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은혜의말씀] 십계명을 주신 이유(출 20:1~3)
    하나님은 애굽에서 비참하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어 자유를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지침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하면,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구약시대에는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십계명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언약인 것입니다.(엡 2:8,9) 또 하나는, 지금은 신약시대이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우리 주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보다 더 엄격한 윤리의식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5:16,17)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오해는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나라마다 법(法)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법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국민을 얽어매고 자유를 빼앗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고하고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란 인간을 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보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1절)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막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십계명 말씀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요 1:14) 2. 그러면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2절) 여기서 우리의 실체와 하나님의 실존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종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긍휼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허물과 죄를 죽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3절)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 가장 중요한 것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인간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은 하나님입니다.(신 6: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이 말씀 가운데 담겨진 신앙이나 생활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은혜만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10-14
  • [교회와세금] 교회 재산세의 납부와 면세 기준
    재산세(property tax)는 토지, 건축물, 주택 등 부동산이나 선박 및 항공기의 소유에 대하여 과세하는 지방세이다. 즉 소득과 소비, 재산 3개 세원 중, 소유하는 재산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이다. 2022년 국회예산정책처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2020년 재산세는 13.8조원으로 지방세수입 102.0조원 대비 13.5%를 차지하고 있다. 세율은 과세대상 및 과세표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주택분 재산세는 일반주택의 경우 과세표준 구간별로 0.1~0.4%의 초과누진세율이 적용된다. 별장은 과세표준의 4%로 단일세율이 적용된다. 토지분 재산세는 종합합산토지와 별도합산토지의 경우 과세표준에 따라 각각 0.2~0.5%, 0.2~0.4%의 초과누진세율이 적용된다. 분리과세 토지는 농지 및 임야의 경우 0.07%, 공장 등 공급목적 토지는 0.2%, 골프장 및 고급오락장은 4%로 단일세율이 적용된다. 건축물은 0.25%의 단일세율이 적용되며, 선박과 항공기의 경우 0.3%가 적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세의 납부를 실무적 차원에서 교회(Church)에 적용할 경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재산세는 보유중인 재산가치에 대해 과세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보유목적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즉 취득세 및 법인세와 동일하게 교회가 고유목적에 직접 사용하기 위해 보유하는 토지와 건물부동산은 타종교단체 및 공익법인을 포함해 재산세가 면제된다. 그러나 고유목적이 아닌 용도로 사용을 하거나 목적을 변경하는 경우 세금을 납부하여야 하며, 심지어 소급하여 부과될 수 있음을 주의하여야 한다. 참고로 2020년에 감면된 우리나라 재산세액은 학교・외국교육기관 3,805억원, 종교단체・향교 2,532억원, 임대사업자의 임대목적부동산 1,516억원(지방세특례제한법 50조)이다. 둘째, 교회재산의 과세와 면세기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회 사택의 경우 담임목사가 거주하는 사택(1건)은 재산세가 면세되나 기타 부목사 등의 사택은 과세 대상이 되고, 교회 사찰 관리인이 부속 건물에서 관리를 위해 거주하는 경우도 고유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 재산세가 부과될 수 있다. 또 학사관, 카페, 스포츠센터의 예와 같이 수익창출 목적이 아니더라도, 일부 염가의 금액을 받을 경우 고유목적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세법의 해석이 어려운 사례로서 예를 들어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토지의 경우 교회당과 직접 연결되어 고유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비과세되지만, 주차장 면적이 연건평의 1/4을 초과하거나 교회에서 일정 거리(직선 300미터, 도보 600미터)를 벗어날 경우 판단의 문제가 발생하며 과세대상이 될 수 있다(지방세법 111조). 기타 본 칼럼에서는 지면 제한으로 충분히 소개할 수 없으나, 국가법령정보센터 웹사이트 『교회관련 판례』도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church)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언약에 따라, 말씀이 선포되며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영적 신앙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義)를 구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코이노니아 나누기 위해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재산형성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될 수 없고, 과도한 욕심은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중세시대 수도원이 과도하게 재산을 축적, 오히려 바른 신앙을 눈멀게 하는 사례가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실무자나 지도자에게 있어, 교회 재산에 대해 바른 청지기적 자세와 통찰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한 교회, 그리고 바른 재산형성과 세금납부 함께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10-14
