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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칠천 명이 일어날 때입니다
    많은 분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교회 외적인 사회적 요인도 있고, 교회 내적 요인도 많겠지만, 저는 그중 하나가 교회 리더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목사님들께서 <교회는 목사 이상으로 자랄 수 없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크기만큼 자라고 성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목회자 위기라 하겠습니다.일전에 현재 각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일치된 말씀은 한국교회의 미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교단장이나 연합기관의 책임자는 제도에 따라 선출하면 되겠지만, 교회를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집니다. 저는 몇 해 전부터 한국교회에 있어서 엘리사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껴왔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다스리던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암흑 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등불을 밝힌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우상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여호와만이 참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또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하기도 하고, 비가 오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승천할 때 그 제자인 엘리사가 외쳤던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승천한 후에는 그 제자 엘리사가 이 희망을 이어갔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 역시 요단강을 갈라 건넜고, 아람에 맞서 이스라엘을 수호했고,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왔을 때도 그의 나병을 고쳐 아람의 기를 꺾었습니다. 엘리사가 살아있는 동안 북 왕국 이스라엘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이후 그 뒤를 계승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북 왕국은 점점 악해지고 약해지다가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 왕국의 버팀목이었으나, 그 후대가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엘리야 시대가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위시한 당시의 목회자들의 시대로서 교회들이 크게 부흥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하용조, 옥한흠 목사님 같은 분들의 시대가 있었는데, 엘리사 시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뒤를 잇는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윗대 어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사역 현장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세대는 좋은 교회 토양에서 성장했고, 스펙이 매우 뛰어나고 세련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들이 과거만 못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선 세대 목회자들 때보다 많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야성이 부족합니다. 이들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현재 부교역자로 일하는 이들, 조만한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될 분들 역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담임목회자가 될 것이고, 그때 한국교회는 더 약해질 것입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적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교회가 어떻게 성령님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부흥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영적 능력과 부흥을 경험한 엘리사 같은 이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칠천 명이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앞장 설 때입니다. 신학생들은 큰 교회를 바라보지 말고, 스펙 쌓기에 매달리지 말고, 그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역 현장에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충성함으로써 부흥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엘리야, 엘리사가 되려는 일념으로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칠천 명이 모두 엘리사가 된다면, 한국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때를 사모하며 오늘도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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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소강석칼럼] “낮은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건물을 준공한 이후부터 교회 안에 있는 서재 안 방에서 거해 왔습니다. 저희 집이 이사한 지도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 방은 동굴과 같습니다. 