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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말씀] 기도 :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킵니다!(출 32:7~14)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모든 죄를 싫어하시지만, 그중에도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 음란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진노하십니다.(10절) 모두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십니다. 모세를 조상으로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도, 모세에게 나를 말려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오버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심으로, 모세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시고, 마치 그의 기도 때문에 참으시는 것처럼 하시면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14절)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모세의 기도는 과연 어떤 기도였습니까? 1. 언약을 붙드는 기도였습니다.(13절)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약속입니다. 그 언약이 다윗으로, 그리고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는 것이 신약입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드리는 기도는 강력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잘났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늘 연약하고 범죄 하였지만, 우리를 향한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드심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님들은 자기 생각, 자기 고집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자신을 드리는 기도였습니다.(32절)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자기 생명을 죄인을 위한 제물로 기꺼이 바치고자 합니다. 죄인과 한 운명이 되려는 뜨거운 마음, 이것이 중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세의 간구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의 기도를 보면서 한 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진멸 당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생들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간절히 중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그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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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2-12-25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1
    작은 시골마을에 조그마한 개척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해 몇 차례는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즐거움의 가장 큰 이유는 맛있는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어서 일거다. 다음으로 성탄절의 뜻도 의미도 잘 모르면서 재밌게, 힘차게, 열심히 불렀던 탄일종, 동방박사 세 사람이란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기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인데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함께 어울리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던 거 같다. 예를 들어 탁구치고, 성경퀴즈, 성경 찾기, 찬송가 찾기 등이 즐거웠지만 특별히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당시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연합활동이 있었는데 대림절기가 되면 그동안 준비하고 연습한 연합찬양의 밤을 가졌는데 그 감동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가을을 노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미처 덜 준비가 된 우리의 몸은 적응을 위한 적지 않은 고통을 격기도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은 인정도, 사정도 없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연초에 계획하고 꿈꾸었던 일들을 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곧 다가올 새해를 기대하는 열정을 새롭게 주시는 주님을 인하여 감사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는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을 어떻게 맞고 보내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해마다 달랐다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달라져 적응이 쉽지 않을 정도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제한적이었던 교회공동체내의 활동이 다시금 시작되는 분위기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옛날이 회상될 때가 많다. 예컨대 요즘은 보기 힘든 새벽송의 추억이다. 성탄 이브에는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예배와 음악회가 진행되고 이어서 게임도 하며 밤을 지새우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빛을 쫒아 새벽을 깨우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온 누리에 알리는 것이다. 비록 아름다운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우리 중심에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담아 구원의 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리고 온 세상에 이 놀라운 주의 사랑을 노래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는 복된 성탄의 계절이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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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목회자칼럼] 유토피아와 성탄절
