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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 기사

  • [가정칼럼] 미소-일곱 색 행복 무지개
    “미소는 한여름의 소낙비다. 짜증나는 마음을 시원하게 날려보내니까.”“미소는 무지개다. 사람마다 다른 색깔의 미소를 가졌지만 한 데 모으면 조화를 이뤄 더 아름다우니까”“미소는 진공청소기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깨끗하게 만드니까”“미소는 아름다움의 압축파일이다. 사랑 ? 존경 ? 반가움 ? 그리움 ? 추억이 모두 담겨 있으니까”“미소는 요리다. 정성들인 만큼 제 맛을 내며 감동을 전해주니까”“미소는 바로 ‘나’자신이다.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밝은 미소를 나누는 미소사절단원들이 미소에 대한 생각을 담아낸 그림언어들이다. 일찍이 네일 카네기는 미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이것은 별로 소비되는 것은 없으나 건설하는 것은 많으며, 이것은 주는 사람에게는 해롭지 않으나 받는 사람에게는 넘치고, 이것은 짧은 인생으로부터 생겨나나 그 기억은 길이 남으며, 이것이 없이 참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으며, 이것을 가지고 정말 가난한 사람도 없다.이것은 가정에 행복을 더하며 사업에 호의를 찾게 하며!, 친구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며, 이것은 피곤한자에게 휴식이 되고, 우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살수도 없고, 꿀 수도 없고, 도둑질할 수도 없는 것이다.“미소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들어 부쩍 내 얼굴을 살피게 된다. 늘어나는 주름살이나 피어나는 주근깨 대문이 아니다. 표정을 보고 싶어서다. 나의 얼굴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져 있을까? ‘소망’ ‘깊이’ ‘평안’ ‘행복’......어려서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말없이 가만있으면 “화가 났느냐?” 또는 “중국 00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얼굴은 더 굳어져 갔다. 그러다가 마음마저 잃어갔다. 더 늦어버리기 전에 표정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요즈음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 있다. 거울 앞에서 미소를 지어보는 일이다. 사진을 찍을 대 사람들은 미소를 짓기 위해 “김치” “치-즈"를 외친다. 그런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안 만들어진다. 핵심은 대협골근과 소근, 구각거근을 훈련시키는데 있다. 따라서 제일 좋은 해답은 주를 가까이 하는 일이다. ! 주를 열심히 사모해야만 미소가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외친다. “위-스-키”그렇게 열심히 미소 연습을 했더니 정말 표정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내게 속삭여 온다. 하루가 즐거워진다. 내가 미소짓고 웃음 지었더니 세상이 따라 웃기 시작한다. 나는 믿는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면 마음속의 감정도 침묵한다”는 것을 오늘도 미소연습으로 행복 세상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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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7
  • [함께 생각해 봅시다] 4.13총선 유감(有感)
    후보에게 발언기회를 주면 안되고 그를 교회 앞에 소개하는 것도 안돼 4.13총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금번 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생각되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정당의 난립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기독교정당은 기독자유당, 기독민주당, 진리대한당 등 3개 당이다. 이들은 모두 이번 4.13총선에서 승리하여 반드시 원내 진입에 성공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정당을 표방하는 여러 당의 출현은 한국교회뿐아니라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고 국민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인물이 과연 몇이나 있느냐하는 지적도 일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되지 못한 기독교정당의 난립으로 인해 원내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제19대 총선에서 기독교정당들이 단일화를 통해 한 목소리를 내면서 총력을 경주했지만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하나된 힘으로도 뜻을 이루지못했는데 3개 정당의 난립으로 어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들도 기독교 정당이 셋이나 되는 것을 보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면서 등을 돌릴런지도 모른다. 다음 기독교인들은 선거 후보 중에 국회에 진입해서는 안되는 후보가 누구인지를 살펴 당선돼서는 안되는 후보에게는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종북좌파에게는 물론이고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후보에게는 표를 줄수 없다. 국민일보는 4월 4일자 신문을 통해 낙선대상자들을 발표했다. 말하자면 당선돼선안될 사람들이다. 거기보면 동성애를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시킨 차별금지법안 대표발언자들의 명단,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하는 군형법 제92조 개정안 발의자들의 명단,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자들의 명단, 동성애 옹호활동자의 명단 등이 밝혀져 있다. 다음, 선거후보자를 교회 앞에 소개하고 심지어는 발언을 하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데 그게 허용될 수 있는 일인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선거후보자들의 교회방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발표에 따르면 10명 중 7명이 발언기회를 주는 것은 부적절하다 했고 응답자의 절반은 발언 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 소개만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응답했다. 실제로 교회 앞에 소개하는 것은 안되고 “아무개 후보가 이 예배에 참석했다”는 광고도 하면 안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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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7
  • [시사칼럼] 레버넌트(Revanant)
