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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
    6.25 전쟁 중 유대인 군목이 참전했고, 그 유대인이 부산에 왔고 일시 부산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과 유대인, 혹은 한국에서의 유대인의 존재는 흔치 않았다. 유대인 군목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국에 온 유대인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에 온 첫 유대인은 오페르트였다. ‘오페르트도굴 사건’으로 알려진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8년(고종 5년) 홍콩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던 중 사업이 어렵게 되자 조선으로 관심을 돌리고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바 있는 미국인 프레더릭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Stanislas Féron, 1827-1903) 신부를 통역관으로 고용하고 차이나 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몇 명, 청국인 승무원 약 1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떠나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인접한 덕산군 가동(伽洞,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1868년의 일이었다. 이 도굴 사건의 오페르트는 우리나라에 온 첫 유대인이었다. 두 번째 우리니라에 온 유대인은 첫 개신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KarlGuetzlaff, 1803-1851)였다. 독일 루터교 배경의 화란선교회 소속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태국 중국 등에서 일했던 선교사인데, 그는 태국에서 일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가 중국에서 사역하는 기간인 1832년 7월 말 고대도에 상륙하여 최초로 한글 주기도문을 번역하였고, 한글의 우수성을 독일어와 영어로 서양에 소개했다. 또 최초로 서양 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던 이가 귀츨라프였다. 한국에 온 3번째 유대인은 시편 번역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였다. 한국이름으로는 피득(彼得)으로 불렸다.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71년 우크라이나에서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히브리어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히브리어에 능통하였다. 그가 직장을 얻기 위해 24세 때인 1895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화란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고 개신교도가 되었고,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어를 공부한지 3년 만인 1898년 62편의 시편(저주시를 제외한)을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촬요’였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본이었다. 후에도 구약성경 번역에도 기여하여 최초의 구약 역본인 ‘구약젼셔(1911년)’의 출판에 도움을 주었고, 후에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개역 구약성경(1938)’ 출간에도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지은 찬송이 지금의 찬송가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이다. 히브리어가 능통한 유대인을 통해 한국어 성경번역에 기여하게 하신 것이다. 그는 70세에 한국에서 은퇴한 이후 미국 LA 인근 파사데나 소재 은퇴 선교사 주거 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고 1958년 8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곳의 공용묘지(Mountain View Cemetery)에 안장되었다. 그 외에도 한국과 유대인과의 교류가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6.25전 쟁기 정통 유대인 랍비 군목이 있었고 부산에서 활동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미군에 속했던 밀턴 로젠(Milton J. Rosen)이었다. 미국에서 군목 제도는 1775년 7월 29일 대륙의회가 군목협의회를 조직하고 미국성공회의 샤무엘 프로보스트(Samuel Provoost, 1742-1815)를 첫 군목으로 임명했는데, 이것이 군목 제도의 시작인데, 미국의 독립 이전 해였다. 유대인 랍비가 군목으로 복무하기 시작한 때는 남북전쟁기였다고 한다. 이때 유대인도 군목으로 근무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여성군목과 흑인군목도 이때 처음으로 임관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거의 90년 만인 2019년부터 유대인 군목의 보무를 허락했다고 한다. 제1차 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위해 싸웠고, 수십명의 랍비들이 종군했는데,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모든 유대인들이 공공생활에서 배제되고 추방된지 90여 년 만에 다시 유대인 군목을 허용한 것이다. 배경 이야기가 길었다. 다음 호에 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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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09-23
  • [서임중칼럼] 광야의 은총
