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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바로알기]고신대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4) 6.25 전쟁과 귀국, 경남구제회 설립 그는 1951. 1. 9일 미국 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렸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지부 구제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미국의 교회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영창을 한국으로 보내면서 전란중인 한국에 구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서둘러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미국의 지부격인 대한민국 경남지역 총무직에 임명하였다.(김은식, ‘장기려-우리 곁을 살다간 성자’ 봄나무 2006, 60쪽)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지부 총무로서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을 만나 지속적인 구호품 획득과 분배를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 내 구제위원회 설치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설함과 동시에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만든 이유는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교계의 요청 때문이었다. 귀국당시 미국교계는 한국 원조를 위한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한국지부 총무(한국 대표자)로 이미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던 것은 6.25전쟁으로 공산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었고 남은 지역이 경남(부산시와 분리하기 전)뿐이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미국지부였던 셈이다. 5) 복음진료소 설립(초대원장 차봉덕) 도착하자마자 불과 1주일 만에 경남구제회를 만들고 동시에 복음진료소를 개설했다는 것은 전영창이 얼마나 그 당시 상황을 엄중하게 보았고 바쁘게 일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서 모금해 온 구호기금 5,000불로 처음에는 항생제를 구입하여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부산에 상주하고 있던 노르웨이 구호담당 책임자인 넬슨을 만났다. 그런데 넬슨은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조그마한 의원이라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즉시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난 의사가 차봉덕이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전영창, 34세)는 미국교회의 요청으로 설립했고, ‘복음진료소’(원장 차봉덕)는 한국의 필요 때문에 개원한 것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는 의료복지사업을 하기위한 사회복지법인체와 같은 것이고, ‘복음진료소’는 그 사회복지법인체의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의료기관인 셈이었다. 전영창은 귀국 후 단 1주일여 만에 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고 복지기관과 의료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전영창이 내걸었던 복음병원 원훈은 <1. 치료하는 병원, 2. 전도하는 병원, 3. 교육하는 병원>이었다. 이는 훗날 지금의 고신의료원(치료), 원목실(전도), 의과대학(교육)으로 잘 발전해 왔음을 볼 때 전영창의 설립비전과 꿈이 얼마나 크고 정확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6) 장기려 박사 초빙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된 복음진료소는 밀려드는 환자들로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로는 외상환자들 치료나 수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를 만나 외과의사의 필요성을 의논했고, 마침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부임해 와 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았다. 1951. 6. 21일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님을 모시고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장기려를 찾아가 복음진료소 사정을 말씀 드리고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장기려는 흔쾌히 수락했고 6월 30일 사직을 하고 1941. 7. 3일 복음진료소로 부임 했다. 이때부터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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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목회자칼럼]속도인가 방향인가?
    난 갈등했다. 그리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 하면 사람이 변할 줄 알았다. 해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저 방법으로 변화를 유도했다. 그렇게 저 방법도 아닌 모양이다. 새로운 방법으로 해보면 어떨까? 선택과 번복,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청소년을 향한 사역이 벌써 햇수로 35년째이다. “35년 동안 하고 있지만 이 사역이 나에게 맞는 것일까?” 여전히 물음표이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갈등과 고민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데 왜 빨리 변하지 않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울까?” “더 많은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덧 바른 방향보다 속도에 조급해하며 갈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쯤되니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청소년들도 35년을 하고 보니 철이 들어 성인으로 자기의 역할을 하나씩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속도, 양, 수준만큼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모두 변화되어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은 일하고 계셨다. “내가 주님보다 앞서 있었구나. 내가 성령보다 앞서 나갔구나. 내가 조급했구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서야 깨닫는다. 