    2016년 2월 28일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침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마침내’란 말을 쓴 이유는, 그 동안 그가 이 상(賞)의 유력한 후보가 된 것만 해도 다섯 차례였기 때문입니다. 디카프리오는 아직 20대 초반(1974년 생)에 불과하던 1997년 영화 타이타닉(Titanic)으로 일약 신드롬을 일으키며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이전의 명성과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고 연기파 배우의 반열에 오르고자 나름 사투(死鬪)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작품 이름 그대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기 나흘 전, 한국 영화 한 편이 국내에서 개봉되었습니다(2월 24일). 「귀향(歸鄕)」입니다.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잡혀간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그러나 제작비 부족과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난산(難産)을 거듭하다가 수만 명이 넘는 국민들의 후원과 뜻있는 분들의 재능 기부로 14년 만에 ‘마침내’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화는 여전히 험로(險路)를 걸었습니다. 상영관이 확보되지 않아 힘들게 태어난 작품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때 온라인(on-line) 청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원하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상영관이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라져가던 「귀향」이 제목 그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개봉한지 열흘 만에 관객 100만을 돌파하고, 현재까지 누적 관객이 300만 명을 훌쩍 상회하는 기적을 배태(胚胎)한 채로 말입니다. 「귀향」이 돌아오고 있는 동안, 「동주」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0대 꽃다운 나이에(1917년 생) 급사(急死)한 윤동주를 기리며 만든 영화입니다. 애당초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제작비도 일반 상업 영화의 1/10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예산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주가 사망한 바로 다음 날인 2월 17일 개봉한 「동주」는 비록 「귀향」처럼 잰걸음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시구(詩句)처럼 어느새 100만이 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윤동주, 〈새로운 길〉, 1938). 마치 전 날 죽은 동주가 바로 그 다음 날 새로운 길을 걸어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가만 보니 다시 돌아온 존재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 오지만은 않았습니다. 「귀향」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들을 결코 잊지 않는 무언(無言)의 국민들 존재를 새삼 일깨워 주었습니다. 「동주」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향한 순결한 양심이 조용히 포효(咆哮)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 디카프리오(DiCaprio)도 수상 소감을 통해 뜻밖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기후 변화는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딸을 위해, 탐욕의 정치로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많은 할머니들이 실제로는 귀향하지 못했습니다. 윤동주는 시로, 영화로만 우리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디카프리오는 환경운동가로 거듭났지만 부활은커녕 실제로는 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있는 실체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순간마다 끊임없이 만물을 갱생(更生)하고 계십니다(recapitulatio, Irenaeos).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a), 레버넌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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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목회자칼럼] 방향
    항간에 떠도는 유머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벌인 의정활동에 대한 성적표가 나왔다. 유일하게 ‘수’를 받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봉급을 비롯해서 들어오는 비자금을 계산하는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우’를 받은 과목은 국어인데 말하기, 읽기, 쓰기 다 잘했는데 듣기가 잘 안 됐기 때문이다. ‘미’를 받은 과목은 외국어인데 외국 여행은 잘 다녀도 외교 실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양’을 받은 과목은 사회인데 워낙 사회봉사를 하지 않는데다 겨우 명절에나 한 번씩 얼굴을 내밀기 때문이다. ‘가’를 받은 과목은 윤리로 본래 거짓말, 싸움, 욕설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예 점수가 나오지 않은 과목도 있었다. 체육, 그중에서도 특히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하면서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렸기 때문이다. 방향을 잃은 국회와 정치를 꼬집는 유머다. 최근 여러 여론조사 통계에서 신뢰도가 하위를 맴도는 직업이 국회의원이다. 이렇게 신뢰도를 잃어버린 이유가 방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최근 각 당마다 공천을 두고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 역시 자신들의 근본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이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 방향이 어디인지, 국민을 위한 방향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국회의원들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우리의 방향은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성경중심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방향을 향하여 가기보다는 세상 중심, 물질중심, 자기와 자녀 중심으로 살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딤후3:1-2)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사실이 이렇다보니 국회의원이 비판받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방향을 잃은 국회의원들은 나라를 살리지 못하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방향을 잃어버리면 가정과 교회와 자신을 복되게 하지 못한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고전9:26)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라고 하였다. 이렇게 바울 사도는 바른 방향으로 달려갔기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말씀을 통하여 복을 남겼다. 세리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불의한 재물’이라는 물질 중심의 삶에서 방향을 돌이켰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많은 사람을 구원케 하셨다. 이것은 세상 중심,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돌이킨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방향성을 잃은 것에 대해 비판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방향, 내 안에 있는 잃어버린 방향만 제대로 찾으면 되는 것이다. 바른 방향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자신이 살아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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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성서연구] 종교보다 신앙!(눅 24:13-35)
