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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유튜브, 당신이 바로 매체입니다
    이 달 초하루(한국 시간), 암 투병 중이던 이제 약관(弱冠)을 갓 넘긴 나이의 미국인 유튜버 테크노블레이드(본명 알렉스)가 아버지를 통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1,300만 명이 넘는(당시) 구독자들을 슬프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나는 죽은 것이다”로 시작되는 고인의 마지막 말은 “모두들 오래토록 행복하게 잘(long, prosperous, happy)” 지내라는 인사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며칠 사이 한국은 한 악성 유튜버(gzss, vellado)의 형제가 청와대 행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세상이 시끌벅적했습니다(현재 사표). 여기서 “유튜버”란 유튜브를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튜브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온 세상을 울리기도 분노하게도 하는 걸까요? 2005년 2월 당시 한국 나이로 27세였던 자웨드 카림(Jawed Karim), 28세였던 채드 헐리(Chad Hurley), 그리고 가장 연장자이자 29세였던 스티브 첸(Steve Chen)은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인터넷 사이트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6년 이들이 창업한 회사가 구글에 16억 5,000만 달러 즉 한화로 1조 5,800억 원에 팔렸습니다.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눠가져도 한 사람 당 5,000억 원 이상을 순식간에 벌어들인 셈이 되었는데, 그게 바로 “유튜브”였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이것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스티브 첸은 한 인터뷰에서 그저 보고 싶은 동영상이 있었는데 어떻게 찾을지를 몰라 궁리하다가 이런 채널을 하나 만들면 편리하겠다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젊은 창업자들은 처음에 회사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무척 진지하게 고민하고 회의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정한 원칙이 있었는데,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말하기 쉽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제목이어야 하고, 절대로 알파벳 철자로 7자를 넘지 말아야 하며, 두 음절로 이루어지되 각각의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소셜(social) 또 하나는 미디어(media)의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채드 헐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홀연 튀어나온 이름이 바로 “유튜브(YouTube)”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는 물론 영어로 당신, 너라는 뜻이고 “튜브”는 통로나 당시 TV를 가리키는 단어였지요. 즉, 유튜브란 말은 ‘당신이 곧 튜브다’, ‘당신이 곧 미디어다’, ‘당신이 곧 매체다’ 이런 뜻을 가진 말이었다는 뜻입니다. 유튜브가 어떻게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었을까요? 누구나 영상제작자요 감독이 될 수 있고, 동시에 누구나 심지어 동물조차도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현재 유튜브의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유튜브는 어떤 접점이 있을까요? 서울 지역의 한 교회는 찬양에 집중해서 엄청난 투자를 한 끝에 유튜브에 올린 그 교회의 찬양 동영상들이 합쳐서 1억 조회 수를 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적이 있습니다. 벌써 일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각종 강의와 영상으로 기독교계의 스타로 일약 발돋움한 전도사님이나 집사님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유튜브를 복음을 전하는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유튜브라든지 현대인터넷문명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놀라운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유튜브는 반드시 인터넷 사이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매체(미디어)”라는 말은 유튜브를 통해서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당신이 곧 복음을 전하는 통로다’, 즉 ‘당신이 매체(미디어)다’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가 아니라 인터넷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우리는 늘 그렇게 복음의 전달자로 살았습니다. 그간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해 우리는 유튜브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이제 그 빚을 다른 각도로 갚아야 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복음 전도가 어렵다고 하는 이 시대에, 물론 인터넷 유튜브를 활용해서도 힘써야 하겠지만, 바로 나 자신이 예수의 유튜브가 되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유-튜브, 즉 당신이 바로 복음의 유튜브입니다. 우리가 바로 복음의 유튜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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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교회와세금] 교회의 취득세 및 등록세의 납부와 면세 기준
    취득세(acquisition tax)란 일정한 자산을 매매 교환 증여 등의 방법으로 취득한 경우 납부해야 할 지방세 항목이다. 2022년 국회예산정책처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20년 취득세 납부액은 총29.5조원으로 전년대비 5.6조원(23.5%)이 증가하였다. 또 지방세 총수입 102.3조의 28.9%를 차지하고 있다. 표준세율은 주택은 1~3%, 주택외 부동산은 2.3~4%, 기타 부동산외의 경우는 2~7% 수준이다. 취득세의 세율은 대도시 등 과밀억제권역내 법인이나 사치성 재산의 취득에 대하여 중과세되며, 법인의 주택 취득과 개인의 다주택 취득도 중과세된다. 납세의무자는 과세대상의 취득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취득세를 신고・납부해야 하며, 또 취득후 등기나 등록을 하는 경우 등록면허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등록면허세(registration license tax)는 각종 등기・등록과 면허에 대해 과세하는 지방세로서 2020년도 징수액은 총2.1조원이다. 등록면허세율은 부동산 등기의 경우 소유권 보존 등기 시 0.8%, 유상 소유권 이전 등기 시 2.0%의 세율이 적용된다. 차량은 영업용 차량 및 비영업용 경차는 2.0%, 비영업용 승용차는 5.0%의 세율이 적용된다. 그러면 이러한 취득세 및 등록면허세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Church)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 특징은 크게 다음과 같다. 첫째, 취득세의 경우 교회가 고유목적에 직접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토지와 건물부동산에 대해서는 타 종교단체 및 공익법인과 동일하게 취득세가 면제된다. 즉 예배에 사용할 교회당과 교육관, 기도원 등을 취득한 경우 세금이 면제된다. 