참 미련한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둘째, 아기를 낳고 기뻐하며 그렇게 좋아하고, 배밀이 할 때 아장아장 걸을 때는 또 얼마나 귀여워했나?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니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 자녀가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다시 자신의 부모와 같은 상황이 되면 그 때 자기의 모습을 알게 될까? 신앙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는데, 육적 자아가 자라고 자기 철학이 생기면서 신앙의 성장에서 반항기가 올 때, 옆에서 보고 찾고 기다려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아버지는 잘도 견디어 주고, 잘도 참아 주며,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나는 어떤가? 셋째, 양이냐? 질이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 쉬운가? 모든 목회자들이 성도의 양적 부흥과 질적 성장을 함께 바란다. 둘 다 건강하게 성장하며 든든한 교회를 세우길 원한다. 나도 이 둘의 조화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질적 성장이 안 되어서 고민일까? 아니면 양적 성장이 안 되어서 더 갈등하는 것일까? 부모님들은 자녀가 키와 몸이 자라기를 원할까? 아니면 공부, 성적, 인격도 모두 다 자라길 원할까? 분명 겉으로는 둘 다 조화롭게 자라길 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은 자녀가 성경적 세계관으로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란다고 하지만, 막상 반에서 성적이 하위권 이거나, 대학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이 안되어 집에서 놀고 있을 때, 부모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교회의 질적 성장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양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넷째, 그래서 지금도 나는 두 나라에서 갈등한다. 세상과 교회, 과연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교회에서도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배우고 공부할수록 세상은 교회의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데, 성경 중심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쉽지 않다. 이건 평신도나 목회자나 다 똑같은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갈등하며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주님, 바른 분별력을 주옵소서! 성령님이 내 속에서 새 영으로 역사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를 주옵소서” 끝나지 않는 갈등, 멈출 수 없는 사역 속에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물으며 방향을 결정하고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갈등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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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4
    앞에서 MCC의 조직과 한국에서의 사역의 시원, 초기 사역자들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전쟁기 MCC의 초기 사역이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항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구제 사역이었다. MCC의 대표적인 활동이 구제활동인데, 이는 사역의 최우선 순위였다. 인간의 가치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메모나이트 정신에 따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어 생존하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사역이었고, 이것이 바로 식량지원이었다. 지원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있기 때문에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에는 79톤의 구호물자를 보냈는데, 우유와 식품이 중심이었고 그 외 의류 성탄절 선물꾸러미 등이었다. 이들이 지원 대상은 부산이나 경남지방 뿐만 아니라 서울 인근, 인천과 수원, 38도선 이북의 화천, 그리고 울릉도 등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MCCC가 세계교회 봉사회(CWS)와 동역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량 지원 외에도 소고기 통조림 등을 공급하고 부산과 대구 등지에 우유급식소를 설치하고 어린 아이들의 건강과 위생을 지켜 주었다. 구호통조림 통에는 ‘Food for Relief,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넣어 무상 공급이라는 점을 알리고, 이를 판매하거나 되팔아서도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무상 구호 식량을 판매하여 특정인이 사유화하지 못 하게하기 위한 조처였다. 둘째, 직업교육이었다. MCC는 고아들의 자립갱생을 위해 직업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1953년 5월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천동의 78에이커(약 9만5천평)의 땅과 거기 부속된 27채의 건물을 구입했다. 47에이커의 땅은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구입하였고, 논과 밭과 언덕이 있는 31에이커는 한국정부로부터 임대한 것이다. 이 토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업실습장인 농도원(農道園)이었으나 해방 이후 한국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이 학교 사업은 MCC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이곳에서 남자 고아들을 위한 중등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살아갈 수 있게 구상한 것이다.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구성했는데, 초기 사역자인 위버 선교사를 비롯하여 경상북도 도지사, 경상북도의회 의장, 경북대학교 총장 고병간 박사, 사회사업가협회장인 이영식 목사, 대구동산병원 부원장 황용운 박사,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로버트 콜스(L. Robert Kohls, 1928-2006) 선교사 등 8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가 1953년 10월 개교한 메노나이트실업중고등학교였다. 일차적으로 전쟁고아들을 위한 학교였음으로, 학교는 무상교육만이 아니라 의류와 숙식을 제공하는 기숙학교로 출발했다. 