 절망이라는 감정과 앞으로 살아야 할 행동 그 사이에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수없이 많이 있다. 슬프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더 괴로워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프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발전적인 무언가를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감정을 떼어낸 후,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들을 생각한 후, 행동을 내린다면, 즉 감정과 행동 사이에 선택을 넣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어진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청소년 교육과 치유’란 뜻을 세웠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앞에 감정과 행동 사이에 갈등할 때마다 청소년의 뜻을 생각한다. 목회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에도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생각하고, 앞을 향해 한창 달려가고 있을 때도 틈틈이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돌이켜본다. 결국, 이 선택이 상황을 뛰어 넘어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힘의 원동력이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감정과 행동 사이에 있는 이 괄호( )가 여러분들의 내일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알고 바른 선택의 분별력을 가지길 바라본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6-2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기도운동
    6.25전쟁 기간 중 부산에서 시작된 두 가지 사역은 회개와 자숙을 포함한 거 교회적 구국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대한민국을 공산지배로부터 보호하며 전쟁의 승리와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하는 구국운동이었다. 또 이 시기 시작된 군목 활동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지 부산에서 거 교회적 기도운동 그리고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긴 후 후퇴를 거듭하여, 대전(1950. 6. 27), 대구(7. 16)를 거쳐 8월 18일부터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대구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자 부산에는 각처로부터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피난민들의 도시가 되었다. 1951년 8월 당시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380만 명, 가옥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은 402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피난처가 부산이었다. 부산은 피난민들의 도피처였고 신자들에게는 이른바 ‘의의 피난처’였다. 그런데 부산의 초량교회와 중앙교회 등에서 기도회가 개최되고 회개운동이 전개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목사와 친분 있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해방 후 교회 쇄신운동을 지지하던 이들이 주로 회집했고, 부산중앙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그 외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회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서 회개와 자성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기도회 혹은 구국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때는 서울이 함락된 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부산과 그 인근지역만이 적의 수중에 놓이지 않았던 위난한 때였다. 이때의 기도회를 혹은 ‘회개기도회’ ‘회개운동’ 혹은 ‘구국기도회’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피난 해 온 성도들, 그리고 피난교역자들이 포함된 회개집회 및 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이름 그대로 전란(戰亂)에서 나라를 구해 달라는 ‘구국기도회’였다. 전자의 경우 중심지역이 초량교회였고, 후자의 중심교회가 부산중앙교회였다. 물론 이 두 기도운동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전시 하에서의 기도회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한 기도가 제외될 수 없었고, 구국기도회에서도 회개와 자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량교회 양성봉(梁聖奉) 경남도지사가 부산 초량교회 장로였으므로 초량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기도회는 1950년 8월 말 시작되었는데, 집회시간은 일주일로 하되 새벽기도, 낮 성경공부, 저녁 집회로 진행되었다. 김치선, 박윤선, 박형룡, 한상동 목사가 강사였다. 오종덕 이학인 목사 등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이 집회의 모든 경비는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부담했다. 이 비상기도회에서 특히 박윤선 목사가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설명하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해방 후의 교회 분열과 대립, 그리고 신자답게 살지 못한 일에 대한 회개와 통회 운동이 일어났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날 새벽기도회 담당이었던 나는 설교도중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대해, 즉 그가 총회석상에서, 만주에서, 옥중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사실을 증거 하였다. 그 시간에 나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였다.” 이 때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교역자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회개하는 기도로 이어져서 그 집회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하는 나 자신부터 내 죄를 회개하면서 증거 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즉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적으로 고백하였던 것이다.” 원래 기도회는 1주일간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집회의 연장을 원했다. 그래서 집회는 일주일 연장되었다. 이때는 부산만이 아니라 울산과 온산 지방 교역자들도 합류한 가운데 계속되었다. 부산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고, 박형룡은 이곳에서도 강사로 활동했다. 초량교회에서의 약 2주간에 걸친 기도회가 끝나는 날 신문 호외가 배포되었는데,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알리는 호외였다.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성공률 5천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라고 믿었다. 1.4 후퇴 이후에도 부산에서는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초량교회에서의 나라를 위한 기도회는 수일간 계속되었다.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 이승만 대통령이 초량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기독교인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06-24
