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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인연(因緣)이 있다. 그것이 선연(善緣)이든 악연(惡緣)이든 다를 바 없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악연은 빨리 잊고 선연은 곱씹으면서 살아간다. 나에게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선연(善緣)이 있다. 그것이 나의 오늘을 있게 한 토양(土壤)이었다. 그래서 인연을 들숨과 날숨으로 내 삶을 호흡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 어느 관계도 하나님의 섭리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 없기에 인연은 내 삶의 들숨과 날숨이 되어 오늘을 살게 한다. 사계절처럼 오고 가는 인연을 굳이 악연을 붙잡고 헐떡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연을 붙잡고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움처럼 삶을 다듬어 가는 사람도 있다. 5월이 되면 더욱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일상이 그래야 하지만 그래도 5월은 더욱 부모님이 생각나고 스승과의 인연이 생각나고 친구와의 인연이 생각난다.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삶에서도 자식을 위한 부모의 본능적인 양육은 평생 곱씹어도 모자랄 사랑이다. 오늘의 내 자리매김을 생각할수록 스승의 가르침은 내 삶의 영양소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짓게 해 주는 친구는 삶의 활력소다. 마흔이 넘어 목사로 임직받은 후 어느 날 집에 오신 엄마에게 “엄마 젖 먹고 싶다.” 할 때 “야야 징그럽다.” 하시면서도 마흔이 된 자식에게 젖을 물리시고 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목사 한다고 얼마나 고생 많겠나” 하시면서 눈물짓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이 젖 때문에 5남매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하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때 말없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셨던 어머니였다. 그 엄마 마음으로 나는 평생 교인들에게 젖먹이는 모심목회(母心牧會)를 했다. 우리 부부를 약혼주례 결혼주례 하신 고 김기수 목사님은 내 목회의 토양(土壤)이었다. 목사님이 소천하시는 그 해까지 3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에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여 목사님을 찾아 축복기도를 받는 것이 결혼기념일 행사였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스승의 가르침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목회의 정도(正道)로 정행(正行)을 했다. 얼마 전, 정장복 총장님의 부음(訃音)을 받았을 때 믿기지 않았다. 지난해도 어김없이 내외분을 모시고 식사하시면서 “나 죽기 전 고향교회 부흥회 한 번 인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올 4월에 일정을 약속하고 함께 고향교회를 방문하리라 기뻐하시면서 친히 점심을 사 주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르신이 마지막 부탁하신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기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광주로 가서, 광주에서 마중 나온 목사님 차를 타고 2시간 완도로 가서, 완도에서 다시 1시간 배를 타고 청산도에 도착하여 3일 동안 자비량 집회를 인도했다. 평생 신언전달자(神言傳達者)를 가르치신 스승님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설교의 정의입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교훈을 받고자 진언(眞言)할 때 기뻐하시면서 “청출어람 청어람이로다” 하시면서 “그래도 설교는 <신언전달(神言傳達)>이다”라고 파안대소하셨다. 그 가르침 때문에 강단에 설 때마다 그 말씀을 되새김질했다. 이제 총장님은 천국 가시고 그 가르침이 내 목양의 토양(土壤)이 된다. 일본에 하시모토 다카오 장로님이 계신다. 나에게는 더 없는 친구다. 부인 요시애 다카오 장로님의 지극한 내조로 장로임직을 받고 선한일에 부하고 교회를 세우는 야긴과 보아스처럼 성직을 수행하시는 분이다. 친구의 인연을 맺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다. 나의 삶은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2등 하기 싫은 마음가짐으로 평생 살아왔는데 하시모토 장로님 내외분에게는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2등의 삶으로 오늘도 우정(友情)을 맺고 살아간다. 아름다운 인연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마음이 근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보여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때로는 언어로 때로는 삶으로 때로는 물질로 가시화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고 말은 생각의 표현이다. 사랑은 묻어둘 수 없고 묻히는 것 또한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연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제 고희의 마지막 날들을 계수하면서 다시금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인간사 어찌 선연(善緣)만 있으랴. 살아가노라면 악연(惡緣)도 맺어지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이치라면 오늘을 살아가면서 진정 축복받은 삶이란 악연도 선연으로 바꾸는 삶이리라. 그것이 어이 마음대로 되겠는가만 그래도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살아가노라면 아름다운 인연이 엮어지리라. 고희의 삶을 살면서 잠간 멈추고 뒤돌아보면서 나와 인연을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회고해 본다. 인연의 여정에서 경애(敬愛)는 고사하고 왜곡과 망각과 배신이 명확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삶을 통해 둥글게 다듬어 내면서 나는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아간다. 김광규님의 아름다운 글의 표현이 생각난다. 경애(敬愛)를, 빗속을 걸어가는 법이라 했다. 그러면서 ‘사랑은 기꺼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길이며, 사람에게 젖어 드는 일’라고 했다. 이 얼마나 깊은 사고(思考)의 표현인가.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살맛 나는 인연으로 하루를 엮어가면서 내가 후일 천국에 이른 후 나의 후학들이 나와의 인연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하면서 오늘도 선연(善緣)의 삶을 기도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첫 구절을 마음 깊이 읊조린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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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성서연구] 시간을 해석함
