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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
    이단은 얼핏보면 기독교 같아 보이지만 알고보면 이단은 기독교와는 전혀 달라 디도서 3장에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다. 요즘 이단들이 부쩍 설치는 것을 보면서 이단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단이란 무엇인가? 사이비 기독교가 이단이다. 즉 기독교와 비슷하면서 실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 이단이다. 기독교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종교는 이단이 아니고 다른 종교이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와 방불하면서 실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 이단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증인, 신천지, 몰몬교 등이고 이 외에도 기독교의 탈을 쓰고 내막인즉 기독교가 아닌 것이 이단이다. 다음, 이단은 언제부터 있어 왔는가? 이단은 구약시대부터 있었다. 교부시대에도 있었고 이단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다. 그러나 이단이 오늘처럼 많았던 때는 없었다. 우리 한국에서만 해도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이 64개라고 한지가 여러해 전이다. 가짜 예수가 25명이고 가짜 하나님이 3명이라 한지도 여러해 되었다. 다음, 사이비 기독교를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 처음과 마지막 즉 양쪽 끝이 기독교와는 다르고 중간만 기독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끝이 다르다고 異端이라 한다.) 이단은 출처가 다르고 끝이 다르다. 출처는 사단으로부터이고 끝은 멸망이다. 그러면서 중간은 기독교와 비슷하다. 비슷한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미혹된다. 다음, 이단의 사명이 무엇인가? 이단의 사명은 구원이 아니고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하고 기독교를 매장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를 상대로 포교하는지 보라. 기독교인만을 상대로 한다. 그들이 내 집에도 종종 와서 초인종을 누르기에 교패를 떼버렸더니 그후로는 일체 오지 않는다. 다음, 이단의 특성이 뭔가? (1)가만히 들어오는 것이다.(유다서 9) (2)이단은 성경 전체를 부인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시인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부인하거나 달리 해석한다. (3)이단에게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이 있다. 여호와의증인에게는 ‘성서연구’가 있고 몰몬교에는 ‘몰몬경’이 있고 신천지에는 ‘영핵’이라는 책이 있다. 그들은 이것들을 성경처럼 혹은 성경보다 더 권위있게 본다. (4)이단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밖에 없는 구원의 종교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기들에게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1)그들과 변론하지 말고 (2)그들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디도서 3:10, 요한2서 10) 사도요한은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하지도 말라”고 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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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시사칼럼] 어두움 후에 빛이 있으라
    <판도라(Pandora)>라는 한국 영화가 연말 개봉을 앞두고 ‘국내 최초 원전(原電)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홍보 중입니다. 예상 밖의 지진을 겪으면서 특히 진앙(震央)과 멀지 않은 지역에 밀집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어느 때보다 급증했던 터라, 영화사 나름대로는 잠재 관객들을 자극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찾은 듯합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대작이라고 하니 영화는 개봉되어야 하겠지만, 누구나 실제로 원전(原電)을 담고 있는 지역의 판도라의 상자만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이름입니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에 대한 응징으로 제우스(Zeus)는 선물과 함께 판도라를 지상으로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판도라와 결혼했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열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어기고 상자를 열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질병, 가난, 증오, 전쟁과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급하게 상자를 닫았는데, 그 바람에 무언가 하나가 갇혀서 미처 나오지 못했고, 신화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 전 만들어진 그것도 신화(神話) 속 이야기 비슷한 일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열리고 그 속에 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세상을 가득채운 느낌입니다.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전쟁이 인류 사회에 등장하자마자 마치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일인 마냥 일상과 역사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처럼, 범인(凡人)들은 한 번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연인 마냥 입을 타고 전파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계층을 초월해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암묵적인 동맹 혹은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기라도 했던 걸까요? 지식격차(knowledge gap)가 참여격차(participation gap)로 이어질 수 있다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지적이 새삼 서글프게 살갑습니다.