  • [서임중칼럼]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
    제 8대 6.1 지방선거가 끝났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거도 희비의 쌍곡선을 긋는다. 이즈음이면 먼저 떠오르는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있다. 승패야 선거의 결과지만 과정을 지켜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이기기 위하여 분수를 잊고 도를 넘어 난장판이 되는 경우는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다. 8대 지방선거의 선거운동도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태는 여전했다. 그러기에 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언론은 ‘정치무관심증의 국민정서’라고 평했다. 4년전 지방선거결과의 지형은 한반도가 ‘파란색’으로 뒤덮였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오늘에는 붉은색으로 그 지형의 색상이 바뀌었다. 그냥 모든 것이 헛웃음만 나오는 한국정치의 단면도를 보면서 마음이 슬프다. 여러 평론 가운데 패자에 대한 언론보도의 머리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명분 없는 출마, 이변 없는 패배, 빛바랜 희생론, 반성 없는 사과>라는 내용의 제목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부분의 내용은 <내 탓이오>는 보이지 않고 <네 탓이오>였다. 선거 결과는 승패를 따라 희비가 이어지겠지만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가 승자를 축복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은 아직도 피지 않음에 국민은 아파한다. ‘명분(名分)’이란 ‘신분이나 이름에 걸맞게 도덕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명분을 거꾸로 읽으면 분명이다. 분명이란 틀림없이 반듯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정시(正視), 정사(正思), 정언(正言), 정도(正道), 정행(正行)이 일상이 된다. 사람마다 삶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이 좌우될 수도 있다. 곧 흥망성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시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촌음(寸陰)을 아껴 쓴다. 신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범사가 힘들어도 신의(信義)를 생명처럼 여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팔아먹는다는 속언(俗言)이 있다. 사랑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죽는 것 또한 행복으로 여긴다. 권력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당연시한다. 명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대의(大義)를 생명처럼 여긴다. <명분 없는 출마, 이변 없는 패배, 빛바랜 희생론, 반성 없는 사과>를 읽으며 가슴 아픈 싸한 통증을 쓸어내린다. 어느 때보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즉사생(必死卽生 必卽死生)>의 명언이 생각난다. 공자보다 약 100여년쯤 후의 인물로서 맹자처럼 전국시대에 활약한 사상가 장자는 호방자재(豪放自在)한 명문(名文)으로 장자 33편을 남겼다. 각의편에서 장자는 이렇게 깨우쳤다. ‘衆人重利 廉士重名 賢士尙志 聖人貴精, 즉 대중들은 이익을 중시하고, 청렴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존중하여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명예와 염직(廉直)을 중시하며, 현인들은 높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중시하며, 성인들은 정(精) 곧 정신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며 깨끗하고 맑고 참되고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뜻하는 문장으로써 이를 중시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무슨 일에든지 유혹이 있다.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명분을 중시함으로 유혹을 극복하지만 명분을 중시하지 않으면 온갖 유혹에 스스로의 삶을 무너뜨리게 된다. 가인은 장자의 명분보다 팥죽 한 그릇을 중시했고, 엘리는 제사장의 명분보다 패역한 아들들을 중시했다. 삼손은 사사의 명분보다 들릴라의 악한 꾐에 넘어갔고, 발람은 발락의 물질에 현혹되어 넘어졌으며, 웃시야는 직분의 명분보다 분향에 유혹 되었고, 가룟 유다는 제자도의 명분보다 은 30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넘어졌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명분을 중시했던 노아는 세상즐거움을 거절했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으며, 다니엘은 고량진미(膏粱珍味)의 유혹을 거절했고,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거절했다.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판가름 난 역사의 교훈이다. 은퇴 후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자비량집회를 인도하면서 후배들의 목회현장 아픈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즉 명분 없는 논쟁에 지치고 사사로운 감정에 대의를 접어야 하는 일들을 겪을 때는 성의(聖衣)를 벗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십일조라면서 매월 1천원을 하면서 목회걸림돌 역할을 하다가 항존직분 피택 조건에 교인의 의무조항에서 십일조를 했다는 경우, 설교하고 강단을 내려오는데 국문학적으로 볼 때 어순도 맞지 않아 듣기 힘들었다는 경우, 봉고승합차를 운행할 때는 열차의 운임은 거리의 함수를 이야기하면서 매월 주행거리와 주유금액을 계산하는 경우, 교인들 가정 심방이나 길흉사를 집례한 후 사례비를 받은 것은 목자가 아니라는 경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명분 없는 논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는 아픈 이야기들이다. 소리 없는 한숨과 젖어드는 눈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동일한 한 마디로 권고해 준다. “그래도 목사는 채찍질 당하면서, 얼굴에 침 뱉음의 수모를 당하면서,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도 또 일어나서 골고다를 향해 한 걸음씩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목사의 명분입니다.” 듣는 목사님들 대부분은 흑- 하면서 엎어지기도 하고 유구무언이 되어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렇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기 義가 기준이 되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명분을 깨닫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만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잠깐 후면 아무것도 아닌 좁쌀만 한 작은 무엇 하나를 갖고 안하무인, 오만불손, 경거망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가르침을 중히 여겨야 한다. 이해하고 관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명분을 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2-06-10