    1992년에 개봉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전 시카고대학 교수인 노먼 맥클레인(1902~1990)이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1976년에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영화는 그다지 큰 흥행은 하지 못했습니다. 1900년대 초,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인 리버런드 맥클레인은 아내와 아들 노만과 폴과 함께 몬타주 강가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강에서 플라이낚시를 즐기며 삽니다. 신중하고 지적인 노만과 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폴은 어린 시절부터 기질이 다릅니다. 영화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족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후에 작은아들 폴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가족은 슬픔에 잠깁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노먼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과 함께 흐른 가족사를 회상하며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인생도 시간과 함께 흐릅니다. 인생은 시간과 함께 그 모습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그 후 청년, 중장년을 거쳐 하류인 노년기를 맞습니다. 그후엔 바다라고 할 하나님의 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바쁘게 살면서 시간의 흐름을 잊기 쉽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깨닫고 반응하는 데 인생의 지혜가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90:12). 우선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시간의 포착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종종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일 1부 예배부터 찬양 예배까지 드리는 동안에 강단 꽃을 통해 시간을 느낍니다. 1부 예배 때는 봉오리였던 꽃이 3부 예배 즈음엔 약간 벌어지더니, 5부 예배 시간에는 상당히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수요기도회 즈음에 활짝 피어있던 꽃은 금요기도회 때면 이미 시들어갑니다. 꽃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봅니다. 시간의 포착은 경건한 긴장을 가져옵니다. 그 흐름은 언젠가 우리를 마지막 시간 앞에 세울 것입니다. 인생의 유한함과 그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스쳐 가는 순간이 눈물겹도록 귀합니다. 다윗은 시편 144편 4절에서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같으니이다>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이 그림자를 <새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새가 날아가면서 남기는 그림자는 얼마나 순간적일까요? 인생이 그렇다는 말이겠습니다. 또 시간은 해석을 요구합니다. 눈을 떠서 새벽임을 알았다면, 그다음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즉 새벽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벽은 새로운 날이 되었으니, 일어나라고 속삭입니다. 이게 해석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면 시간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청년일 때, 중년일 때, 노년일 때,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인생의 내용은 결정됩니다. 지난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영혼의 갈등이 심하던 어느 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노래 가사는 <들어서 읽으라, 들어서 읽으라, tole lege! tole lege!>는 것이었고, 그는 충동적으로 집에 들어가 펼쳐진 책을 들어 읽었는데, 그 말씀이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깊은 영혼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024년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가늠해 볼 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을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는 것, 그리고 해석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결국에는 인생을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행동을 촉구합니다. 깰 때가 되었다는 해석을 얻었다면, 이젠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아름다운 결단과 행동은 시간을 빛나게 만들 것이고, 인생도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는 날로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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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은혜의말씀]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14–15)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식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다른 짐승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 사람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이처럼 냄새라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성도로서 우리를 나타내는 냄새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을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5절)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악취를 풍기는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4,5)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로 가득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의의 냄새, 생명의 냄새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은 생각을 해도 의로운 생각, 말을 해도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향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14절) 바울은 각 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바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서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제 이일을 통하여 사망의 냄새에 찌들려 살던 그들에게 생명의 향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선물해야 합니다. 향기는 숨어있거나 감춰져 있으면 안 됩니다. 널리 뿌려지고 퍼져야 향기 자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복음의 꿀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향기를 찾으십니다. 모양만 있다고 신자가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 있고, 예수의 향기가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 땅에 만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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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시사칼럼] 라인 사태와 디지털 국유화