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판도라 상자가 이 사회 어딘가에 깊이 감추어져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기밀의 정도와 보안의 강도는 정비례한다는 상식을 염두에 둘 때, 이번에 열린 상자로 인한 충격만 해도 지진으로 인한 내외상증후군쯤은 비교도 되지 않음을 익히 경험했는데, 만에 하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상자가 정말로 개봉된다면 우리는 미증유의 당혹감과 대혼란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송곳은 겹겹이 싸도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아무리 가려도 빛은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만일 이 시대 판도라의 상자에 감추어진 것이 진리(眞理)라면, 아무리 꼭꼭 감싸고 은폐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튀어나오고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제네바 대학 곁 공원에 새겨진 네 사람의 종교개혁자들(칼빈, 파렐, 베자, 녹스) 부조(浮彫) 위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post tenebras lux> 그렇습니다. 문자 그대로 어두움 후에는 빛이 있습니다. 아니,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어둠이라는 말 자체가 빛의 부재가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리를 현대판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수호해야 할 진리의 사도들이 시류와 대세에 편승하고 영합하여 스스로 어둠의 시종들로 전락하는 그런 시대와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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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목회자 칼럼] 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냐? (1)
    주전 700년 경, 이스라엘에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형편은 참으로 딱하였다. 악명 높은 아합-여호람-아하시야 왕은 3대에 걸쳐서 지독한 악정(惡政)을 펼치고 있었다. 그 악정의 내용은 ① 바알과 아세라 우상종교를 이스라엘 땅에 확산시킨 것, ② 통치권을 활용하여 재물을 착취하는 것, ③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위협 앞에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 … 대략 이 세 가지였다. 그러니 백성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앞날이 불투명하고 곳곳에서 백성들의 탄식과 절규가 멈추지를 않았다. 앞의 ①~③ 세 가지를 척결하고 철저히 대비하여 백성들이 맑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나라를 가꾸고 세워나가라고 세워진 것이 왕도(王道)이거늘, 군왕(君王)들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 <주어진 권력과 힘>을 남용하고 악용하였다. 그것도 3대(代)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땅 위에 그리고 역사 속에 <이스라엘Israel>을 세우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되는가」를 온 세상에 보여주라고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뽑아 세우셨다.(신명기 7:5~11; 마 5:13~16)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의 위대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 온 백성을 대표하는 통치자인 왕이 그 의미를 망각한 채 방종과 타락의 길을 걷고 있으니 백성들의 모습 굳이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너는 나 외에는 결코 다른 신(神)을 두지 말라 /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십계명 중에서 1~2계명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시금석(試金石)이다. 이것을 안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된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우상(허망한 것·헛된 것·전혀 무의미한 것,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을 숭배하고 우상에게 매이면 그의 인간성 즉 감정, 이성, 의지가 어두워져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악한 영(靈)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유치하고 허망한 우상을 숭배하면, 인간은 사탄의 영향 아래로 전락하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만물 중에서 가장 거짓되고 부패한 자리로 떨어지면서 감정과 이성(異性)이 타락하고 마비된다.(롬 1:18~32; 렘 17:9) 주전 700년 경, 아합과 여호람 그리고 아하시야에 이르는 3대(代)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재임(在任)하면서 이스라엘의 국력과 도덕성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신앙심은 총체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황,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절체절명의 난국(難局)이었다. 이스라엘(북Israel왕국) 전역에는 곳곳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세워져 있었다. 저급하기 짝이 없는 저들 우상의 제사장들이 통치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미신과 맹신으로 이끌고 있었다. 통치권자인 왕은 백성의 안위(安慰)와 행복을 도모하는 주된 임무에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눈을 돌리면서 폭정과 일탈(逸脫)에 여념이 없었다. 주변 강대국들(아람, 이집트, 암몬, 모압)은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거나 기습 침략을 자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니 사방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나마 백성들이 기댈 곳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 <선지자>들인에 저 폭군들은 이미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당시의 이 상황을 열왕기상 19:1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엘리야 선지자)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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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성경인물탐구] 그리스도를 위해 생업을 포기한 요한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다가 