  • [성서연구] 은혜가 숙성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한 나병환자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혹시 당신께서 고치신 것을 비밀로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미 많은 무리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또 제사장에게 입증하러 가면 어차피 알려질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비밀 유지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너무 많은 환자가 몰려올까 염려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분이시며, 마태복음 8장 16~17절은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환영하셨고, 연약한 것과 병을 짊어지는 것은 메시아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환자가 올 것은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는 못됩니다. 오히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데는 본문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이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에게 찾아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제물을 드려 입증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고, 이젠 격리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제물을 준비하여 가족과 함께 제사장에게 가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가 먼 동네 사람이라면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특히 <왜?>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로 시작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도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왜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가, 이제 어떻게 살아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라고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은혜를 받은 후의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주정꾼을 만나셨는데, 그는 과거에 예수님께 저는 다리를 고침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다리가 회복된 후 직업을 얻지 못해 타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엔 창녀를 만났는데,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창녀 생활을 청산했지만, 고독하고 생계가 막막하여 다시 그 길로 들어섰다고 했습니다. 또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맹인이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막상 눈을 뜨니, 자신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참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받았으나, 은혜에 대한 응답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은 후에 가질 태도와 삶을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없이 가볍게 떠버리면 안 됩니다. 그동안 개척하여 교인이 좀 늘면, 능력을 좀 받으면, 프로그램 하나가 성공하면, 대단한 것을 이룬 것처럼 사방으로 떠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금방 유명해졌으나, 종말도 빨리 왔습니다. 은혜는 받았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 종말을 재촉했습니다. 히스기야는 15년의 생명이 연장되는 은혜를 입었으나, 교만하여 바벨론 사신 앞에서 하나님 영광 대신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다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되는 불행의 씨앗을 뿌렸고, 그 15년 동안에 태어난 아들 므낫세가 유다를 완전히 수렁에 빠지게 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침묵하고 깊이 기도하면서 은혜를 내면에서 숙성시켜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깊은 묵상과 겸손한 엎드림이 필요합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침묵하고, 기도하고, 더 깊어져야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이유를 깊은 기도 중에 발견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겸손하고 경건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6-10
  • [시사칼럼] 이십 대는 요리사다?
    최근 아주 유명해진 이십 대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야당의 공동비대위원장으로 활약했던 박지현 씨가 그 주인공인데, 1996년 3월생이라고 하니 한국 나이로 만 26세에 해당합니다. 그녀는 소위 ‘n번 방 사건’을 추적해서 그 전모를 밝혀낸 성과로 약관의 나이에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민주당의 수장이 되었고, 최근 치러진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면서 공개적으로 586 세대의 퇴진을 요구하여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안겨다 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년에 이준석 씨가 30대의 나이로 당내 선거를 통해 당시 야당의 대표에 취임하고 또 대통령선거까지 승리하게 함으로써 정계를 넘어 한국사회 전체에 먼저 충격파를 던진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이십 대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경우는 종종 있어도 공당(公黨)의 대표성을 가진 자리에 이십 대가 등용된 일은 없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십 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십 대와 관련해서 등장한 신조어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각기 다른 영어 단어들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CHEBB’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요리사를 뜻하는 말로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셰프(chef)’를 잘못 쓴 것 아니냐고 되묻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십 대를 앞에 붙이면 ‘이십 대는 요리사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듯합니다. 