첫해에 14명의 고아가 입학했고, 학교교육은 1971년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고, 그 후 학교는 폐쇄되었다. 한국은 급속도로 산업가 이루어지고 삶의 환경이 개선되자 MCC는 더 시급한 도움이 요청되는 월남으로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첫 교장 콜스는 한국이름 고을수(高乙秀)로 불렸는데, 1953년 10월 내한하여 1956년 3월까지 2년 6개월간 교장으로 재직했다. 오하이오주 달라스카운티 출신인 그는 드레이크 대학(Drake University)에서 1년간 수료하고 제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28일 징집 서류를 제출했고, 1945년 12월 31일 입대하였는데 전후 1946년 한국에 주둔했다. 한때 대구 동촌의 K2공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후 드레이크대학에 복학하였고, 1949년 6월 17일에는 노르마 차펠(Norma Glee Chappell)과 혼인했다. 대학 졸업 후 3년 교사로 일했고, 메노나이트교인은 아니었으나 어려운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내한한 것이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는데, 메노나이트교회와 더불어 평화교회를 지행했음으로 그를 교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일 『한국식으로 사고하기 Learning to Think Korean』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런 문서를 보면 그는 매우 지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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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1-11-05
  • [성서연구]그녀가 거기에 간 이유(요한복음 20장 1-2절)
    지금까지 저는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수백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교육지도사와 전임전도사, 부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만 32세에 담임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려운 개척교회가 아니라, 장로님이 여러 명 계신 교회였습니다. 그 후 지금은 그 보다 훨씬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주님을 따르는 고단함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일부러 일 년에 한두 번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부산 외곽의 시골로 나갔습니다. 지나다가 교회가 있으면 무턱대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날에는 모든 것이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낯선 교회에 처음 들어가는 경험, 그 교회의 성도들이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을 때의 느낌, <지나가다 들렸다>고 대답하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드리는 기도, 그 후 교회 주보를 읽어보고, 교회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던 생소한 느낌, 그리고 조금 분위기가 다른 예배와 설교..... 어떤 교회의 목사님은 일찍 나오셔서 직접 교회 문을 열고, 불을 밝히고, 강단을 정리하고, 예배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그러다가 네댓 명의 성도들이 참석했겠지요. 저희 부부 두 사람은 예배 분위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설교했을까요? 그리고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계속 그러했겠지요. 갑자기 교인이 많이 늘어나거나 재정이 불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늘 모자라고 쪼들렸을 것입니다. 처음엔 3년 정도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3년이 30년이 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왜 이 교회에서 목회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어떤 분은 그 지역에 대한 소명 때문이라 대답하겠지요. 제가 들은 대답 중 하나는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셨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서 섬긴다>입니다. 그러나 이 정답은 머리에만 있을 뿐, 가슴으로부터 이 대답을 하는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요? 제 동기 목사님 중에 김동찬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인도네시아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고등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학비도 끊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길을 갔고, 지금은 온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일입니다. 지리산 자락의 목사님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삼십일 년째 골짜기에 머무는 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지나가다 갑자기 들렸더니 일을 하시느라 바빴습니다. 얼굴을 그을리고 옷맵시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천사의 웃음이 배어났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안식후 첫 날,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갔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 여인의 몸으로 무덤에 가는 것은 쉽지 않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왜 무덤에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게 했습니다. 저의 숙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가>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농어촌의 어려운 교회에서, 개척교회에서, 힘든 선교지에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계신 분들처럼, 저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심방하고, 기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덤에 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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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서임중 칼럼]허리를 굽혀라.