도서관도 도서관법 31조에 따라 면제된다. 그러나 고유목적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선교원, 영어유치원, 납골당, 공원묘지 등은 과세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가 고유목적을 위해 자산을 취득한 경우 그 목적에 맞게 3년 이상 사용을 하여야 한다. 둘째, 교회가 고유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만약 사용을 변경하는 경우 소급하여 취득세가 부과될 수 있음을 주지하여야 한다(지방세특례제한법 50조). 예를 들어 교회가 선한 목적으로 타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사관을 만들어 숙식을 제공하거나 카페를 만들어 지역주민에게 염가로 음료를 제공할 경우 고유목적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 취득후 3년이 지난 시점에도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폭탄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셋째, 교회사택의 경우에도 담임목사가 거주하는 사택(1건)은 비과세되나 기타 부목사 등의 사택은 과세 대상이 되고, 교회 사찰 관리인이 교회 부속 건물에서 관리를 위해 거주하는 경우에도 고유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취득세가 부과될 수 있다. 또 자산의 소유를 교회명의로 하지 않고, 담임목사 등 개인 명의로 할 경우 처분시 양도소득세가 발생할 수 있다. 넷째, 등록면허세는 고유목적에 사용되는 부동산의 등기는 취득세와 동일하게 과세가 면제되나, 그 외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지방세법127조, 지방세특례제한법 50조). 예로 교회 건물과 인접한 빌라를 구입하여 교육관 등으로 사용할 경우 고유목적을 명확히 하여 등록을 한 경우 과세가 면제되나, 그렇지 않으면 세금이 부과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외에서 물품을 구입하여 반입하는 경우 관세가 부과될 수 있으나, 이 때에도 고유목적 사용인 경우 과세가 면제될 수 있다. 즉 현행세법은 취득세 납부기준으로 ‘고유목적 사용’을 중요 개념으로 하고 있다. 또 교회를 통한 예배와 신앙생활이 공익에 기여하며, 선한 기관의 모델로서 그 권위가 기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러한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유형 무형 형태의 존재를 넘어 모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교회의 고유목적 또한 그리스도를 닮아 세상을 향해 선한 빛과 같은 모습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금 문제도 이러한 입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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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은혜의말씀] 애굽에 내린 재앙(6) - 메뚜기, 흑암(출 10:4~11)
    모세가 바로에게 들어가 만일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메뚜기가 온 땅을 덮고 우박을 면하고 남은 모든 것을 먹어치울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바로는 요지부동이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의 신하들이 왕을 설득합니다.(7절) 다시 바로 앞에 선 모세에게 바로는 어린 아이들은 데려갈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10절) 그리고는 그 말이 이렇습니다. ‘어린 아이를 보내면 하나님이 함께 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보낼 수 없다.’ 바로는 이스라엘 어린이들 마음속에 여호와의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이들에게 이스라엘의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자녀들의 미래가 중요합니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자녀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붙들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속적 가치관이 팽배한 이 시대입니다. 어둠의 영 사단은 세상의 온갖 화려한 문화와 교육의 원리를 가져와 우리 자녀들을 유혹합니다. 말씀의 신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망합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잃으면 교회를 잃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음세대를 향한 꿈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자란 씨앗이 영적 거목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꿈을 꿉니다. 사랑하는 부모세대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말씀 우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가정에서도 주의 사랑과 훈계로 양육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을 붙잡고 살아나갈 수 있는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입니다.(22절)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삼일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에 애굽 사람들은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하는 곳에는 어둠의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광명한 시대에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빛을 잃고 어둠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 8:12)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빛 안에 걸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자, 흑암의 재앙을 견디지 못한 바로가 모세를 부릅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합니까?(24절) 양과 소는 안 된다. 바로가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던 것은 재산, 물질입니다. 아홉 번째 재앙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몸은 설령 애굽을 떠났다 할지라도 마음만큼은 애굽에 묶어 두겠다는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이 속삭임으로 뭇 성도를 유혹합니다.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시대 아닙니까? 돈이 신입니다. 돈 앞에는 다 무릎 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천국 백성인 줄 믿습니다. 때론 우리 소유니까 내 마음대로 하게 합니다. 하지만 내가 가졌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명의는 비록 내 이름일지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쓰시겠다 할 때에 드릴 수 있다는 철저한 청지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물질에 자유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모세는 어떻게 대처합니까?(26절) 너무나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손해를 보고 혹 불이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수하겠습니다. 모세의 신앙입니다. 모세는 지금 바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면, 사단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믿음에 굳게 서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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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목회자칼럼] 하프 타임