실상은 이러합니다. “글로벌 주류 겨눈 90년대생... ‘쳅(CHEBB)’에 걸었다, [90년대생 창업자가 온다]”와 같은 기사(중앙일보 5월 3일)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말은 이십 대가 주로 창업에 뛰어드는 새로운 영역들을 상징하는 축약어입니다. ‘커머스(Commerce)’, ‘헬스케어(Healthcare)’, ‘에듀테크(Edu-tech)’, ‘B2B SaaS’, ‘블록체인(Block chain)’, 이렇게 다섯 분야에서 최근 이십 대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하기야 이 단어들을 제대로 제시한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기성세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알만한 분야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나머지만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먼저 ‘커머스’는 ‘깊고 뾰족한 상거래’라는 ‘딥버티컬 커머스’(deep vertical commerce)의 줄인 말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의미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음식 사업을 해도 간편식 시장을 노린다거나 인테리어 영역에 뛰어들 때도 동남아시아 인테리어 사업을 구상한다든지 이런 식을 의미합니다(간편식 커머스 윙잇, 동아시아 식기 커머스 서울번드 등). 한편 ‘B2B SaaS’는 태생적으로 디지털에 익숙한 이십 대(디지털 전환 루키)들이 기업에서 업무용으로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구독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사업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블록체인’이라는 말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핵심은 역시 가상화폐라 할 수 있는데, 최근 비트코인 폭락 사태가 한국에서 촉발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애플 엔지니어 출신인 권도형 씨가 이십 대 시절부터 준비해서 발행한 ‘루나와 테라’가 한때 상종가를 치다가 최근 가치가 99% 폭락하면서 주된 거래자인 수많은 청춘들이 일대 혼란에 빠졌고(“천만 원 잃고 떠난다”, “원금은 못 찾더라도 이혼은 막아야지”..), 이 여파는 세계가상화폐 시장에도 미쳐서 하루만에 257조가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해 외신들 사이에 ‘코인런’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핵심은 이들 신종 사업을 주도하는 주류가 이십 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만 이들이 신인류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지방자치선거에서 19세의 천승아 당선인을 포함해 80여 명의 이십 대들이 당선되어 풀뿌리민주주의 현장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더 이상 지금의 이십 대에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이십 대의 형편은 어떠할까요? 최근 네 번째로 추기경을 배출해 경사가 난 천주교계는 연이어 발표한 소식으로 충격에 빠졌습니다. 작년에 신규 사제 숫자가 111명에 불과했고, 최대교구에 위치한 서울 소재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고작 7명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치경제문화체육 분야의 전 방위에 걸쳐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높이는 이십 대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 때 유독 교회에서만 이십 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이십 대들이 문제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0대 당대표와 스타트업 창업자가 속출하는 현실을 자각하고 교회가 먼저 이십 대처럼 변해야 합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작은 일부터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6-10
  • [은혜의말씀] 애굽에 내린 재앙(2) (출8:20~24)
    우리는 지금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재앙입니다. 네 번째 재앙은 ‘파리’가 애굽 전역을 덮는 것입니다.(24절) 여기서 말하는 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밥상 위에 앉아서 “워이워이” 하면 도망가는 순한 파리가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의 피까지 빨아먹는 아주 독한 ‘쇠파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침실에 순한 파리, 몇 마리만 있어도 밤잠을 설치는데, 새까만 쇠파리 떼가 무수히 날아와서 사람에게 들러붙어 피를 빨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애굽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파리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케프리’라는 신입니다. 그들은 파리 모양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까지 했는데, 그 숭배하던 신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에서 독특한 것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파리가 없게 하겠다고 하십니다.(22절) 이로 인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때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똑같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불경기에는 똑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결정적인 때’는 구별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순간에는 구별하십니다. 이런 구별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열 번째, 죽음의 재앙에서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시고, 이스라엘 장자는 살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롬 3:23) 그런데, 롬 3:24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러주심으로, 우리는 구별되어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심판의 날에 불신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별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분이 바뀌었다면 우리의 수준도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백성과 구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하길 기대하셔요?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출애굽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습니다.(20절) 이제, 우리 삶의 목적은 구원받은 자 답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것이요. 그런데, 바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5,28절을 보면, 이 땅에서 예배드리라고 합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오늘로 바꾸면, 삶의 원리.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여야 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입니다.(신명기 6:4-5)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3-24)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 삶의 목적인 예배자로 삶의 제자리를 찾아,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신실한 예배자가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6-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