    역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고난의 날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래서 苦尽甘来(고진감래)라는 말이 명구가 된다. 고진감래의 반대어로는 興尽悲来(흥진비래), 곧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으로 세상은 돌고 돌아 순환됨을 이르는 말이 있다. 하여 인생을 塞翁之馬(새옹지마)라고들 한다. 전국 교회의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회중에게 묻는 말이 있다. “제가 고생한 사람 같이 보입니까?” 그럴 때면 거의 이구동성 ‘아주 귀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자란 사람 같다’고들 한다. 그러나 둘째 날 저녁에 필자의 간증을 들으면 여출일구 “아이구 세상에나, 아이구 세상에”를 연발하며 필자의 지난 고생에 감정이입이 되어 함께 아파한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렇게 행복한 삶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필자에게 모두 진심의 박수를 보낸다. 부흥사경회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역이 더욱 보람된 것은 고난가운데 힘들고 지쳐 좌절과 우울증으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소망을 갖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 소성하는 사람은 목사나 성도나 차등이 없다. 고희의 세월을 걷는 부흥회 인도가 때로는 지치고 일어서기 벅찬 시간도 있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복되는 양떼들을 보며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 오늘도 감사의 옷깃을 여미며 말씀사역을 현재진행형으로 써간다. ‘광야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곧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삶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광야(曠野)’라는 원문은 ,מִדְבָּר(미드바르)’이다. 그것의 헬라어는 ἔρημός(에레모스)’로 번역이 되었다. 넓은 들판으로서 거친 땅, 빈들, 사막 등의 여러 가지로도 번역되는데 불모(不毛)지인 ‘씨 뿌리지 못하는 땅(렘 2:2)’, ‘사람 없는 땅(욥 38:26)’, ‘짐승이 부르짖는 황무지(신 32:10)’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사람이 살기 어려운 상황을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무 인적의 광야가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뵈옵는 장소이기도 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으셨다. 나아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 같은 광야의 시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피할 것만은 결코 아닌 필요한 시간이다. 이 광야의 시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더 깊이 있는 삶을 위하여는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교훈임을 깨닫게 된다. 사노라면 오늘의 삶이 광야 같아서 우리를 힘들게도 한다. 육신의 아픔도,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모든 범사도 때로는 우리를 주저앉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가는 길목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고난인 광야의 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인생에 필요한 광야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깨달음의 은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의 시간도 ‘이것은 내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광야의 시간’임을 깨닫고 극복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극복하는 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눈으로 가능하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말씀하셨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에서 자라는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최상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밤중에 따는 장미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격과 신앙의 향기도 극한 고난의 밤, 절망과 아픔의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며 발산되는 것이다. 같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어두운 벽을 바라본다. 광야의 시간에서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성공자가 된다. 보리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 없고 겨우 80알 또는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는 보리밟기를 한다. 이 때 허약한 싹들이 모두 꺾이고 다시 일어나는 싹들은 밟히기 전보다 훨씬 강한 줄기가 되어 수백 알이 달리는 보리알도 넉넉히 받쳐 결실한다고 한다. 요셉은 13년의 광야 같은 시간도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되었고 축복의 반열에 섰다. 탈무드 속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가고 있었다. 날씨는 타는 듯 뜨거웠고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저는 힘이 다 빠진데다가 목이 타서 죽겠어요.” “아들아 용기를 내어라. 우리의 선조들도 이 고통의 길을 다 걸어갔단다. 이제 곧 마을이 나타날 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이때 그들의 눈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우리 선조들도 여기서 모두 죽어갔지 않아요. 도저히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아들아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 희망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밤도 사경이면 아침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겨울에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제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제비는 다시 돌아온다. 한겨울 앙상한 가로수를 보고 그 나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다시 싹이 나고 푸른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좋은 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고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변함없이 대지에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사노라면 광야에 들어서는 시간도 있다. 어떤 이는 밤 4경 고난의 막바지에 이르게 될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는 곧 날이 밝고 해가 뜬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겨야 한다. 