    하늘에서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아담한 집의 창문 사이로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가족 중 막내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더니 보란 듯이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다음주는 드디어 크리스마스에요. 제가 1년 동안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죠?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해요. 그리고, 예수님 제가 올해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은요...” 5살 어린이가 바라는 성탄절의 참 모습은 예수님이 자기가 바라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1년 동안 꼬박 12월을 기다린 것도 성탄절이 되면 생일, 어린이날과 마찬가지로 떳떳하게 하나님께 선물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 올 것이라 믿으며 그 선물을 받는 크리스마스가 5살 어린이에게는 최고의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막내의 기도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아이의 아빠는 달력을 보며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승진발표일’이라고 적힌 것을 봅니다. 1년의 마지막 승진 발표가 있는 날이 하필 크리스마스 다음날입니다. 아빠는 오래전부터 승진을 준비하고 원했는데, 하필 그 날이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혹시, 예수님의 생일을 맞아 나를 위해 승진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26일에 승진이 된다면, 이 아빠에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자, 그 곳이 곧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성탄절을 꿈꾸고 있나요? 5살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이 어떤 선물을 주실까?’ 기대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 아이의 아빠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수님이 승진을 시켜주시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있나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가 되면 뭔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뭔가를 주시지 않을까? 이왕이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걸로, 가능하면 돈이 좀 되는 걸로...” 어렸을 때,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집에 들어오는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린 맛있는 간식들이 더 반가웠던 것처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실만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나를 위해 가지고 왔으면 하는 것들로 기대하며 반기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어지럽고 힘든 세상, 경쟁과 다툼 속에 참 평화와 평안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내 마음 속에서 충만히 이뤄질 때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어디든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많이 소유해야지 유토피아가 이뤄질 것이라 말하고, 더 높은, 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지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밟고 일어나야지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참 평안’을 맛보기만 하면 그곳이 유토피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알 리도, 알 수도 없는 비밀이자, 기쁨인 셈입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한국교회가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오히려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을 쌓은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2022년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실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 예수님의 탄생 그 사실 만으로 기뻐하며 그 속에서 참 의미를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는 도피적 유토피아 대신 무너진 사회와 정의를 회복하는 재건 유토피아를 2023년에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2023년에는 내실이 든든한 한국교회, 거품보다는 알맹이가 있는 한국교회로 성숙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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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이상에서 6.25 전쟁당시의 부산지방 상황과 기독교계의 활동, 기독교계의 전도 및 구제활동, 기독교 병원의 설립과 의료활동 등 전쟁기 상황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제 2년여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 곧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이 어떠했던 것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수행자들(군인) 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행위주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인데, 전쟁에서 우연하게 죽었다고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었다. 1차 대전 당시 8백만 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1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최악의 소모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제2차 대전에서는 7천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민간인이 4천만 명이었다. 나치독일이 일으킨 독소전 당시 소련의 20대 남성 70%(1,400만 명)가 전사했다. 