    본문은 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종교적 사고, 종교적 대화, 종교적 관행들에 익숙하지만, 신앙적 사고, 신앙적 대화, 신앙적 삶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 서북쪽 12킬로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고 믿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였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고,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끝나실 분이 아니며, 부활하실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예수님을 시간적 한계 속에 묶어 두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은 바로 자신들 곁에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셨지만,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종교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느낍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이론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삶 속에서 맛봅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부지런히 찾지만 공허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알고 기뻐합니다. 종교적 교인은 <좋은 예배>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헤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 교회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또 훌륭한 설교자, 웅장한 악기 연주, 잘 조화된 찬양이 있을 때, ‘영광의 주님이 임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조건에 따라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르겐 하나 변변히 없고, 찬양대도 없는 시골 교회에는 주님이 안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설교자, 찬양대, 악기 등의 조건과 관계없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종교는 그런 조건을 채우려고 애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주님이 이미 함께 계신 줄 믿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잠든 야곱과도 함께 계셨고,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 곁에도 계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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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서임중 칼럼] 부활신앙은 삶으로 연주된다.
    이세돌 천재바둑기사와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온 세상을 전율케 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이미 예견된 것이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의 중심부에서 이미 전개되고 있다. 필자는 5국을 지켜보면서 21세기 바벨탑을 생각했다. 무엇이든 만들어진 것과 만든 존재가 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고 하나님은 만든 창조주이시다. 만들어진 AI가 만든 인간을 앞서는 듯한 현상을 보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을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면서 딱 부러지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젖어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고, 하나님이 정돈케 하셨고, 하나님이 번성케 하신다는 근본이치가 있다. 그 이치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끊임없이 그 창조의 이치를 무너뜨려보려고 한다.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제작팀의 ‘하사비스’는 1승 이후에 한 말이 “달나라에 갔다”고 한 말이 가슴에 남아있다. 그런데 필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있다. 온 우주에 다 이르러도 태양에 갈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이해하리라.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을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치가 없다. 막을 수도 없고 비켜갈 수도 없다. 그렇게 흐르고 난 시간을 역사(歷史)라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스를 그 무엇도 하나님은 인간세계에 허락하시지를 않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수(流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으면 돌아가고, 끊임없이 낮은 곳을 지향하고, 막으면 그냥 멈추어 더 막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흐르면서, 구름과도 이야기하고 낙엽과도 대화를 한다. 그렇게 계속 흘러 흘러간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마른 땅을 적시면서 온갖 잡다한 찌꺼기조차 덮어버리고 메말라 건조한 곳을 소리 없이 적셔 먼지조차도 잠재우는 신비한 힘을 갖고 흐른다. 그것이 창조섭리의 순리(順理)다. 그렇다고 물은 그렇게 순리(順理)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듯 홍수로 임하기도 하고,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역리(逆理)를 매질하듯 때로는 쓰나미(tsunami)같이 노도(怒濤)로 경계한다. 그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자연의 섭리도 그렇지만 영적 세계는 더욱 그 섭리가 경이(驚異)롭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인데, 첫 번째 아담은 그 근본의 순리를 저버리고 역리를 취했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를 따르고 빛의 자녀로서의 옷을 벗어버렸다. 거기서부터 불법(不法), 불의(不義), 불선(不善),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죄(罪)를 짓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방향설정이 틀어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의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시고 본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함으로 창조의 섭리에 순응하게 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순리의 역사가 아닌 역리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현실에 동화되어 진정한 역사의 순리를 역행한다. 