    일년의 절반을 지난 시간이다. 삶은 타이밍이다. 인생길에는 초기에 대응할수 있는 황금같은 시간인 골든타임이 있고, 중간 평가를 하며 후반전을 준비하며 쉬어가야 될 하프타임이 있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파이널타임이 있고, 어쩌다가 은혜와 덤으로 주어지는 인저리타임이 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이 모든 시간이 뒤범벅이 되어 혼란해져 버렸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초기대응을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못했다. 그렇게 2년을 훌쩍 지나고 2022년도 절반을 지나면서 분명히 하프타임인데 누구도 냉정한 중간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코로나 종식을 선언할 수도 없을 만큼 확산과 재확산을 거듭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껏 조심을 하다가 최근에 코로나에 확진이 되기도 하였다. 혹자들은 가을이 되면 다시 새로운 팬데믹이 온다고 하니 지금의 시간이 파이널타임인가? 덤으로 주어진 은혜의 시간인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골든타임이요 하프타임이요 파이널타임이다. 성경은 이르기를 첫 사랑을 회복하라,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며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한다. 코로나를 지나며 많은 것이 중단되었고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상실한 것도 많다. 한날의 괴로움도 족한 줄로 알고, 하루를 천년같이 살아가고, 오늘밤 주님 앞에 선다면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될 것이다. 1년의 절반을 지나며 코로나를 아직도 종식시키지 못한 가운데 한 해의 후반전을 열어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다. 지나온 상반기를 감사하는 맥추절을 지나면서 절반의 아쉬움이 남고 절반의 감사가 생긴다. 절반의 아쉬움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체 코로나에 떠밀려 거의 3년을 지나왔다는 것이고 절반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로 여기까지 생존케 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0년 동안 가만히 계신 이후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보면 골든타임이요, 30년을 기다리신 것을 보면 하프타임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0년 동안을 가만히 계셨고 이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몇 가지를 선결해 주셨다. 때를 채우고, 형식을 갖추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소리를 들려 주셨다. 첫째, 때를 채우셨다.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다. 백 년 전에 오셔도 안 되고 백 년 후에 오셔도 안 될 만큼 때를 맞추어서 오셨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성경이 기록될 언어가 통일되어 있었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때가 무르익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만사가 때가 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며 때에 맞게 쓰임 받은 사람이 에스더다. 제철에 그 땅에서 나온 과일이 맛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철따라 우로를 내려서 농사가 가능하게 하신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차매 거둔다. 때를 채워야 된다. 사람은 살아갈 때 서러운 때가 있고 가난한 때가 있고 어려운 때가 있다. 그 세월을 채워야 된다. 때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다. 세월을 아끼고 우리 날 계수함을 알고 때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 철이 든 것이다. 둘째, 형식을 갖추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씻음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세례를 받으셨다. 형식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형식에 내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패션 테라피가 있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내면의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이 정신이 나가면 패션이 이상해진다. 단정한 옷차림을 하면 마음도 정돈이 된다. 유대인들이 강한 이유는 오랜 세월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니며 고생한 것과 사면에 적들이 있어서 전쟁에 지면 물러날 수 없는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기를 잘 지켰다. 절기 때 가족들이 다 만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정교육이 이루어졌다. 탈무드를 통한 자녀교육이 되었기에 절기를 통하여 만남과 나눔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형성되었기에 신앙 유산을 잘 계승할 수가 있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이 형식을 강조한 것 같지만 그 형식 속에 아름다운 내용들이 담겨진다. 셋째, 하늘이 열렸다. 전후좌우가 막혀 있어도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린다. 교회는 전도의 문이 열려야 되고 자녀는 태의 문이 열려야 된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인간관계가 열리고 사업이 열려야 된다. 막힌 인간은 소망이 없고 열린 사람은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의 사역 위에 하늘 문을 열어 주셨다. 넷째, 성령이 임하셨다. 힘으로 능으로 깡으로 돈으로 안되고 주의 영으로 되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실 때 권세와 능력을 받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이끌리어 가지 않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셨다. 다섯째,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려 주셨다. 믿음은 들음으로 오고, 시험도 들음으로 오는데 성도는 사랑의 소리를, 성령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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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구국운동
