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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에 시무할 때였다. 예배가 시작되고 나서 10여분 지났을 때 조만식 장로가 터벅터벅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예배를 인도하던 주기철 목사는 모범을 보여야 할 시무장로가 예배시간에 지각을 했으니 덕이 안 된다며 ‘조 장로님은 뒤에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 조만식 장로는 묵묵히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위에 대한 확인 없이 설교자들에 의해 유통되었고, 이것저것 살을 붙어 이야기는 보다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그가 예배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은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잠시 대화하다 보니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다며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였고, 설교가 끝난 후 주기철 목사는 다시 조만식 장로에게 ‘ 앞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살을 붙였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 나온 조 장로는 울먹거리면서 기도했다며 기도내용까지 첨가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하던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교인들이 함께 통회 자복하는 기도회로 번졌고, 교회 부흥의 시발이 되었다며 기발하게 각색을 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조만식 장로, 주기철 목사, 그리고 산정현교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이 장기려 박사였다. 그래서 그에게 회자되고 있는 이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장기려 박사는 한마디로 단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 같지도 않는 말이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할 가치조차 없는 허구라는 의미였다. 누군가에 의해 꾸며낸 이 이야기는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의 인격을 모독하고 있고, 올곧은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깨웠던 산정현교회를 모욕하고 있다. 주기철 목사가 우리민족의 큰 어른에게 그처럼 무례하게 대하는 무지한 목사가 아니었고, 조만식 장로는 예배시간을 놓치는 그런 규모 없는 장로가 아니었다. 고당(古堂) 조만식(1883-1950) 장로는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인물이자 규모 있고 절제된 삶을 사셨던 민족지도자였다. 평생 한복을 입고 다니며 국산품애용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라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신 어른이셨다. 1905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고, 6월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했다. 1911년에는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는데, 이때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 그는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는데, 이때 주기철은 학생이었다. 조만식은 3·1운동에 가담한 일로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만세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했고, 1945년 11월에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공노선을 걸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1904년 경부터 한정교의 권유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데, 1906년 산정현교회로 분리될 때 이 교회로 옮겨갔고, 1921년에는 집사가 되었다. 당시 강규찬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2년 12월 그의 나이 39세 때 장로가 되었다. 집사가 된지 1년 만에 장로가 된 것은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해 웅천 출신인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조만식 문하의 오산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한 학기 수학한 후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를 거쳐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5년간 일하고 1936년 10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39세 때였다. 당시 산정현교회 장로는 조만식을 비롯하여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홍삼, 오윤선, 최정서 등 한국교회와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당시 주기철 목사는 엘리트 목사였고, 어른을 존경하고 존중할 줄 아는 목사였다. 예배 시간 늦었다고 14살이나 많은 어른 장로에게 서서 예배 드리라고 말할 만큼 무례한 목사가 아니었다. 조만식 장로는 주일 아침 사람을 만난다고 예배시간을 어기는 그런 허술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신앙과 애국이라는 두 영토에 굳게 서서 싸웠고, 소련군 사령부에 끌려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평양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이들은 예의범절을 소중하게 여기며 서로를 존중했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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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1-20
  • [성서연구] 끝에서 보는 시작
    지난 12월 3일 우리나라와 포르투갈의 월드컵 예선 3차전이 있었는데, 우리가 2대 1로 승리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2대 0으로 승리했지만, 골득실에 밀려 탈락했고, 우리가 16강에 진출했습니다.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에 우루과이 선수들은 주저앉았고, 우리 선수들을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포르투갈 선수들은 끝났고, 우리에게는 다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4장 4절에 <때가 차매>란 구절이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시간의 충만이 오다>란 뜻입니다. 마치 경기 종료 휘슬 소리가 울리는 순간과 같습니다. 이기고 있는 팀은 휘슬 소리에 기뻐하지만, 지는 팀은 낙심합니다. 휘슬 소리가 어떤 이에게는 절망으로, 어떤 이에게는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본문의 <때가 차매>도 그러한 순간입니다. 세상의 휘슬 소리는 종말의 선언입니다.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슬픕니다. 그렇다면 소망과 기쁨의 휘슬 소리는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휘슬 소리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못 박힌 행악자의 인생은 십자가 위에서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꿈도, 욕망도, 열정도, 분노도 거친 한 모금의 호흡과 함께 끝날 상황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이 이 사람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끝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소리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호소하는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행악자에게 낙원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을 시작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종말은 시작으로 바뀝니다. 