    한 잎 낙엽이 속삭이듯 창문을 노크하며 날아 내린다. 아파트 앞 둘레길 가로수도 어느새 울긋불긋 채색 옷을 갈아입고 빼곡히 짙던 잎새들을 조금씩 솎아내며 서 있다. 열어놓던 창문도 이제는 닫아야 하는 계절의 변화에 분주함을 잠시 멈추며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고희의 세월을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나는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거룩한 옷을 갈아입으려 얼마나 애쓰는가 생각해 본다. 어린 나이에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었다. 목회 추억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노회를 마친 어느 주일 당회 모임에서 평소 어린 목사를 따뜻하게 품고 지극히 아껴 사랑하며 동역하시는 큰형님 같은 장로님이 웃으시며 조용하게 “목사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사님, 노회에 가셔서 너무 그렇게 허리 굽혀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큰 교회 당회장이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앙교회 당회장의 자리에 걸맞은 모습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로님의 말씀을 백분 이해하면서 나도 웃으면서 말씀을 드렸다. “대형교회 목사가 인사할 때 허리 굽히면 안 된다는 성경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당회원들은 파안대소하면서 분수에 맞는 언행이란 꼭 필요한 것임을 서로 이해하고 포항중앙교회는 관계개념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고 베풂의 삶을 실천하는 교회를 지향하자고 했었다. 나의 목회병법에는 10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휴지통 목회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사용한 후 버려야 할 것들은 휴지통에 버린다. 휴지통은 가득차면 비우고 다시 채운다. 교인들이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에서 오는 불평 원망이 왜 없겠는가? 그럴 때면 상호간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목사에게 와서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기 뜻이 관철되면 웃고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갖 아픔을 목사에게 되돌려주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런 경우에 나는 휴지통 목회로 일관한다. 다 받아들이고 더 담을 수 없도록 채워지면 십자가 앞에서 다 비워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목회병법의 한 가지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청소를 하는 집사님을 계단에서 만났다. 걸레를 들고 청소 도구를 옆에 세우고 있던 집사님은 나를 보자 언제나처럼 애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비켜서다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내 발 앞에 떨어진 빗자루를 내가 엎드려 주워서 건네주니 “목사님, 목사님,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집사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먼지를 닦고 휴지를 줍고 연신 허리를 굽히고 일어서고 굽히고 일어서고...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집사님은 그렇게 교회를 쓸고 닦는다. 집사님의 아름다움은 육체적 허리를 굽힐 때보다 마음의 허리를 굽힐 때 더욱 확연히 전해져온다. 이조(李朝) 역사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충정 어린 재상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 가운데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을 빼놓을 수 없다. 일생을 가난하게 지내면서도 성품은 온유했고, 그러면서도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하면서 직무에 강직했던 재상이었다. 그는 이조(李朝) 역사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서 공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오직 목민(牧民)에 두었고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청렴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직했던 고불(古佛)의 정신은 오늘처럼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처처에 공직자의 비리가 만연해지는 때에 참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고 고불이 본래부터 겸손하고 훌륭한 재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한 머리로 교만했던 고불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맹사성이 열아홉에 장원급제-正史는 1386년(우왕 12년) 27세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 후 파주 군수로 명을 받았을 때 선사(禪師)를 찾아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고언(高言)을 듣기를 청했다 그 때 고승(高僧)이 이르기를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시오”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오만한 맹사성은 “스님, 그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아십니까?” 하며 노기 띤 얼굴로 일어섰다. 고승은 “먼 산사(山寺)까지 오셨는데 녹차라도 한 잔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하고 권유했다. 오만했던 맹사성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못 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고승은 맹사성 앞에 녹차 잔을 놓고 차 주전자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찻물이 흘러넘쳐 방바닥을 적시는데도 계속 따르고 있는 것을 본 고불이 더 화가 나 “스님, 지금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화를 냈다. 고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고승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차 잔의 물이 넘쳐 방바닥 버리는 것을 보고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까?”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어 황급히 차를 마시고 일어서 문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피하려는 급한 마음에 서두르던 맹사성이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나가는 맹사성의 뒤에서 고승의 설법 같은 두 번째 말이었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오만했던 고불이 위대한 이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되게 한 한 사건이 이것이었다. 교회도 사회도 정치도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왜 모두 이렇게 시끄럽고 불편한가를 생각해 보면 맹사성을 향한 고승의 말 한마디가 명언이 된다. 마음의 허리를 굽히면 육신의 허리도 굽혀진다. ‘허리를 굽혀라’ 그것이 너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삶의 지남철이다. Bend down! Bend over!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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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시사칼럼]깐부