스탈린의 학살이 2천만 명, 마오쩌뚱의 학살 4천만 명에 달했다. 6.25전쟁은 3년 1개월 2일 간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재산피해는 그만두고 인적 피해를 보면, 한국 및 UN군 피해자가 776,360(사망 전사 부상 실종)명, 북한 및 중공군 피해자 1,773,600(북한군: 801,000명, 중공군: 972,600명)명이었고, 민간인 피해(사망 학살 부상 실종)는 2,540,968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피난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말한다면 군인 40만, 민간인 약 2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난 5,600년 동안 1만 4천5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약 35억 명이 전쟁의 와중에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무기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인권모독, 인권유린이 자행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독일의 위험사회학자 율리히 베커(Ulich Backer)는 현대의 재난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재난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둘째, 재난의 범위가 대규모적이며, 셋째, 재난의 고통이 무한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재난의 아픔을 안고 70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기독교 일각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은 거부하거나 피해야 하며 무저항 비폭력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런 입장을 기독교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라고 부른다. 그런가하면, 전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방어적 전쟁이나 정당한 동기와 원인을 지닌 경우에는 전쟁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정당전쟁론(Just war), 혹은 전쟁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론(The Crusade)도 있고 미국의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현실적 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완전한 주장일 수 없지만 그래도 평화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그래서 지상의 평화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평화주의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기꺼이 평화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화주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평화주의 원칙을 난처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비전의 윤리는 고상한 가치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인내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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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12-20
  • [서임중칼럼] 光水風의 교훈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종교를 따라 증산도에 심취했었다. 태을주, 오주, 절후주, 운장주, 갱생주, 칠성경, 진법주, 개벽주, 천지불주를 다 암송하면서 주문을 낮밤으로 외웠다. 이것이 상제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류가 相生과 福樂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나가는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교의 經典에 심취되어 한 때 성철, 법정스님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럼에도 내 삶의 환경은 상생과 복락의 체득은커녕 느낌조차 없는 가난과 질고의 세월이었다. 이런 삶을 이겨내지 못하고 삶을 포기할 즈음에 알지도 못하는 힘에 이끌려 교회로 갔고 처음 예배당에 앉았을 때 그토록 추구하던 상생과 복락을 무의식적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흔 살에 목사가 되어 오늘도 목사의 길을 행보한다. 그 옛날 상생과 복락과 더불어 사는 삶을 교회를 통하여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체득했기에 내가 교회를 통해 체득한 그 기쁨을 전하는 복음의 삶이 나의 삶의 전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相生의 아름다움이 아닌 相剋 相衝의 어둠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느낀다. 무엇인지 모를 濁함으로 영혼이 숨을 쉬지 못하는 영적 고통이 심령폐부까지 밀려들기도 한다.얼마 전 원주 구룡산 중턱에 눈이 부시는 것보다는 마음이 더 부시는 뮤지엄 산(SAN)을 다녀왔다. 일본 건축의 철학자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작품이다. 2013년에 개장한 뮤지엄 SAN(Space, Art, Nature)은 자연과 예술이 있는 공간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 <SAN>이다. 그리고 우리 말 ‘산(山)’이기도 하다. 빛과 물과 바람의 건축가로 알려진 ‘안도’의 교회 작품으로는 오사카의 <빛의 교회>, 홋카이도의 <물의 교회>, 고베의 <바람의 교회>가 있다. 한국에도 ‘안도’의 작품이 몇 개 있지만 특히 제주도 <글라스 하우스>가 있다. 오래 전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공간 글라스 하우스의 <민트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원주에 세워진 해발 275m에 걸터앉은 뮤지엄 <산>에는 빛, 물, 바람을 재료로 쓰는 안도의 건축 철학이 담겨 있다. 웰컴센터에서 시작해 플라워가든, 워터가든, 본관, 스톤가든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자연과 하나 된 미술관, 오솔길 지형을 그대로 살린 미술관, 7만여 평의 부지가 자연에 안긴 거대한 작품이 <산>이다. 그 <산>에서 삶을 묵상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이다. 그리고 빛과 어둠, 땅과 물을 나누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 하시면서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창세기 1장이 마무리 된다. 빛과 물과 바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이다.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만 원주 <SAN>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보았다.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로 인해 단절의 담이 무너지고 수직으로 하나님과 수평으로 인간과의 관계가 이어졌다. 그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사랑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그 삶 자체가 오늘의 천국이다. 역설하면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이 멈추고 단절된다면 하나님과의 이어짐도 단절된다. 하나님과 단절 되는 사람은 사람과의 이어짐도 멈춘다. 그것이 오늘의 지옥이다. 빛과 물과 공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양과 질량은 다르지만 속성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은 따뜻해서 사랑으로 표현한다. 빛은 차별 없이 모든 곳을 비춘다. 그래서 진정한 평등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겸손으로 표현한다. 上善若水가 그래서 명언이다. 물의 흐름에는 삶의 지혜가 담겨있고 그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공기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그런데 빛은 지하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한다. 