그 역행의 공통점이 아이러니 하다. 모두가 나는 의롭고 나는 거룩하고 나는 어제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제의 사람은 미워하고 기쁨이 없고 분쟁하고 참지 못하고 증오하고 정죄하고 불충하고 사납고 오만함의 옷을 입고 있다. 오늘의 사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바로 오늘의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란 그 삶을 통하여 갈라디아 5:22~23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주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나는 오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삶의 내용은 어김없이 어제의 사람으로 언행을 일삼으니 아이러니 한 것이다. 잠깐 멈추고 돌아보면 역리의 삶을 살면서 순리라고 하는 그것이 곧 어제의 사람인 것이다. 순리를 행하는 오늘의 사람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십자가 복음의 삶이 연주된다. 역리의 어제의 사람은 복음의 삶이 아닌 것은 카오스 현상의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면서 분쟁과 분열과 시기와 쟁투로 공멸에 이르게 되는 삶을 연주한다. 올해도 온 누리에 어김없이 부활의 은총으로 충만함을 찬송하고, 축하하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이란 값싼 언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연합회이든 부활절 행사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진정한 부활신앙이란 삶이어야 한다. 부활신앙의 삶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용서와 사랑의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전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복음의 삶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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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
    2016-03-24
  • [중독칼럼] 스마트폰 시대, 중독문화로부터 어떻게 내 자녀들 지킬 것인가?
    [상황1] 벗어 날 수 없는 스마트 문화초등학교 졸업생 80명 중 장래 희망이 프로게이머가 꿈인 학생이 10명이 넘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지 않고 삼삼오오 둘러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내 자녀가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면, 또한 능력이 된다면 아빠는 목사이지만 시킬 마음이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직업으로 추천 할 수 있을 것인가? 해마다 스마트폰 중독으로 늘어나는 학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최근 해마다 약 2%이상씩 증가세를 보이고 있단다. 스마트폰이 1992년 IBM사가 설계되고 안드로이드가 2007년부터 보급된 지 약 9년 만에 이러한 결과를 낳고 있다.스마트폰을 안 줄 수도 없는 사회구조, 상황은 우리 자녀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러한 문화가 쓰나미와 같이 몰려온 중독 문화로 정의 내리고 있고, 중독 문화는 우리 자녀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스마트폰 문화는 게임, SNS, ... 기타등등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녀들의 교육이전에 부모 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여러 가지 중독문화를 야기시키고 있고 중독되지 않으면 소이 대박나지 않는 상업적 구조로 되어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상황2, 상황3 등의 예로 독자들에게 인식 시켜 갈 것이다. 세상을 보는 중독문화(죄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을 때 각각의 성도들도 대처 능력이 생겨나리라 본다. 에베소서 2장2절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조언1]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 가정을 사수하라.본인은 중독문화를 죄문화로 정의 내리곤 한다. 어떤 한 가지에 중독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공동체, 예를 들어, 가족에 미치는 악영향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별히 갈등의 문제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가족 구성원들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희생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참으로 위험하다.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쓰나미처럼 안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 스마트 문화는 현실에 있어서 중독 문제로 야기시키고 있지만 현실적 대안이 없다. 하지마라. 주지마라.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이러한 문제를 교회 교역자나 교사에게 위임하지 말라. 부모가 먼저 문제점을 인식해야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다.첫째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본인은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써 현실적 조언을 한다. 그 중에 감사한 것은 목사이기에 예수님 외에는 내 아이를 지킬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둘째는 가정의 영적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부부가 서로 자녀 교육의 의견 차이를 나타내면 자녀들은 더욱 심각해지고, 중독되기 싶다. 부부 서로가 가정의 영적 질서를 세우고 자녀들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한 갈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또한 가정의 머리인 남편을 영적 아비로 세워야 할 것이다.셋째는 일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라. 예배를 우선시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맡은 본분을 충실히 하며 자신의 여가를 즐기는 아비와 어미가 되라. 