    요즘 유행하고 있는 “깐부”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릴 땐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참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실력이 꽤 좋은 편이어서 따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몽땅 다 잃고서는 무척 속상했던 날이 하루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상대방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고,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서 둘 사이에는 계산을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때 자기들끼리 부르던 명칭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86년에 또 듣게 되었습니다. 배우 박중훈과 김혜수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의 개봉 때문이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깜보”였습니다. 그 후로는 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같은 뜻을 가졌다는 단어 하나가 21세기에 이토록 세계적으로 유행하다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모조리 시청률 1위를 휩쓸어버린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에 등장해서 어쩌면 앞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될지 모르는 “깐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지역에 따라 “깜보(부)”나 “깐부(보)” 혹은 “가보(갑오)”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일단 “깜보”에 대해서는 미8군 시절의 소규모 음악 밴드 ‘캄보(comb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오종석, 국민일보), 늘 밖에서 같이 뛰어 놀아 가무잡잡해진 친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라는 견해도 있는바(네이버 사전), 앞선 영화 속 주인공 장두이 배우의 극중 별명이 “깜보”였는데 이런 뜻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깐부”와 관련해서는 일본어 ‘카부(株)’가 어원이라고 하는데, 에도시대 상인조합 ‘카부나카마(株仲間, かぶなかま)’ 또는 지분을 가리키는 말 ‘카부시키(株式, かぶしき)’의 “카부”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견해로(이무완, 오마이뉴스), 쓴 돈을 나누어 낼 때 ‘카부시키하다’라는 말을 썼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간 “깐부치킨”이라는 가게를 운영해 온 분은 요즘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특수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어원을 묻자 어릴 때 고향(평안도)에서 쓰던 말이라 했다고도 하고, 친구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중국어 발음 ‘꽌보’나 일본어 발음 ‘깐보(かんぽう)’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한국을 시샘하기 바쁜 일본이나 중국에서 “깐부”도 자기네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현대판 “깐부”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는 관계, 그런 의미라면 진정한 “깐부”는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각자의 소유를 심지어 팔아가면서까지 함께 쓰고 함께 나누며 살았다고 사도행전은 두 차례나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행 2:44-45, 4:34-35).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어떻게 소개했던가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나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고(갈 4:1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관해서는 “자신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롬 16:4)? 아무리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동역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눈을, 목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 속 신자들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나환자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가족과 심지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최흥종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답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예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이들을 향해 “친구”라 부르셨습니다(요 15:4).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깐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곁에는 이와 같은 깐부가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이와 같은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실한 깐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너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깐부가 되어 준다면, 이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나쯤은 주님 닮은 깐부가 하나씩 붙어있지 않겠습니까? 대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서도 깐부라는 말이 연일 등장해 화제입니다. 