    한 때 자국 내 외국기업 혹은 다국적기업의 자원 독점 및 수탈을 막기 위해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국유화 조치를 감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974년 베네수엘라는 50년 간 부여했던 미국철강회사들의 철광채광권을 국유화한다면서 국내 외국기업은 소유주식의 80%를 베네수엘라 투자가들에게 매각하여 국영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대단한 저항과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국가의 주권적 행위인지라 국제사회에서 뚜렷한 해결책과 원만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시장자본주의가 범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가던 국유화조치가 최근 들어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이전 세기와 사뭇 다른 점은 동일한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이론적 배경으로 내세우면서 과거에 그렇지 않았던 국가들이나 지금은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 역시 유사한 조치를 감행하는 현상에 있습니다. 먼저 새천년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격적으로 실시된 중남미 일대의 국유화 조치를 살펴보겠습니다. 2006년 5월 1일 볼리비아 정부는 석유 · 가스 산업을 국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을 발표합니다. 2009년 5월 8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 역시 마라카이보 호수 유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60여 개의 국내외 석유서비스기업 자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2012년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또한 자국 내 최대 다국적에너지기업인 YFP 국유화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쟁 중인 러시아 정부가 이와 관련하여 깜짝 놀랄만한 발언들을 쏟아내어 화제입니다. 지난 4월 12일 러시아 하원이 자국 내 외국인투자회사의 국유화와 관련된 법안을 발의하여 심의 중에 있고 조만간 그 입법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법률신문 5. 16). 한 때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이자 최고의 산업국이던 러시아가 이런 조치를 발표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러시아만이 아닙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중국도 최근 몇 년 간 상당히 주목할 만한 비정상적인 경제적 조치들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특성을 띠어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첨단 장치에 필수적인 17종 원소를 통칭하는 “희토류(稀土類, Rare Earth Resources)”라는 말이 최근 수년 간 엄청나게 회자되지 않았습니까?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중국이 2010년부터 희토류를 일종의 ‘자원 무기(Resource Weapon)’로 만들어서 우호적인 국가에만 수출하고 대립하거나 자신들을 제재하는 나라들에는 수출을 금지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자원민족주의는 석유나 가스 등 자원에 국한되었고 주로 국유화조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희토류뿐만 아니라 니켈이나 리튬 같은 자원으로 대상이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상 또한 생산량 제한이나 선별적 수출과 같이 다양화되고 있어 문제입니다. 특히 화석연료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그 중요성이 급증하고 있는 탄소중립 필수자원의 공급망을 관리하는 방식(SCM, Supply Chain Management)을 활용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더욱 문제가 복잡해지고 커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상기한 자원민족주의의 신종 형태로 등장하여, 우리나라가 거기 엮여서 그 자체로도 문제인데다 이를 둘러싼 국론조차 대립하고 분열되어 더욱 심각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메신저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온라인서비스 ‘라인’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일종의 국유화 시도가 그러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른바 ‘플랫폼 데이터 규제’ 조치가 미국이나 유럽연합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중국 산 ‘틱톡’ 앱의 퇴출 방안과 이에 대항하여 중국이 취한 자국 내 미국 동종 플랫폼의 사용 금지 조치 등에 국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 정부는 개인 정보 유출을 이유로 한국 기업 네이버에 라인야후 지분을 매각하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굴종외교라며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반면 반일몰이라며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앞으로 ‘디지털 국유화(Digital Nationalization)’ 내지는 ‘온라인 자원무기화(Online Resource Weaponization)’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영토나 주권을 배경으로 하던 시대와는 그 결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경도 없고 장벽도 없는 인터넷 세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옳지 못합니다. 부디 이번 사태로 인해 디지털 세상의 자유와 정의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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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목회자칼럼]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