주님은 처음이요, 시작이요, 알파이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의 삶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열매가 없었고,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호소했습니다. 한 해만 더 기회를 주면 두루 파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잘 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찍혀나가야 할 끝에서 한 해 더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은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우리 인생의 끝인 죽음은 부활 생명이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끝난 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이 멎는 그 순간, 우리는 천국의 공기를 호흡하게 될 것입니다. 아쉬움이 많은 2022년도가 끝나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2022년도의 끝을 2023년의 시작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비록 후회가 많더라도 새로운 용기로 2023년을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세 가지 결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묵은 것들, 우리를 패배하게 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단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아멘.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와 단절해야 합니다. 둘째, 이어나가야 할 것은 계속 이어나가야 합니다. 선수들이 질 때도 국가대표인 것처럼, 잘 살지 못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했을 뿐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축복을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새로운 시작을 위해 새로운 것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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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시사칼럼] 토끼와 묵상
    호주(Australia)의 ‘150년 전쟁’ 혹은 ‘회색 전쟁’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토끼” 때문에 벌어진 전쟁 같은 실화입니다. 1859년 거대한 미지의 대륙에 정착한 토마스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고향인 영국이 그리워 사냥용 토끼 24마리를 들여왔는데 이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가공할만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토끼들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농작물을 비롯한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토끼들을 없애기로 결심했고, 1870년 무렵엔 200만 마리 이상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동이라도 막아보고자 1900년대에는 3,000km 넘는 울타리를 쳤건만 이 또한 곧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가 되자 토끼의 숫자는 100억 마리에 육박합니다. 이후 정부는 여우를 비롯한 천적도 동원해 보았고, 독극물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생물학자 파스퇴르까지 나서서 바이러스를 활용한 퇴치법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도 2~3억 마리 이상의 토끼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합니다.(『인간의 흑역사』(2019), 『재난 인류』(2022)) 토끼의 번식력과 생존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바로 그 “토끼”의 해 곧 ‘계묘(癸卯)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토끼는 동양에서 열두 종(種)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불릴 정도로 친숙할 뿐 아니라, 속담이나 격언에도 토끼가 등장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다 놓친다”거나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한다” 그리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나 “토의 간”(별주부전) 같은 익숙한 표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반면 서양의 중세시대에 토끼는 의외로 악당이나 불한당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긴 모양 때문에 회색토끼(hare)가 주로 그러했는데, 반대로 다산의 특성이나 온순한 이미지 덕분에 에덴동산이나 성모 같은 다수의 성화(聖畵)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부활을 상징하는 동물로도 쓰였습니다.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가 1479년 완성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치에 있는 지붕 위에 두 마리 토끼가 보입니다. 그러나 뭐니 해도 토끼와 기독교 관계의 백미는 성경 속 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6, 신 14:7 참고)가 그러하고 여기서도 “새김질”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사실 토끼는 소나 양처럼 위가 서너 개라 소화를 위해서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ruminant)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토끼가 “새김질”을 한다고 했습니다. 생물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토끼가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을 보고 여타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라는 견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성경은 고대인이 쓴 비과학적 기록이며 오류투성이의 문서일 뿐입니다. 그런데 1972년 독일의 동물학자 그리지멕(Grizimek) 박사가 편찬한 동물백과사전에는 토끼를 ‘유사되새김질(pseudo-rumination)’을 하는 반추동물의 일종으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1880년대부터 이미 토끼가 비타민이 풍부한 특수한 물질(씨코트로프, caecotroph)을 밤이나 새벽에 내놓고 이를 다시 새김질해서 소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현대과학이 19세기에 와서야 밝힌 사실을 3,500년 전에 기록한 ‘성경무오성’의 승리라고 찬사를 바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토끼가 “새김질”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새김질”은 ‘묵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한글성경이 침묵할 묵(黙)과 생각할 상(想)을 써서 번역한 이 말의 원어는 ‘하가’로 비둘기소리나 사람이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모습을 가리키는 의성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알려져 버린 일부 구절을 제외하고(시 1:2; 수 1:8 등) 해당 단어를 대부분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로 바꿨습니다(시 49:3, 119:97 등). 작은 소리로 읊조리려면 당연히 우물거리는 입 모양이 되겠지요(삼상 1:13). 일종의 “새김질”에 해당합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의미의 새김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의 새김질은 필요합니다. 질긴 풀이나 고기를 되새김질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꿀 같은 하나님 말씀을 되새김질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길이고 빛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토끼의 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습니다. 올해야말로 제대로 “새김질”을 하는 원년이 되도록 목표를 정합시다. 주야로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우물거리면서 읊조리고 소화시킵시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 건강과 성숙을 얻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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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은혜의말씀] 두려움을 넘어서라!(수1:1~9)
