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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오미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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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부터 많은 이들이 소위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운운하면서 털어놓던 푸념입니다. 그런데 다시 격리나 봉쇄 조치를 준비하는 국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월 2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B.1.1.529)를 ‘우려 변이’(variant of concern)로 분류하고 ‘오미크론 바이러스’로 명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존의 바이러스보다 전파력도 강하면서 기존의 백신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해서 전 세계가 바짝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이 바이러스는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미, 남미를 가리지 않고 전 방위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새 달 들어 한국에서도 아프리카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그 자취와 흔적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미크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오미크론’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로 이어지는 그리스 알파벳 중 15번째 문자입니다. 변종이 나올 때마다 철자 순서대로 이름을 붙여서 마지막 등장한 이름이 12번째의 ‘뮤 바이러스’였는데, 이번에는 두 철자를 건너뛰고 바로 ‘오미크론’이 되었습니다. 13번째 ‘뉴(N)’는 영어의 ‘뉴(new)’로 오해할까봐 지나갔다 하고, 14번째 ‘크시(Xi)’는 중국의 일인자 시진핑(Xi Jinping, 習近平)의 이름 앞 글자와 같아 건너뛰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자체가 중국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사자들이 펄쩍 뛰고 그 말만 나오면 광분하다시피 반응을 보이니 아마도 세계보건기구에서 몸을 사린 듯합니다. 평소 늘 대국을 자처하는 나라니 ‘크시 바이러스’쯤 대범하게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오미크론(omicron)’이란 말은 본래 ‘작은 오(O)’라는 뜻입니다. ‘미크론’은 요즘도 사용하는 ‘마이크로(micro)’라는 말과 어원이 같지요. 그렇다면 ‘큰 오(O)’도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 문자 마지막 철자에 해당하는 ‘오메가(omega)’가 바로 ‘커다란 오’입니다. ‘메가(mega)’ 또한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쓰입니다(메가마트, 메가스터디). 이렇게 오미크론에서 오메가까지 탐색하다가 결국 ‘예수’를 떠올렸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예언한 바 있는데(사 44:6), 예수께서는 동일한 취지로 친히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계 22:13). 그러나 동시에 “나는 오미크론이요 오메가니라”고도 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세계에서부터 가장 큰 세계까지, 즉 원자와 미립자 차원부터 우주와 초우주의 차원까지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원자와 우주는 닮았습니다. 원자 전체 질량의 99퍼센트인 원자핵은 부피로는 전체의 1백조 분의 1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원자 속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우주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더 작은 입자 곧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존재가 1897-1919-1932년 차례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작은 입자도 존재하지 않을까, 예측한대로 1968년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더 작은 입자를 발견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Finnegan’s Wake)에서 따와 붙인 이름이 ‘쿼크’입니다. 지금도 계속 발견되는 아원자 입자의 크기는 10⁻²⁶(m), 우주 전체는 10²⁷(m), 사람의 크기는 정확하게 그 중간인 10⁰(m), 이를 우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에는 1조 톤을 네 번 곱한 만큼의 물질이 있고, 1조를 여섯 번 곱하고 거기에 백 만을 곱한 만큼의 원소가 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원자나 우주만 그러하겠습니까? 우리 삶의 오미크론 곧 작고 소소해 보이는 영역에도 주가 계시고, 우리 삶의 오메가 곧 크고 원대해 보이는 영역에도 주가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오미크론부터 오메가까지를 다 감찰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미크론 같아 보이는 일들조차 주를 위해 살고, 오메가 같아 보이는 일들까지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해서 결코 당황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미크론에서 오메가까지 결국 다 주 예수 안에 있으며, 그분은 오미크론 같은 존재인 나와 오늘 이 순간에도 동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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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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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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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음진료소 원장으로 초빙.
1948년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에 취업했던 차봉덕은 1950년 봄에 부산 초량동 어느 2층집을 임대하여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업했다. 몇 달 후에 6. 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51년 1월 9일에 귀국한 전영창이 초량의 차산부인과에 근무하던 차봉덕을 몇번이나 찾아와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복음진료소 원장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박희천목사의 부인-차진실 사모의 증언>
이때는 전영창이, 외삼촌이 근무하던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UN CAC)를 찾아가 노르웨이 출신의 구호담당 책임자인 의사 넬슨을 만나 항생제 등 구호의약품 조달문제로 상의를 하던 중 차라리 병원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의약품을 지원하겠다는 넬슨의 조언을 듣고 병원설립을 위한 의사를 급히 찾던 때였다.