예수님의 눈에 띄어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이제 막 고기잡이를 끝내고 다음 번 고기잡이를 위해 찢어진 그물을 깁고, 또 고기잡이 장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몹시 피곤했겠지만 요한은 내일을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여 가정을 돕는 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요한이 주님의 눈에 띈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자, 그리고 생업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애쓰는 자, 이런 자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요한은 그 부친 세베대와 그물을 깁는 도중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자 마태가 굳이 요한이 부친과 더불어 일했다고 언급하는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요한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열심히 가정을 보살피며 그 부친에 효성을 다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공생애 전에는 열심히 가정을 보살피며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정을 보살피며 그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자야말로 정녕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합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가정에 성실치 못한 자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요한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 야고보와 더불어 부친의 가업을 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요한이 부친에게도 효도를 다했지만, 형제 야고보와도 매우 우애가 돈독한 자였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주님의 제자로서 활동할 때도 끝까지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한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도 영적 형제자매와 화목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런 사실을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요한이 형제와 더불어 우애가 돈돈한 것을 훌륭한 장점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고, 또 영적 형제, 자매를 사랑하려면 먼저 육신의 친형제들과도 화목하며 화평함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서는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이는 곧 요한이 자신의 생업을 완전하게 버려두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과거의 생업을 완전히 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는 데 있어 자신의 생업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면 때로는 이렇게 완전하게 생업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아는 결단력도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그보다 더 훌륭한 생업을 허락해 주십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생업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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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교회법률상식] 제101회 총회 직할 재판의 흠결 (1)
    ■직전 총회장이 임원 선거 하지 않고 직할 재판함은 범죄 행위 ■직할 재판 인정한다 해도 재판회 구성과 판결문은 엉터리 합동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직후에 기독교 100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대 불법 사건으로 총회장직의 직권을 남용하여 스스로 총회 직할 재판의 재판회장이 되어서 목사 5명에게 목사 면직, 본 교단 목사 제명, 영구 출교, 당회로 하여금 원로목사 취소, 소속 노회 명부에서 제명, 본 교단에서 출교 처결, 총대권 5년 정지 처결, 공직 정지 1년 처결 등의 판결을 하여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월권을 행사하여 제101회 총회의 후속 조치가 어수선하게 되었다. 1. 직전 총회장의 직권 남용 및 월권 행위에 대하여 직전 총회장인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합니다.”라고 개회 선언을 했으면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오직 임원을 선거하여 신구 임원 교체와 신임 총회장 취임 예식(정문 617문)에 관한 사회권만 행사하는 것이 교회 헌법이 정한 법리이다. 이에 대하여 정문 제456문에 “누가 총회를 개회 하느냐?”의 답으로 “전회장의 설교로 개회하고 신회장이 선임되어 교체될 때까지 사회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장은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하자마자 당연한 순서인 임원 선거는 제쳐 놓고 제100회 총회가 결의하여 위탁하지도 아니한 “총회 결의 시행 방해 조사 처리 위원회”라는 유령 위원회를 등장시켜 총회를 재판회로 변경하고 총회장의 직권을 남용하여 재판회장의 자리에 앉는 등 철면피한 월권을 행사하였다. 이와 같은 직전 총회장의 극단적 행패에 대하여 증경 총회장 중 한 분이 불법이라는 지적과 함께 자제를 촉구하였으나 막무가내로 권징조례에 맞지도 아니한 엉터리 재판을 진행하여 권징조례에 명시도 되지 않은 엉터리 책벌을 행하는 범죄 행위를 계속하였다. 2. 총회 직할 재판의 법리적 절차에 대하여 총회 직할 재판의 성립 요건은 신임 총회장이 취임(정문 617문)한 후 하회에서 올라온 안건을 처리하면서 헌의부 보고 시에 상소 건이나 소원 건 중에 재판국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본회가 직접 재판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건이 있으면 총회가 직할 재판으로 하기로 결의하면 그 사건만 총회 직할 재판 건으로 성립된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장이 불법으로 목사 5명을 판결한 것은 상소나 소원 건이 아니요, 총회에서는 할 수 없고 노회에서만 할 수 있는 목사의 원심 재판(권징조례 제19조)을 총회가 직접 하였다. 그 증거는 판결문의 책벌 내용이 상소 건이나 소원 건의 판결문이 아니고 원심 재판의 판결문인 것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혹 노회가 그 목사들을 재판하기 어려워 총회에 위탁판결을 청원을 했다고 변명을 하거나, 가정할지라도 ? 