    광야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가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설레였을까요? 그런데 그동안 그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부르시고, 모세를 뒤이어 가나안 정복을 향해 나아가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호수아를 살펴보면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삶에 누룩처럼 퍼져있는 두려움들을 이기고 넘어서는 비밀을 발견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 어떻게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하나님만을 붙잡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의존하던 것에서 탈피하기 원하십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모세처럼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5, 6절)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두려움 앞에 계십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려움보다 크신,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현실의 크기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크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어떻게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기도의 사람이 될 때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청년 시절부터 회막을 떠날 줄 모르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한순간의 성령 체험이나 영적 체험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경건 훈련이 몸에 배이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거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해, 닥쳐올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온 교회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교회를 놓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가정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그냥 견디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오직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십시오. 3. 어떻게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말씀을 묵상할 때입니다. 사실 두려움 앞에서 한없이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두려움은 감정, 결단, 내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신뢰하십시오.(7, 8절)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방법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시고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새 시대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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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교회와세금] 종교인소득의 과세와 이해
    2023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3 1:1)’, 아멘! 한해를 출발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씀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린다. ‘교회와 세금’ 연재칼럼 제8회로 이번 달은 종교인 소득에 대해 내용을 나눈다. 2018년 1월부터 종교인 소득세법령이 시행 적용된 지 5년이 지났다. 목회자에 대한 과세적용 찬반여부를 넘어,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인이 현행 소득세에 의해 세금을 납부하도록 의무화되었다. 그리고 교회도 이 법에 따라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 필자는 2020년 3월에 교회의 세금업무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종교인소득 과세의 성경적 의미와 실무 적용방안’이란 주제로 ‘로고스경영연구’ 학술지에 논문을 쓴 적이 있다. 따라서 자세한 내용은 동 논문을 참조하고, 본지에서는 당시 마지막 결론 부분에 썼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인소득 과세에 임하는 목회자와 교회의 모습에 있어 이해가 필요하다. 오랜 기간 찬반논리가 지속된 가운데 세법이 확정되어 과세가 의무화되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출애굽 이후 레위지파를 별도 구분함으로 납세를 면제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오나, 신약의 경우 예수님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으로 가이사에게(마22:21)’라 하시며, 성전세를 납부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또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행하여 할 삶의 자세로 마음을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조세를 바침도 세상 권세를 존중하기 위함이라’하였다. 즉 조세와 바른 회계윤리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구현해 가고자 하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종교인소득 과세와 관련한 교회내 실무자의 모습이다. 종교인소득 과세제도는 종교인소득(기타소득)을 원칙으로 하되, 근로소득의 선택이 가능하며 원천징수와 연말정산, 종합소득세 규정을 두어 세금 납부를 한다. 또 매월의 원천징수가 부담되는 경우 세무서장의 승인을 받아 반기별 신고 납부가 가능하다. 또 종교인소득의 시행으로 소득이 낮은 경우 근로자녀장려금을 수혜받을 수 있다. 기타소득과 근로소득의 산출세액은 소득금액에 인정되는 필요경비는 기타소득이 많으나, 연말정산시 소득공제되는 항목은 근로소득이 많아 어느 한쪽에 유리하다 보기 어렵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세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과세 실무절차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 제도에 따라 선한 행실을 행하는 자세로 납세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종교인소득 과세의 시행이 4대보험, 특히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산출에 미친 영향이다.