창문이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이중창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어지간한 천둥이 쳐도 천둥소리가 안 들릴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화장실 쪽에 있는 창문을 열어놓으면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반대쪽을 열면 환풍기가 있어 지하에서 뽑아 올린 좋지 않은 공기가 제 방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환풍기로 강제 통풍을 시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끔 본당으로 가는 통로 쪽에 작은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글을 쓰고 설교를 준비할 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창문을 열면 뒷산의 맑은 공기가 그대로 들어오고 새 소리와 매미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곳에서 여름수련회에서 할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요란하게 “웨엥~~”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밖을 보니 누군가가 교회 벽 위에서 잔디를 깎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비서까지 불러서 둘이 함께 소리를 쳤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만 있으면 들꽃이 만발해 있는 곳까지 다 깎아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청을 다해 둘이 소리를 질렀더니 그제야 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부터는 풀을 깎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렇게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어떻게 잘라내려고 하십니까?” “저야 교회 요청에 따라 시킨 대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담임목사이니까 제 말을 따라 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렇게 해서 다행히 들꽃들이 피어있는 곳은 깎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교회 담 위에 피어있는 꽃들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하얀 꽃이지만 손톱만 하게 피어있는 꽃이었거든요. 그러나 저 꽃들도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애처롭게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을 제초기로 깎아버리면 얼마나 무참하게 쓰러져버리겠습니까? 꽃이란 유명하고 화사한 꽃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 모를 들꽃이라 하더라도 꽃망울을 여는 순간 그리움이 되고 연인이 되는 것입니다. 연모함을 찬사하는 사랑이 되고 순결한 고백과 같은 존재이지요. 그러니까 꽃은 바라보기만 해도 애처롭거나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저에게 사랑의 손짓을 하는 모습과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며칠 후 다시 와서 보니까 꽃은 어엿하게 서 있습니다. 아주 작은 꽃이지만 그 난폭한 여름의 폭우를 맞고도 끝까지 고고하고 순결한 자태로 서 있었습니다. 물론 얼마 있으면 저 꽃도 지게 되겠죠. 하지만, 아직은 곱고 순결한 자태로 오롯이 서 있었습니다. 저 손톱만 한 하얀 꽃을 보노라니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벼락에 올라 깎여지지 않은 들꽃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리고 여린 개망초 꽃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들꽃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꽃들이 흔들리며 저에게 이런 소리 없는 외침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이렇게 작지만 지금까지 순결한 모습으로 피어있습니다.” 저 여리고 한없이 부드러운 꽃을 꺾지 못하게 한 것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문득, 밤에 별빛을 사모하는 마음처럼, 아니 그 마음이 꽃잎에 어리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낮은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르고파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지구촌 속에 저 역시 너무나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동안 이름 모를 저 들꽃처럼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가 아침이면 이슬 한 모금 축이며 저녁이 올 때까지는 작은 향기라도 풍겨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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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시사칼럼] 각자도생
    근간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이 유행입니다. 이른바 ‘과학방역’ 논란으로 급격히 퍼지기 시작한 듯한데, “각자도생 방역 오해, 의미 전달 부족했다”는 질병관리청장의 공식적인 해명이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7. 26). 115년 만이라는 최악의 폭우로 한강 이남이 물바다로 변한 며칠간의 혼란상 속에도 “직장인들은 알아서 각자 도생하라는 말로 들려 씁쓸하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세계일보, 8. 10). 사실 이 말은 코로나 시대에 진입하면서 심심찮게 등장하곤 했는데, 이제는 정치판에서도 집권여당의 난맥상을 두고 “정부 힘든데 당까지 각자도생”이라 하고, 연예계에서도 “뿔뿔이 흩어진 걸그룹 출신들이 각자도생하며 연예 활동의 2막을 열고 있다”고 썼으며, 어느 목사는 “이제 크리스천은 각자 도생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cafe.daum.net/s.shool). 벌써부터 ‘각자도생 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도 있었는데, 이년 전 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전영수, 2020. 3). 놀랍게도 각자도생은 순수한 우리말 사자성어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실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殺戮之禍 使之各自圖生也(살륙지화 사지각자도생야)’ 곧 ‘살륙지화(에) 각자 자기 살기를 도모하게 하라’는 임진왜란 기간의 기록입니다(선조 27년 9월 6일, 1594년). 다음으로 ‘臨亂遺君 各自圖生 罪實非細(임란유군 각자도생 죄실비세)’ 곧 ‘난리를 맞아 임금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 이는 병자호란 때의 기록입니다(인조 5년 10월 4일, 1627년). ‘今焉離井去里 各自圖生(금언이정거리 각자도생)’ 곧 ‘지금은 정리(마을)를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합니다’는 흉년의 실상 속에 올린 상소문에 등장하는 문구입니다(순조 9년 12월 4일, 1809년). 이들만 보아도 각자도생이란 말을 어떤 경우에 사용했는지 금방 알겠습니다. 전란 속에서 기근 속에서 각종 고난 가운데 정부를 비롯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우리네 선조들은 각자도생이라는 인생판의 외통수에 내몰리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 살기를 도모해야 하는 사람들은 저들만이 아닙니다. 각자도생이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고 있는 필연적인 좌우명일지도 모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고 가르쳤던 노리나 허츠(Noreena Herts)는 『고립의 시대(The Lonely Century)』(웅진, 2021)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 결과 오로지 승자만을 위한 이 사회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남에게 뒤처진 패자라고, 결국에는 우리 모두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이제는 전통적으로 일과 공동체를 단단히 묶어주던 밧줄이 썩어가고 있고 사회안전망이 잠식되어 사회적 중요성이 축소되고 있다.”