직전 회장이 할 수는 없고 반드시 신임 총회장이 해야 함은 물론이요 ? 목사가 5명인데 5개 노회가 다 같이 위탁판결 청원을 한 흔적이 없고 ? 제100회 총회가 권징 제19조에 근거하여 5명의 목사를 지명하여 해 노회에 책벌하고 보고하도록 결의한 회록도 없기 때문에 위탁 판결 운운하는 변명은 할 수도 없다. 3. 제101회 총대들의 자세에 대하여 그런데 증경 총회장 수십 명이 있었고 총대 1500여명이 총회 회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직전 총회장의 불법 횡포를 막아내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연유에 관하여는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필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본 사건이 엄청난 불법이라는 것을 증경 총회장들 중에 딱 한 분만 알고 있었고, 다른 분들 모두가 모르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두 다 보고만 있었다면 총회는 무엇 하러 참석하였는가? 총회의 원로들로서 총회가 진흙탕이 되는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뿐만 아니라 1500여명 총대들은 총회 현장이 난장판이 되어 불법 재판이 진행되는 총회 석상에서 함께 재판관이 된 자들로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어찌 제101회 총회의 회원들이 임원 선거도 하지 아니하고 자격 없는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하면서 총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데도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서 과연 총회의 회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101회 총회 직할 재판은 제100회 총회장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제101회 총회의 총회장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한 일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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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성공칼럼] 섭리와 예견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많다. 지금 나의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지금은 잘되는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잘 될까? 아니면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는 잘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섭리(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와 예견(내 그럴 줄 알았다)이 나오게 된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삶의 매 순간 역사하시기 때문에 지금 어려워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잘 되는 것이고, 예견이란 이 땅에서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은 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은 섭리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선과 의를 행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장은 고통스러워 보이고 어리석고 약해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 사랑과 선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야고보서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 먹었으며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는 말씀은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힘과 권력과 거짓된 방법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돈과 기업과 건물과 지위를 얻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 속에는 거짓과 악이 있기에 결국은 죽음의 길이라는 말이다. 우리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바늘을 훔칠 때 두려움과 가책을 느껴서 돌이키면 이것은 섭리에 해당되고, 소를 훔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고 자신을 자랑하면 이것은 도살할 날을 위해 살찌우는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죄를 지으면 걱정하고 두렵고 괴롭기 때문에 어떻게든 치유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되어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게 되면 분명히 악인데도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즐거워하는 것을 본다. 이 정도까지 오게 되면 이미 거짓과 악을 옹호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다가 발각되면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다. 그런데 그 의도가 더 이상의 쾌락이나 돈,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앞으로의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예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거짓눈물로 위기를 벗어난 다음에는 또다시 쾌락과 권력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술에 중독되어 있는 남편이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늘 “미안하다. 다시는 술 먹지 않겠다. 한번만 용서해줘”하면서 다음에 또 반복된 행동을 한다. 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 죄가 발각되어서 벌을 받을 지경에 울면서 “용서해 달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시 반복하는 것은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돈과 쾌락과 권력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모든 잘못한 것을 털어놓고 그에 합당한 벌고 다시는 거짓과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 사람의 삶은 섭리에 해당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삭개오가 세리와 로마의 앞잡이로 권력을 이용하여 많을 세금을 거두었다.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했다. 나중에 예수를 만나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모습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섭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견의 삶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섭리의 삶은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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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은혜의 말씀] 요셉의 채색 옷 (창 37장 1~5절)