  • [목회자칼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부름받고, 쓰임받고, 사랑받은 사람은 특징이 있다. 주님 손에 붙들려서 한 시대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 성경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친 사람인 다윗에게서 우리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왜 하필 다윗일까? 다윗의 그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 주님의 눈에 띄었다. 다윗에게 주님의 시선이 머물렀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셨다. 주님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신약성경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다(행13:22).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중에 마음이 통하고,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친하고,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였다(시18:1).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 사람이 다윗이다. 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시27:4). 자기 삶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시대의 우울을 거절하고 새벽을 깨우듯이 그의 인생을 튜닝하고 연주하였다(시57:7~8). 무학이었던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였고, 그가 악기를 연주할 때 뮤직 테라피, 음악 치료가 되어졌다(삼상16:23). 다윗은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짓기 위해 많이 준비한 사람이다(대상22:5). 그의 아들 솔로몬이 순적하게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였다. 다윗은 자식농사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였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 물어보고 전쟁에 나아갔다(삼상30:8). 기분이나 감정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로 생활하였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다. 반면에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기에 폐위를 당하였다(대상10:13~14). 사울왕의 범죄 행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것이다. 기도를 쉬는 것이 죄이다. 기도를 쉬는 순간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이다(삼상12:2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이후로 다윗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다(삼상16:13). 성령보다 앞서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범죄 했을 때에도 “성신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51:11).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주께서 성신을 거두어 가시면 한 순간에 패가망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훼방하지 말고,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된다. 다윗은 들판에서 아버지가 맡긴 양을 지킬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삼성17:34,37). 당면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다.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도 건지셨었은즉 골리앗의 손에서도 건져주실 줄을 믿었다. 다윗은 어릴 때 왕이 되려는 비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다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 때에 주께서 부르시고 세우셨다. 미래를 꿈꾸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에 주어진 사역에 성실할 때 더욱 큰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고 그때부터 만사형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한의 어려움을 연속적으로 겪게 되었다. 사무엘상21장에서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골리앗의 고향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였다. 다윗은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체하며 살아나왔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피할길을 열어주신다. 그리고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그에게로 400명이 모였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삼상22:2). 그가 환난 당한 자들 400명과 함께 노숙할 때 거지 왕처럼 동거동락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었고 헝그리 정신이 생겼다.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가 318명이었다(창14:14) 바울과 함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헤쳐나간 사람이 276명이었다(행27:37). 어려울 때 한솥밥을 먹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끈끈한 정이 생기고 동지가 된다. 다윗이 순적하게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산전수전 겪으며 산수가 되고 10년의 피난생활이 그의 리더십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끝까지 자기를 작은 자로 여겼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고 노래할 때 사울왕은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지만, 다윗은 흥분하지 않았다(삼상18:7). 사울왕은 다윗을 묵상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였다. 사울왕을 죽일수도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를 살려주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하였고 다윗은 바로 회개하였다 (삼하12:13). 일국의 왕이 그 자리에서 체통도 없이 바로 회개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이 회개했을 때가 가장 용감했다. 회개하면 회복되고, 항복하면 행복하고, 해석이 되면 해결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족하고, 실패한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했을 때 일을 망치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때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이다. 실패하고 부끄러워도 회개하면 소망이 생긴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와 잘못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훨씬 크다. 다윗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완벽한 자가 아니라 치명적인 실수를 했음에도 회개하여 주께로부터 사함을 받았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자.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10-1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2)
    6.25 전쟁기에 유대인 군목이 부산에 왔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가 밀턴 로젠(Milton J. Rosen)이라는 랍비였다. 그는 부산에 온 최초의 유대인 군목이었는데, 1906년 러시아가 통치하던 리투아니아(Lithuania)의 빌라(Vilna)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하여 시카고에 정착했다. 철저한 정통 유대교도였던 아버지는 큰 아들이 미국문화에 쉽게 적응하자 자녀들이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막내인 밀턴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밀턴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면서 토라와 탈무드를 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는 폐렴으로 어머니도 건강을 잃고 사망하게 되자 밀턴은 예루살렘의 디스킨(Diskin) 고아원에서 양육을 받았고, 제1차 대전 후에는 주임 랍비였던 쿡(Kook)과 가족의 도움으로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밀턴이 14살 때였다. 유대인으로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거주한 관계로 그는 히브리어와 이디쉬(Yiddish)어, 아람어와 영어를 알게 되었다. ‘이디쉬어는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사용되던 유대인들의 언어였다. 