바람은 막힌 곳을 지날 수 없다. 빛은 생명을 주지만 빛이 가열되면 火가 된다. 화가 이르는 곳에는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은 만물의 생명을 살리지만 물이 濷이되면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바람은 濁함을 정화하지만 颱가 되면 모든 것을 휩쓸어 초토화 시킨다. 그래서 過猶不及이 명언이 된다. 나는 목사로서 사람을 많이 만난다. 목사이기에 예수 믿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 道를 통해 빛처럼 사랑으로, 물처럼 겸손하게, 바람처럼 淨化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종종 火와 濷과 颱의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이르는 곳곳마다 水魔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火魔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颱風이 휘몰아치고 지난 것처럼 폐허가 되는 것을 본다.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貪瞋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그 자체다. 불가에서는 이를 三毒이라 했고, 탐진치를 벗어남이 열반이요 해탈이라고 가르쳤다. 삶의 이치가 다를 바 있겠는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연주하는 자연의 이치 光水風의 교훈을 통해 내려놓음, 낮아짐, 물러섬, 그리고 때로는 멈춤의 삶을 사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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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
    2022-11-25
  • [성서연구] 말세에 들어야 할 예언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 <말세>, 세상의 끝이란 규정합니다. 세상 끝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마태복음 24장 3절에 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의 답은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우선 대결과 갈등이 심화되어 민족과 나라가 서로 대적합니다. 대결과 갈등은 개인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기근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있을 것이라 하셨고, 이에 더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말세의 모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을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말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선 말세란 영적이고 실존적 개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세란 주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로 정해진 게 아닙니다. 예컨대 1899년까지는 말세가 아니었고, 1900년부터 말세였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말세는 모든 시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였던 하박국, 황충을 비롯한 메뚜기 류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된 고통을 경험한 선지자 요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시대를 살았던 사도들은 모두 그들의 시대를 말세라고 여겼습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사도들이 방언했을 때,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한 데 대한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서 2장 28~32절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첫째로, 현재의 형편이 아무리 좋아도 그 다음에 올 말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28절의 첫 단어는 <그 후에>입니다. 무엇의 후일까요? 요엘 시대에 메뚜기 류의 습격으로 황폐하게 되는 고통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고통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엘 2장 24~25절을 보면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28절의 <그 후에>는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좋은 때 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할 때 <말세에>란 단어를 추가하여 인용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가 말세입니다.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 후에 말세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풍요롭고 평화로워도 우리는 늘 그 다음에 올 말세에 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미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말세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세상이 끝나는 일뿐인데,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마치 임종하는 사람에게 십 년 후를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끝 그 후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세상이 끝난 후에 시작될 다음 세상, 즉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예언을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뿐이지요. 그래서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와 성도가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본다면 그 초점은 구원에 맞춰져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성도는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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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5
  • [시사칼럼] 아재상법(我在上法)