야당의 어느 예비주자는 “우리 깐부 아닌가요? 치열한 경쟁은 하되 품격 있게, 동지임을 잊지 맙시다”라 했고, 여당의 원내대표도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깐부, 네것내것 없고 네편내편도 없다, 우리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지요? 좋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지금까지 격동의 세월을 용케 함께 헤쳐 온 사이들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부디, 더러운 이(利)나 부패한 사욕(私慾)이 아니라,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열정과 미래의 비전과 타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깐부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보다 우리부터 주 안에서 그런 깐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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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은혜의 말씀]예수님의 시간표(요 11:1~7)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이고 빠르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더디다고 여기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나사로가 병들어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결국 오빠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시자 그들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은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이 위기의 상황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처럼 갑작스런 시련을 만날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큰 어려움을 만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사로 삼남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위기 가운데서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2,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사람들이 달려와서 위급함을 전하는데도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이틀을 거기서 더 머무셨습니다. 두 자매의 속은 얼마나 타 들어갔을까요?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내뱉은 말이 무엇입니까?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의 지체하심에 대한 상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두 자매를 향해서 “네 오라비는 다시 산다”고 단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가정에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생각하듯이 늦은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인데, 어떤 것이 그 가정에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는 주님인데,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십니다. “3best : best time / best way / best thing”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3:25,26) 예수님의 시간표는 가장 정확합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시련 중에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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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역사바로알기]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1917.12.26~1976.5.20)
    출생과 기독교 입문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여원리에서 전일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영창의 할아버지 전치선은 일제치하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영창의 아버지 전일봉도 할아버지의 독립정신과 신앙심을 이어받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읍내 장터에서 열변을 토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 전영창 나이 세 살 때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교육열로 전영창은 집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안성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했다. 미국장로교 선교사 보이어(Elmer T. Boyer,1893-1976)가 해마다 두 차례 그의 동네로 와서 성찬식을 베풀곤 했는데 이때 전영창은 성구암송책에 있는 성경구절을 전부 암송하고 소요리 문답까지 막힘없이 다 외우자 보이어 선교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영창을 학비까지 지원해 주며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서 근로장학생으로 공부하게 해 주었다. 1936년 5년제 신흥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촉탁선생이 되었으나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쫒겨났다. 일본유학과 투옥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을 휩쓸 때 끝까지 이를 반대한 전영창을 눈여겨 보았던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이 영창을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가도록 지원해 주었다.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영창(21세)은 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1년 12월 1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신사참배 반대자 일제 단속에 걸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꾸오까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루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투옥될 때부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영어공부에 혼신을 다했었다. 