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보수월액에 6.46%의 건강보험료율을 곱하여 산정하고, 후자는 추가로 주택, 차량 등 재산을 반영하여 산출한다.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기준소득월액에 연금보험료 9%(교회 부담 4.5%, 본인 부담 4.5%)를 곱하여 산출된다. 어느 경우에든 종교인소득 과세시행 이후 교회가 재정적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 증가됨은 예상된다. 그리고 교회는 실무적 관점에서 내부시스템을 잘 구축하여 종교인의 소득체계와 복지후생이 개선됨은 물론 과세제도가 잘 정착될 수 있도록 협조를 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세금과 관련된 국가의 모습이다. 소득세법은 종교인소득을 기타소득과 근로소득으로 구분하여, 과세부분에 대해서는 의무화하되 시행단계에서 실무상 편의를 도모하고 성경적 관점에서 목회자 사례비의 경우 일반 급여와 다름은 수용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조세 찬성논리를 보면 여전히 종교의 특수성과 순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채 종교단체 소득에까지 과세를 주장하는 논리가 있어 우려된다. 국가는 성경의 가르침이나 개념, 목회자의 속성 등 해당 종교를 이해한 가운데 조세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이미 다양한 구제와 봉사사역을 하고 있음을 고려하여 그 순기능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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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목회자칼럼] 그물과 물고기
    눅5장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만남을 설명하고 있다. 밤새도록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지만 소득이 없이 빈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다. 사람은 나름대로의 네트웍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 모든 것이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물망이 촘촘하게 잘 갖추어진 사람은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가 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좋아해서 수많은 무리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 베드로를 향하여 나아가셨다.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베드로 한 사람에게 집중하셨다. 허다한 어중이, 떠중이보다 부름받고, 쓰임받고, 사랑받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만 베드로 한사람은 수제자가 되었다. 흔히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연장을 나무랜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데에는 그물이 중요하다. 군인에게는 무기가 필수이고, 낚시꾼은 채비가 좋아야 된다. 내가 그동안 사용했던 그물 상태는 어떠한가? 새해가 되고 나의 그물을 점검해 봐야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두 번째는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판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무디어진 도끼날을 가지고는 효율적으로 벌목 일을 할 수가 없다. 하프타임을 통해서 도끼날을 갈아야 된다. 깨진 거울, 깨진 안경을 가지고는 바르게 볼 수가 없다. 고장난 관념, 고정관념이 문제다. 선입견, 편견이라는 두 마리 개를 조심해야 된다. 판단착오와 오해의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문화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데, 오늘 교회는 문화영역이 여전히 미전도 개척 지역이다. 도구를 활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인데, 유튜브, 숏츠, 영상물이 넘쳐나지만, 이것들을 핸드링할 만한 멘탈이 약하고 역량이 모자라는 것이 아쉽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자란, 물개 수준이었지만 예수님은 목공 요셉 집에서 30년 동안 한 번도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는 물고기 잡는 데는 완전 초짜였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인 베드로 앞에서 예수님은 비전문적인 소리를 하시는 것이다. 물고기 잡는데 귀신같은 어부가 밤새도록 허탕질을 하고 난후 기진맥진한 상태인데, 거기다가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없는데, 왠 낯선 젊은이가 생뚱맞은 소리를 하니 전문가 귀에는 가당찮은 소리였을 것이다. 믿음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얕은 지식, 천박한 실력으로 선무당 사람 잡듯이 덤비지 마라. 사람들은 나름대로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큰 소리치는 전문적인 영역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신앙이다. 사랑의 높이, 깊이, 너비를 키워라. 쉽고 편한, 얕은 물가에서 촐싹거리지 말고, 저 깊은 데로 나아가라. 사람 말을 들으면 시험 들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은혜 받는다. 크리스찬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새벽마다 먹고 살아간다. 베드로는 지난 밤에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헛심을 썼다, 잡은 것이 없다, 남는 게 없었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인가? 내 솜씨, 내 노하우, 내 방식을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야 된다. 아니 내가 가진 그물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된다. 터진 그물인지, 엉성한 그물인지? 쌍끌이, 저인망으로 훑어도 될까말까 한데 엉성한 그물을 가지고 엉뚱한데 던져서야 어떻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 길을 찾고, 기도로 길을 물어라. 새벽기도와 큐티를 통해, 성경 말씀을 아침마다 일상에 적용해 보라. 가랑잎에 바지 젖듯이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질 것이다. 베드로가 순종할 때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순종하면 대박이다. 순종이 실력이다. 잡종보다 순종이 낫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축복의 두 날개는 순종과 충성이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순종으로 쓰임받고, 충성으로 복 받는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은 독불장군이 없다. 돕는 배필을 만나야 된다. 동무들, 동역자, 동행자 여기에서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한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핵심 제자가 된다. 멀리에서, 외부에서 답을 찾지 마라. 임자는 가까이에 있는 법이다. 지금, 네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해라.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다. ④ 사람이 대안이다. 인재를 찾아라. 사람 욕심을 내라. 만남의 축복이 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제자 삼는 것이다. 한 사람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그가 많은 사람들을 건졌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새해에는 새 그물을 가지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고, 주님 말씀 의지하여, 깊은 데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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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부민정교회는 어디인가?