고난이 닥칠 때 절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일생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야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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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성서연구]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목회자로 살면서 요즘처럼 무기력함을 느낀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여 앉으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한국교회의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교단의 경우 매년 수만 명씩 교세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2030년에는 무척 어려워질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일신하고 끌고 나가야 할 교회들이 지속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 예배 출석 회복이 요원합니다. 코로나 이전의 절반 수준에 머무는 교회가 아직 많습니다.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세속화되어 신앙에 온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장식품 정도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런 우리에게 본문은 근본적인 해결의 방안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람은 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이 사람은 청년이었고, 부자였고, 신분이 높은 관원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세속적 성취에만 도취된 저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생에 관심을 가진 고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의 결과는 실망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근심하며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좌절한 결정적 이유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2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요구를 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구제가 소중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비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럴만도 했습니다. 젊고, 부자고, 신분도 높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질 만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비우길 원하셨습니다. 소유를 팔아 구제함으로써 부자라는 자부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의 관원의 삶을 내려 놓으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크게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비우도록 요구하신 이유는 사람의 방법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자신이 주어로 등장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라고 합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인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난관에 봉착한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해결책입니다. 며칠 전 새벽기기도 시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화된 교회 생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다시 힘을 내어 전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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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시사칼럼] 공정의 추석
    어김없이 찾아온 반가운 명절, 추석입니다. 본래 우리네 추석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시점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절기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게는 지치고 힘이 드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에서 획기적인 ‘추석 차례상 표준안’을 내놓았습니다. 중요한 줄로만 여겼던 ‘홍동백서(紅東白西)’나 ‘조율이시(棗栗梨枾)’는 원래 예법 관련 문헌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음식과 네 가지 과실만 차려도 충분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예법을 다루는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으니, 앞으로 상당한 변화가 뒤따르리라 생각합니다. 추석과 관련해서 “기준”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해제되었으니 이번 명절은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터인데, 의외로 정치적인 대화가 많이 오간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번 추석에 가장 많이 언급될 말들 중 하나가 “공정”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저마다 “공정”을 외쳤고, 이제 백여 일이 지나 그 평가가 이루어질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공정”이 “기준”과 관련 있습니다. 일상에서 언제 “공정”이란 말을 쓰나요? ‘공정한 심판’, ‘공정한 거래’, ‘공정한 경쟁’ 등인데, 모두 “기준”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영역에서 기준이 정해져 있으면, 그 영역에 속하는 누구에게나 형평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운동경기를 예로 든다면, 친정팀에게는 유리하게 원정팀에게는 불리하게 동일한 규칙을 달리 적용한다면 그 경기는 공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정”은 “공평(公平)”이나 “형평(衡平)”과는 사뭇 다른 개념입니다. 