이에 차봉덕은 “너는 예수 믿고 결혼하지 말고 의사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 주고 섬겨라” 는 이북에 계신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고 운영하던 차산부인과를 미련 없이 접고 전영창을 따라 1951. 1. 15일 영도로 와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진료를 시작한 것이 ‘복음진료소’였다. 이때 그녀는 초량 차산부인과에서 사용하던 분만기계 등 산부인과 관련 의료기자재를 다 가지고 가서 진료를 했었다<차진실사모, 맹숙희 간호사 증언>
전영창이 차봉덕 원장과 함께 복음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할 때 전영창은 매일 의약품 50인분을 받아와서 차봉덕 원장의 환자진료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부대에서 강냉이와 밀가루를 지원받아 가마솥에 끓여서 전재민들을 열심히 구호하고 있었다. 이때 죽을 먹기 위해서 선 줄이 200미터나 되었다.<전영창의 아들 전성은증언>
5) 장기려박사 취임으로 사임
초대원장 차봉덕에서 불과 6개월 만에 장기려 박사로 원장이 바뀌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가벼운 일반 환자들은 산부인과 의사인 차봉덕 원장이 진료할 수 있었지만 외상환자나 수술환자는 진료가 불가했다.
6.25전쟁으로 전상을 입은 외과 환자들의 진료를 위해서는 외과의사가 필요했다. 이에 전영창 선생은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고, 마침 외과진료와 수술이 가능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아 1951. 6. 21일 전영창이 한상동의 안내로 김상도 목사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진료소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기려 박사가 제3육군병원을 사직하고 1951. 7. 2일자로 복음진료소로 부임해 왔다. 이에 차봉덕은 초량으로 다시 와서 차산부인과를 개업하고 4명의 조카들을 거두어 삼일교회(한상동 목사)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6) 차봉덕의 늦은 결혼
피난 온 4명의 조카를 거두어 양육과 교육, 그리고 전영창과의 복음진료소 개원과 차산부인과 개원 등으로 정작 자신은 결혼도 못하고 지내다가 같은 외과의사인 황영갑과 1958년 늦은 결혼을 했다. 남편 황영갑은 중국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하얼빈의대 졸업, 신의주 방직공장 병원장, 6.25때 인민군 후방 군의관으로 참전, 북한의 후퇴 때 탈영을 하여 미 8군 의무관,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6.25때 북한에 징집될 때(1950. 9월) 6세, 3세. 1세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부인을 포함 전 가족이 사망하자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하였다.
복음의원 초창기 시절 농어촌 무료진료 전담의사로 지원해서 장기려와 함께 무의촌 진료를 나갔고 이때 차봉덕에 대해서 조금은 알았겠지만, 차봉덕이 장기려 박사에게 바톤을 넘기고 초량으로 와서 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함으로 떨어져 지내다가 황영갑의 절친이자 중, 고, 대학 선배인 신영희 의사의 중매로 1958년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어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차봉덕의 나이 38세때이다. 이듬해 큰 딸 황은경(59년생), 은성(61년생), 은희(64년생) 세 딸을 차례로 낳았다.
7) 동두천 이거와 진주 복음병원
차봉덕이 1948년 부산으로 와서 10여년을 살다가 황영갑과 결혼 후 부산을 떠나 동두천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남편 황영갑의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가 결혼했을 때에 나는 빈털터리요, 집사람도 개업할 돈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두 사람이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이때 큰 조카 차진실은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전도사와 막 결혼(1957.1.17)하여 독립한 이듬해였다.
그때 마침 동두천에 살던 황근옥 선생이 아무 차용증서도 받지 않고 50만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어 병원개업을 해 보라해서 동두천에서 개업을 했는데 병원이 크게 번성하여 주변에 땅도 많이 사게 되고 일 년 만에 황근옥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 드리고 이자도 넉넉히 계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진주에서 부름이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원했던 진주 배돈 병원 후신으로 1955년 8월 15일에 설립된 진주복음병원의 초대원장 한규상(부산 복음병원 내과과장 출신)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자 제2대 원장으로 황영갑을 초빙했고 1959. 9.10일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황영갑은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부인 차봉덕은 진주 우체국 근처에 ‘차봉덕 의원’을 개원하여 진주 최초 부부의사로 병원 일에 힘쓰며 진주교회(전 봉래동교회, 옥봉교회)장로(1961년 장립)로, 차봉덕은 여전도회 회장 직을 맡아 14년 동안 교회를 지사충성하였다.