이런 지역에 살던 흩어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디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뉴욕에서는 이디쉬어 일간 신문이 발행될 정도였다. 밀턴은 시카고의 해리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고, 1925년부터 29년까지는 시카고의 히브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9년 랍비가 되었다. 후에는 메디슨의 위스칸신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BA)를 받기도 했다. 곧 사라(Sarah)와 결혼했고, 이후 19년간 정통유대교 랍비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47년 아무런 훈련도 없이 비공식적인 요청으로 미육군 군목이 되었다. 밀턴의 아들 스탠리 로젠의 증언에 의하면 약 10분 정도의 군대식 경례법을 배웠을 뿐이라고 한다. 군목으로서의 첫 임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래그(Fort Bragg)였다. 이곳에서 장교이자 군목으로 활동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고 유대인 성직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주둔한 미군 군목으로 배속되어 1948년 1월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에는 러시아와 나치독일을 피해 일본에 온 유대인들이 있어 이들과 접촉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예배당(chapel)을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의 최초의 유대인 집회소(Jewish Chapel)였다. 그는 일본어를 익히면서 유대교를 알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에게도 설교하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하나의 조직체를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일유회(日猶會, Japan-Israel Society)였다. 이렇듯 일본에서 군목으로 활동하면서도 이스라엘과 유대교를 소개하던 밀턴은 2년 5개월가량 일본에서 근무를 마치고 1950년 여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의 친구들과 군인들 민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전역에서 38도 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것이다. 밀턴 로젠 군목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태평양 선상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 귀국선이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밀턴 로젠의 고국에서의 안식은 길지 못했다. 그는 곧 한국으로 돌아왔고, 앞서 소개 한 바처럼 한국 땅을 밟은 첫 유대인 군목이 되었다. 유대인 군목의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유대인 군목 이야기가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밀턴 로젠은 자신의 일에 대해 과묵했고 자식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사망한 이후 가족들은 밀턴은 정통 유대인의 관점에서 일기를 썼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군목으로 일하는 동안 뉴욕에서 발간되던 이디쉬(Yiddish) 일간지인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밀턴은 몇 번이나 연제했는지도, 그리고 기고문을 모아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신문은 보관되지 않았으나 이 신문이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미국 유대인 정기간행물 센터(American Jewish Periodical Center)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 신문을 열람하는 가운데 밀턴은 1950년 11월 10일 한국전쟁에 대한 첫 원고를 기고하였고, 1951년 3월 11일까지 19회 분의 원고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밀턴의 아들 스탠리 로젠은 한권의 책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한국에 온 미국인 랍비’(An American Rabb in Korea)라는 책이다. 필자는 미국 미시간 앤아버를 방문했던 2014년 9월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접하게 되어 약간 비싼 책이었으나 이 책을 샀고, 전쟁기 유대인 군목이 부산에 왔다는 사실을 알 게 된 것이다. 밀턴의 아들 스탠리 또한 정보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했고, 후일 내과의사가 되어 일리노이와 위스칸신주에서 활동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10-14
  • [소강석칼럼] 상생과 화합의 꽃밭을 만들며
    저는 요즘 염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작년에 고 문정남 장로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뒤통수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새에덴교회 개척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문 장로님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제가 직접 상주가 되어 3일간 조문소를 지켰습니다. 그때 무리를 해서 그런지 뒤통수의 염증이 생기더니 사라진 듯하다가 재발하기를 몇 번 반복하면서 자그마치 세 번이나 수술을 했습니다. 뒤통수의 염증이 커질 때는 잠자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허리나 등에 욕창이 난 것도 아닌데 뒤통수 작은 염증 하나가 온몸을 얼마나 힘들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근래는 손톱을 너무 깊게 잘라가지고 염증이 생겨 통증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손톱 하나도 이렇게 온몸에 고통을 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실 1, 2주만 고생하면 되는데 염증이 난 손톱이 왜 그렇게 다치고 또 다치는지... 오른손과 세게 부딪쳐 다치고,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다가 다시 다쳐 손톱과 살이 붙어 있는 부분이 완전히 벌어져서 얼마나 아렸는지 모릅니다. 엎친 데 덮쳐서 이번에는 코에 또 염증이 생겼습니다. 코 염증 정도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놔뒀더니, 코가 딸기코가 되고 밤새 아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재훈 의료강도사님이 약을 잘 지어주어서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저는 작은 염증 하나가 온몸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도가 넘는 스트레스로 몸의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몇 주간의 제 삶을 돌아보면 총회 선관위 일로 보통 신경을 많이 쓴 게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소 목사님이 아니면 결코 이렇게 처리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정말 소 목사님의 지혜와 공명정대한 처사가 총회의 위기와 한국교회의 갈등을 중재하여 새 길을 열게 하였습니다”라고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게 쉽게 말을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자다가도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몸의 각 지체가 서로의 역할이 있기에 함께 돕고, 몸의 다른 기관이 아프면 다른 기관이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말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현재 우리 교계 상황을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할 연합기관들이 여전히 분열되어 하나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이든 미움과 증오를 심으면 또 다른 미움과 증오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증오를 심으면 결국 그 조직도 나중에는 증오의 단체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과 화목을 심는 조직과 공동체는 또 다른 사랑과 화목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든, 총회를 섬기고 교계를 섬기든 언제나 사랑과 화목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의 작은 상처도 온몸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고통을 갖다주는데 하물며 우리 총회이겠습니까? 우리 교계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누가 뭐래도 미움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화목,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분란이 일어나거나 분열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작은 열매를 보인 것처럼 앞으로도 저는 끝까지 교계에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미움과 증오의 가시덤불과 찔레가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상생과 화합의 향기로운 꽃과 포도송이들이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사랑과 화목의 꽃씨를 심으며 앞으로도 끝까지 상생과 화합의 꽃밭을 일구어 갈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9-23