    요셉은 12명의 아들 중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라헬의 사이에서 태어난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의 요셉을 향한 사랑은 그의 옷을 통해서도 잘 나타납니다. 염료가 귀한 시절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화려하고 고운 옷은 매우 값비싼 것으로 족장들이나 집안의 상속자, 후계자 등 신분이 특별한 사람들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 중 특별히 더 사랑하는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신들을 향해 오는 요셉에게 형들은 웅덩이에 가두고 미디안 상인에게 은20냥에 팔아 버렸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 요셉은 애굽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고 그는 종의 옷을 입고 10년을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형들을 향한 배신감으로 죽을 만큼 힘들었을 요셉은 계속 형들을 미워하고만 있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였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허드렛일을 하는 종의 옷을 벗고 최고 관리자가 입는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음에도 시련은 다시 또 찾아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도망치는 요셉은 그녀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고 관리자의 옷을 벗고 죄수복 입게 됩니다. 차디 찬 감옥에서 복수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최악의 곳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뢰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요셉의 모습에 감명한 감옥의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다 맡겼습니다. 바로의 꿈을 아무도 해몽하지 못할 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불러들입니다. 위기에 처할 뻔한 애굽을 구해 준 요셉은 바로의 은혜로 30세의 나이에 애굽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인장반지를 손에 끼고 세마포 흰옷을 입은 채 금사슬에 목에 걸고 왕의 마차에 타고 사람들 앞을 행차하게 됩니다. 그는 일평생을 의롭게 살았지만 고난과 어려움에는 면제 받은 적이 없었고 계속하여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총리가 되어 형들과 재회 했을 때조차도 형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아시고 내 인생을 설계하시고 디자인하시고 내 인생을 염색하시어 재단하셔서 이제껏 자신을 인도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만큼 각가지 다양한 옷들을 다 입어 보았을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처한 삶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의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과 함께 하셨고 은혜를 베푸사 형통케 하셨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성향이나 사회적 지위와 재력 등을 나타내주는 척도가 됩니다. 요셉만큼 그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옷을 그렇게 많이 입어 보았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시절 입었던 형형색색의 채색 옷만큼이나 그의 삶은 실로 컬러풀했습니다. 어느 인생도 심플하기만은 않겠지만 요셉만큼 컬러풀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원망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였고 최선의 삶을 살아간 요셉은 실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은 요셉의 죽음과 함께 수의를 입은 그를 입관하면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예측불허의 길이고 돌발변수가 많고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가는 길을 아시고 그 길을 주관하시고 설계하시고 디자인하시고 염색하셔서 우리의 삶에 풍성하고 다채롭게 채색 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울지 몰라도 장차 받을 영광을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음을 기대하며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뜻을 구하며 순종하고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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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가정칼럼] 분수를 아는 행복
    서울대 초빙교수 된 오종남 전 통계청장이 2008년 3월부터 서울대 자연과학대 통계학과에서 학부 1·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과학적 방법론과 통계학의 이해’라는 강의를 시작하게 된다. 1946년 서울대 문리과 대학 이학부로 출발한 자연과학대가 자연과학 비전공자를 초빙교수로 영입한 첫 케이스다. 그는 행복론 강사로도 유명하다. 그의 행복 강의는 수학·경제학적으로 이뤄졌다. “내가 바라는 것(What I want)을 분모로 놓고, 이루고 성취한 것(What I achieve)을 분자로 놓습니다. 바로 ‘행복지수’ 공식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 아이(I)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자를 키워 행복지수를 키우려고 하지만 사실 분모를 줄여도 효과는 같잖아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부자인 이유죠. 국어 시간에 ‘주제 파악’을 잘하고 수학 시간에 ‘분수’를 잘해야 성적이 잘 나오듯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살아야 행복합니다.” 주제파악과 분수에 맞는 행복 방정식은 의외로 간단한데 있다. 1. 거울 공주가 되고 거울 왕자가 된다 : 인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표정을 연습한다. 