1972.5.14일 차봉덕은 남편을 따라 진주로 온지 14년 만에 경영하던 두 병원을 폐원 정리하고 진주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이는 남편 황영갑이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서울 논현동에서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의사직과 장로직, 여전도회장직을 그만두고 평생 복음을 위한 목회자로 결단하였다. 차봉덕이 남편의 목회를 위해 진주에서 서울로 떠날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진주교회 조헌국장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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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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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보복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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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홈쇼핑에서 (코로나가 끝나면 사용할 수 있는)베트남 여행 패키지를 판매했는데 매진되었습니다”
뉴스에서 들리는 홈쇼핑 여행 완판 소식은 코로나 때 문에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소비로 나타난 대표적인 예시이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1-2 시간 줄을 서는 풍경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이는 맛집 소식은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며 거리낌 없이 식당을 이용하는 음식 소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위드 코로나로 인해 2년 만에 단계적으로 일상을 회복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보복소비’이다.
보복소비란 외부요인에 의해 억눌렸던 소비가 보상심리에 따라 한꺼번에 분출되는 현상으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소비가 급감했다가 위드 코로나가 되면서 갑자기 확 느는 것을 말한다. 이커머스 업체가 발표한 11월 행사 기간 판매 증감률에 따르면, 현재 우리 사회는 보복소비로 인해 11월 매출이 올 초에 비해 적게는 40배 많게는 70배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었던 소비욕구가 완화된 코로나 단계에 맞춰 한꺼번에 터졌다고 볼 수 있다.
약 2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하고 싶었던 것을 절제하던 삶에서 위드 코로나 전환으로 인해 자유로워 진 것은 좋지만, 무분별한 보복소비의 형태를 비롯한 지금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람직한 것인지 방향은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보복심리 현상으로 코로나19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자발적’이었는지, 아니면 ‘수동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자발적 참여의 특징 중 하나는 억눌리는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기쁨과 헌신의 자세로 섬기기에 마음에 눌림이 없는데, 수동적이거나 타의로 섬기는 사람들은 불만과 불평이 마음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은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일이 끝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도출되는 법이다.
우리가 2년 동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거리두기’ ‘집합금지’ 등 방역 조치들에 기꺼이 협조했지만, 이 협조가 ‘자발적’이었는지 ‘수동적’이었는지 보복소비 현상으로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마음에 억눌러져 있는 감정들, 억압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의식 속에 소비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19로 인한 눌림이 이번 현상을 시작으로 조금씩 발생할 텐데 이를 사회는,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보듬어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둘째, 절제의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를 살리기 위함이다. 보복소비 현상을 보며 우리는 역설적으로 절제의 필요성을 느낀다. 한쪽으로 쏠린 생각, 행동 등에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이 절제이다. 보복소비 현상이 오래 가면 이 또한경제에 또 다른 문제점들을 야기 시킬 것이다. 소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절제가 필요한 원인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셋째, 지금 예수님이라면 이런 시대적 변화 앞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예수님 시대에도 사회적 흐름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주도하기도 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 행위를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셨다. 변함없는 복음을 가지고 변하는 세상 속에 스스로 기준이 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관심이 오직 세상의 흔들림에 집중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믿음을 붙들고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 방향에 맞게 걸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보복소비와 함께 ‘현재 우리의 자세’ ‘절제의 필요성’ ‘예수님의 기준’을 잘 생각해 위드 코로나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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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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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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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의 여섯째 활동은 ‘기독교아동보호교육’(CCT: Christian Child care Training)이었다. 메노나이트교회는 근본적으로 약자들, 소수자들,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집단 혹은 국가 지원을 최우선 순위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아동 보호와 구제를 중요한 사업으로 전개한 바 있다. 미망인들을 위한 구제 사역, 봉제나 재봉틀 교육도 이런 차원의 사업이었다. 인간의 생명, 인간의 가치는 가장 존중되어야 하고 가중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 MCC사역 방향이었기 때문에 식량과 피복 제공을 구제사역의 기본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가족 및 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이 직접적으로 구호의 대상인 어린아이들을 위한 사역이라고 한다면, 지금 말하는 기독교아동보호 교육은 아동 보호기관에서 일하는 보모들과 봉사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난 1963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그 동안은 전쟁 피해자들의 구호가 시급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물적 구호 혹은 지원(material aid)에 치중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장기적인 아동보호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아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아동보호시설에서 일하는 보모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그리고 부산 지방에서 일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했고 후에는 교육이 필요한 이들에게 개방되었다. 매년 두 차례 교육 과정이 개설되었는데, 교육은 MCC의 지원을 받는 3사람의 책임자들의 해 수행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강사들이 교육에 참여하였다.