    ‘신필(神筆)’로 불렸던 홍콩의 김용이 쓴 「신조협려」에 보면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절벽 아래로 투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여주인공이 벌의 날개에 “아재곡저(我在谷底)”라는 글씨를 써서 날려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나는 골짜기 아래(바닥)에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중국 명문 가문 출신으로 “명보(明報)”를 창간한 탁월한 언론인이었던 저자(본명 사량용)가 신문의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중소설을 연재하면서 느꼈던 남다른 소회를 담아 살짝 흘려보내는 고백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이 문구를 떠올린 이유는, 최근 이와는 반대로 “아재상법(我在上法)” 곧 ‘나는 법 위에 있다’는 대담무쌍한 선언을 노골적으로 쏟아내는 듯 행동하는 무리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바로 서울 성북구 소재 사랑제일교회 사건에서입니다. 합법적인 재개발지역에 포함된 이 교회는 보상 문제로 조합 측과 다투다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최종적으로 패소하고 말았지만 몇 차례의 명도집행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방해하여 마침내 조합 측의 굴복을 이끌어 냈습니다. 양측이 협의보상금 500억과 대체 부지에 합의하여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교회의 자칭 목사는 “그래, 나는 대법원 위에 있어”라는 망발을 공공연하게 내뱉기에 이르렀습니다. ‘직접적 아재상법’입니다. 물론 법이라 해서 모두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때로 악법에 대해 혹은 자의적인 해석과 집행에 대해 분연하게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더군다나 ‘프로테스탄트’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신앙도 법치주의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법치주의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아재상법”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예수님보다 자신이 위에 있다(我在上主) 여기지는 않겠지요? 두 번째도 서초동 소재의 한 교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한국교회사상 가장 많은 돈을 들여 건축했다는 이 교회는 세상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본당을 지하에 두고 아동시설 등을 만들어 기부하는 등의 행보를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최대규모의 예배당 일부가 공용공간을 침범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코 고의로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결국 공공도로 점용허가를 내준 구청에 대해 주민소송이 제기되었고, 지난 2019년 10월 17일 대법원은 교회 측의 도로점용은 불법이므로 원상회복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법으로 건축된 예배당 일부를 헐어서 공공도로부분을 반환하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곧바로 집행정지 및 행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합니다. 예배당 헌당식에 참가했던 해당 지역 구청장은 “영원히 예배당의 점용허가를 해드리겠다”는 말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영적제사장법이 세상법보다 우위에 있다”, 평소 교회 측에서 자주 언급해 왔던 신묘한 화법입니다. ‘간접적 아재상법’입니다. 세 번째는 서울 강동구 소재의 초대형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소속 교단은 수년 전 목회자세습금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교계를 넘어 세상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교회는 부자세습을 시도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법을 무시하고 이루어진 일이라 더욱 반발이 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단 재판부가 세습무효판결을 내렸으나 총회는 화해수습이라는 명목으로 재차 탈법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세상법정에서 대표자지위의 존재 여부를 둘러싸고 엇갈린 판결이 오가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설립자 목사는 빈궁과 가난을 벗 삼았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마을 형의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에 훗날 큰 선물을 하면서 “주님께 바치나이다, 2003. 11. 30. 작은 종 드림”이라고 수줍게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단의 법 위에, 교단의 재판 위에 서 있습니다. 말은 안 해도 ‘묵시적 아재상법’입니다.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이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6. 16).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 자신만은 법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들 교회가 무슨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곧잘 법을 경시하며 유월하니 말입니다. 전술한 “아재곡저”는 원래 “아재절정곡저” 즉 ‘나는 절정곡 아래에 있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소설 속 골짜기가 하필 “절정곡(絶頂谷)”입니다. 높은 절정과 낮은 골짜기의 합성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 내려놓고 쓴 글 때문에 김용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다 갔습니다. 그는 한 때 기독교계열의 학교를 다녔다 합니다. “아재상법”이 아니라 “아재곡저”야말로 예수께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도 깨달았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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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5
  • [은혜의말씀] 감사가 답이다(출 23:14-17, 골2:6-7)
    오늘 말씀에 보면, 일 년에 세 차례 절기(무교절(유월절-고난주간 부활주일), 맥추절(오순절-맥추감사주일), 수장절(초막절-추수감사주일))를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수장절[收藏節]이라고 하는 것은 가을에 추수하여 곡식을 저장한 후, 한 해 동안 햇빛과 비를 주셔서, 풍성한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초막절[草幕節]이라고 하는 것은 풀로 지붕을 만들어 조그맣게 지은 막집인데, 이스라엘은 나뭇가지로 집을 지으며 그 안에서 7일동안 지내며,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초막에 거주하던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음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1.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골 2:6)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주로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 지옥의 심판밖에 없던 우리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 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2)이제는 내가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 제가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하고 감사하는 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줄 믿습니다. 2.