    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어 구호 혹은 구제 사업을 기획했고 나라를 위한 구국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첫 조직이 ‘대한기독교구제회’였다. 남침 소식을 들은 서울의 한경직 목사와 여러 교회 지도자들은 서울 종로의 예수교서회에 모여 피난민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 기독교 구제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구체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해산되고 말았다. 7월 3일에는 대전으로 피난 온 한경직 김창근 황치헌 목사 등이 대전 제일교회당에 회집하여 대한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였다. 한경직 목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전세에 밀려 7월 17일에는 대구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로, 9월 이후에는 부산으로 옮겨가 본부를 두고 대구와 부산 등 남한 30여 개 처에 지부를 조직하고 국방부와 사회부와 협력하면서 선무(宣撫),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을 실시하여 구국활동과 구제, 인보(隣保)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3천 여 명에 달하는 기독교 의용대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가케 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카츄사 부대와 육군 통신학교 등 특수 업무에 동참하게 배려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3개월간 공산치하에 있었던 서울이 해방을 맞았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서울의 교회는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었고 피난민은 남으로 향하여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난민구호대책이 시급했다. 1월 9일 노진현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부산중앙교회당에서 모인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들은 ‘기독교연합전시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한경직 목사는 회장으로 류형기, 김창근, 황종률 목사는 부회장으로 김양선 목사는 총무로 피임되었다. ‘기독교연합전시대책위원회’는 ‘대한예수교각교파연합 신도대회’를 계승한 조직으로 볼 수 있는데, 대한예수교각교파연합 신도대회는 1950년 12월 27일 유엔 사무총장, 미국의 투르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쟁은 자유, 민주국가와 공산독재국가 간의 최후 결전의 전초전이므로 유엔군이 승리할 때까지 전진 무퇴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내외에 천명하였다. 또 한경직 목사와 유형기 목사를 미국에 파견하여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한편 피난민 구호를 위한 여론을 형성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에서 주한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이 지대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취급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1951년 3월 38선 이남을 모두 탈환한 이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내외로부터 휴전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어 1951년 7월 10일 전전 협상이 개시되었다. 이 때 부산에서 ‘구국신도대회’를 개최하고, 한국기독교회는 정전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이루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피난지 부산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채택한 결의문은 아래와 같다. “정전 반대 신도대회의 결의문, 우리는 조국의 완전 독립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의 축복을 빌어 마지아니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세력 남침에 의하여 전토(全土)가 폐허화 되었고 수백만의 인명이 피살되었음은 비통한 사실이다. 앞으로 보다 더 가혹한 유혈을 강요하고 있는 차제에 개성에서 개최된 정전 회담에 대하여 전 세계는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한국의 백만 신도들은 속한 기일 내에 정전되어 평화의 봄이 오기를 절원(切願)하는 바이다. 그러나 원수의 38선이 강토를 분할하고 철의 흑막이 동족 강압을 계속할 우려가 있는 한 여하한 협정도 찬성할 수 없음이 우리의 결의임을 명백히 하는 바이다. 38선을 중심한 정전협정은 거(去)6.25 사변 이상의 불법 침입을 계획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며, 따라서 UN의 오늘까지의 희생은 도로(徒勞)케 되며 태평양을 혈해(血海)로 화할 비극이 연출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여하한 고통과 희생이 있다하더라도 공산세력을 국경선 외로 몰아내고 한국 남북통일의 완전독립을 지향하여 일로매진(一路邁進) 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바이다. 주후 1951년 7월 12일, 在釜山韓國信徒大會.” 기독교계는 정전 협정을 반대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달라는 호소였다. 이런 휴전협정 반대 입장은 교계의 변함없는 입장이었다. 1953년 6월 15일에는 구국신도대회 이름으로 ‘세계교회에 보내는 휴전반대 성명서’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53년 6월 14일에는 서울에서 약 2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기원대회’(대회장 전필순 목사)를 개최했고, 1953년 6월 15일에는 NCC 주최로 ‘전국 기독교신도 구국대회’를 개최하고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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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07-15
  • [소강석칼럼] 휠체어가 날개가 되다
    제가 예전에 명성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대통령 취임식에서 지휘하셨던 차인홍 교수님께서 지휘를 하고 바이올린 연주도 하며 미니콘서트를 하는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님은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걸을 수 없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부모님이 도저히 키울 수 없어서 재활원에 보낼 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재활원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바이올린을 접하게 됩니다. 끝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춥고 냄새나는 연탄 광에서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4세의 나이에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라이트주립대학교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교수가 되었 습니다. 제가 그분의 간증과 연주를 듣는데 너무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사님을 잘 압니다. 미국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갈 수 없었는데 새에덴교회 유튜브로 함께 예배 드리며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감동이 되어서 “저희 교회에도 한번 초청을 하고 싶으니 다음 주에 당장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교회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급하게 약속을 잡았어요? 