해방과 미국유학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 합격한 후 미군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가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벧종드를 소개해 주었다. 벧종드는 자신의 모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 기특한 청년을 포옹하며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고 개인경비까지 다 부담을 해 주었다. 당시 미군정청 산하 외교업무 담당처는 첫 한국유학생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해 줌으로 1947년 4월 건국 이후 최초의 유학생이 되어 펜실베니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으나 2년 뒤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1년 1월 웨스턴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때 1951년 1월 3일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전영창은 뮬더 학장을 찾아가 지금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 일을 시키려고 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약 조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까지 배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점령하기 전에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6. 23-24쪽) 뮬더 학장은 졸업을 두 주 남기고 포탄이 쏟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막아섰다. “학위를 받으려면 졸업을 해야 하니, 두 주일을 기다리며 사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전영창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완강한 태도였다. 전영창의 고집을 꺽을 수 없음을 깨달은 뮬더박사는 귀국을 허락하고 수속도 책임질테니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라, 그리고 두주일 후의 졸업시험은 치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학장의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학장은 이사장과 협의하여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여 1951. 1. 8일 저녁 학장실에서 뮬더 박사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경비는 학장의 친구 게리드윗 목사의 도움으로 해결하였고 게리드윗 목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전란중의 조국을 도우려는 전영창을 위해서 미화 5,000불을 별도로 모금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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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목회자칼럼]그릇 이야기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기도 한다. 통 큰 대인, 대기만성, 그릇이 크다. 믿음은 사이즈다. 입을 넓게 열라. 주님은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그릇 준비가 되어야 쓰임 받는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 시대에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 한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었다. 하나님을 경외한 믿음 좋은 남편은 사역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고 두 아들을 빚쟁이들이 끌고 가서 종을 삼으려하는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주의 일을 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한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천만한 일이 닥친 것이다. 호사다마다. 삶은 편집이 가능한 녹화방송이 아니라 실시간 생방송이다. 예측불허의 돌발변수가 많고 한순간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순간대처 능력을 길러야 된다. 교육전도사 정도의 아직 어린 사역자 집안에 갑자기 가장이 죽었다. 가장 큰 고통은 나 한사람만이 아니고 온 가족에게 고통이 전이되는 것이다. 졸지에 아내는 과부가 되고 두 아들은 벼락거지가 되었다. 어려움은 누구나, 언제나, 어디나 있지만 대응방식이 문제이다. 문제를 문제 삼지 말고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문젯거리가 간증거리가 된다. 삶의 막장에 떨어지거든 분노조절장애에 빠져 있지 말고 주를 찾아라. 어려움을 당할 때에 누구를 찾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사람 앞에 하소연 하지 말고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 사람들 보기에 웃기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가 되라. 사사시대를 보면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면 그때마다 사사를 보내어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어둠의 일은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패션 테라피이다. 어둠을 탓하지 말고 일어나 빛을 발하라. 어두운 방에서 어둠아 물러가라 외치지 말고 스위치를 켜라. 스위치를 켜면 불이 오고 스위치를 끄면 불이 간다. 믿음을 켜면 슬픔이 꺼진다. 가면 전도 대상이 있고 안가면 없다. 하면 되고 안하면 안 된다. 소금물을 마시면 갈증이 유발된다. 식물이나 동물들은 빛을 보려고 필사적으로 나아간다. 안 된다, 어렵다, 힘들다, 죽겠다, 못살겠다는 입방정을 떨지 말고 주께 기도하라. 챌린지가 체인지가 된다. 코로나가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도박이 아니다. 진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사랑하면 방법이 보이고 싫어하면 변명이 생긴다. 쓸데없는데 감정소모 하지 말고 말싸움한다고 기를 빼앗기지 말고 복음전도 하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엘리사는 먼저 과부의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과부는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기름 한 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해서 큰 기적을 만드신다. 다윗의 물맷돌, 모세의 지팡이, 라합의 붉은 천 조각, 엘리야의 손만한 구름, 기드온의 보리떡, 벳새다의 오병이어는 모두 하찮은 것이지만 기적을 이루었다. 은사에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크기가 중요하다. 엘리사는 과부에게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하였다. 소극적인 것은 비극적으로 결말이 나기 쉽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어야 된다. 