    손양원 목사 평전을 쓰면서 몇 차례 난관에 직면했다. 그의 삶의 여정을 추적하다 길을 잃기도 하고 앞뒤가 꽉 막힌 턴널처럼 출구를 놓치기도 한다. 불과 9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자료의 결핍을 실감하기도 한다. 그 중의 한 가지가 ‘부민정(富民町)교회’에 관한 것이다. 목회자의 길을 생각한 손양원은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호주선교사 매견시 목사가 원장으로 있던 부산의 나환자 보호시설인 상애원(相愛園)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다. 사실 상애원교회를 담임하기 보다는 상애원에 속한 성도들의 지원을 받아 경남 동부 지방을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거나 연약한 교회를 돌보는 순회전도가 그의 임무였다. 상애원교회는 1910년 보호시설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곳에 수용된 이들이 동물 사육, 새끼 꼬기 등으로 얻은 수입을 헌금했는데 이 돈으로 손양원 전도사를 순회 전도사로 일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손양원 전도사는 지역을 순회하며 일하던 중 1928년 11월에는 울산의 남창(南倉)교회를 설립하고, 울산의 방어진(方魚津)교회, 양산 원동(院洞)교회, 밀양 수산교회 등을 돕거나 말씀으로 후원했다. 그런데 이 기간 그가 상애원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김교신 함석헌 등이 만들던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을 교제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성서조선은 무교회 신앙잡지였기 때문이다. 1932년의 일이었다. 이 일로 ‘이단’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그는 결국 외압을 이기지 못하고 상애원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 후 그는 어디로 갔을까? 유일한 기록이 문신활이라는 상애원 수용자가 쓴 글이다. 손양원 전도사를 존경했던 그는 손양원이 교권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애양원을 떠난 일을 애통히 여기면서 이렇게 썼다. “유무전변(有無轉變)은 부세(浮世)의 상사(常事)라더니 손 씨의 전변(轉變)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후 손양원이 감만동을 떠나 “쐬뙤(富民町)로 떠났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쐬뙤란 부민정을 의미하는데 문신활은 손양원 전도사가 부민정교회로 가려했던 일에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손 형이여,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아닌 것은 어디까지나 부인(否認) 주장하고 진리라면 만난(萬難)을 헤치며 절규 하던 그 입으로 사실을 부인하고 싶습디까?”라고 묻고 있다. 무교회주의자들의 서적을 이용한 일에 대하여 맞서지 않고 상애원을 떠나는 회피를 문신활은 부당한 처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상애원을 떠난 손양원은 ‘부민정교회’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부민정교회가 어디일까?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을까? 어떤 이는 부민정교회가 어디 있는 어떤 교회인지에 대한 탐색도 없이 ‘손양원은 그 교회로 가서 목회를 잘해서 교회가 부흥했다’며 소설을 쓰고 있다. 많은 이들이 부민정교회에 대해 모르고 있고, 현재도 부민정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손양원 관련 기록에서 부민정교회가 언급된 곳은 단 한 곳뿐이다. 손양원은 자신의 일기에서 순회전도 집회한 교회를 기록하고 있는데, 1938년 5월 22일 주일 ‘남부민정교회’에서 설교했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그 교회는 어디에 있는 교회였을까? 어떤 이는 부민정교회를 지금의 부산 서구 부민동에 위치한 ‘부민교회’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의 부민교회는 1949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저런 궁리 끝에 항서교회를 부민정교회로 칭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다. 항서교회는 1905년 설립된 교회이고 부민정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문신활은 손양원은 “감만동을 떠나 항서교회로 가려던 목자의 말이었으니...”라는 또 다른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은 1936년 12월 8일 개최된 경남노회 제38회 노회 촬요를 통해서였다. “부산 남부민정교회는 항남교회로 명칭 변경하기로.”라는 한 줄 기록에 불과하지만 소중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손양원이 옮겨갔다는 부민정교회는 다름 아닌 남부민정교회인데, 지금의 부산 서구 남부민동 29번지에 위치한 ‘항남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촬요에 기록된 교회명칭변경건이 본 노회록에는 언급이 없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정리하면 손양원 전도사가 감만동 상애원을 떠나 이적한 ‘부민정교회’는 다름 아닌 지금의 항남교회였다. 부민정교회는, 1935년 5일 15일 항서교회의 후원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앞서 설립되었음을 보여준다. 항남교회 기록을 보면 교회 명칭 변경일은 1936년 3월 25일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해 말 노회의 승인을 얻은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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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성서연구] 성탄 특집