다음 주일은 그다음 날이 6월 6일 현충일이어서 적지 않은 성도들이 금요일부터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주일예배만 드리고 오후에 휴일을 즐기러 갈 수 있는데 저녁예배에 성도들이 얼마나 오겠습니까? 교회 체면도 있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생각해 보니까, 집사람 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순간 저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차인홍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날짜를 옮겨 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지’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계획한 대로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차인홍 교수님께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요. 드디어 차인홍 교수님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성가대 지휘를 하시고 간증도 하고 연주를 하시는데 정말 큰 은혜와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분이 바이올린 연주만 해도 눈시울이 젖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그런지 몰라도 그분의 연주에는 삶의 애환이 느껴지고, 깊고 여리고 뭉클한 감동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할 때는 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정말 위대한 인생 역전이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이다.’ 차인홍 교수님은 간증하시는 내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님의 일생은 하나님 은혜와 그분의 최선이 만남으로써 위대한 걸작품을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달변가도 아니고 뻥을 치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순수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 그분이 쓰신 저서 ‘휠체어는 나의 날개’라는 제목처럼 두 다리를 못 쓰는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었고, 휠체어가 하늘을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가 된 것입니다. 그날은 아무래도 연휴가 있는 주일 저녁이라 더 많은 성도들이 오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많은 성도들이 오셔서 은혜를 받았고 주일 저녁이었지만 유튜브로 3,4000명 내외가 참여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약점이 없고 절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에게는 연약한 다리가 삶을 반전시키는 힘이 되었고, 휠체어가 오히려 인생의 날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약점이 강함이 되고 휠체어와 같은 불편함이 날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날아오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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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시사칼럼]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제 코로나사태는 진정국면에 들어섰지만 다른 측면으로 세상은 또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이언트스텝(giant step)’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연준(Fed)의 금리인상조치가 있었고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라 불리는 물가상승현상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도사태에 직면한 국가들이 속출하고 있고,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과 내전과 전쟁의 위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문화평론가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러한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지금은 아주 흔치 않은 시기입니다...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제가 고른 키워드는 불안정상태(precarity)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아주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소득은 들쑥날쑥했고, 고용 상태는 불확실했으며, 이제 건강마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안 개념으로 “안전(security)”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어떤 “안전”인가가 중요합니다. 역사상 가장 안전해 보였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안전은 뭐니 해도 강력한 군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는 말이 탄생했는데, 이 평화를 지탱하는 힘은 다름 아닌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로마 시대에 오신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평화이자 보다 본질적이고 진정한 평화를 이 땅 가운데 구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곧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개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모든 담과 장벽을 허무셨고, 정복이 아니라 정복당하심으로, 지배가 아니라 지배당하심으로, 승리가 아니라 패배 당하심으로,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고 스스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평안(평화)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평화)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1207년 아시스라는 곳에 살던 25세의 청년 프란치스코(1182-1226)는 어느 날 십자가 밑에서 신성한 음성을 듣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지어라!” 그래서 맨손으로 흙과 돌을 나르며 교회를 보수(補修)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세상을 위해 역시 부패해버린 교회를 향한 혁신의 명령이었습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그는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s)’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표방한 바는 본질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본연의 사명을 저버렸던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병폐에 대한 가장 획기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비록 ‘개혁’이란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그는 무너져 가는 교회와 곪아가고 있던 세상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지는 거룩한 개혁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병을 앓고 있는 거지의 모습을 한 신비로운 존재의 