    ‘내가 잘한다는 착각, 내가 서툴다는 착각, 내가 소중하지 않다는 착각, 내가 이쁘다는 착각’ ‘인생은 착각의 역사다’는 말이 있듯 사람은 알게 모르게 많은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 중 하나가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무심하게 대하는 내 모습을 본다. 항상 내 옆에 있기에 편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아내, 오랜 시간 한 교회를 섬기며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동역자들과 교인들. 편한 친구들과 동생들. 모두 익숙한 사람들이기에 잘 안다고 여겼는데, 문득 생각하니 나 중심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크라테스 형님이 “너 자신을 알라”고 했으니, 익숙함으로 인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첫째, 마음 속 우월감, 열등감을 돌아보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란 언제 생길까? 나의 정체성이 약해질 때,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시선이 나에게서 타인으로 옮겨간다. 그러면서 내게 있는 좋은 점들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들에 시선이 멈추며 생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월감, 열등감이 물밀 듯 밀려오는 시점이다. 분명, 나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녀인데, 그 정체성은 사라지고 비교의 함정에 빠진게 된다. 토끼가 거북이와 비교할 때 빠르지, 기린과 비교하면 빠르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적인 비교에 빠지만 착각의 늪에 헤매고 만다. 둘째,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보자. 나는 장년부 사역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청소년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 38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한다고 청소년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과연 나는 청소년을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혹시, 내가 오랫동안 청소년 사역을 해왔기에 청소년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고민, 아픔, 갈등, 내면의 생각을 깊게 알고 있기는 한건지 나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본다. 셋째, 나의 내면을 자세히 보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에 나의 내면을 자세하게 볼 여유가 없다. 마음을 잡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나의 자아를 특정할 수 없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조차 일관성있지 않는 모습, 나와 타인을 수용하지 못해 요동치는 내 마음.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실제로 나의 내면을 직면하면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착각 속에 살고 있구나”라는 사실 뿐이다. 넷째, 내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자. 예수님의 제자라면 삶 속에서 예수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말로는 믿음, 사랑, 소망, 섬김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행동으로는 철저하게 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 타인과 관계할 때, 어떤 일에 진행할 때, 예수님의 생각이, 성경적 생각이 먼저 떠올라야 하는데 오늘도 나는 내 생각이 무의식으로 흘러나온다. 익숙함에 착각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로 말이다. 살다보면,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들, 나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더 늦기 전에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착각을 멈춘 후에, 내가 존재적으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죄인인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우리가 은혜스럽게 부르는 이 찬양의 가사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자.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란 이 표현이 삶으로 동의가 되는지. 내 삶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아픔과 꺾임이 있는지 자문해보자. 사랑하는 동역자, 성도님들과 이같은 고민, 갈등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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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대구와 거제도에서 봉사한 존 시블리 의사
    의료선교사 존 로슨 시블리(John Rawson Sibley, 1926-2012)는 최근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는 대구 동산병원(1961-68)에서 그리고 거제도(1969-1977)에서 8년간 의료사업을 펼쳤던 인물이지만 거제도 주민조차도 그의 봉사를 모르고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부산 늘빛교회 시무장로였던 정태산 의사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그의 봉사를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앞선 시대의 봉사자를 기억하는 것은 후대 사람의 도덕이기도 하다.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에는 ‘전사불망 후사사야’(前事不忘 後事師也), 곧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일의 스승이라’고 했는데 시블리의 헌신은 오늘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존 시블리는 1926년 10월 7일 미국 뉴저지주 메일플우드에서 노만 시블리(Norman Sibley)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3년 앰허스트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인 1945년 2월 육군에 입대하여 일본에서 복무하였다. 이때 만난 의료선교사 토핑(Dr Topping) 여사의 영향으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48년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만난 진 버틀러(손진희, Jean Lee Butler, 1926-?)와 그해 7월 2일 혼인했다. 부인은 교육학을 전공한 영어교사였다. 