(29) 코로나 광풍전야였던 2019년 연말을 맞아 직장인들이 선택한 올해의 문구가 벌써 각자도생이었습니다(인쿠르트 설문조사).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는 각자도생의 길로 빠질 것이다”, 일찍이 경제학자 로버트 머튼(MIT)이 했던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래, 나밖에 없어, 나를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각자도생이 무조건적으로 해롭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방역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근자에 질병관리청장이 남긴 말의 일부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요하다. 다만 정부의 조치로 갈 것이냐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갈 것이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발적”이란 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각자도생이란 결국 자발성이나 자율성의 극성이라 볼 여지도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극성’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적인 돌봄과 온정으로 보완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적으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신자가 각자도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론 신이 방관하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건가, 이런 의문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의 이 말을 기억합시다. “신의 침묵은 인간의 침묵과는 다르다.. 신의 침묵은 사랑을 통해서 말씀으로 변한다. 신의 말씀은 스스로를 비치는 침묵, 인간에게 스스로를 바치는 침묵이다.”(침묵의 세계, 266-2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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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1
    오늘날 예배와 찬양의 갱신에 대한 절박함을 개괄적으로 제법 긴 시간을 통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감당해야할 현실이 너무나 어렵고 무거워서 생각하기조차 힘들었을 수 있다. 이를 잠시나마 위안으로 삼았다면 이제 다시금 일어나 나를, 가족을, 교회공동체를 생각하며 재정비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부족하여 전혀 가능하지 않지만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힘을 내어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의 영적무장의 핵심은 성경 말씀이다. 즉 올바른 지식에 대한 이해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이정표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음악, 예배음악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바르게 인도해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부정한 입술을 회복 시키셔서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찬송케 하신 것이 아닐까? 예배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음악이 영감 있고, 열정과 감격으로 충만할 때 예배의 새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관점에서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예배음악의 비전을 제시하고 변화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교회음악을 조금 장황하게 정의해보면 모든 장르와 연주형태를 통하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주제로 하거나 복음과 성경 말씀을 소재로 한 음악 그리고 선진들이나 성도들의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모든 음악을 우리는 교회음악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에 제시한 교회음악의 정의는 앞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할 찬양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중요한 잣대이자 기준이 될 것이다. 사실 음악사를 이야기할 때 교회음악을 빼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한 것에서 음악은 시작되었고, 변화하고 발전해 왔기에 그렇다. 음악은 시대와 나라, 문화 그리고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새로움에는 늘 힘든 갈등과 고통이 수반되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름의 방법과 치유의 성숙함도 함께 진행된 것 같다. 뒤를 잠시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나와 우리의 주변은 큰 변화를 격으며 나아왔다. 변화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물론 신앙의 본질인 성경 말씀은 조금이라도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하며 발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구약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이어져왔고, 변화를 거듭해 왔다. 찬양의 방식 또한 각 시대와 지역, 전통과 신학에 따른 다양한 변화가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 리더들은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본질을 흐리지 않으면서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자면 음악을 통한 변화, 변화를 통한 새로움 이러한 진행은 끊임없이 힘있게 반복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생명력으로 인해 놀라운 역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고 창조적으로 하여 보다 아름답고 거룩함으로 주님을 높이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한다. 우리의 부족과 무지, 안일함으로 관습과 문화에 젖어서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갇혀 빠져 나올 생각조차 못하고, 아집과 교만으로 승부한다면 이것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로 다양하고 무한한 영광과 칭송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제한하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겸손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렬한 헌신으로 생명의 주를 지치지 않고 찬양하며,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 더불어 특별히 바라기는 그 옛날 교회음악이 모든 음악을 주도하고 이끌었듯이 이러한 부분의 회복도 이뤄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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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은혜의말씀] 유월절을 지키라(출 12:1~14)