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골 2:7)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환경이 남달리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7절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감사는 언제나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감사도 줄어지게 됩니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어떤 문제도 감사하며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감사는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골 3:16)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 중 하나는 감격하여 드리는 찬양입니다. 우리의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2)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출 23:15)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작은 것이라도 정성을 다해서 감사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3)작은 일 하나라도 감사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면 할수록 더욱 늘어납니다. 매일 매일 감사를 선택하고, 감사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훈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어려운 경기에 감사가 힘드시지요? 예수님을 힘입어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려고 머리에 의존하지 말고 주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제단을 쌓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의 편이시며, 감사하는 자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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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5
  • [교회와세금] 교회의 자동차세 납부기준 이해
    자동차세(automobiles tax)는 자동차의 소유와 주행에 대해 과세하는 지방세이다. 자동차의 소유에 대해 과세하는 ‘소유분’과 주행에 대해 과세하는 ‘주행분’으로 구분된다. 소유분 자동차세는 자동차의 배기량과 적재정량을 기준으로 부과한다. 주행분 자동차세는 2000년에 주행세로 도입되어 운영하다가 2011년부터 자동차세 주행분으로 편입되었다. 주행분 자동차세는 휘발유, 경유 등에 부과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의 부가세(surtax)이다. 자동차 종류는 승용・승합・화물・특수・3륜 이하 소형자동차로 구분되며, 용도에 따라 영업용과 비영업용으로 구분된다. 승용자동차의 과세표준은 배기량이며, 내연기관이 없어 배기량 개념을 적용할 수 없는 전기자동차의 경우에는 비영업용 10만원, 영업용 2만원의 정액을 부과하고 있다. 자동차세 주행분의 과세표준은 휘발유나 경유 등에 대해 과세되고 있는 교통・에너지・환경세액이며, 기본세율은 36%이다. 다만 30%의 범위 안에서 탄력세율을 적용할 수 있으며, 2022년 현재 26%가 적용되고 있다. 자동차세 소유분의 납기는 6월과 12월 2회이며, 자동차 소유자를 기준으로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징수한다. 국회예산처의 2022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2020년 자동차세 징수액은 8.1조원으로 전년대비 5.3% 증가하였으며, 전체 지방세 수입 102.0조원의 8.0%를 차지한다. 또한 지방세 대비 비중은 감소하는 추세로 2011년 12.4%에서 2020년 8.0%까지 하락하였다. 그리고 주행분에 포함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 징수액은 2021년 16.6조원으로, 국세수입 344.1조원 대비 4.8%의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동차 관련 세금을 교회(Church)에 적용할 경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교회의 자동차 관련 세금은 차량을 구입하는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 부가가치세를 납부하여야 하며, 소유 및 운행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자동차세와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교회가 고유목적을 위해 토지나 건축 등을 구입할 경우 과세가 면제되는 비과세 규정이 없다. 차량을 구입하면 약 7%의 취등록세는 물론, 거래금액의 10%에 해당하는 부가가치세를 소비과세로 국세기관에 납부하여야 한다. 둘째, 자동차 소유분에 해당하는 자동차세를 배기량과 적재정량에 따라 지방세로 납부하여야 한다. 셋째, 주행분 자동차세로 휘발유, 경유 등에 부과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자동차는 교회의 사역에 있어 운송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교회의 규모에 따라 여러 대의 차량 및 버스와 같은 대형차량을 보유하는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다른 조세와 달리 비영리법인이 고유목적의 업무를 하는 경우 주어지는 비과세 혜택이 없는 것이 자동차와 관련한 조세 시스템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말이다. 한해의 결산을 준비해 가는 시기이다. 교회마다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며, 감사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회가 지켜야 최고의 윤리는 무엇일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예수님은 모두를 사랑하라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또한 개인은 물론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도 교회와 성도가 그 공동체를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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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5
  • [목회자칼럼] 원 팀, 엘리야와 엘리사