  • [성서연구] 버림받은 자의 기념비
    사무엘상 15장을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했던 사람이 버림받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버림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아말렉 족속이 그들을 가로막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모세는 두 손을 들었고,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었는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사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을 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진멸하기는커녕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서 데려왔고, 수많은 짐승도 약탈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는 사울에게 실망하셔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0~11절입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은 슬픈 마음으로 사무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울 왕은 갈멜에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을 보면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은 땅의 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땅에서는 그가 적의 왕을 사로잡고, 수많은 짐승을 약탈하여 대승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보였고, 기념비를 세울 만 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일은 알지 못했습니다. 땅에서는 사울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실망하셨고,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고, 그의 왕위를 다른 자에게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사무엘상 15장 26~28절입니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도 모른 채, 기념비를 만드는 사울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결국 그의 왕좌는 다윗에게 넘어갔습니다. 저는 한국교회도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제법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와 봉사에 힘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을까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념비를 세우느라 바빴습니다. 성도가 좀 모이면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음에도 자신이 아말렉에게 이긴 것처럼 도취된 사울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기념비를 세우듯이, 한국교회도 자기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세간에서 자신의 교회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에 우쭐했습니다. 방송에 설교를 송출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한때는 이것이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는 방송 설교도 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교회들은 성도가 좀 모이면 거대한 교회와 수양관을 짓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박사학위 과정에 등록을 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이사장, 회장 한 두 자리를 하는 것도 순수한 섬김보다 기념비적 측면이 강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설교집이라도 몇 권 내지 않으면 명함을 내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슬픔을 느낍니다. 교세가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고, 세상에서 비난받습니다. 교회들이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실망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실망하셨을까 하여 크게 염려됩니다. 촛대를 옮기시려고 작정하신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기념비를 세우는 데 열심인 우리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념비를 세우는 게 아니라,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기념비들이 버림받은 자의 기념비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전적으로 겸손하게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9-23
  • [시사칼럼] “욕망”의 개혁과 재구성
    교회와 백화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 스미스의 문제작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에 답이 있습니다. 바로 “욕망”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뚜렷합니다. ‘카푸어(car poor)’나 ‘영끌족’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전자는 좋은 차 사느라 가진 돈 다 써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경우를, 후자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택(주로 아파트)을 구매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신종 용어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어때서?’라며 나름대로 만족감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기존의 언론에서 다소 부정적인 논조로 이러한 현상을 보도하는 이유는 이를 ‘욕심’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인데, 차라리 “욕망”의 발로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이라는 개념은 좋고 나쁨의 양단에서 일종의 왕복 진자 운동을 보여 왔습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함께 연구한 기독교학자입니다. 서구권에서는 원래 욕망을 ‘결핍’을 전제로 다소 부정적으로, 즉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욕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은 인간이 이성의 주체라기보다 욕망의 주체이며, 그것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거울 이론)라고 주장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에 따르면 역사는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 넘어 왔으며, 이 새로운 시대의 핵심은 바로 “욕망”인데 ‘욕구’가 자연적 필요와 관련된다면 “욕망”은 그 너머에 있는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라 정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이미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코나투스(Conatus)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코나투스”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4장 6절에도 등장합니다. 