입 꼬리를 2mm만 살짝 들어 올린다. 2. 죽을힘을 다 해 달리고 또 달린다 : 아프리카의 영양은 살아남기 위해, 사자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뛴다. 불행이 잠에서 깨어나 나를 따라오기 전 5분 먼저 일어나 뛴다. 3. 가족들에게 행복의 풍향계가 된다 : 백 마디 말보다 더 소중한 것이 단 한 번의 포옹이다. 8초의 투자로 사랑의 기적을 만든다. 4. 독서로 지혜의 곳간을 채운다 : 독서는 성장의 동력이다. 나의 잠재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루 30분 이상, 일 년에 50권 이상의 책과 씨름한다. 5. 소통의 삶으로 통(通)하는 사람이 된다 : ‘발신모드’에서 ‘수신모드’로 전환한다. 다른 이들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1분 동안 말하고 2분간 듣는다. 그리고 세 번은 고개를 끄덕여준다. 6. 꿈을 꾸는 시간을 따로 갖는다 : “꿈에는 한계가 없다. 마음껏 꿈꿔라.”(Dreams have no limits. Go further.) 단 5분이라도 꿈꾸는 시간을 갖는다. 되고 싶은 나를 그려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7. 스트레스를 스트레스 받게 한다 : 하루에 세 번은 깔깔대고 웃는다. 웃음을 통해 절망을 이겨낸다. 세상의 바보들에게도 화 내지 않고 꾸짖는 법을 터득해 산다. 8. 화는 바로 바로 푼다 : 몸을 자학하면 일만 보약이 소용이 없다. 잠들기 전에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잠든다. 9. 새 노래를 배우고 요리하는 법을 익힌다 : 한 가지 악기를 배운다. 노래를 못할 때면 목욕탕에서 혼자 콧노래라도 부른다. 요리를 못할 때면 맛있는 것을 사먹기라도 한다. 10.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된다 : 짬을 내 연극을 관람하고 봄이 되면 화초를 가꾼다. 가끔은 낙조를 보고 해 뜨는 것을 보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않고 달려간다. 11. 스트레칭으로 몸의 엔진에 급유를 한다 : 마음을 긴장을 풀고 허리를 편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등을 곧추 세운다. 팔 다리를 뻗어 근육을 푼다. 12.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 최소한 세 사람 이상에게 칭찬을 한다. 사소한 일에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상대방의 잠꼬대까지도 새겨듣는다. 물어라? 난 주제파악이 되었나? 그리고 내 분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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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서임중 칼럼] 엎드림의 미덕(美德)
    이조(李朝) 역사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충정 어린 재상이자 대표적 청백리로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은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하면서 직무에 강직했고 정치의 근간을 오직 목민(牧民)에 두었고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맹사성이 그 유명한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해 역사학을 발전 시켰는데 실록이 마무리가 되어 세종이 보자고 했을 때 맹사성은 “임금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전례(前例)가 되고 사관(史官)들은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진언하였는데 이 사건은 맹사성의 성품과 관직 수행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어명을 거역하면서 까지 공직수행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었던 맹사성의 말에 세종대왕도 따랐다는 사실은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청렴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직했던 고불(古佛)의 정신은 오늘처럼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처처에 공직자의 비리가 만연해 지는 때에 귀감이 되는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고불(古佛)이 본래부터 겸손하고 훌륭한 재상이었던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명석한 머리로 교만했던 고불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맹사성이 열아홉에 장원급제하고 스무 살에 파주 군수로 명을 받았을 때 선사(禪師)를 찾아 보다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고언(高言) 듣기를 청했을 때 스님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시오.” 라는 평범한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오만한 맹사성이 “스님, 그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 들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아십니까?” 라고 노기 띤 얼굴로 일어섰을 때, 스님은 “먼 산사(山寺)까지 오셨는데 녹차 한잔이라도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고 권유하니 성질 급하고 오만했던 맹사성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못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맹사성 앞에 녹차 잔을 놓고 주전자의 물을 찻잔에 붓는데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을 버리는데도 계속 물을 붓고 있기에 화가 더 난 고불이 “스님, 지금 찻잔에 물이 넘쳐 방바닥을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고 화를 냈던 것이다. 고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스님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차 잔의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 버리는 것을 보고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실까?”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어 황급히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가다가, 급한 바람에 정신없이 나가던 맹사성은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가 났다. 손으로 상처를 감싸고 나가는 맹사성의 뒤를 향해 스님은 두 번째 혼잣말을 했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사건이 위대한 이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되게 한 것이었다. 