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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그리스도인의 자유
    19세기 중반에 기하학(幾何學)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기하학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진리를 차려놓은 과정”이었으며, “사고를 이끌어주는 놀라운 스승”과 같았습니다. 19세기 말엽에 로마법, 농민법, 인종학 등 사회과학에 심취한 경제학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공부를 통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혔고, 이를 통해 “인류가 처해 있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앞의 젊은이 이름은 앙리 파브르(Henry Fabre, 1823~1915)로 훗날 『곤충기』를 썼고, 뒤의 젊은이 이름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로 비구상적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가 되었습니다(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422-24). 만일 파브르에게 ‘너는 기하학을 잘 하니 반드시 수학자가 되어야 해’라고 강요하고, 칸딘스키에게는 ‘전공과 관계없는 미술을 택하지 말라’고 압박을 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른바 ‘곤충세계의 호머요 선지자’는 탄생하지도 않았을지 모르고, 우리는 고도로 추상화된 현대회화의 걸작을 만끽할 가능성조차 빼앗겼을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와 창조정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파브르 같은 솔로몬도 있고(잠 30:17~21) 악령을 제어하는 음률시인 다윗도 있으며(삼상 16:23) 건축기술을 전공한 성경학자 바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행 18:3). 종교개혁자 루터 또한 법학도였으며 뛰어난 음악가였고, 역시 법을 전공했던 칼빈은 로마의 키케로(Cicero, 106~43, B. C.)에 관한 인문주의 논문을 썼으면서도 탁월한 목사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498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Wittenwerg)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요 8:32)는 말씀이 가시화된 사건입니다.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교황과 로마교회의 획일화된 교조주의(敎條主義) 가르침만을 무비판적으로 굴종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개신교회는 등장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1520년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세 편의 개혁주의 문서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인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외의 어떤 절대적인 이념(理念)이나 주의(主義)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지난 20세기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파시즘(fascism), 볼세비즘(Bolshevism), 매카시즘(McCarthyism) 등의 광풍(狂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선한 양심을 뒤틀리게 했으며 심지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갔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른들이 볼 때 당연한 것도 아이들에게는 궁금하고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방적으로 정답 하나를 말해주기 보다 열 마디 이상의 대답을 해주면 아이들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왜?’라는 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발생한다.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포기하지 말라”(이지훈, 『혼창통』, 138). 세상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그러한가(scrutantes Scripturas)” 하면서 성경을 보았다 했습니다(행 17:11). 무비판적으로 맹종한 것이 아니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anacrinontes, scrutinizing) 성경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세상의 진리와 가치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혹시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사상의 자유시장(free market of idea)’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데, 미켈란젤로 식으로 말하자면 이 둘은 결국 ‘같은 한 주인’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Jesus liberabit v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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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 [서임중 칼럼] 오늘도 사도 바울의 흉내를 낸다.