시블리는 의학 공부를 위해 노스웨스턴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리과 2년, 일반외과학 4년의 수련의 과정을 이수하고, 1960년 부인과 함께 미국북장로교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961년 대구지부로 배속되어 대구동산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게 된다. 마펫 원장의 안식년 기간에는 원장 서리로 일했다. 동산병원에서 일하는 한편 대구 한센병 전문병원인 애락원에서 외과진료를 병행했다. 특히 그는 병원신축이 필요하다고 보아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벌려 애락원에 3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는데, 국내에서 유일한 정형외과 수술관이 되었다. 이 애락원이 1968년에는 대구애락보건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시블리는 정형외과 김익동 과장과 더불어 한센병 환자 수술을 시행했는데, 한센병의 이차 증상으로 오는 안면 마비 환자에게 근전이술과 안면 현수 고정술, 또 눈썹이 사라진 자리에 두피 머리카락을 이식하는 수술을 시행하는 등 한센병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1963년 동산병원의 이철 외과 과장이 3년간 미국 연수를 가고 없을 때는 다른 의료선교사인 존 해밀턴 다우슨(John Hamilton Dawson)과 함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미국의 선진 의료기술을 전수하였다. 1964년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성형외과 및 일반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이수하는 등 의료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다시 내한한 1969년에는 거제도로 가서 의료활동을 재개하였다. 그가 거제도로 간 것은 그곳의 의료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시블리 의사는 세계교회협의회 산하 기독교의료위원회(CMC)에서 ‘거제지역사회보건시범사업’(Jojedo Community Health and Development Pilot Project) 승인을 받아 거제군 하청면 실전리에서 시범사업을 위해 ‘거제건강원’이라는 기관을 개설하고 전통적인 병원 중심의 의료가 아닌 예방 등 더 넓은 의미의 지역사회 보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거제 주민들은 이곳을 ‘실전병원’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시블리 의사는 우리나라 공중보건 역사상 중요한 ‘지역사회의학’을 도입한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시블리는 치료의학의 한계점을 발견하고 차츰 병원 중심의 치료의학으로부터 지역사회 보건교육 및 일차보건의료접근법을 활용한 지역사회의학을 개척한 것이다. 이것은 저비용 고효율의 1차 의료보건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제도에서 첫 사역은 대구동산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한 고수자, 김정남, 문태임, 유시영 등 네 간호사가 동참하였다. 유승흠 의사도 약 1년간 시블리 의사와 동역했다. 그 후 시블리 의사는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에게 자신의 의료사업을 도울 한국인 의사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때 장기려 박사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복음병원 내과에서 일하던 정태산 의사를 천거하였다. 그래서 정태산 의사가 거제도로 가서 시블리 의사와 같이 오랜 기간 동역하였다. 시블리 선교사는 거제도에서 8년간 일했는데 ‘섬 주민을 돌보는 선교사’라는 제목으로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거제도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1977년 51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거제도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보건학에 대한 논문으로 1979년 하바드대학교로부터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에는 태국의 피난민 켐프에서 보건사업을 전개하였다. 1981년에는 다시 내한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지역사회의학 교수로 활동했다. 1983년에는 네팔로 가서 의료선교사로 3년간 봉사했다. 의료선교사직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에서 의사와 교수로 활동하고 2012년 6월 24일 8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거제도 주민들은 시블리의 공적을 기념하여 공적기념비를 세웠다. 슬하에 4자녀를 두었는데, 차남 노만(손용만, Norman Sibley)는 마삼락 박사와 더불어 1982년 한국이 풍물 사진을 엮어 First Encounters라는 영문 책을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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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5-17
  • [성서연구] 이 말씀이 여기 있는 이유
    본문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은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세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본문 열두 절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없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14절이 이를 보여줍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습니다. 2장 1~4절입니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므로 1장 14절에서 오늘의 본문 없이 곧바로 2장 1절로 이어지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세워진 맛디아가 그 후 복음 전파 과정에 바울처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본문이 의미가 있겠지만, 본문 이후에는 맛디아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열두 절을 그 사이에 배치하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먼저 이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베드로가 유다의 죽음과 그 직분을 다른 이가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서 주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맛디아가 세워진 과정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본문을 근거로 교회에서도 장로, 권사, 집사 등을 세울 때, 혹은 심지어 담임목사를 세울 때, 혹은 노회장, 총회장 등을 세울 때도 제비뽑기로 하자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왜 요셉과 맛디아만 후보가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3의 후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비뽑기를 할 때 베드로가 했는지, 혹은 두 후보가 직접 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본문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 때문에 본문 열두 절을 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주신 핵심 이유는 22절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이때 베드로와 성도들의 관심은 유다의 빈자리를 채워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 두 가지 중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이 부활의 기쁨에 충만했고, 부활의 메시지를 이어 나가려는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활주일이 지나면 그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가느라 분주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365일 내내, 우리 가슴에 있어야 합니다. 