이 프로그램 운영 담당자의 인건비 등 기본 예산은 MCC가 지원했지만 아동보호시설을 지원하는 월드비전(World vision), 기독교아동복리회(CCF: Christian Childrens' Fund), 컴패이션(Compassion),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 그리고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 등이 운영기금을 출연했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3개월간 이루어졌는데, 전반기 6주는 주로 강의로 이루어졌고, 후반 6주는 대구 대성원(어린이 보육원)에서의 실습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동 보호 교육 프로그램을 종료되는 1968년까지 202명의 보모들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이수한 이들에게는 정부가 보모 자격증을 수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교욱 받은 이들은 자신의 근무지에서 수용 아동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배우고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한 것이다.(이 점에 대한 중요한 문헌으로는 MCC, "Christian Child care Training, Plans for training 1967" Folder 18, Box IIB5가 있다)
이 훈련 프로그램의 실제적인 관리자 혹은 운영자가 헬렌 티센(Helen Tieszen)이었다. 1954년에서 1957년까지 MCC요원으로 일한 바 있는 그는 1961년부터 1970년까지 다시 한국에서 일하면서 이 사역을 주도하였고, 후에는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아동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아동 교육, 아동 복지 등을 가르쳤다. 헬렌 티센은 미국의 대표적인 아동학 관련 저널인 Children에 ‘한국의 장애아의 놀이행동’(Play Behavior in deprived Korean Children, 4/1(Jan-Feb., 1957), ‘한국의 아동복지를 위한 기술적 지원’(Techical Assistance for Child Welfare in Korea, 4/4, July-August, 1958), 그리고 한국가정경제학보(Journal of the Korean Home Economics Association, 1979;17(3)에는 ‘한국의 미취학 아동의 사회행동’(Children's Social Behavior in a Korean Preschool)과 같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상 몇 회에 걸쳐 소개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는 전화(戰禍)의 와중에 있던 한국과 부산 대구에서 그리고 전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구호사역을 감당하였는데, 사역을 시작한 1951년부터 한국에서 사역을 종료한 1971년까지 20년간 75명의 메노나이트 요원들이 한국에서 일했다. 이들은 각종 구호활동, 고아나 극빈아동을 위한 직업교육, 전쟁 과부들을 위한 직업교육, 아동복지사업, 그리고 농촌지도사업을 전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섬김과 봉사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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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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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달라지지 않은 것, 달라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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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은 남 왕국 유다 말기의 선지자입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하박국 1장 6절의 <갈대아 사람>이란 구절은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군대가 유다를 향해 다가오던 때임을 알게 해 줍니다. 당시 유다는 서산 너머로 기우는 태양과 같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 사회의 온갖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박국 1장 2-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이런 하박국의 항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악한 유다를 심판하고 징벌하기 위해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군대를 준비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박국에게 조금도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 많은 약소국을 점령하는 악을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또 다시 하나님께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1장 17절입니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런 상황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흥을 갈망하여 부르짖었습니다. 3장 2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부흥하게 하옵소서>란 기도는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여기 <부흥>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하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야 동사는 살다,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부흥하게 하소서>란 기도는 <살려 주소서>란 절규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의 절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이를 보여주는 것이 하박국 3장 18-19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은 더 이상 절규하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3장 16절의 하박국이 아닙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이랬던 하박국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하박국의 환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7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 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하박국은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하박국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됩니다. 부흥은 바깥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심령의 변화입니다. 부흥은 심령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바깥세상을 탓하지 말고, 그것을 견디고 이기지 못하는 심령의 나약함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부흥되길 원합니다. 그게 먼저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 심령이 부흥될 것이고, 그러면 바깥세상이 광야와 같아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심령의 부흥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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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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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감사의 근원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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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어느 날 예배당 마당에서 앞에 가는 두 분의 집사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봉사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아이고, 목소리 좀 낮추어라 남들 듣는다.” 내용인즉 재활용센터에서 물건을 샀는데 봉사하시는 집사님이 불친절하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재활용센터를 들여다보고 그분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그렇게 불평하는 사람과 거의 몇 달 동안을 주목해 봤다. 분명한 것 한 가지가 확인되었다. 재활용센터에서 봉사하시는 그 집사님은 언제나 밝고 친절하고 감사함이 일상생활에 배어있었지만 불평했던 그분은 항상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불평이나 감사는 환경 상황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근원임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잠언 4:23절의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말씀은 지고한 생활 교훈이다.