    마지막 10번째 재앙이 애굽에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밤중에 애굽에 들어가셔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은 다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개의 혀도 움직이지 않는 평안함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한 일을 지시하십니다. 바로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을 통하여 유월절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유월절은 어린 양을 준비합니다.(3,5절) 한 가족이 하나님께 바치기에 가장 적합한 일 년 된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보관하며, 양이 흠은 없는지 충분히 살핍니다. 나아가 양을 바라보면서 나 대신 ‘희생제물’이 될 ‘대속’의 의미를 새기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피 흘려줄 하나님의 어린양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어린양을 친히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 이십니다.(요 1:29, 벧전 1:19) 2. 유월절은 어린양을 죽여 피를 문에 바릅니다.(6,7절) 14일 저녁 어린 양이 죽습니다. 죽음의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십니다. 그 값은 생명은 생명입니다. 죽음으로 죄의 값을 치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피를 바른다는 것은, 죗값으로 죽어야 할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은혜를 깨달아, 마음으로 십자가 보혈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실 때에 넘어가겠다고 하십니다.(13절)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 Passover, 이것이 바로 유월(逾越)입니다. 따라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속의 피입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피의 유무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을 했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있는가, 없는가에 있습니다. 3. 유월절은 고기를 먹습니다.(8절) 왜 고기를 먹으라고 하실까요? 애굽에서 나오면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가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가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고기를 먹으면 힘을 얻습니다. 광야를 지날 힘을 얻습니다. 이 고기는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요 6:51-56) 우리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는 떡과 잔을 나누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연합되고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셔야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래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승리의 찬송을 부르며 지나갈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유월절은 새로운 시작입니다.(2절)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날짜 계산법을 초월하여 새로운 월력을 제정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유월절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삶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인생의 시작은 예수님을 만난 날인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간에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고후 5: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앙의 유월절을 갖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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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목회자칼럼] 35년이 지난 지금, 난 사업가인가? 사역자인가?
    젊은 20대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십대 사역에 뛰어 들었고, 벌써 35년이 지났다. 35년이 지난 지금 가끔 난 내가 사업을 하고 있는지 사역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물을 때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사업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그러면서 다시 되묻는다. “나는 청소년 사업을 하고 있나? 사역을 하고 있나?” 사업과 사역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업은 인간이 뜻을 갖고,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인간의 노력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사역은 하나님이 뜻을 세우고, 하나님이 인도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며 인간이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사업과 사역의 의미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체이다. “일의 주체가 누구인가?” 사역을 하려고 할 때, 나의 죄성 때문에 사업을 하기도 했고, 사업을 하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사역의 중심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35년 간 부단히도 많은 노력을 해왔던 것 같다. 사업이 아닌 사역을 하고 싶어서… 진정한 사역자가 되고 싶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진정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쳤던 나의 작은 깨달음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나의 계획,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말이 쉬우면서도 어렵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지성과 경험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진정한 사역 속에서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 원하셨다. 