또 이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6~48절입니다.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명에 몰두했고, 이를 위해 맛디아를 보선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모임에서 어떤 이를 세우는 데는 관심이 많지만, 세우는 자나 세움받는 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성도들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목적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이 일 다음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기록된 것은 성령님 강림의 목적이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승리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기쁨으로 살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목적에 의해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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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소강석칼럼] 우리들만의 아주 특별한 밤
    저는 故 이어령 교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의무봉의 필력으로 끝없는 지식을 거대한 산맥처럼 이어가셨고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창조적 신지식의 세계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저의 문학세계를 인정해 주시고 시집 ‘꽃씨’ 추천사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한국 시사의 첫장으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바다에서 소년에게’에서는 파도가 네까짓께 뭐야 라고 바위와 뭍을 몰아세우며 우르르 쾅 덤벼들지만, 소강석 목사의 그리움에서는 오히려 파도와 뭍의 절벽은 서로 친화의 사랑과 그리움으로 어울린다. (중략) 불교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이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 지도자들도 시를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시기를 빌면서 이만 말을 거두려 한다.” 특별히 이어령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에 대해 애착심이 많으셨습니다. 언젠가 전화를 주셔서 “내가 하늘나라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내가 뭐 추천서 쓸 거 없습니까? 작품 있으면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를 썼을 때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소강석 목사는 예향(藝鄕)의 마을 남원 출신으로 목회자인 동시에 시문(詩文)에 능하고 풍류와 흥이 있으며 거친 남도 사내의 야성도 있다. 그의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 사람을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풍모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나의 언어를 마지막 선물처럼 주고 이 시집의 추천사는 어쩌면 나의 마지막 도움의 말이 될지 모른다. (중략) 나는 그가 그리울 것이다. 그의 시가 그리울 것이다. 그와 나누었던 추억과 순간들이 그리울 것이다. 소년 같은 그의 웃음과 미소도….” 결국 이어령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저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 분의 장례식에 직접 가서 조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께서 저의 시를 인정해 주시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목사들의 시가 문단에서 잘 인정을 못 받습니다. 일반 서점에서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시가 이미지나 낯설게 하기, 은유와 함축, 반전 같은 것들이 없고 그냥 고백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러나게 쓰다 보니 논외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종회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를 접하시더니 목회자 시의 테두리를 넘어서 문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시집 원고를 보내 드렸더니 “몇 군데 좀 수정하면 안 되겠느냐” 하셔서 다시 표현을 했더니, 확실히 더 돋보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년에 한강 세빛섬에서 북콘서트를 했을 때도 직접 참석하셔서 시 토크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그때 세빛섬에 초청받지 못한 분들이 정말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예상을 초월한 북 콘서트였습니다. 이번에는 책을 파는 북콘서트가 아니라 봄을 맞아 꽃과 관련된 저의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느끼는 ‘꽃소리 들리는 밤’의 시 콘서트입니다. 물론 김종회 교수님을 초청하지 않고 우리끼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게도 문단에서 가장 위대한 평론가 중에 한 분이신 김종회 교수님을 모시고 시 콘서트를 할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먼저 짧게 1부 예배를 드린 후, 우리 교인들과 함께 시 낭송과 노래, 연주, 토크를 진행하며 꽃향기가 보이고 꽃소리가 들리는 특별한 밤을 갖는 것은 우리들만 누리는 특권입니다. 저녁에 오신 분들을 정말 예의를 갖춰 모시겠습니다. 오늘 밤,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꽃소리 들리는 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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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시사칼럼] 봄을 사는 이들이여, 메멘토 모르툼!