일단 “평(平)”자가 들어가는 말은 ‘같게 하다, 고르게 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기준”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공정은 주어진 기준을 전제로 하지만 공평은 그 기준 자체가 불합리하다면 이를 문제 삼는 측면이 있습니다. 같은 기준 하에서 똑같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어 같은 기회를 주어도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된다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근자에 펴낸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2020)이 이러한 측면을 잘 설명합니다. 서울대의 신재용 교수 또한 『공정한 보상』(2021)에서 비슷한 취지로 공정은 ‘능력주의(Meritocracy)’로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단적으로 ‘공정한 불공평’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적인 요소보다 외적인 공정 자체를 더 강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MZ 세대’가 대표적인데, 이른바 ‘인국공 사건’이나 ‘반페미 논쟁’에서 이들은 얼마나 공정을 중요시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어떨까요? 공정입니까, 공평입니까? 정답은 “공의(체데크)”로, 양자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성경적 공의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곡식 되와 저울 추 그리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명령인데(신 25:13; 잠 20:10),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공정의 원칙을 선언한 말씀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이들을 돌보라는 명령인데(출 22:21-22; 신 24:19-21),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경쟁력이 없는 이들을 배려하려는 소수자 보호의 원칙을 선언한 말씀들입니다. 이러한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공의로 이루어진 신적 질서가 깨어질 때, 이를 복구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성경적 “정의(미쉬파트)”입니다. 재판관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사사(Judges)”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성질을 띠는 성경의 초막절에 관해 신명기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신 16:14)라는 구절을 부가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공정의 원칙을 강조해 왔더라도, 명절만은 공평의 원칙을 잊지 말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번 추석에 우리 신앙인들만이라도 공정과 공평을 함께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대화만 할 게 아니라 십시일반 가족들이 힘을 모아 어려운 이웃이나 먼 나라들을 위해 성경적 공의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이번 추석은 공평이 뒷받침하는 공정이 말해지고 행해지는 뜻 깊은 명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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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교회와세금] 교회 종합부동산세의 납부와 면세 기준
    종합부동산세(Comprehensive Real Estate Holding Tax)는 인별로 보유한 주택 및 토지 등 부동산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각 공시가격의 합계액이 일정 기준 금액을 초과하는 경우 초과분에 대해서 부과하는 조세이다. 과세기준일(6월 1일) 현재 주택은 6억원(1세대 1주택자는 11억원, 법인 등은 0원), 종합합산토지는 5억원, 별도합산토지는 8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 세금을 납부하여야 한다. 2021년 종합부동산세 수납액은 6.1조원으로 국세수입 344.1조원 대비 1.8%이다. 공시지가 상승과 세율 인상으로 전년대비 2.5조가 증가하고, 납부인원도 74.3만명(2020년)으로 최근 수년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세율은 과세표준을 구간별로 구분하고, 과세표준 금액이 커질수록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초과누진세율 구조이다. 주택의 경우 개인은 2주택(조정대상지역은 1주택) 이하자는 0.6~3.0%, 3주택(조정대상지역은 2주택) 이상자는 1.2~6.0%의 초과누진세율이 적용되며, 법인은 2주택(조정대상지역은 1주택) 이하자는 3%, 3주택(조정대상지역은 2주택) 이상자는 6%의 단일비례세율이 적용된다. 토지의 경우, 종합합산과세대상 토지는 1.0~3.0%, 별도합산과세대상 토지는 0.5~0.7%의 초과누진세율이 적용된다. 그러면 이러한 종합부동산세의 납부에 대해 교회(Church)는 어떤 적용을 하면 좋을까? 2021년 12월, 많은 교회가 종합부동산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상황을 경험하였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2020년에 개정된 세법이 적용되며 3주택 이상을 소유한 법인의 경우 공시지가의 95%에 해당하는 과세표준에 6%의 세율을 곱하여 세액이 산출되는데, 전례없는 세금 폭탄 상황이 되었다. 둘째, 교회가 보유하는 특히 부목사 사택 및 선교관이 그 대상이 되었다. 예로 위 주택을 3채이상 보유하여 공시지가가 10억원인 경우 [과세표준 9.5억*세율 6%= 5700만원]의 종합부동산세와 [5700만원*20%=1140만원]의 농어촌특별세 합계 6840만원의 세액을 12월 15일까지 납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전년 대비 수십배가 증가한 세금으로, 매년말 종부세를 납부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교회재정에 미치는 부담 영향이 심각하였다. 필자는 이와 관련, 본 한국기독신문에 ‘교회 종합부동산세와 관련한 단상(2021.11.29)’으로 교회에 필요한 실무 안내를 한 적이 있다.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고유의 목적을 위해 보유하는 예배당과 담임목사 주택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타 공익법인 등과 같이 종합부동산세가 면제된다. 둘째, 부목사 사택과 선교관 등은 교회 재산으로 간주되어 재산세와 같은 개념으로 종합부동산세의 납부가 요구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액의 세금이 고지된 것으로 보인다. 