    은퇴 1년이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이 명시 한 정년을 지키지 못하고 조기 은퇴한 것은 분명 법리적으로 잘못임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동역자들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헌법이 정한 정년을 지키는 것이 은혜요, 질서라는 것을 요즈음 강조한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은 이유는 일찍 그것을 마음에 담았고 개인적인 서원과 말씀사역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다 건강할 때 나에게 주신 은사의 하나인 말씀 사경회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는 가난과 병약함과 고난의 환경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 대형교회를 담임하면서도 늘 이 부분이 마음자리에서 어느 한 날도 떠나지 않았기에 조금은 일찍 은퇴하여 농어촌 개척 산골교회를 다니면서 자비량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사도 바울의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2년 단위로 부흥사경회 일정을 약속하는데 52주 매 주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50여명 미만의 교회의 초청만 허락하여 자비량 1일 부흥회로 헌신하고, 주중에는 조금은 갖추어진 교회들의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 운전에 익숙하지도 않고, 숙식도 대형교회 시무할 때처럼 갖추어진 환경이 아니어서 이래저래 불편함이야 말할 수 없지만, 칠순에 이르는 나이에 아내와 함께 번갈아 운전하고 차내의 찬송과 말씀을 들으면서 어촌 길, 산골 길, 고속도로를 주행하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한다. 휴게소마다 들러 아내랑 마주앉아 차 한 잔 나누면서, 평생을 목회 뒷바라지만 하고 여기까지 온 아내에게 쉼의 은총을 갖게 하지 못하고 고달픈 여정을 갖게 하여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면, 아내는 “이보다 더 행복은 없다.”고 웃음을 짓는다. 조기은퇴를 하게 될 때 교회에서는 목회와 관련된 다양한 뒷바라지를 해 준다고 결정하였지만 이래저래 뒷말이 있어 나는 거절했다. 목사라는 이름의 거룩한 자존심 하나로 오늘에 이르렀는데 잡다한 흠집 내기로 목사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내 자존심으로는 허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프고 힘들고 외롭지만, 아내와 함께 운전을 하면서 여전히 서원한대로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을 흉내라도 내고 싶은 하루를 열고 닫는다.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여정을 나는 2차 여정까지는 돌아보았다. 그때 편리한 교통수단을 통해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참 많이 울고 웃었다. 그 때 결심한 것이 나도 남은 생애 바울처럼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헌신하리라 서원했었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상황과는 다르게 말할 수 없는 편리한 교통수단과 환경이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그가 복음전도에 일생을 바친 그 삶을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전라도 해남까지 이르는 곳마다 눈물행전을 쓰고 있다. 35명 정도 모인 어촌교회, 가장 젊은 교인이 62세로 90% 이상이 70대를 넘긴 어르신들만 사는 산골교회, 어른이라고는 5명 정도, 어린아이들이 10여명 정도 모여 혼신을 다하여 박수치며 찬송하고, 말씀마다 아멘을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개척교회, 통성기도를 시켜놓으면 통곡이 터지면서 차마 그 기도를 멈추게 할 수 없는 상황에 강단에서 강단 아래서 함께 울고 또 울면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 예배를 마치면 “목사님, 한번만 안아줄 수 없어요.”하는 허리 굽은 할머니를 품에 안고 그냥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낸 시간이 엮어지는 주일 예배는 감동과 행복, 아픔과 고뇌, 기쁨과 축복이 뒤엉킨 시간이다. 주일 오전예배를 마치고 나면, 점심시간은 못난 목사를 주님처럼 영접하며 예배를 준비한 교인들이 집에서 각자가 갖고 온 온갖 반찬들을 앞에 내놓고 오랜만에 밥을 했다고 자랑하듯 기뻐하면서 시골특유의 밥그릇 위로 밥이 올라오도록 고봉으로 담은 밥그릇을 앞에 놓고 “목사님 목사님, 이것 다 잡숫고 또 잡수셔요.”하면서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은 그대로 강사라고 섬기는 연로하신 권사님의 표정은 문자 그대로 천사였다. 그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차라리 울음이라는 표현이 맞다. 찬송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말씀 선포하면서 울고, 그렇게 눈물 행전을 기록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말씀 사역을 한다. 은퇴하고 난 후, 선배 목회자들이 충고했던 것처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온갖 아픔과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다는 말을 귀넘어들었던 현역시절이 회고된다. 그렇게 웃고 울면서 함께 했던 평행감축의 목회 현장이었는데 바통 터치가 끝나자 말자 이방인이 된 듯 돌변하는 교회 현실을 보면서 충격과 놀라움에, 이것이 내가 목회한 곳이 맞는가 싶은 상황에 트라우마(trauma) 현상에 실어증으로 유구무언이 되었다. 그러다가 주님 가신 길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어루만지심을 입고 일어나 내면의 아픔을 안고 억울하고 참담한 일을 당하면서 할퀴고 쥐어뜯는 일을 겪으면서도 골고다 언덕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가야 할 길을 걷는다. 사도 바울이 족보와 학벌과 명예와 권력과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말씀의 두루마리를 들고 그토록 모진 매를 맞고 헐벗고 굶고 병들고 동족과 이방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바다와 강과 시내의 위험을 겪으면서 오직 말씀사역을 하면서 침묵하면서 주님가신 길을 걸었던 것처럼, 나는 오늘도 그 사도 바울의 흉내라도 내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말씀 사역의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이 없다. 주님이 어서 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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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 [성서연구] 유다의 품에서 샬롬(여호수아 19장 1-9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령한 땅을 나누었을 때, 아직도 일곱 지파는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땅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 방안은 지도를 그려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도를 그려온 후 지도를 놓고 점령할 땅을 분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중에서 시므온 지파의 땅 분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의 땅 분배는 참 이상합니다. 