이 한 문장을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둘째, 하나님과의 동행이 참 사역이 된다. 내 뜻이 얼마나 앞섰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얼마나 원했는가? 청소년의 우울, 청소년의 변화, 모두 좋다. 그러나 난 항상 주님보다 먼저였다. 셋째, 주님이 앞서고 난 동역할 때, 열매가 나타난다. 어떤 때는 그렇게 열심히 사업해도 열매가 없었다. 어느 때는 그렇게 내려놓아도 주님이 일하심에 열매가 풍성했다. 먼저, 과거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했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아야 사역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교회를 예로 들어보자. 북한의 경우,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을 주셨다. 그러나 공산 정권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함께 우상이 득세했다. 누가 더 강한 우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고난의 행군을 통해 우상을 무너뜨렸다. 지금 북한은 하나님이 새롭게 일하고 있다. 천천히, 천천히 지하 속에서 순수성을 가진 성도를 세우며 다시 영혼을 살리고 계신다. 남한의 경우, 경제 부흥과 동시에 교회 부흥을 주셨다. 세계 10대 교회가 한국이 있을 정도로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했다. 그러나 세속화로 인해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 하나님은 남한 교회에 남긴 순수한 사역자를 세우고, 찾아내고, 훈련시키고 있다. 나는 과연 교회 사업가인가? 교회 사역자인가? 말은 교회 사역자, 청소년 사역자라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청소년 사업가로 변질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십대의벗을 하다 20년 전부터 다음세대를 외쳤지만 지금까지 변한 것은 없다. 교회마다 다음세대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16년 전에 개척을 했고, 교회를 통해 다음세대를 회복이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만, 이 사역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다음세대를 위해 주님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한국 교회의 청소년 사역자들이여! 같이 고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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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군목제도
    군목제도의 시작 6.25전쟁은 한국군 내의 군목(軍牧) 병과를 설치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시작된 군목 제도는 이후 한국교회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의 군목 제도는 전적으로 미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전쟁으로 미군과 함께 군목이 복무하게 됨으로서 한국군에도 군목 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군 선교를 제일 처음 고려한 이는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손원일(孫元一, 1909-1989) 제독이었다. 감리교 손정도(孫貞道, 1882-1931) 목사의 아들이기도 한 손 제독은 전쟁 전인 1948년 해군에서 정훈 장교 형식으로 착수하게 한 바 있으나 공식적인 병과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교회지도자들의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이 기도운동과 함께 군에서의 목회 혹은 정훈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 손원일 제독과 교회 지도자들은 군목제도를 청원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군목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상의한 견해가 있지만, 전쟁 기간 중 군목제도에 대한 복수의 청원이 결국 군목 병과를 시작하는 배경이 된다. 군목 제도는 1950년 1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이전인 1950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 교계 대표들, 곧 한경직 박종율 박치순 유형기 목사 등이 모여 군목 임명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언하였다. 1950년 9월에는 선교사 신분으로 미군 군종부 문관으로 임명된 캐럴(George Carroll) 신부와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서위렴, William Show)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종 제도 창설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미군 극동사령부 군종과장 이븐 베넷(Ivan L. Bennett) 목사는 미군과 한국정부 사이의 가교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0년 8월 1일부터 미군 군종부 문관으로 활동한 이들은 신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국무총리를 방문하여 군종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적극적인 협력을 얻었고 9월 5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군종제도 창설에 대해 청원하였다. 9월 18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대표들로 ‘군종제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천주교의 캐럴 신부와 장로교의 한경직, 감리교의 유영기 목사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19일 대통령을 면담하고 6.25 전쟁은 사상전이므로 정훈활동이 필요하고 미군이나 유엔군과 같은 군종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회 지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그 필요성을 공감하고 1950년 11월 21일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군목제도 설치 훈시를 내렸다고 한다. 대통령의 훈시에 따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군목제도를 창설하게 했고, 결국 1951년 2월 7일 군목제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군 예산이 부족하여 피복 식량 등 병참 관계는 군에서 담당하되 군종활동 경비는 파송하는 각 교단이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첫 군목이 박대선, 전종옥, 박치순, 김형도, 윤창덕, 김윤승 등 39명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사와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이들은 4주간의 교육을 받고 1951년 4월부터 각 일선부대와 병원 등에 배치되었다. 