단 종부세법 8조2항2호, 시행령4조에 따르면 사원용주택(국민주택규모이하 또는 공시가격 3억원이하)은 종합부동산 합산에서 제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사원용 주택이나 기숙사는 부동산 투자와 관계없이 사원의 복지와 근무환경, 업무 효율성을 위해 무상 또는 저리로 제공하는 것으로 보아 면세 규정을 두고 있으며, 이는 또한 교회의 부목사 사택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실제로 사택에 부목사 등이 거주하고 있음을 증명하여야 한다. 셋째, 2020년 개정세법은 법인이 3주택 이상을 보유시 6%의 최고 단일세율을 적용, 위와 같이 거액의 세금을 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법은 종교단체 명의로 된 주택과 토지는 종합부동산세에 한하여 개별단체 소유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적용할 경우 세율은 6% 일괄적용에서 개별단체 1.2~6% 구간의 선택으로 완화됨을 알 수 있다. 금년 7월 21일,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획재정부가 종합부동산세를 포함한 여러 감세 내용을 담은 세제 개편안을 발표하였다. 국회 심의가 통과되면 2023년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법은 여러가지 복잡하고 또 변동될 수 있으므로 교회 담당자가 그 전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난 종합부동산세와 같이 세금이 폭탄처럼 고지되고, 또 이를 뒤늦게 조정하는 사례는 최소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교회, 모두에게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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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은혜의말씀] 만나(출 16: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를 지나 엘림에서 잠시 안식한 후, 다시 광야로 행진합니다.(1절) 그런데, 음식은 떨어지고 갈 길이 보이지 않게 되자, 급기야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2절) 사실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요. 언제나 현실의 벽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평, 원망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현재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3절) 여러분, 신앙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가치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렇게 불평,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4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지요.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아침에 이슬이 내리고 마른 후 지면에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만나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신 ‘선물’ 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나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으십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시는 하늘양식- 만나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날마다 거두라고 하십니다.(4절) 하나님의 주시는 양식은 하루치입니다. 이틀 치도, 한 달 치도, 일 년 치도 아닙니다. 양식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줄 믿습니다. 특히 만나는 아침에 거두는 양식입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2. 여섯째 날에는 두 배를 거두라고 하십니다.(5절) 만나는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둘 것이 아니라,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민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의 날이요, 예배의 날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주일, 여러분은 잠시 일을 멈추고 영혼의 안식을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일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요. 여러분이 주일을 지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3. 대대로 간수하라고 하십니다.(32절) 그들의 자손들에게 만나를 보여줌으로,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만나의 의미가 무엇인지 교육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들의 신앙 교육이 있어야, 우리 자녀 세대들이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말씀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믿음의 부자가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만나에 대한 신약적 의미 즉 구속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요 6:32-35) 구약에는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었는데, 만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샘물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베풀어 놓으시고, 지치고 배고프고 상처받은 여러분들을 초대해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양식-만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매일 매일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과 호흡하고, 동행하므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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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목회자칼럼] 전신갑주를 통한 패션 테라피