다른 지파는 모두 자신들끼리 모여 살도록 분배되었는데, 시므온은 유다 지파의 땅 이 곳 저 곳에 분산되어 살도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유다 지파의 몫이 너무 커서 나눠 가지게 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둘째 이유는 시므온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응보였습니다. 일찍이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 동생인 디나가 세겜에서 겁탈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세겜의 남자들을 도륙한 일이 있었습니다. 복수의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몰살시킨 것은 지나친 분노였습니다. 후에 그들의 부친인 야곱은 열두 아들에 대해 예언적 유언을 언급하면서 시므온과 레위는 그 형제들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49장 7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결국 시므온이 유다의 땅에서 기업을 받은 것은 이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레위 지파도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진 것을 보면 야곱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가 이렇게 땅을 받은 데는 매우 큰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죄인은 구주의 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죄인의 지파요, 반면 유다 지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는 왕의 지파였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였고, 예수님께서도 동정녀 탄생을 하셨기에 실제로는 상관이 없지만, 형식적으로는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등에는 예수님께서 소위 “이새의 줄기”,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죄인이 구주 예수님의 품에 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죄인은 오직 예수님의 품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이 결국은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 품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살길 원합니다. 둘째, 후에 여호수아가 세상 떠난 후 땅을 점령하러 갈 때 유다 지파가 제일 먼저 출정하게 되는데, 그 때 시므온 지파가 합류하여 따라가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사기 1장 3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할 때 제일 먼저 앞장 선 것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예수님의 상징이라 했으니, 언제나 예수님께서 앞장서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란 찬송 그대로 대장되신 주님을 모시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품에만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기업, 우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언제나 대장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려 하지 말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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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수록 위대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없었으면 건국이 어려웠고 좌우합작했으면 적화됐을지 몰라 해방 직후 국민의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미국마저도 좌우합작으로 정부를 수립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사코 반대하고 끝내 단독정부 대한민국을 수립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를 휩쓴 사상은 좌우합작 사상이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 대항해 이기기 위해서는 좌파든 우파든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았다. 그러한 민족대단결주의의 명분은 해방 후 우리 한반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좌파든 우파든 모두가 손잡고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다른 의견을 달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명분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 원래 우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온건하다.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하다. 반면에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단결력이 강하고 투쟁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파가 좌파와 손을 잡으면 우파가 좌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좌우합작의 연합정부를 세웠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같은 동유럽국가들이 모두 공산화된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중국에서도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이른바 국공합작을 했다가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한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같은 좌우합작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그 위험성을 밝히 알고 있는 지도자는 이승만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당시 미국도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주의적인 태도는 단호했다. 이유는 조직력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으면 공산화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국내외적으로 온갖 역경을 딛고 악조건과 싸워 종내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하여 UN이 1948년 5월 10일 한국 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그랬으나 가을에 열리는 UN총회에서 승인받는 것이 문제였다. 반대표를 던질 위험성이 있는 나라가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가 승인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개인을 상대로 호소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에 승인되었다 이승만, 생각해 볼수록 위대하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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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 [시사칼럼] 어느 개혁주의 화가의 일생