그리고 이것을 보여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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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은혜의 말씀] 말고와 분별(롬 12장 1 ~ 2절)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로써 복음의 이론을 다루고 있다면 12장부터는 그 이론과 교리에 입각해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덮어 놓고 하지 말고 성경책을 펼쳐 놓고 해라’ 이런 말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과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매뉴얼, 인생설명서인 성경책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 신행,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연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나눈 그들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고 있기에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가진 그들을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기에 권면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마귀의 편에 속함으로써 죄가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로 죽을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 하셨습니다. 죽어야 할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몸과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죄짓는 죄의 병기로 쓰지 말고 의의 도구로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머무는 전인 우리의 몸을 언제나 깨끗함과 거룩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고 예배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공로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선하신 뜻을 좇아 충성됨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과 함께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우리의 삶이 예배로 하나님 기뻐 받으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유행이나 트렌드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변화 무쌍한 유행이나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위해 굳건히 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대의 풍조와 악하고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일상 가운데 우리의 마음은 강팍하거나 굳어지기가 쉽습니다. 마음의 동맥경화가 일어나고 고집불통인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마음의 근본부터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은 넘쳐 나는 정보와 새로운 사조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무엇을 받아 들여야 하고 버려야 하는지 그 어느 때 보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단은 거짓 것을 화려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자들도 미혹하려고 온갖 수를 다 짜내고 있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선 변치 않는 기준과 척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기준과 척도가 되어 줍니다. 말씀을 알아야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속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바른 선택은 무엇인지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분별력과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 기뻐 받으실 만한 삶으로 예배드리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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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성공칼럼] 깨끗한 그릇 만들기
    성경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등등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도, 복음을 믿을 수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회개는 씻는 것이며,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그릇 속에 오물 덩어리가 있는 채로는 그 어떤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다. 이처럼 내가 깨끗하지 않고는 천국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회개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양심이 일상생활 속에서 겪는 일들이 거짓과 악이라는 생각이 들면 거절해야하고, 옳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옳다고 여기는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주의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 진리의 나라, 빛의 나라, 선의 나라, 자유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일상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고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런 일상적인 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고 천국을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한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백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런 후에 다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종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술기운에 으스대면서 취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면서 운전을 한다. 어느 날도 음주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그만 경찰에게 걸렸다. 이 때 이 운전자는 그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경찰에게 잘못을 빌고 다시는 음주 운전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한번만 봐달라고 한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있으나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없으며 다음에 술 마신 후에 음주운전을 하지 않아야 그 때 회개가 완성되는 것이다. 회개란 마음을 넘어서 의지까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밝고 따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없는데서 누군가가 내 잘못을 근거로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에 불이 나고 두려움과 분노와 미움이 생길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순간 내 마음이 어두워지며 악한 기운이 가득차서 가슴도 답답해지고 몸도 긴장하게 된다. 이런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질문을 해 보려고 한다. “내가 없는데서 내 험담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 물음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할 때 분노와 미움이 사라지게 된다. 