교회도 가정도 정치도 어느 한곳도 성한 곳 없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왜 모두 이렇게 시끄럽고 불편스러운가를 생각해 보면 맹사성을 향한 스님의 말 한마디가 명언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 너나없이 모두가 덜 익은 벼이삭처럼 꼿꼿하게 자기를 세우는 오만 때문에 여기저기서 부딪치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엎드릴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의 몫이라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자”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믿음의 사람은 항상 엎드림의 삶이기에 부딪치지 않는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나없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자기모순의 치명적 정신질환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나는 소크라테스이고 너는 돼지’라는 삶의 공식이 자기 자신은 물론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혼돈에 빠뜨린다. 정제된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죄인”이라는 타락한 카오스적 공식이 성립되고 그로 인해 모두가 무질서로 인한 삶의 가치개념이 뒤틀린 현상을 연주하게 된다. 작금에 언론을 도배를 하고 있는 최순실씨 사건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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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성서연구] 자루를 채우는 하루 (출애굽기 17장 8-16절)
    사람이 어릴 때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해 주시는 일을 누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자라나면서 옷도 스스로 입어야 하고, 공부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청소년이 되면 인생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던 초기에는 그들이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모든 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일 등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스스로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예상치 못했던 아말렉이란 적을 만났고, 단 한 번도 전쟁 혹은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여호수아의 인솔로 처음으로 나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전투를 처음 만나기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싸우는 동안 산에 올라가 팔을 올렸습니다. 그가 팔을 올리면 전투에서 이기고 내리면 지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아무리 팔이 아파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장하면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자람에 따라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한 전쟁, 죄악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전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한 전쟁,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쟁은 과거에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벌이는 이러한 전쟁을 바울 사도는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본문은 모세의 팔이 <해가 지기까지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루 종일 팔을 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한 싸움은 인생의 황혼이 덮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때때로 우리 팔이 피곤할 때입니다. 그럴 때면 팔을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 팔을 내리면 전쟁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팔을 들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25절에 보면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달려갈 길을>이란 부분은 헬라어로 <드루모스>인데, ‘인생여정’이란 의미입니다. 또 <마칠 때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오>인데, ‘가득 채우다’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생을 끝마칠 때까지 인생의 자루를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인생의 자루를 채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들도 그러합니다. 쇠털 같이 많은 날들 중 하루일뿐이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겠지만, 우리의 하루는 절대로 무시해도 좋을 시간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하루 동안에 자루를 조금 더 채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매일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심방을 하는 일들이 갑자기 무슨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회자는 그 날 하루만큼 인생의 자루를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누구나 기적을 원하지만, 그건 우리 삶을 허공에 뜨게 만들 뿐입니다. 비롯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날마다 자루를 조금씩 채워가는 삶을 살다보면 어느 새 우리의 자루가 아귀까지 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도 삶의 자루를 조금이라도 채워가는 보람 있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성실과 친절로 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자루가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이 가득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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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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