성경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쪽팔린다 생각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넉살, 깡살, 애살을 가지고 나서야 된다. 일을 내가 다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빌린다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빌려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려오는 것이 실력이다. 배워서 남 주자. 벌어서 섬기자. 4절,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채우라고 하였다.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러운 법이다. 우리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채워야 된다. 휴대폰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배터리 충전을 해야 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에 권세와 능력을 받고 새 일을 할 수가 있다. 성령충만, 은혜충만, 진리충만한 후에 새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충만 없이 사역을 하는 것은 고통이다. 7절,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고 하였다. 장사하라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것은 종합예술이다. 경기의 흐름을 알고, 사람들의 심리와 시대의 필요를 파악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장사를 해보면 그 사람의 인성, 영성, 야성, 정성, 감성이 다 드러난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을 얻고, 인심도 얻고, 실력도 생긴다. 장사를 못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일도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지체하거나 꾸물거릴 이유가 없다. 골든타임, 하프타임, 파이널타임을 알고 시간차 공격을 한다. 원망, 핑계, 변명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있는 것을 가지고 바로 가서 장사해야 된다. 실패는 해도 피드백은 남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노하우가 생긴다. 사업장, 직장이 바로 선교지이다. 기름병을 내다 팔아서 빚을 갚아야 된다. 빚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아픈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고나면 무엇보다도 삶의 자신감이 생긴다. 삶이 고달프면 마음이 위축이 되고 어두워지기 쉽다. 그래서 열등감, 수치감, 패배감에 빠지고 만다. 빚을 갚고 난 후 두 아들과 생활하라고 하였다. 겨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 생활해야 한다. 믿음의 그릇, 소망의 그릇, 사랑의 그릇을 키워라. 빌려오든지, 채우든지 내다 팔아서 생존이 아닌 생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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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의학칼럼]이유 모를 안면통증, 삼차신경통(2)
    삼차 신경통의 치료는 이차성의 경우 원인에 따라 치료하지만, 원인이 없는 특발성의 초기 치료는 우선 약물치료와 심리적 지지를 병행한다. 약물치료의 경우 신경 이완제 약물이 투약되며 장기간 약물을 복용할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 전문가의 지도가 꼭 필요하다. 대표적인 약은 ‘카르바마제핀(Carbamazepin)’으로 흔한 부작용은 졸림, 어지러움, 변비 및 운동실조 등이 있다. 그러나 장기간 신경이완제의 투약에도 불구하고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떨어지거나 약물에 따른 부작용이 심각하여 궁극적으로 시술 또는 수술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과거부터 여러 방법의 시술 또는 수술이 삼차 신경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시행되었으나 현재 전 세계적으로 ‘경피적 삼차신경 고주파 응고술’과 ‘미세혈관 감압술’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피적 삼차신경 고주파 응고술’은 전신마취가 필요하지 않은 시술이며 과거에 수술에 실패한 경우, 미세혈관 감압술에 부적합한 신체 질병이 있는 경우, 또는 약물치료에 실패했거나 약물치료로 합병증이나 부작용이 생긴 환자에게 적응된다. 시술 방법은 부분마취 후 디지털 이동형 x선 형광투사촬영장치를 이용하여 통증이 발생하는 빰의 피부에 주사침을 삽입하고 삼차신경이 통과하는 타원 구멍에 주사를 진입시킨다. 투관침을 제거한 후 고주파 전극을 위치하고, 목표점에 대한 시험 자극을 시도한 후 삼차신경을 찾아낸다. 그리고 고주파를 이용하여 찾아낸 삼차신경을 90초 동안 전극의 온도를 75~80도까지 올려 치료한다. 시술 후 대부분 즉각적인 통증 완화를 경험하지만, 환자의 100%가 감각 소실이 일어나는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술은 장기적으로 유용하지만 이상적인 치료법으로 증명된 것은 아직 아니다. 일반적으로 위 사례의 중년 남자의 경우처럼 필자는 전신마취의 위험성이 없는 경우 ‘미세혈관감압술’을 우선 추천을 한다. ‘미세혈관감압술’은 머리 뒤쪽 후두골에 백원짜리 동전 크기의 구멍을 내고 소뇌를 개방한 후 삼차신경의 뿌리를 압박하는 뇌혈관을 찾아서 그사이에 ‘테플론’이라는 수술재료를 끼워 놓는 수술이다. 재발이 약 10% 정도에서 발생하지만 대부분 환자에서 주요 합병증 없이 낮은 유병률을 가지고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선 ‘미세혈관감압술’을 필자가 추천하는 이유는 ⑴ 수술 이후에도 증상이 지속하거나 다시 재발할 때도 재수술이 쉽고 ⑵ 재수술의 경우에도 불구하고 수술 성적이 좋으며 ⑶ 부득이 수술에 최종 실패할 경우 차선책으로 ‘경피적 삼차신경 고주파 응고술’ 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SNS의 무책임한 정보 제공으로 인해 삼차신경통의 적절한 치료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환자의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여 전문 진료 기관을 헤매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위 사례처럼 삼차 신경통의 치료는 환자 본인이 의심 증상을 놓치지 않고 반드시 전문가의 진료와 검사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늘 진료실에서도 필자는 얼굴이 너무 아파서 온 중년의 여자 환자가 이런저런 이유와 증상으로 상담을 오랫동안 하였다. 삼차신경통은 일상생활을 바꿀 수 있는 질병이다. 이러한 고통에서 하루빨리 해방되기 위해서는 환자들은 전문가의 세심한 진료가 꼭 병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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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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