이메일 편지 한 통 받았다. 추수감사주일에 감사헌금을 얼마 할 것인가로 인하여 두 내외가 한참 논쟁을 벌이다가 자기가 이겼다는 내용이다. 내용인즉 원로목사님이 시무하실 때 가르쳐 주신대로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봉헌정신이라고 아내에게 설명하고 올해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 가정 범사가 너무도 은혜로 한해를 지나오게 되었으니 십일조 한 번 더 하는 마음으로 하자고 했더니 아내가 목사님 말씀 하시는 대로 다 할 것 같으면 천국 가기도 전에 천사된다고 좀 지나친 농담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말다툼이 되었고 나중에는 손을 잡고 회개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가르친 奉獻의 의미를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 고마워 눈시울이 젖었다.
왜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의 조건을 감사함으로 누리지 못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첫째는 교만이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기 자신이 다 이룬 듯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는 불만이다. 불만은 만족함이 없는 마음의 표출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감사함이 없는 결과다. 셋째는 무지(無知)다.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는 것, 좋은 것을 좋은 줄 모르는 것이다. 그 삶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내용의 대표적인 사건이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열 명의 나병환자의 치유 사건이다. 이 사건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함이 없었던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지난날의 처절했던 상황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생활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전형적인 감사함이 없는 대표적인 일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서 1: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디모데전서 4:4절을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그렇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과학자들은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엔돌핀이 생겨서 T 임파구가 생성되는데, 그것이 암 덩어리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기분이 좋은 것이 무엇인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기분(氣分), 즉 온 몸의 기운이 분산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건강으로 축복으로 이어진다. 기가 막혔다는 말은 그 반대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는 예수님 믿고 인생을 바꾸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늘 불평불만으로 얼굴이 한 번도 웃음이 없었다. 사람이 미웠다. 특히 잘난 사람들이 미웠다. 그러니 늘 긴장관계의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믿은 후는 모든 것이 좋았다. 밥 먹을 때마다 “건국 이후에 가장 맛있다”고 한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잘 생겼다. 얼굴 참 좋다. 미소가 좋다. 이름이 좋다”면서 어찌하든 칭찬할 것 찾아 축복한다. 모든 것이 좋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여지고 느껴진다. 나를 힘들게 하고 모해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도 도무지 밉지 않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은 늘 바보라고 한다. 바보가 되니 불만도 모르고 불평도 모르고 그저 감사한 것뿐이다. 먹는 것마다 맛이 있고, 하는 일 마다 행복하다. 도대체 불평할 이유를 찾으려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오늘까지 남의 말 나쁘게 해본 기억도 없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내 입으로 불평하고 불만해 본 기억이 없다. 그저 행복하고 모든 것이 좋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함을 생활에서 연출한다.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실천한다.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렇기 때문에”의 감사의 삶을 노래한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살전5:18)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한다.(롬1:21, 고후8:2) 감사는 축복을 심는 씨앗이다.(신16:15)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최고의 행동이다.(고후9:1)
나는 요즈음 육신의 작은 아픔 하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마음은 더욱 평안하고 행복하다. 입만 열면 감사가 노래된다. 고희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난다. 누구 못지않은 아픔을 마음에 담고 숨을 쉴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도무지 그 어떤 상황도 불평 없이 그 누구도 미움 없이 여전히 감사함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천국이라고 찬송한다.