방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깨달은 바로 남긴 기도가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문을 의지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는 세력이나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통해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저 멀리서는 전쟁의 포성소리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고, 점차 그 전선이 확대되려 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평화를 깨뜨리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눅 2:1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 땅에 당신의 평화를 이루어 주소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라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평화가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 사이에 당신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일을 위해서라면 오 주여, 우리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간절한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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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은혜의말씀] 애굽에 내린 재앙(5) - 우박 (출9:22~26)
    지금까지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나 같은 말씀을 전하여도 바로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로를 한 번에 끝내시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긍휼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14절) 하나님은 계속되는 재앙을 통해 바로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에게 조차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같은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아무리 큰 시련과 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우리가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바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이러한 교만과 불순종이 우리 믿는 자의 거울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이런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내 생각과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깨닫고, 우리의 의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의 독특한 점은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주셨다는 것입니다.(19절) 그런데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20, 21절) 결과는 어떻게 되지요? 결국 결과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자신을 얼마만큼 잘 보호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자, 드디어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자, 우박과 함께 천둥 번개가 애굽 온 땅을 어지럽게 합니다.(23, 24절) 하늘에서 불이 내려 땅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만 이러한 우박의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계 16장)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25절) 우리 안에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구별되어,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지는 줄 믿습니다. 바로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27절) 그러나 이 고백은 진실된 회개가 아니라, 죽음의 위협에서 나온 일시적인 반응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변화가 없는 삶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변화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진정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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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교회음악]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갱신과 회복을 소망하며(2)
    오늘날 희미해져가는 예배와 찬양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적을 무척 부담스러운 판단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워질 방법은 찾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는 종합적으로, 복합적으로 생각한다고는 하나 그렇지 못하고 편협하거나 단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에 관하여서는 끊임없는 고민과 변화를 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예배와 찬양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정확한 답은 성경에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의식행위 즉 예배와 찬양을 위하여, 이것을 제대로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아예 한 지파를 통째로 그 일에만 전념토록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이 당신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또 중하게 여기시고 좋아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다양한)을 강조하고 이를 행할 것을 권고하시고 명령하셨는데 사실 이것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바르고 진실되게 행하였을 때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크고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이자 책임인데 더할 수 없는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배만 잘 이뤄진다면 속된 표현일지 모르나 개인은 물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사형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거룩한 백성으로 풍성함을 누리며 우아하게 이 땅위를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잠깐 시간을 되돌아보면 음악적으로 바로크시대, 고전시대를 지나면서 예배에도, 그 속에서 행해지는 음악 즉 찬양의 경향도 많은 변화와 함께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 의식에서나 음악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졌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낭만시대를 거치고 현대에 와서는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윤택하여졌으며, 믿는 자의 수가 나날이 더하여지고, 세상은 주의 뜻대로 바르고, 정의롭고, 평안하여졌는가? 