    <특집>이란 신문이나 잡지, 방송 따위에서 특정한 내용이나 대상에 중점을 두고 하는 편집 혹은 그런 편집물을 말합니다. 며칠 전 한국기독신문에서 평신도성서연구 원고를 부탁하시면서 <이번 신문은 성탄 특집>이라고 하셨습니다. 12월의 성탄의 달이므로, 신문사는 성탄 특집 기사를 싣는 게 당연하겠습니다. 그런데 성탄 특집은 신문사에서만 준비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성탄 특집을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목회자는 성탄에 맞춘 설교를 준비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모든 설교가 다 부담되지만, 특히 절기 설교는 더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신앙 연조가 깊은 성도들은 주보에 실린 설교 본문과 제목만 보면 설교의 내용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탄절 설교는 그 내용이 이미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설교자는 성탄 설교를 여러 차례 해야 합니다. 올해는 성탄절이 주일이어서 설교 부담이 한 번 줄었다고 하겠습니다. 보통은 성탄절 직전 주일에 성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12월 24일 성탄 이브에 찬양예배를 드리면 그때도 성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리고 성탄절 당일에도 성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러니 내용을 이미 짐작하고 계시는 성도들을 앞에 두고 성탄절 설교를 집중적으로 해야 하니, 설교자는 매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에 이루어지는 집중 설교 역시 성탄 특집인 셈입니다. 거기다가 성탄 감사헌금을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행사를 벌이는 등, 요즘 교회마다 성탄 특집을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그런데 특집의 이면을 생각해 보셨나요? 특집이 나올 때는 온통 그 주제에 집중합니다. 12월에 교회와 성도들마다 성탄하신 예수님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탄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주제에 대해서 완전히 침묵 모드로 들어갑니다. 특집은 화려하지만, 특집이 끝나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는 12월에 성탄을 집중적으로 말하고, 12월 25일이 지나면 언제 성탄절이 있었냐는 듯이 전혀 성탄절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성탄 트리가 교회 뜰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성탄절의 잔상이 남지만, 트리마저 철거하고 나면, 성탄은 사라집니다. 열한 달은 기다려야 다시 성탄을 말하게 되고, 그때 다시 우리는 성탄 특집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질 것입니다. 이제 이런 우리 모습을 좀 바꾸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1998년에 개봉된 <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가 있습니다. 한석규가 초원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 역을, 심은하가 주차단속요원으로 일하는 다림의 역을 맡아 잔잔한 사랑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수채화 같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마음을 끕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고, 정원이 죽어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눈이 쌓인 12월이었습니다.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무더운 8월이 오래 남길 바라는 12월의 크리스마스로 덮이면서 관중의 마음에 여운으로 남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제목을 우리 삶에 옮겼으면 합니다. 8월에도 생각하는 크리스마스, 어떻습니까? 저는 연중 성탄절 찬양을 듣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습니다. 아이들이 <웬 캐롤?>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성탄 특집으로 분주한 12월에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제 삶에 탄생하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 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천여 년 전, 특정 상황에 탄생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헤롯 왕 때라는 시간을 2022년으로, 유대 베들레헴을 온갖 갈등으로 복잡한 대한민국으로 바꾸면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탄생하여 오고 계신 중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예수님을 <오시는 하나님, The Coming God>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일이 아닌 이유는 365일을 성탄일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매일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매일 맞이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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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소강석칼럼] 본질이 아니면 우상
    최근 안준배 목사가 ‘한국문학 속의 우상과 구원’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기독교와 관계된 소설들을 평론한 것이다. 제도권에서 보면 삐딱한 시각으로 쓴 소설들이다. 발표 당시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들은 본질과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본질과 근원 그리고 원형 속에만 구원이 있고 제도화 정형화 화석화된 종교의 틀 안에는 우상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순교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순교 문제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다가 교단이 나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한 사태가 소설가 김은국에게는 일부 제도권 교회들이 순교를 우상처럼 여기고 있다고 보여진 것이다. 김은국은 ‘순교자’라는 소설에서 순교적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신 목사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거기에는 구원도 없다는 예언자적 선포를 했다. 이범선의 ‘피해자’ 역시 제도권으로 전락한 기독교와 교회를 희화화했다. 주인공 최요한은 독실한 장로의 아들로 자란다. 아버지 최 장로는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아들과 똑같이 사랑한다. 그런데 최요한이 자라 고아인 양명숙을 좋아하게 되자, 최 장로는 양명숙이 고아이기에 안 된다며 결혼을 반대한다. 이 사실을 안 양명숙은 상처를 받고 요정의 마담이 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최요한을 다시 만난 양명숙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요한은 영원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양명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때 모두 양명숙을 정죄한다. 