나의 저서 “인생은 지우개가 없습니다”에서 쓴 글이 많은 블로그와 카페에서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지 못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가을이 온 듯 했는데 겨울을 느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더 따뜻한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더 따뜻한 옷(?)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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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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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두 후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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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한 듯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정치는 때로 세계적인 이슈나 국제적인 약속을 초월할 때도 있습니다. 최근 새롭게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포기하면서까지 국내 조기 총선(중의원 선거)을 선택한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뭐니 해도 근래 최대 관심사 또한 내년 있을 대선을 앞두고 각각 선출된 여당과 야당의 두 후보에 관한 기사들일 것입니다. 한국은 양당제 국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여당’과 ‘야당’ 혹은 ‘여야(與野)’라는 단어가 보통명사처럼 쓰이며 최소한 대선 기간에서만큼은 실질적 양당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되지 않았습니까? 전례를 보아할 때,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현재 여당과 야당의 두 후보 중 한 명이 차기 대통령이 되리라 봅니다. 그러니 후보들을 앞두고 무성한 말잔치에 얘깃거리들이 풍성합니다.
공교롭게도 두 후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습니다. 첫째, 불과 십년 전만 해도 정치권에서 그 이름을 찾을 길이 없었던,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 신인이라는 면에서 닮았습니다. 대통령제의 모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케네디나 클린턴이 같은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좋든 싫든 미국사회가 체험했던 신선한 변화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둘째, 두 후보 모두 가정사(家庭事)의 문제를 지적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닮았습니다. 여당의 후보는 부모형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야당의 후보는 처가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대로 대선이 끝난다면 적어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상징하는 동양적 국가지도자의 덕목 하나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할 지도 모릅니다. 셋째, 유독 ‘설화(舌禍)’의 주인공들이라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여당의 후보는 거침없고 과격한 발언으로 원래 유명했고, 야당의 후보는 자체 경선 과정에서 말(言)과 관련해 수많은 논란거리들을 양산하고 다녔습니다.
그밖에도 두 후보는 기이하리만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지 않은 닮음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정치적 의제(agenda)를 압도하고 있는 소위 ‘대장동사건’이나 ‘고발사주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벌써부터 ‘찍을 사람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시민들로부터 터져 나오고 있고, 심지어 후보들을 비하하는 ‘놈놈놈’이란 말까지 들려오는 실정입니다(한국일보, 이태규). 그렇다고 다들 투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작년 4.15 총선 직전 당시 사실상 미래통합당 수도권 선대위원장 역할을 하던 유승민 의원은 어느 지역구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역설적으로 지금 의미심장해진 말을 남겼습니다. “최악이 아니라면 차악,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 달라.” 사실은 새로운 표현도 아닙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덜 나쁜 악이 더 큰 악보다 선호가 크고, 선호가 크다는 것은 좋은 것이므로, 덜 나쁜 악은 더 큰 악과 비교할 때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라는 명구(?)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더욱 민주시민으로서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남녀와 인종과 재산의 구별 없이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이 인정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의 눈물과 기도와 희생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두 번째로 누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타인의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번 언제든지 여당 후보 지지자도, 야당 후보 지지자도, 제3정당의 후보 지지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교회의 강단은 결코 설교자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로 온갖 구설수와 의혹이 아니라 후보들이 제시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약속과 비전을 고려해서 투표하고, 그렇게 해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그 약속과 비전을 반드시 지키고 이루어가게 해달라고 영원한 대통령이신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 주여. 제게 대한민국을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소서.” 존 녹스(John Knox, 1514-1572.11.24.)의 마음이 후보자들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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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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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근심을 이기는 비결(2)-기도 (요 1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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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근심을 이기는 비결 두 번째 시간으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기도가 막히면 우리 영혼은 답답해집니다. 최근 들어 여러분의 영혼이 시들해지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기도의 불이 꺼져가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막혀있는 모든 영적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고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온의 대로가 펼쳐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왜 기도가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까?
1. 기도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근심의 폭풍이 몰아칠 때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문제들이 나를 너무 조여오기 때문입니다. 근심이 밀려와 불안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안하면 기도하고 불안하면 또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롬 8:28)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는 마음이 고민하여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니다. 비로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마 26:36-46)
여러분, 기도하면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도 이기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합니다.(빌 4:6-7) 어느 사이에 근심 걱정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내 가슴에 강물 같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내 짐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게 됩니다.(시 55:22) 아무리 문제에 둘러싸여 있어도 눈을 들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2. 예수님의 이름 안에 응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3,14절)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1)예수님의 이름이 왜 중요합니까?