그 반대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음에 주목하고 긴장하는 것이다. 축약한 시대현상의 요약이지만 실로 수많은 일들이 교회공동체 내외로 일어났다.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부정적이고 교회답지 못한 사건들도 실로 많았다. 지금으로서는 한마디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상황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혹이라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까 고심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영적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 그럴듯한 탈을 하고 교회공동체로 들어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심각성을 가지고 오늘날 반듯이 유념하고 경성하여 주의해야할 일이다. 영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기에 따라 이해와 해석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영적으로 매우 지혜롭고, 맑았음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그 어렵고 힘든 사명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신실한 예배자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확신한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았으니 무엇이 무섭고 두려웠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너무나 나약하고, 맥없고, 힘없는 크리스챤들은 혹 아닌가? 이 시대에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 아니 지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별히 예배와 찬양의 갱신은 반듯이 있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형식의 변화를 포함한 예배 속 음악의 사용도 심도있게 고려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모든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집중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절실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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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목회자칼럼] 감정과 행동 사이에는 ( 괄호 )가 있다
    신약과 구약 사이에는 신구약 중간사가 있고, 눈과 눈 사이에는 미간이 있다. 그렇다면 사건과 행동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감정과 행동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사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짜증을 내면서 투정을 부린다. 이런 상황일 경우, 아내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니, 하루 종일 밖에서 잘 있다가 집에 오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왜 짜증을 내요? 내가 집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고... 내가 당신의 짜증을 받아주는 사람이에요?”라며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는가보네요. 일단 내가 준비한 맛있는 저녁 먹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요”라며 남편의 마음을 읽고 감정을 풀어주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아내가 더 큰 소리로 화를 내자 남편은 마음의 문과 함께 자신의 방문도 닫아버리며 화가 난 행동을 보였고, 후자의 경우, 감정이 풀어지자 다시 온화한 모습으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일상의 저녁으로 돌아왔다. 이 예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감정을 받아주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물질, 시간과 같은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단지 화나고 억울한 감정을 읽어주고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의미치료(logo therapy)의 주창자는 빅터 플랭크는 자신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힘, 자유 의지 등의 선택이 있으며 우리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 행복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에 던져진 명제 앞에 돌아가 생각해보자. 빅터 플랭크가 말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고, 결국 그 선택으로 인해 인간이 행복해 진다면, 감정과 행동 사이 역시 선택이 존재해 그 선택으로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온 종일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며 자신의 시간은 전혀 없이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복잡해 질 때, 즉 슬픔과 절망이라는 감정과 앞으로 살아야 할 행동 그 사이에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수없이 많이 있다. 슬프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더 괴로워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프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발전적인 무언가를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감정을 떼어낸 후,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들을 생각한 후, 행동을 내린다면, 즉 감정과 행동 사이에 선택을 넣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어진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청소년 교육과 치유’란 뜻을 세웠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앞에 감정과 행동 사이에 갈등할 때마다 청소년의 뜻을 생각한다. 목회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에도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생각하고, 앞을 향해 한창 달려가고 있을 때도 틈틈이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돌이켜본다. 결국, 이 선택이 상황을 뛰어 넘어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힘의 원동력이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감정과 행동 사이에 있는 이 괄호( )가 여러분들의 내일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알고 바른 선택의 분별력을 가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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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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