    지난 10월 1일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루 전인 9월 30일 네덜란드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가 그린 초상화 두 점을 공동으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예트 부세마커(Jet Bussemaker) 문화장관은 현재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이 그림들을 양국 정부가 절반씩 부담해서 1억 6,000만 유로(약 2,120억 원)에 구입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서 순회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중(公衆)을 위해 미술품을 산다는 사실도 생소하고, 그것도 구매 경쟁에 나섰던 두 나라가 대의(大義)를 위해 국적을 초월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합니다만, 보다 뜻 깊은 의미가 이번 미담(美談)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각기 210×135cm, 210×134cm 크기의 두 작품은 결혼식을 앞둔 예비 부부 마르텐 솔만스(Maerten Soolmans)와 오프옌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림이 그려진 1634년은 렘브란트가 정든 고향 레이든(Leiden)을 떠나 암스테르담(Amsterdam)에 정착한 지 4년째면서 그곳에서 만나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 사스키아 아위렌부르크(saskia Uylenburg)와 약혼한 지 1년 만에 백년가약을 맺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생활도 안정된 렘브란트는 이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633),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1633), 「그리스도의 승천」(1636), 「그리스도의 매장」(1639), 「그리스도의 부활」(1639)-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렘브란트가 태어날 무렵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레이든 대학에서 가르쳤던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영향으로 예정론을 부정하는 ‘항의파(remonstrant)’가 일어나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습니다. 1618년 도르트레히트(Dortrecht)에서 개혁교회 첫 국제회의가 열렸고, 개혁파들은 아르미니우스 파를 정죄하고 ‘도르트신경(The Canon of Dort)’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1609년부터 종교적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와 있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부터 1629년까지 대거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처럼 화가 렘브란트는 종교개혁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1642년, 지금은 렘브란트 불세출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야경」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쏟아졌던 혹독한 비판과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이 그를 은둔과 파멸로 내몰았습니다. 1656년 마침내 그는 파산했고, 1668년 9월 남아있던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 티투스마저 잃은 후, 이듬해인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 운하 끝자락에 위치한 호젠흐라흐트(Rozengracht)라는 마을 작은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할 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재산도 명예도 가족도 건강도 남아 있지 않았던 1668년, 렘브란트는 262×206cm의 걸작(傑作) 「탕자의 귀환」을 그렸습니다. 머리털도 외투도 없이 낡아빠진 옷에 찢어진 신발과 상처투성이의 발바닥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은 차마 얼굴도 보여주지 못한 채 등을 지고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어깨와 등을 만지며 거의 감긴 눈으로 측은하게 바라보는 노(老) 아버지의 모습이 애틋해 보입니다. 1669년, 렘브란트는 마지막으로 98×79cm의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을 남겼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렘브란트의 하나님』, 안재경, 홍성사, 287에서 인용). 돌아온 탕자처럼, 시므온처럼, 그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긴 지 345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프랑스에서 네덜란드에서 나란히 전시될 솔만스와 코피트의 초상화처럼, 그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천국에서 주를 그리며 서 있겠지요.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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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목회자칼럼] 연변기행
    지금 우리에게 중국동북지방은 <연변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번에 다섯 번째로 연변지역을 방문하면서 보다 깊이, 보다 책임감 있게 연변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연변지역을 중심한 중국의 지금 동북지방은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출발과 삶의 첫 번째 터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처음 여기서 출발하였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 옥저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져 살다가 고구려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나라(국가)다운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으로는 역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백제와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그 결과 일컬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가 열려 아시아동북지역은 우리 한민족에 의하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면서 세 개의 나라가 