제1기 군목인 박치순은 제주 훈련소에서 일했는데, 그가 여기서 처음으로 군인교회를 세우고 군인들의 정신생활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1951년 2월부터 군목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독립된 병과로서의 군종 병과라기보다는 민간인 목사 신분으로 전쟁 중 군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군종의 신분은 현역 군인보다는 문관이 더 바람직하다는 이 대통령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김영환(金英煥), 지송암(池松岩) 두 목사는 전쟁이 발발하자 광주에 있던 제3육군병원을 방문하여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병원장인 장희섭(鄭熙燮) 대령은 이들에게 ‘종군 목사’라는 직함을 주었다고 한다. 정희섭 대령은 목사의 아들로서 군선교 활동을 가능하게 했는데, 김인서는 이것이 군목 활동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 후 장로교의 권연호(權連鎬) 목사와 각 교파 지도자들과 주한 외국 선교부 관계자가 연합하여 외국에서와 같은 군목 제도 창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진언하였고,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여 육군 안에 문관의 자격으로 군목 업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전쟁이 발발하자 복수의 교계 인사들에 의해 군선교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교회 지도자들과 외국 선교부 관계자들이 군 선교차원에서 군목 활동을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민간 차원의 문관 신분의 군목 제도가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처음에는 무보수 문관 신분으로 군목 활동을 시작했으나 1952년 6월에는 유급 문관으로 격상되었고, 1954년 1월 12일에는 군종을 독립된 병과(兵科)로 인정함으로서 군종감실이 설치되었고, 12월 13일에는 육군에서 군목을 현역 장교로 임관하여 이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2년 초까지 80명의 군목이 각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이중 51.9%가 예수교 장로회 소속 목사였다. 1954년 4월 당시 군목 수는 199명으로 증가했고, 1955년 8월에는 352명을 증가되었다. **혹 길면 마지막 부분 짤라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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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서임중칼럼] Attitude (마음관리)
    세계 최초로 16M D램을 개발한 엔지니어요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낸 탁월한 CEO이며 정보통신부 장관까지, IT시대의 핵심인재로 살아온 진대제 박사의 Mind는 Attitude다. 즉 사람, 물건 등에 대한 태도로써 마음가짐이 어떠냐가 그의 성공에 이르는 삶의 태도였다. 정보통신부 장관 재임기간이던 2005년 3월 9일 아침 그는 상공회의소 조찬 간담회에 초청되어 파워포인트를 열고 `인생을 100점짜리로 만들기 위한 조건’을 찾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은, 먼저 알파벳을 순서대로 두고 그에 따라 숫자를 붙여준다. 즉 A에 1, B에 2, C에 3...과 같은 방식으로 Z(26)까지 숫자를 붙인다. 그런 다음 어떤 단어의 알파벳에 붙여진 숫자를 모두 더해 100이 되는 단어를 찾는 것이다. 진 장관은 모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100이 되는 단어가 결코 쉽지 않음을 전개 해 나갔다. “열심히 일하면 될까요? hard work, 98점, 그렇다면 지식이 많으면? knowledge는 96점, 사랑을 하면? love 54점, 운(運)으로 될까요? luck 47점, 돈이 많으면 되나요? money는 72점, 리더십은요? leadership 89점입니다. 그럼 뭘까요? 답은 attitude입니다. ‘태도’ ‘마음가짐’ 즉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100점짜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5년 4월 15일 진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하여 터키 앙카라를 방문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100점짜리 인생의 조건 2탄’을 추가로 공개했다. 바로 ‘스트레스(stress)’와 ‘휴식 취하기(take a rest)’였다. 100점 인생의 조건을 공개한 뒤 많은 네티즌들이 호응해 줬고 자신들이 알파벳을 조합해 100점짜리를 만들어 보내왔다고 말하는 진 장관은, 그 가운데 ‘스트레스(stress)’와 ‘휴식 취하기(take a rest)’가 있었다"고 전했다. 100점 인생엔 그만큼 스트레스도 따르기 마련이며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연한 조합치고는 참으로 심오한 인생철학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100점짜리 골퍼가 되기 위한 비결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관리와 닿아 있다. 드라이브를 잘 친다면 driver는 71점, 우드샷을 잘쳐도 wood는 76점, 아이언샷이 좋아도 iron은 56점, 웨지를 잘해도 wedge는 44점, 어프로치를 잘해도 approach는 78점이 된다. 결국 골프에서도 마지막 퍼터를 잘해야 putter(16+21+20+20+5+18)가 100점이 된다. 우연치고는 신기할 정도다. 우리네 일상에 덕담(德談)이란 것이 있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빌어 주는 말이 덕담이다. 덕담은 실제로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한다. 즉 ‘자기충족적 예언’인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왕으로 ‘아프로디테’ 여신상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베누스’ 여신이 그의 간절한 마음에 응답하여 여신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교육철학에서 상용된다.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 “내 그럴 줄 알았다.”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말이 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뜻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는 절망언어며 “그럴 수 있지 뭐”는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언어다. 