곧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에서 마지막 단어가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현대는 아마도 그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라 극찬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6)는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coupures)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욕망을 아예 우주의 내재적 원리이자 그 운행을 관장하는 에너지라고 선포했습니다(안티 오이디푸스, 11). 이들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하는 셈입니다. 물론 들뢰즈는 욕망을 이렇게 능동적으로 보지 않고 수동적 종합으로 이해합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의 주장을 결코 폄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읽고 저마다의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염연히 욕망이 존재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저마다 이런저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돈과 욕망의 포로, 그것이 타락이다”(김기석) 식의 고전적인 해석이 아니라 욕망 개념의 개혁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선한 기독교적 욕망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의외로 “욕망”이란 단어가 흔치 않습니다. 다만 그 앞에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 2:16)와 같이 다소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은 채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절의 욕망이 부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일절의 욕망이 부정하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욕망덩어리인 사람 모양으로 오셨겠습니까?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십계명 해설에서 “사랑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욕망은 우리 마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Inst. 2. 12). 신자는 마땅히 사랑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욕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욕망해야 하고, ‘예배를’ 욕망하고 ‘선행을’ 욕망하고 ‘지복(至福)’을 욕망해야 합니다. 현대 사상가들은 현실의 욕망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으나 바라는 신령한 이런 바들을 욕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욕망”은 ‘생각’과 달리 실천을 전제합니다. 가령 하나님 나라를 생각만 하고 정작 실천하려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욕망의 개혁과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9-23
  • [은혜의말씀] 시내산 언약(출 19:1~6)
    반복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을 떠난 지 꼭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리트”라고 합니다. 이 뜻은 ‘묶는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로 묶는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이 ‘시내산 언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언약은 본래 쌍방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 은혜로 베풀에 주신 언약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해나가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절에 나옵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였다’는 말은 강하신 하나님의 손길,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독수리 날개에 업혀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업혀 구원을 받았습니다. 2. 그런데 이 언약에도 순종이 필요합니다.(5절) 하나님은 이제 언약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순종에는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내 소유가 되고(5절)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내 소유라고 특별하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가장 보배로운 소유로 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사 43:1)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보석 곧 귀중한 재산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집안에 있는 값비싼 보석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며, 그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이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2)제사장 나라가 되며(6절)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축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나라로 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이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2:9)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누군가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거룩한 백성이 되리라(6절)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하게 되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또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이 놀라운 복을 주시는 은혜를, 늘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9-23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2
    찬양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방향을 맞추는 것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강조한바 있지만 찬양의 사전적 정의는 칭찬하다, 갈채를 보내다, 존경 또는 인정을 표현하다, 말이나 노래로 높이다, 크게 보이게 하다, 영광을 돌리다, 즉 하나님을 최고로 높임을 이러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두 가지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서 찬양하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가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칭찬하거나 혹은 크신 분으로 보이게끔 찬양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드릴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표현함으로서 드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 근거한 찬양의 특징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찬양은 활기찬 축제 분위기에서의 노래나 외침 또 말이나 악기연주 그리고 춤 등 다른 외적인 모습으로 외부로 표출되어야 하는 특이점이 있다. 