그 후에 “내 험담을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는 그 사람과 만나서 “내 험담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 내 모습을 깨닫고 고치게 되었습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고맙네요.”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한 상황에서 마음도 깨끗해지고 행동도 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서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회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요한도 회개를 선포하면서 “속으로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 등을 자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것이다. 즉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세리들은 정한 세외에는 받지 말고, 군인은 힘으로 강탈하지 말고 지금 받는 월급을 족한 줄 알고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나기 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보여줘야 할 회개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밝고 선한 행동을 할 때 내 그릇은 더 깨끗해지고 더 큰 사랑의 세계, 빛과 자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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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교회법률상식] 만 70세 전 원로목사 총회 총대, 운영이사장 될 수 있다(1)
    모 인터넷 신문(2016.2.10. 입력)에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의 노회 회원권의 한계”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 중 헌법에 상충되는 위헌적 기사를 보았다. 그런데 그 기사는 교회 헌법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아연실색할만한 내용이기에 부득불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음을 먼저 밝혀 둔다. 논점이 될 만한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만 70세 전에 은퇴하여 원로목사 된 자는 노회 회원권이 주어진다는 교단 헌법에 근거하여 총회 총대나 운영이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운영이사장 직무 대행은 법적으로 그 신분이 유지되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회 회원이면서 조직교회 위임목사가 아니라 미조직교회 임시목사라는 이유로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총회 결의(제87회)가 있다.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는 노회 회원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총회 총대가 될 수 있으므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그리고 조직교회 위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원로목사는 운영이사회 이사로 파송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영이사회 규칙 제4조에 운영이사회 구성요건에 21당회 이상의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로 구성한다. 원로목사는 운영이사로 파송할 수 없으며 이사 자격이 상실된다. 이같은 법리에 따라 당회가 구성된 위임목사가 아니면 운영이사회 이사가 될 수 없으며 위임목사직을 사임한 목사가 단지 정년 이전의 은퇴자로 노회회원권이 주어져 있다 하더라도 운영이사 자격이 상실되므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없다. 이사장이 아닌 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유지되지 못하므로 ‘현행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회 소집권을 갖고 있으며 송춘현 목사가 소집하지 않는 운영이사회의 소집은 위법이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 해석은 총회의 몫이다.”라는 대목이다. 이상의 기사에서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옳지 않다”함이나 “설득력이 없다”함이나 “이 해석은 총회의 몫이다.”라는 주장은 교단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당한 법리에 대하여 교단헌법에 상충된 반론을 제기하는 역풍에 다름 아니다. 1. 이사장 직무대행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만 70세 전의 원로목사는 교단 헌법에 근거하여 총회 총대나 운영이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은 법적으로 그 신분이 유지되므로 할 수 있다.”는 주장은 흠잡을 것이 전혀 없는 지극히 합법적이고 정당한 법리이다. 또한 만 70세 전 원로목사인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회 소집권을 갖고 있으며 송춘현 목사가 소집하지 않는 운영이사회의 소집은 위법이다.”라는 주장 역시 교단 헌법이 보장한 지극히 합당한 법리이다. 그 이유는 교단 헌법 정치 제10장(노회) 제3조(회원 자격)에 “각 지교회 시무 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사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에 목사는 언권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라고 규정하였고 본 조항은 노회의 회원 자격 규정으로 “정회원”(회원권을 구비 하고)과 “언권회원”으로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① 언권회원은 “그 밖에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라는 문장에서 “그 밖에 목사”란 무임목사, 전도목사, 정년 후 원로목사, 은퇴목사를 의미하며(정치 제4장 제4조 참조) “총대권은 없다”란 총회총대 피선거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총대권은 없다.”라는 필요치 않는 문장을 덧붙인 것은 개정되기 전의 옛 헌법이 노회에서 장로 총대가 아닐지라도 투표만 받으면 총회총대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무임목사도 위원회에서는 피선거권이 있었던 것을 삭제개정하면서 강조한 문장이고 언권 회원은 정회원 그 밖에 목사이므로 선거권, 피선거권, 결의권, 총회 총대권이 없는 노회 회원이다. ② 정회원은 지교회 시무 목사인 위임 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 기관 목사로서 선거권, 피선거권, 결의권, 총회 총대권을 구비한 노회 회원이다. 따라서 언권회원이 아니고 정회원(회원권을 구비한)에 속한 정년 이전의 원로 목사는 노회와 총회가 투표만 해주면 총회총대, 운영이사, 운영이사로서의 운영이사장 또는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이 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바 정당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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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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