700여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AD 660년에 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아시아 동북지역의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지만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정복은 당했으나 실상은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신라의 통치권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고구려가 가꾸어 놓았던 저 광활한 송화강, 목단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기름진 땅은 그 때 이후로 우리 한민족의 영역에서 멀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우리 한민족의 영토는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안타까운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우리는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을 북쪽 국경으로 하는 말 그대로 <한반도 3천리>만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870년대 말, 함경도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왕조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어 조정의 통치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극심한 흉년에다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불쌍한 백성들은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1870년대의 두만강 이북 땅은 청나라의 행정력 또한 제대로 미치지를 않아 거의 방치상태로 버려진 땅이었다. 함경도 지역의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서 굶어서 죽느니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 땅으로 들어가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드문드문 청나라의 국경 경비대들이 있었으나 먹고 살 길을 찾아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청나라 군대의 위협과 천대 멸시를 온 몸으로 감수하면서 방치되고 버려진 그 땅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토굴과 토담으로 된 움막을 짓고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삶>을 시작하였다. 함께 모여 이웃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면서 황무지를 파헤쳐 씨를 뿌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여기 저기 자그마한 논밭이 일구어지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저 연변 땅은 우리 한반도 남쪽의 기름진 당과 너무나 흡사하게 옥토로 변모 되었다. 나는 이번 방문길에서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맨손으로 피땀 흘려 일구어 가꾸고 넓혀왔던 연변의 논과 밭은 1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름답고 탐스럽기가 그지없어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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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교회법률상식]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에 대한 소고(2)
    5. 제9장 제4조 4항에 “장로, 집사, 권사 임직”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권사를 임직한단 말인가? 오직 권사는 임시직으로서 취임할 수 있을 뿐이다. 안수하지 않는 직분은 임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6. 제10장(노회) 제3조(노회 회원의 자격과 권한) 본 항의 내용은 위임목사의 노회와 총회로 만들어 장로회 정치원리에 반하는 독소조항이다. ① 현행 헌법은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70세전 원로목사, 교단 기관목사, 종군목사, 교육목사, 선교사는 모두 정회원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위원회의 개정안은 위임목사만 정회원으로 하여 총회 총대 피선거권을 위임목사에게만 부여하였다. 따라서 위임목사가 아니면 아무도 총회 총대가 될 수 없게 하여 위임목사의 집단적 독재정치가 되게 하였다. ② 아이러니한 것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는 결의권, 투표권, 총회 총대권은 있으나 피선거권이 없는 회원이다”라고 했으니 피선거권 없는 원로목사가 어떻게 총회 총대로 피선되어 총대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법리에 맞지 않는 모순이다. ③ “전임목사는 노회 서기까지만 피선거권이 있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된다. ④ “부목사의 회원권은 시무하는 교회의 장로 총대 수를 초과할 수 없고 피선거권이 없다”는 것 역시 법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목사 10명에 총대장로 4명인 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에 “노회조직은 일정한 지방 안에 목사와 각 당회에서 파송하는 장로로 조직”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부목사는 모두 당당한 노회원인데 부목사 10명 중 누가 어떤 방법으로 4명은 회원권이 있게 하고 6명은 박탈한다는 말인가? ⑤ 선교사, 기관목사, 전도목사, 군종목사, 교육목사, 정년 이후의 원로목사, 은퇴목사는 발언권은 있으나 투표권과 피선거권 및 총대권이 없는 회원이다. 이는 민주적 정치(정치 제도 5)인 장로교 정치의 원리와 법리를 망각한 처사이다. ⑥ 노회 상회비를 납부하지 않는 교회의 목사와 총대 장로는 발언권이 있으나 투표권이 없다. 이는 헌법으로서의 품위가 없다. ⑦ 제8조 1항에 “총회 결의로 노회를 분립하게 될 경우, 지교회 공동의회(교인총회) 참석 인원 3분의 2의 이상의 찬성으로 소속 노회를 결정한다”고 한 것은 노회분립의 원칙을 망각한 탁상공론으로서 지역노회를 폐지하겠다함에 다름 아니다. 노회 분립에 어찌 지교회가 소속을 결정한단 말인가? 이상 각항은 위임목사의 집단적 독재정치 제도로서 지교회를 시무하는 전임목사와 부목사의 숫자가 위임목사의 3배 이상이 되는 상황에서 정회원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장로회 정치가 아니다. 7. 제12장(총회) 제8조(총회의 직무) 3항에 “총회 현장에서 범죄행위를 하였을 경우 즉결 할 수 있으나, 즉결 처결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총회는 기소위원을 선정하여 총대 목사와 총대 장로의 원심치리회로 고소할 수 있다”고 한 초안은 즉결처단이 무엇인지 기본 상식도 없는 자의 발상이다. (헌법 개정위원들은 총회 현장에서 범죄 한 행위 중에 “즉결 처결할 수 있는 경우”와 “즉결 처결 사건이 아닌 경우”를 구별해 보라!) 