    모든 것은 영적이다. 정신적으로 신경쇠약, 노이로제, 강박관념, 불면증, 우울증, 공황장애는 결국 영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 전신만신 골병이 든다. 영이 혼미해지고, 마음은 너덜너덜할 만큼 곤핍해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야말로 기진, 맥진, 탈진 상태가 된다. 환자가 온 몸이 병들어서가 아니라 한 곳만 아파도 그것 때문에 합병증이 생기고, 전이가 되어, 결국 온몸에 탈이 난다. 치통 하나만 생겨도 온몸이 아파서 치를 떨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압이 올라가고, 두통이 생기고, 소화불량이 되고, 불면증이 오고, 입맛, 밥맛, 살맛이 떨어진다. 사람이 아무리 조용하고 원만하게 살고 싶어도 사탄마귀가 간계(간사하고 교활한 꾀)를 부린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밀 까부르듯이 치대고, 광명한 천사와 같이 미혹하고, 호시탐탐 성도를 노리고, 간계를 써서 미혹하고, 궤계(속이는 간사한 꾀)를 부려서 속이고, 계략을 꾸미고,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해서 선동하고 선전한다. 악하고 음란하고 패역하고 강하고 조직적인 군대 같은 세력이 분명코 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에베소서5장을 보면 속으로 성령 충만하고, 6장을 보면 겉으로 전신갑주를 입어서 속사람, 내공이 강해지며 겉 사람이 반듯해진다. 문무를 겸비하고, 안팎이 고침받고, 균형과 조화를 갖춘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통해서 풀고 육체적인 피로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은혜와 감동을 받을 때 풀어진다. 그러면 우리의 속사람은 어떻게 강건해 질 수 있을까? 속에 있는 더럽고 악한 것은 토설하고 신령한 은혜와 진리로 채워야 된다. 그것이 회개와 충만이다. 믿음은 죄악을 회개하고 성령충만으로 나타난다. 기도는 들숨 날숨과 같다. 독한 것은 토해내고 산소는 들이마신다. 세월이 흘러가면 땅도 지력이 떨어지고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묵은땅을 기경해야 된다. 기경한다는 영어 단어, 컬티베이터(cultivate)에서 파생된 단어가 컬쳐(culture), 문화라는 단어다. 마음 밭을 깊이 기경한 사람이 문화인이고 교양인이다. 마음 밭은 길가 밭, 돌밭, 가시밭, 좋은 밭이 있는데 길가 밭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고, 돌밭은 해가 나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죽고, 가시밭은 가시가 자라고 기운을 막았고, 좋은 땅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땅을 깊이 갈아엎고,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을 때에 마침내 좋은 땅이 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에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하다. 그런 사람은 정으로 살지 않고 뜻으로 살고,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우선한다.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한다. 바른 신학, 바른 마음, 바른 생활에 따라서 반듯한 사람이 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식 습관, 수면 습관, 운동 습관, 정서 활동이 중요하다. 아깝다고 음식물 쓰레기를 내 몸에 버리지 마라. 과식으로 살이 찌고, 과로가 만병의 원인이고, 과속이 교통사고의 주범이다. 사람은 인풋이 되는대로 아웃풋이 된다. 그러므로 좋은 물을 마시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필요한 영양을 골고루 보충해야 된다.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서 산보를 하고, 작정을 하고 운동을 해야 된다. 새벽기도를 날마다 하면 저녁시간을 함부로 보낼 수가 없다. 주일을 성수하면 6일이 교통정리가 되어져서 준비된 일상을 살 수 있다. 마음속을 헛된 것, 거짓된 것으로 채우지 말고 신령한 것으로 채워라. 성령을 훼방하지 말고,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을 환영하고, 성령에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 그리고 겉으로,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완전무장을 해야 된다. 군인은 엄청난 훈련을 받고,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에 대비, 준비, 유비무환한다. 사탄 마귀는 어김없이 빈틈을 파고든다. 그래서 완전무장을 해야 된다. 워커화를 신고, 방한복을 입고, 벨트를 차고, 방탄조끼를 입고, 썬그라스를 끼고, 헬멧을 쓰고, 방독면과 수통과 무기를 차야 된다. 그야말로 패션 테라피이다. 힘들어도, 무거워도, 답답해도 이 모든 것이 필요, 충분한 것이다. 무좀이 생길만큼 발에 땀이 차도 워커화를 신어야 산길, 강행군을 견디어낸다. 썬그라스는 겉멋을 부리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헬맷을 쓰면 답답하고 무겁지만 유사시에 머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필수 장비이다. 면류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된다. 전신갑주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최소량의 법칙에 따라서 바로 그곳으로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전체를 망가뜨린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문제가 복합적이듯이 치료도 유기적이다. 병원에 가면 내과, 외과, 안과, 비뇨기과, 흉부외과, 신경정신과 등이 연합해서 치료를 한다. 토탈 힐링, 전인치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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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군목제도2
    6.25 전쟁의 결과로 시작된 이 군목제도의 시행은 한국기독교회에 대한 특혜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제도는 “한국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선교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이후 군선교에 끼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군종제도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김양선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김양선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나 잃은 것 못지않게 얻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백만의 국군장병에게 복음을 전하여 확고한 정신무장을 시킬 수 있는 종군목사 제도의 실시라고 할 것이다. 