    1.엘리야와 엘리사는 둘이 하나가 된 원팀이다. 바통터치가 좋았다. 콤비 플레이어가 되었다. 역사의 단절이 아닌 연결이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달랐지만 자라게 하시는 한 하나님의 두 종이었다.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처럼 시작과 마무리를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트 플레이에 능하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이른 비와 늦은 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맞춤형으로 역사하신다. 2.엘리야와 엘리사는 사역했던 시대적인 배경이 결코 명랑하지가 않았다. 엘리야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합하여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시대에 활동을 한 정치 환경과 시대적인 배경이 최악이었지만 최상의 사역을 하였다. 3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가뭄의 때였기에 기후가 악조건이었다. 엘리야는 멘탈이 약하여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극심한 영적침체를 당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간절히 기도하여 하늘 문을 열었다. 쓰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역사에 등장하는 장면이 특이하다. 엘리야는 족보와 스펙이 없이 부름 받았다(왕상17:1). 부모 이름도 모르고 경력사항이 없는 디셉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력서가 필요 없다. 주께서 부르시고, 들어 쓰실 때에는 지혜와 건강과 물질과 용기도 함께 주시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농사꾼으로 소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가 불러서 소를 버리고 따라나섰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생업도구인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듯이 엘리사도 지체하지 않고 소를 잡아 잔치하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양을 치던 현장에서 부름 받은 모세, 다윗처럼 일터에서 부름 받았다. 현실에 최선을 다할 때, 주께서는 일마다 때마다 인도하신다. 4.충분한 준비과정이 있었다. 사람은 준비된 만큼 쓰임 받는다. 엘리사는 처음에 엘리야를 돕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 후계자가 되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자 비로소 선지자 사역을 하였다. 마치 여호수아가 모세의 수종자로 오랜 세월을 보냈던 것처럼, 마치 디모데가 바울의 후계자요, 믿음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좋은 학생이 좋은 교사가 되고,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된다. 준비하는 과정이 복이다. 허황된 꿈을 꾸며 비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몽상가가 아니라 세컨드 리더십을 잘 감당하는 자가 리더가 된다. 5.인수인계를 위한 기도회가 있었다(왕하2:9~14). 엘리사는 후계자가 되고자 갑절의 영감을 구하고,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 가지고 요단강을 치며 스승의 흉내를 내었다. 배우기를 힘썼다. 두 사람의 강을 건넌 형태가 비슷하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기도와 기적의 사람이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성령보다 앞서지 말아야 되는 이유이다.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하므로 후계자를 자청하였다. 그는 어려운 기도를 하였다. 부담이 안 되는 것은 사명도 아니다.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주의 일에 기꺼이 헌신한 것이다. 성경에는 숫자가 중요하다. 은혜 위에 은혜, 갑절의 영감, 칠배의 권능, 백배의 결실, 천대까지 축복이 있다. 6.구약 최고의 선지자가 엘리야이고, 구약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선지자가 엘리사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였다(왕상18:30). 문제를 문제 삼지 않고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다. 문제를 문제 삼으면 문제만 되지만 어떤 문제이든지 기도제목으로 삼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눅1장에서는 세례요한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한 자라고 말한다. 엘리야는 일당백이었다. 나만 홀로 남았다고 했지만 혼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 850명을 상대하였다. 엘리사는 빈 그릇에 기름을 채웠다. 기름병이 떨어졌을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기름 그릇을 빌려오고, 그 빈 그릇을 채우고, 그것을 내다 팔라고 하였다(왕하4:1~7).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왕하4:32~37). 아람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쳤다(왕하5:1~14).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에 구했다(왕하7장). 그야말로 정치, 경제, 외교, 보건, 종교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다. 7.성경에서 이 두 사람에게만 사용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을 볼 때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 나라를 보호하고, 가정을 수호하고, 교회를 지키고, 신앙을 파수했다. 엘리야가 혼자라고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칠천 명을 남기셨다(왕상19:18).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칠 때 엘리사가 한 말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였다(왕하5:8). 한 사람의 막대한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다. 8.엘리야 엘리사,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완성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사엘을 아람왕으로,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엘리사를 후계자로 기름 부으라고 명령하였다(왕상19:15~16). 앞의 두 가지는 오히려 엘리사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최종 목적지인 언약의 땅, 가나안의 정복은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 때에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다윗의 평생의 소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건축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마침내 완공되었다. 바울의 세계선교는 그의 후계자들과 동역자들에 의해서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세계 열방으로 확산되었다. 9.엘리야와 엘리사는 죽는 순간에도 위대하였다. 엘리야는 에녹과 같이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아름다운 사람은 그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요아스 왕 때에 죽었는데 죽는 순간에도 요아스 왕에게 모압을 세 번 칠 것을 예언하였고 죽은 사람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다시 살아났다(왕하13:14~21). 그야말로 뒤끝이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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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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