즉결처단(권징 제48조)은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행정치리회 석상에서 범죄 한 사건이 아니라 권징치리회인 재판 석상에서 범죄 한 사건을 재판관이 직접 목격한 범죄 사건에 한하여 기소, 증인, 증거, 심문 등의 재판 절차 없이 목격한 재판관이 재판 석상에서 즉시 판결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행정치리회 석상에서 범죄 한 사건은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행정 사무관의 신분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반드시 재판절차에 의하여 재판관 신분으로 처결해야 한다. <결론> 헌법개정위원회가 제시한 헌법 개정안은 한마디로 말해서 뒤죽박죽이다. 단 한 가지만 법리에 맞지 아니 해도 개정안을 그대로 채택할 수는 없는데 이상과 같이 수많은 조항이 모순투성이인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대로 헌법이 개정된다면 이는 결코 장로교 헌법일 수는 없다. 감히 필자는 지난 2015.3.16. 11:00-15:00에 헌법 전문가 초청 간담회 시에 발제자로 초청을 받으면서 간담회를 주관하는 헌법개정위원회 측에서 요구한 바에 따라 제출했던, 헌법 개정초안 정치 편 제1장에서 제23장까지의 전반적인 개정안을 다시 제시하면서 참고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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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성경인물탐구] 약한 인간 베드로(3)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급한 성격과 인간적인 연약성 때문에 실수를 여러 번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때 무력으로 대항하려 하였고,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의 은혜로 훌륭한 복음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팔려 잡히실 때에 예수를 잡으러 온 군인들은 병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스승을 위하여 칼을 뽑는 베드로의 모습은 충성스런 제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주의 뜻에 어긋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들의 손에 잡혀 가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의 베드로의 반응과 일맥 상통합니다. 베드로는 그때에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하였다가 예수께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과 행위는 예수께 대한 충성과 같이 보였지만, 이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데서 나온 실책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결국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잡히실 것과 그때에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는 차라리 예수와 함께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짐이 헛된 것이었음이 그 날 밤에 증명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습니다. 예수가 체포된 상태에서 정죄 받아 형벌을 받게 되면 예수를 좇던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를 시인하지 못하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을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아깝게 여길 때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신을 좇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육신의 생명은 빼앗되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이로써 그 동안 장담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의 충성심은 허구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를 부인했을 때 닭이 곧 울었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는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심히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그 통곡은 회개의 통곡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졌던 자만심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가 얼마나 약하고 헛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베드로에게는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기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만심입니다. 자만심은 실족하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성도에게 자만심을 불어 넣음으로써 자멸하게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신앙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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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성공칼럼] 모독하지 않기
    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지위와 권위를 악하게 사용하여 그 본질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나 진리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진리를 알고 있는 지도자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진리를 듣고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말에 감동받아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을 드린다. 그런데 그 지도자가 성적으로 타락하고 헌금을 사리사욕에 사용하고 온갖 추악한 일을 한 것이 드러났다 하자. 그러면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실망하고 화가 나서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된다면 이 때 그 지도자는 진리를 모독한 것이 되며 진리의 본질인 사랑이나 선을 모독한 것이 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선생님이 자신의 제자를 성추행하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갖고 있다. 학생은 배움을 위해서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른다. 이런 자신의 제자에게 성욕을 품고 성추행을 하면 이 아이는 평생 큰 상처를 입어 모멸감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선생님’ ‘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릴 것이며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나중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마음에 높은 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선생은 선생님을 모독한 것이다. 