이 사업은 실로 한국교회 반세기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대하고 위대한 획기적인 사실일 것이다.” 1951년 2월부터 1953년 4월까지 270여 명의 한국인 목사가 군목으로 투입되었는데, 6개월 이상 참전한 군목 중 2015년 5월 말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가했다고 한다(국민일보, 2015. 6. 2) 6.25 참전 미군 군목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에 속한 군종장교는 140명이었다고 한다. 이중 13명이 순직하고 26명이 부상당했다. 연합군에 속한 군종 장교들 가운데 저래 다수가 미군에 속한 군종목사들이었는데, 한국전쟁에 제일 먼저 투입된 미군 군목은 일본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칼 허드슨(Carl R. Hudson) 목사였다. 그는 1950년 7월 5일 이른 아침 오산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전사한 군목은 미 제24보병사단 제19보병연대 소속의 헤르만 G. 펠호엘터(Chaplain Herman G. Felhoelter) 목사였다. 그는 대전 금강전투에서 미군 방어선이 무너지자 낙오된 부상병을 안고 기도하다가 북한군 수색대에 잡혀 30여명의 병사들과 함께 현장에서 총살되었다. 37세 때였다. 그는 한국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죽은 12명의 군목 중 첫 번째 희생자였다. 제25보병 사단 제35보병연대 군목 바이런 리(Byron D. Lee) 목사는 1950년 7월 인민군 격투기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한국 전쟁시 희생된 미군 군목은 12명에 달하는데, 제19보병연대 케네스 히슬러(Kenneth C. Hyslop), 제2보병사단 제2보병대대 웨인 버듀(Wayne H. Burdue), 32보병연대 7보병대대 로렌스 브런너트(Lawrence F. Brunnert) 목사 등 군목들은 포로가 되었고, 3연대의 에밀 카폰(Emil J. Kapaun, 1916-1951) 신부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병사들을 돌보던 중 사망했고, 다른 군목 포로들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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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09-08
  • [성서연구] 칠천 명이 일어날 때입니다
    많은 분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교회 외적인 사회적 요인도 있고, 교회 내적 요인도 많겠지만, 저는 그중 하나가 교회 리더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목사님들께서 <교회는 목사 이상으로 자랄 수 없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크기만큼 자라고 성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목회자 위기라 하겠습니다.일전에 현재 각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일치된 말씀은 한국교회의 미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교단장이나 연합기관의 책임자는 제도에 따라 선출하면 되겠지만, 교회를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집니다. 저는 몇 해 전부터 한국교회에 있어서 엘리사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껴왔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다스리던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암흑 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등불을 밝힌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우상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여호와만이 참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또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하기도 하고, 비가 오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승천할 때 그 제자인 엘리사가 외쳤던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승천한 후에는 그 제자 엘리사가 이 희망을 이어갔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 역시 요단강을 갈라 건넜고, 아람에 맞서 이스라엘을 수호했고,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왔을 때도 그의 나병을 고쳐 아람의 기를 꺾었습니다. 엘리사가 살아있는 동안 북 왕국 이스라엘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이후 그 뒤를 계승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북 왕국은 점점 악해지고 약해지다가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 왕국의 버팀목이었으나, 그 후대가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엘리야 시대가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위시한 당시의 목회자들의 시대로서 교회들이 크게 부흥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하용조, 옥한흠 목사님 같은 분들의 시대가 있었는데, 엘리사 시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뒤를 잇는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윗대 어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사역 현장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세대는 좋은 교회 토양에서 성장했고, 스펙이 매우 뛰어나고 세련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들이 과거만 못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선 세대 목회자들 때보다 많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야성이 부족합니다. 이들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현재 부교역자로 일하는 이들, 조만한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될 분들 역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담임목회자가 될 것이고, 그때 한국교회는 더 약해질 것입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적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교회가 어떻게 성령님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부흥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영적 능력과 부흥을 경험한 엘리사 같은 이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칠천 명이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앞장 설 때입니다. 