죄 많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께로 연결해 주신 통로가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딤전 2:5) 예수님의 이름만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이 붙은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엡 3:12)
2) 그 이름 안에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받을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요 16:24) 기도해서 응답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근심은 삽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근심을 해결해 주신다는데, 왜 그렇게 근심을 끌어안고 걱정합니까? 기도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능력입니다. 어떤 절망도 어떤 장벽도 기도로 돌파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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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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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조기발견 어려운 췌장암’ 예방엔 복부 CT검사 추가가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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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췌장암을 진단받고 치료를 받으셨거나 혹은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체 종양 발생의 3위가 췌장암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2030년에는 미국 전체 암발생의 1위가 췌장암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통계에 따르면 췌장에 발생하는 낭종성 질환은 최근 10년 간 10배 가량 유병율의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췌장의 본래 기능은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하는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중요한 외분비 기관이면서 인슐린 등의 호르몬을 분비하는 내분비 기관입니다. 따라서 단백질 및 지방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서구식 식습관이 보급되면서 본인의 췌장 분비 기능보다 많은 양의 췌장액을 만들어내고 분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췌장 외분비 세포의 손상이 발생합니다. 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췌장관에 이상세포가 발생하는 것이 췌장암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췌장암의 조기 발견이 매우 어려운데 있습니다. 실제 췌장암을 수술이 가능한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는 20% 미만이며 일단 증상이 발생하면 대부분 이미 수술이 불가능한 진행성 종양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췌장의 위치가 복부 내 아주 깊숙히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검진으로 시행하는 상하부 내시경 검사나 복부 초음파로는 췌장 전체를 살펴보는데 제한이 많습니다. 하지만 초음파 내시경을 활용하게 되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초음파 내시경은 내시경 끝에 초음파 기구가 연결된 형태로 식도 위를 지나 십이지장에 진입하게 되면 복부 초음파에서 관찰이 어려운 췌장, 담도, 담낭 등 중요한 장기들을 바로 근처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높은 해상도를 가지고 확대 등이 가능하여 선명하게 관찰함으로서 작은 췌장의 병변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진단 기구 입니다.
췌장암의 경우는 진단 당시에 수술이 가능한 환자는 전체의 약 20%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80%는 진행성 췌장암이나 전이성 췌장암 단계로 항암치료 밖에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진행성 췌장암의 경우 진단 후 6개월 이내 사망하는 경우가 많으나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내과적인 치료를 병행하여 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수명 연장을 가져오는 것을 목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기간을 살더라도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 끊임없는 통증과 폐쇄에 의한 담관염 등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면서 오랜 병원 생활을 하게 되는 것에 반하여 적절한 항암치료 및 필요 시 내시경적 역행 담췌관 조영술 등을 이용한 배액 치료를 하는 경우 다른 만성질환 처럼 주기적으로 외래에 내원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기 때문에 상당히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최근 항암치료 약제의 발전과 투여하는 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약물 치료만으로도 상당히 높은 치료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경계성 단계의 환자의 경우 수술 전 먼저 항암제 투여하여 미세 전이 등을 제거한 후 수술을 진행하게 되면 완치율이 상당히 향상되며 수술의 성적이 개선되는 것이 최근 10년 이내에 많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췌담도 질환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50세 이후에는 국가 검진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췌장암 검진을 위한 복부 CT가 필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한번 이상 복부 CT를 시행하여 복부 초음파에서 맹점으로 되어있는 췌장 체부 미부 및 담도계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부산 경남지역은 타지역에 비하여 민물회 섭취의 병력이 높은 빈도를 보여 간 디스토마의 유병율이 높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B형 C형 간염이 간암의 1급 발암 인자인 것처럼 간 디스토마는 WHO에서 담도암의 1급 인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민물회 생식은 피해야 하며 간 디스토마는 몸 속에 들어온 후 수 십년 간 생존하면서 담도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과거 생식한 병력이 있다면 반드시 병원에 방문하여 간디스토마 기생충약을 먹어야 합니다. 1일 복용으로 충분한 제거 효과를 볼 수 있어 담도암 예방으로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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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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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까칠한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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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5경 마지막 신명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흔히 축복이라고 하면 꽃길을 걷게 되고 뭔가 달달한 어떤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신명기에 나타나는 축복은 여간 까칠한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고 고생하지 않고 대박을 얻으려는 생각이 많다.