거룩하고 선한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그 직함대로 살지 않으면 그 직함을 모독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교단체나 비영리 단체가 건립될 때 수많은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이 지어지고 운영이 된다. 그 단체를 위해 기부한 사람들은 그 단체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물질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 단체가 악한 일이나 사리사욕을 취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을 내어놓겠는가? 그러므로 그 단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지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잘 행하라고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영리 단체가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한 뜻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의 마음에 ‘내가 기부한 후회 된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면 그 단체는 사랑을, 그 분들의 헌신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단체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는 그 어떤 곳보다 가장 진실하며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리와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도리어 거짓과 악을 행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은 거짓말을 하고 악을 저질러서 지탄을 받을지언정 하나님을 모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갖고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면서 온갖 악을 저질렀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권위를 갖고 있으며 누구나 바리새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목사이면서 목사로서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가? 혹은 내가 부모이면서 부모의 옳은 삶을 살고 있는가? 또는 내가 선생이면서 선생으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본질 즉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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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은혜의 말씀] 남은 사람들 (왕상19장14~18절)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나만 남았거늘」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기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남은 사람, 끝까지 남은 것이 무엇인가!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역보다 중요한건 사람이고 일이나 행사보다 중요한건 행복입니다. 우리가 일에 치우치고 일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멋진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엘리야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엘리야야 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너무나 우리하고 비슷한, 너무도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엘리야의 사람 사는 것을 보면 동병상련, 이심전심, 소통과 공감 등 우리 내면의 어떤 모습과 닮은꼴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열왕기상 19장 14절에 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엘리야가 가지고 있는 쓰임 받는 사람의 조건을 볼 때 될성부른 나무의 그 떡잎, 이기는 사람의 습관, 엘리야의 가슴속에 있었던 하나님, 이것이 그 사람을 들어 쓰실 수밖에 없는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모습이었고 ‘열심’이 크다고 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이 험한 세상에서 지치고 상하고 별꼴이 반쪽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슴에 지치지 않는 힘, 결코 포기되지 않는 핵심적인 에너지를 열심이 특심이라 합니다. 열정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마지막 남은 것이 후회만 남고, 아쉬움만 남고, 부끄러움만 남으면 안 됩니다. 가슴에 불덩어리가 남아있어야 됩니다. 엘리야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지만 가슴에 열정이, 열심이, 특별하여 하나님이 그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가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엘리야란 사람은 최악에서 최상으로, 스펙을 넘어서 스토리를 만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엘리야 콤플렉스란 말을 합니다. 그 콤플렉스가 엘리야를 기도하게 만들고,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고 기도의 자리로 그를 이끌어가고, 엘리야의 일생을 거침없이 끌고 가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 하나님 사람, 창조적인 소수가 될 리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약점이 많았지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고, 수많은 변명과 핑계, 원망거리가 충분히 있지만 시대의 대안이 되고, 대체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엘리야는 기도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것이 야고보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다시 보면 야고보서는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 자체가 별명이 낙타무릎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지만 낙타무릎이 되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불꽃을 태워 올리면서 더욱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신앙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고 마음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내가 너를 남겨놓았다. 너야말로 내손에 남아있는 마지막 건더기다.’하시고 엘리야가 그 시대에 남은 자이듯이, 이 시대에 남아있는 한사람, 여러분 가문에 남아 있는 한사람, 마지막 숨통이 트이는 한사람 되시고, 주님역사에 길이 남아 생명책에 기록이 남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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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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