신학생들은 큰 교회를 바라보지 말고, 스펙 쌓기에 매달리지 말고, 그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역 현장에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충성함으로써 부흥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엘리야, 엘리사가 되려는 일념으로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칠천 명이 모두 엘리사가 된다면, 한국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때를 사모하며 오늘도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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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소강석칼럼] “낮은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건물을 준공한 이후부터 교회 안에 있는 서재 안 방에서 거해 왔습니다. 저희 집이 이사한 지도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 방은 동굴과 같습니다. 창문이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이중창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어지간한 천둥이 쳐도 천둥소리가 안 들릴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화장실 쪽에 있는 창문을 열어놓으면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반대쪽을 열면 환풍기가 있어 지하에서 뽑아 올린 좋지 않은 공기가 제 방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환풍기로 강제 통풍을 시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끔 본당으로 가는 통로 쪽에 작은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글을 쓰고 설교를 준비할 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창문을 열면 뒷산의 맑은 공기가 그대로 들어오고 새 소리와 매미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곳에서 여름수련회에서 할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요란하게 “웨엥~~”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밖을 보니 누군가가 교회 벽 위에서 잔디를 깎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비서까지 불러서 둘이 함께 소리를 쳤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만 있으면 들꽃이 만발해 있는 곳까지 다 깎아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청을 다해 둘이 소리를 질렀더니 그제야 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부터는 풀을 깎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렇게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어떻게 잘라내려고 하십니까?” “저야 교회 요청에 따라 시킨 대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담임목사이니까 제 말을 따라 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렇게 해서 다행히 들꽃들이 피어있는 곳은 깎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교회 담 위에 피어있는 꽃들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하얀 꽃이지만 손톱만 하게 피어있는 꽃이었거든요. 그러나 저 꽃들도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애처롭게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을 제초기로 깎아버리면 얼마나 무참하게 쓰러져버리겠습니까? 꽃이란 유명하고 화사한 꽃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 모를 들꽃이라 하더라도 꽃망울을 여는 순간 그리움이 되고 연인이 되는 것입니다. 연모함을 찬사하는 사랑이 되고 순결한 고백과 같은 존재이지요. 그러니까 꽃은 바라보기만 해도 애처롭거나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저에게 사랑의 손짓을 하는 모습과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며칠 후 다시 와서 보니까 꽃은 어엿하게 서 있습니다. 아주 작은 꽃이지만 그 난폭한 여름의 폭우를 맞고도 끝까지 고고하고 순결한 자태로 서 있었습니다. 물론 얼마 있으면 저 꽃도 지게 되겠죠. 하지만, 아직은 곱고 순결한 자태로 오롯이 서 있었습니다. 저 손톱만 한 하얀 꽃을 보노라니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벼락에 올라 깎여지지 않은 들꽃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리고 여린 개망초 꽃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들꽃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꽃들이 흔들리며 저에게 이런 소리 없는 외침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이렇게 작지만 지금까지 순결한 모습으로 피어있습니다.” 저 여리고 한없이 부드러운 꽃을 꺾지 못하게 한 것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문득, 밤에 별빛을 사모하는 마음처럼, 아니 그 마음이 꽃잎에 어리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낮은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르고파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지구촌 속에 저 역시 너무나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동안 이름 모를 저 들꽃처럼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가 아침이면 이슬 한 모금 축이며 저녁이 올 때까지는 작은 향기라도 풍겨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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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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