즉 attitude다. ‘태도’ ‘마음가짐’ 즉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100점짜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효대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깨우쳤는데 그것이 불교 화엄경(華嚴經)에 기록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心生故 種種法生 心滅故 龕墳不二>, 즉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의 생각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해지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게 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어떤 사람이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잘못하여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 사람은 “어떤 놈이 다리를 이렇게 놓았어?” 라고 불평을 하면서 마음의 화를 토해냈다. 다리에 발을 헛디딘 것은 자신인데 오히려 발 젖지 말고 냇물을 건너라고 징검다리를 놓아 준 사람을 욕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너 때문에 징검다리를 제대로 건너지 못하고 헛디디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종종 너 때문이라고 탓하는 경우가 많다. 얼굴에 침 뱉기지만 우리 민족의 약점은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익숙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배가 아프면 사촌이 땅을 샀냐, 시집가서 소박맞으면 궁합 탓, 쌀독에 쌀 떨어지면 며느리 밥 많이 먹는 탓, 밥이 질면 땔나무 탓, 떡이 설면 안반(시루) 탓, 글 못 쓰는 선비는 지필묵 탓, 서툰 목수는 연장 탓, 일이 꼬이면 조상 묘 자리 탓, 가난하면 부모 탓, 조상 탓을 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네 문화는 오만 가지가 남 탓이다. 한 때 김수환 추기경이 주창한 <내 탓이오>는 마음관리를 잘 하자는 천주교 생활 운동으로서 우리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다듬었다. 그릇에 담겨진 어떤 것이 둥근 것이 아니라 그릇이 둥글기 때문에 담겨진 것이 둥글게 보인다. 네모나 세모 그릇에 무엇을 담으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내 언어나 행동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행복과 불행은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Attitude,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래서 성경 잠언4:23절에는 이에 대한 근원적인 말씀이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곧 ‘살고 죽는 것도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씀이다. 마음 관리가 가장 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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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성서연구] 내 영혼에 힘을 주어
    저는 33년째 담임 목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참 많이도 했습니다. 심방도 많이 했습니다. 온갖 회의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역의 종착지점이 가까워지면서 지난날의 목회를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의 목표를 교회의 부흥에 두었는데, 이것이 심각한 실패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목회자를 부르신 목적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의 부흥에만 매달렸습니다. 더구나 부흥이란 것이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믿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맞겠지만,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이란 단지 사람이 많아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많으면 부흥한 교회요, 부흥한 교회의 목사는 목회에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이런 목사에게 박수를 보냈고, 목사는 자신을 성공한 목회자로 자부했습니다. 이 과정에 많은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한없이 교만해졌고, 교회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교회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자랑했지만, 오히려 실망한 이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또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깊은 좌절에 빠졌고, 자신을 실패한 목사로 여기는 열등감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성공한 목사로 자부하던 사람도 상처를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그로 인한 혜택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막상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훌륭해 보이던 교인들이 갈라져 싸우는 모습을 보고 은퇴하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후회하게 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되돌아보니 목회의 본질은 사람을 많이 모으는 부흥은 아닙니다. 목회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만 바르게 전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는 <너 수고 많았어>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본문 말씀은 매우 은혜가 됩니다. 시편 138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주석가들은 본 시가 다윗이 말년에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면서 지은 감사의 시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말 많은 은혜를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3절은 그 핵심입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숱한 위기와 죽음의 사선을 넘어야 했습니다. 어려울 때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때가 <간구하는 날>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거나 못할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윗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다윗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과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서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도우셨을까요? <내 영혼에 힘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모든 힘 중에 영혼에 주어지는 힘이 최고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의 힘을 믿지만, 영혼에 힘이 충만한 사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힘이 최고입니다. 