    유행병이 한창이던 수년 전 4월의 어느 날, 박지훈 목사가 「봄을 사는 이들에게」란 노래를 발표합니다. 제목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가사가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소개합니다. “봄을 사는 이들에게 오래 전에 이미 도착한 봄의 온기가 아직 다다르지 않은 이곳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봄을 아는 이들에게 날카롭게 오는 눈발에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 무척 힘든 이곳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큰 지붕 위에도 작은 지붕 위에도 멈춘 차에도 달리는 차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이곳에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그곳에는 벌써 도착한 봄이 아직도 배달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4월에도 눈이 옵니다. 나에겐 겨울이 더 어울린다 하며 그런 따뜻함이 있을 수 있냐며 봄을 잃은 사람에도 봄을 모르는 사람에도 이곳에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그곳에는 벌써 도착한 봄이 아직도 배달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모두가 봄기운을 만끽할 때 여전히 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향기 날리고 분분한 낙화 대신 사월에도 온통 마음속 거리마다 눈이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인생들이 어찌 한둘뿐이겠습니까마는, 특히 여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다리며 여전히 사월의 겨울을 살고 있는 세월호의 다섯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이와 같이 누군가를 우리는 잊을지언정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아니, 우리도 그래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벌써 십년 전의 그 날 우리 모두는 뭐라고 외쳤습니까?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늘의 별이 된 얘들아, 우리는 절대 너희를 잊지 않을게!’ 하지 않았던가요?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은 죽은 자를 기억한다’며 죽은 자를 향한 사랑이야말로 아무 보답도 해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비이기적인 사랑이고, 동정을 유발한다든지 해서 어떤 식으로든 강요할 수도 없는 짝을 향한 가장 자유로운 사랑이며, 도대체 변화할 수가 없는 존재를 향한 가장 신실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죽은 자를 향한 사랑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잊은 자를 어찌 사랑하겠습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 어찌 기도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는, 지금 그들을 어떻게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는지요? 예로부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유명했습니다. 라틴어로 이루어진 이 문구는 로마 시대 개선식을 거행할 때 승리한 장군 옆에 둔 노예가 끊임없이 속삭였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승리에 안주하거나 도취하지 말고 ‘나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되뇌며 겸손하란 취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잠언이었겠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차츰 기독교의 세계에도 들어와서, 중세 시대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였다고 전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경에 드러난 헤벨 사상 곧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전 1:2)라는 의미의 중세식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도 이 말을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종의 기독교적 허무주의에 대해 살짝 비틀기를 시전하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대신 ‘죽은 자를 기억하라’를 말했습니다. 기존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대신 “메멘토 모르툼(memento mortuum)”을 주창하고 나섰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메멘토 모리”, 좋은 교훈이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숭고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자기 겸손의 발로(發露)였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메멘토 모르툼”은 이타적인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죽은 자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을 테니 그를 향한 사랑은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월에도 겨울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봄을 가져다주려면 필요한 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앞서 소개한 「봄을 사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봄이여 오라 봄을 떠나 온 이로 인해, 꽃이 피어라 꽃을 품고 온 이로 인해, 겨울에 사니 내 안 봄 더욱 만개합니다, 보내진 곳을 사는 이로부터.” 작가는 보스턴에 머물면서 어느 해 4월에 내린 눈을 보며 이 노래를 구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도달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겨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 봄을 전하기 위해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고 있는 분들도 있답니다. 봄의 왕국을 떠나서 겨울왕국과 같았던 이 땅에 처음 꽃을 품고 온 배달의 시초, 배달부 중의 배달부이신 예수님을 따라 더 많은 봄이 배달되기를 소망해봅니다”(박지훈). 봄을 사는 이들이여, 아직도 겨울을 사는 이들에게, 이제는 겨울 대신 봄을 전해주지 않겠습니까? 눈 대신 꽃을 피워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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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은혜의말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삼상 8:1-7)
    사무엘도 점점 늙게 되고, 그의 아들들이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자 다시 이스라엘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믿음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중한 교훈을 배웁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처럼 믿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익에 따라 뇌물을 받고, 돈에 무너졌을까요? 믿음이란 자동적으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본인 자신이 믿음의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은 자기 몫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를 위한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선순위이지만, 자식을 돌보는 것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믿음으로, 기도로 키워야 합니다.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를 위한 기도와 신앙 계승에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다른 나라처럼,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요구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은 기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왕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블레셋, 모압, 암몬 같은 나라들이 모두 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멋져 보였던 모양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왕관을 쓰고, 멋진 옷을 입고, 주위에 호위 군대를 거느린 모습이 대단해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더 좋은 것에 눈길이 가고,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고, 나타난 것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오늘 현실에 당장 뭐가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하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세상과 물질과 힘을 더 의지하려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사람은 자기중심적 교만의 성향이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으로는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보호해 줄 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계획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욕심, 불신, 자기중심적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나를 위한 세속의 보호가 필요하고, 방패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교만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을 기뻐하지 않으셨지만, 왕의 제도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 불안한 현실을 통하여, 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영적으로 어려서, 이방인처럼 왕이 없이 지내는 것을 불안해 하기 때문에 허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억지로 가려고 할 때 그대로 두십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뒤로 제치고, 눈에 보이는 왕을 구함으로 결국 어떤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인가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위기는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더 좋아 보이는것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내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먼저 기도하고, 행동하는 원칙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주인이시오,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이 왕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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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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