구약 시편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의 찬양과 경배는 매우 감정적이면서 열정적으로 소리를 높여서 거기에 다양한 악기들과 함께 드리는 모습을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되는데 충분한 상상이 가능한 그림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도 다시금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150:1, 시150:6)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시22:3) 3. 찬양은 영적 전쟁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즉 찬양 속에 힘이 있다는 말이다.(대하20장) 4.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시92:1) 5.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시48:1, 계4:11) 6. 우리를 창조한 이유가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렘13:11, 벧전2:9, 이43:21)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거룩함과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찬양하고픈 마음을 넣어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삶을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끔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이 얼마나 축복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9-23
  • [목회자칼럼] 목회자의 중심잡기
    야외 활동하기 좋은 계절에 공원에 가면 이제 막 두발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세발자전거를 탈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겨우 바퀴 하나만 떼어내도 앞으로 가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잘 가다가 오른쪽으로 한번, 또 잘 가다가 왼쪽으로 한번, 수없이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배우는 것은 다름아닌 자전거의 가장 기본인 ‘중심잡기’입니다. 자전거 타기의 중심을 제대로 잡으면 속도, 방향 등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가장 기본적인 중심잡기를 잘 배워 놓으면 자전거를 탈 때마다 산들산들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자전거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년기에 자전거를 통해 중심잡기를 배우듯, 우리 인생의 중요한 성장 지점마다 중심잡기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한참 자라야 하는 청소년 때는 공부와 놀이라는 두 중심을 잘 잡아야 하고, 청년 때는 비전과 현실이라는 두 중심을 잘 맞춰야 합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중심잡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이라면 회사의 수익과 직원들의 복지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춰야 하고, 자녀를 키우는 엄마라면 자녀 양육에 있어서 훈계와 자유 사이를 조절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중심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성으로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하다가도 세상의 작은 유혹이 오면 또 쉽게 균형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양 축을 든든히 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매일 조금씩 기울어지는 것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특히, 목회를 할 때는 사랑에도 균형을 잘 잡아야 됨을 느낍니다. 공의의 사랑과 아가페 사랑. 어떤 때는 아무 조건없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주다가도, 필요할 때는 공의의 사랑을 행해야 하는 것. 목회를 수십년 해도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매일 매일 지혜가 필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심잡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심잡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현대인들의 분주함을 들 수 있습니다. 분주함이란 일의 순서가 정해지지 않고 계획없는 일들이 몰려올 때, 이리저리 바쁘고 수선스러운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일의 중요도와 긴박함 등을 따져 우선순위를 정해서 처리하면 분주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이 사회적, 개인적 요인에도 오는 분주함들로 인해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사는, 그래서 중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중심잡기가 힘든 이유는 묵상할 시간의 부족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 중심을 잡기 위해 수십번의 넘어짐이라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요하듯, 인생에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묵상할 시간’을 통해 생각의 시행착오를 겪어내야 합니다. 어느 리서치기관에 조사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휴대폰 하기, 미디어 보기 등 이런 행동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생각만 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았는데,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쁜 현대인들이 생각없이 주어진 대로 산다는 것이죠. 묵상없이, 생각할 시간이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닥치는 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중심이 흐트러짐을 예고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묵상할 시간이 없이 분주하게 살고 있다면 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 멈추어야 합니다. 일단 바쁜 것에서 멈추어야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멈추려고 마음은 먹어도 실행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불안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나의 중심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어야 합니다. 둘째, 시끄러운 장소에서 벗어나 조용한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은 비단 장소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내면을 정리정돈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육적으로는 평안한 쉼, 영적으로는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잡기의 또 다른 표현은 기본으로 돌아가기입니다. 육체의 기본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고, 영적인 기본은 예배, 말씀, 기도입니다. 넷째, 우선순위를 정해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분주함이 있고, 쉼없이 일들을 해나가면 균형을 잃고 탈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다시 일어나 우선순위를 정하고 결단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넘어졌다고 주저앉거나 머물러서 좌절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결단하며 중심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중심을 잡고 가고 있는가요? 만약, 내 인생에 빨간불이 켜졌다면, 다시 중심을 바로 잡고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랍니다. 그러다보면 시원한 봄날, 아주 능숙하게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조화롭고 균형있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9-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