다윗은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쫓기며 노숙을 해도 영혼에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해 보였지만, 강했습니다. 그 모진 고난에서도 그는 강하게 버텼습니다. 하나님이 강하시기에 그도 강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목회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목회자도 본질에 충실하려면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여 영혼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전하는 본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영혼에 힘을 얻어 강해져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3절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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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시사칼럼] 유튜브, 당신이 바로 매체입니다
    이 달 초하루(한국 시간), 암 투병 중이던 이제 약관(弱冠)을 갓 넘긴 나이의 미국인 유튜버 테크노블레이드(본명 알렉스)가 아버지를 통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1,300만 명이 넘는(당시) 구독자들을 슬프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나는 죽은 것이다”로 시작되는 고인의 마지막 말은 “모두들 오래토록 행복하게 잘(long, prosperous, happy)” 지내라는 인사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며칠 사이 한국은 한 악성 유튜버(gzss, vellado)의 형제가 청와대 행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세상이 시끌벅적했습니다(현재 사표). 여기서 “유튜버”란 유튜브를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튜브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온 세상을 울리기도 분노하게도 하는 걸까요? 2005년 2월 당시 한국 나이로 27세였던 자웨드 카림(Jawed Karim), 28세였던 채드 헐리(Chad Hurley), 그리고 가장 연장자이자 29세였던 스티브 첸(Steve Chen)은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인터넷 사이트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6년 이들이 창업한 회사가 구글에 16억 5,000만 달러 즉 한화로 1조 5,800억 원에 팔렸습니다.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눠가져도 한 사람 당 5,000억 원 이상을 순식간에 벌어들인 셈이 되었는데, 그게 바로 “유튜브”였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이것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스티브 첸은 한 인터뷰에서 그저 보고 싶은 동영상이 있었는데 어떻게 찾을지를 몰라 궁리하다가 이런 채널을 하나 만들면 편리하겠다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젊은 창업자들은 처음에 회사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무척 진지하게 고민하고 회의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정한 원칙이 있었는데,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말하기 쉽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제목이어야 하고, 절대로 알파벳 철자로 7자를 넘지 말아야 하며, 두 음절로 이루어지되 각각의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소셜(social) 또 하나는 미디어(media)의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채드 헐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홀연 튀어나온 이름이 바로 “유튜브(YouTube)”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는 물론 영어로 당신, 너라는 뜻이고 “튜브”는 통로나 당시 TV를 가리키는 단어였지요. 즉, 유튜브란 말은 ‘당신이 곧 튜브다’, ‘당신이 곧 미디어다’, ‘당신이 곧 매체다’ 이런 뜻을 가진 말이었다는 뜻입니다. 유튜브가 어떻게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었을까요? 누구나 영상제작자요 감독이 될 수 있고, 동시에 누구나 심지어 동물조차도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현재 유튜브의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유튜브는 어떤 접점이 있을까요? 서울 지역의 한 교회는 찬양에 집중해서 엄청난 투자를 한 끝에 유튜브에 올린 그 교회의 찬양 동영상들이 합쳐서 1억 조회 수를 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적이 있습니다. 벌써 일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각종 강의와 영상으로 기독교계의 스타로 일약 발돋움한 전도사님이나 집사님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유튜브를 복음을 전하는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유튜브라든지 현대인터넷문명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놀라운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유튜브는 반드시 인터넷 사이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매체(미디어)”라는 말은 유튜브를 통해서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당신이 곧 복음을 전하는 통로다’, 즉 ‘당신이 매체(미디어)다’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가 아니라 인터넷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우리는 늘 그렇게 복음의 전달자로 살았습니다. 그간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해 우리는 유튜브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이제 그 빚을 다른 각도로 갚아야 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복음 전도가 어렵다고 하는 이 시대에, 물론 인터넷 유튜브를 활용해서도 힘써야 하겠지만, 바로 나 자신이 예수의 유튜브가 되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유-튜브, 즉 당신이 바로 복음의 유튜브입니다. 우리가 바로 복음의 유튜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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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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