신명기에 나타나는 축복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디테일한 조건이 붙은 축복을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는 기원, 출애굽기는 구원,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법도, 민수기는 훈련, 신명기는 축복에 대한 말씀이다.
축복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덩어리가 아니고 상당히 엄중한 조건이 따르는 약속이다.
축복 같은 저주가 있고, 저주 같은 축복이 있다.
양날의 검처럼 축복과 저주는 함께 붙어있다. 순종과 해석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지키고 불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라는 것이다. 사람이 전신이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고 간이나 콩팥, 허파, 어느 한 곳만 아파도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그래서 전인건강이 중요하다.
한국 사람의 몸에 좋지 않은 한 가지 충이 있는데 해충, 요충, 편충이 아니라 대충대충이다. 일을 할 때에 대충대충, 설렁설렁, 얼렁뚱땅 하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지 마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킬 때에 비로소 강성해질 것이다. 제품을 사면 제품 사용 설명서가 따라온다. 매뉴얼을 잘 지킬 때 제대로 작동이 되는 것이다. 보험 계약을 할 때 약관을 살펴보고 약관을 지킬 때 보험이 나오지 약관을 어기면 보험을 탈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적당하게 지키면서 복은 거창하게 받으려는 생각은 게으른 욕심쟁이의 생각일 뿐이다. 성경을 덮어놓고 살지 말고 펴놓고 살아야 된다. 인생 사용설명서, 성경말씀을 모두 지킬 때 복을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주문을 디테일하게 받는다. 음료수, 찬 것 혹은 따뜻한 것, 고기의 굽기, 샐러드 안에 빼야 될 것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만들어 준다.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하기 때문에 귀찮아도 꼼꼼하게 주문을 받고 주문대로 음식을 내어 놓아야 한다.
둘째, 건너가야 복을 받는다. 옴짝달싹을 안하고 당최 움직이지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꿈도 꾸지 마라.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가 복을 받는다. 소극적인 것은 비극적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 건너가야 되는 것이다. 건너간다는 것은 소풍을 가거나 여행을 다니는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불사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을 마무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되는 것이다. 요단강에 두 발을 담글 때 비로소 강물이 멈추었다. 건너간다는 것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거인 족속인 네피림, 목이 길어서 장대 같은 아낙 자손이 그 시대의 최고의 병기인 철병거를 가지고 버티고 있었기에 상당히 어려운 전쟁을 치러야 되는 것이다. 건너간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체력의 한계, 물질의 한계, 기질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한계를 뛰어 넘어 무한도전 해야 된다. 가면 있고 안 가면 없다. 하면 되고 안하면 안 된다. 유월절은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것이다.
셋째, 건너가서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지 말고 완전히 차지하라. 승리의 깃발을 꽂기까지 끝장을 보라. 찰떡의 유래는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골병이 들어 골이 빈 상태에서 찰떡을 먹여서 골을 채운다는 말이 있다. 최후 승리의 깃발을 꽂아라. 빈 깡통이 시끄럽다. 그릇을 빌려서라도 채워야 된다.
신앙생활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된다. 성령 충만 없이 사역하는 것은 비극이다.
넷째, 나의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될 축복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물려주어야 될 풍성한 축복을 받아야 된다.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였다. 후손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된다.
다섯째, 평지를 쉽게 가려고 하지마라.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할 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의 특징은 산지이기 때문에 일교차가 심하고 이슬이 생기고 풀이 자라고 양이 살아서 그 젖을 짜는 것이다. 성경에는 산 위에 마을이 있다. 높은 곳이 군사적으로 안전하고 헐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서 산지에서 샘으로 터져 나오고 산지에는 심한 일교차 때문에 이슬방울이 맺히고 그것을 통하여 잎이 자라고 양이 그 잎사귀를 따 먹으면서 젖을 만들고 사람들은 젖을 짜는 것이다. 꿀은 대추야자에서 나오는 꿀처럼 단 열매를 말한다.
여섯째, 옛적 애굽 땅과 같지 않다. 이제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때 비로소 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코로나 이전의 수월했던 시절을 추억하지 마라. 코로나 이후는 산 너머 산이요 산 너머 똥밭이요 산 너머 지뢰밭이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야 되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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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