최요한은 양명숙을 변호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그녀를 죽인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아니,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입니다.” 결국 율법과 형식으로 찌들어 있는 제도권의 교회가 양명숙을 죽였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안 목사는 당시 소설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본질과 원형, 근원을 찾아가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원래 시(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보면 말씀 언(言) 자에 관청 시(寺) 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곧 기독교적 표현으로 하면 성전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시인은 신탁을 받아 왕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므로 시가 아무리 서정성과 심미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예언자적 메시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안준배 목사는 먼저 윤동주 시인의 저항성을 넘어 평화의 이상 세계를 갈망하는 예언적 요소를 소개했다. 그리고 김현승의 시를 논했고 김현승에 이어 필자의 시를 평론했다. 필자도 시의 예언성을 알기 때문에 심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시에 예언성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은 끊임없이 본향과 본질을 향해 돌아가는 아드 폰테스(ad fontes) 운동을 한 것이다. 그 본향과 본질을 붙잡는 곳에 진정한 구원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도권 안에 머물거나 그것만을 붙잡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우상 속에 머무를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항상 끊임없이 아드 폰테스, 신앙의 본질,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지 않고 오늘의 교회가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우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우리 안의 우상을 허물 때 한국교회 연합과 세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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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시사칼럼] 메시아
    열사(熱砂)의 땅 카타르에서 열린 제22회 월드컵에는 처음부터 이변이 속출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강력한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를 개막전에서 2대 1로 격파한 경기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며칠 후 아르헨티나는 경시할 수 없는 건넛마을의 호적수 멕시코와 일전을 치렀습니다. 이 경기에서마저 패배한다면 예선 탈락이라는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었던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한 골과 도움 하나로 맹활약을 펼친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의 활약으로 이겼습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습니다. “메시, 메시아가 되다”(중앙일보, 11. 28). 십여 년 전부터 이 선수는 유럽무대에 진출해서 소속팀을 우승시키고 최고선수상을 휩쓸면서 그 이름을 빗대어 “축구 메시아”라 불렸고 “메시가 곧 축구다”라거나 심지어 “메시는 예수와 축구를 하며 놀고 있다”(마라도나)는 말까지 듣곤 했습니다(시사인, 2010. 6. 10).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사상초유로 성탄절이 있는 12월까지 진행되는 바람에 “메시아”라는 말이 더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사실 “메시아”라는 말의 용례는 운동경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메시아”는 한 세기 동안 군림하고 있는 인기 유행어에 해당합니다. 일찍이 독일의 유대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2)은 “(…) 행복의 관념 속에는 구원의 관념이 포기할 수 없게끔 함께 공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약한 메시아적 힘(schwache messianische Kraft)이 부여되어 있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에서)라며 “메시아”라는 관념을 차용합니다. 이후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 것”(le messianique sans messianisme)으로 자신의 사상을 차별화해서 발표합니다. 신적인 간섭 내지 개입이 역사적 필연일 수는 없지만 메시아적 힘(운동)만은 수긍한다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역시 “메시아적 도래” 혹은 “메시아적 세계”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뜻밖에도 성경의 바울서신에서 그 근거를 도출하는 그의 사상을 “메시아 없는 메시아니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한보희). 사도 바울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던 모로코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lain Badiou) 또한 비슷한 메시아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메시아”라는 인상적인 개념을 불교계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불교의 미륵(彌勒)이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다’는 주장을 들어보셨습니까? “미륵”(彌勒)은 미륵보살이라고도 하고 미륵불이라고도 하는데,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도래한다는 존재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메시아와 그 지위와 역할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게다가 단어 자체도 본래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자비나 우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 ‘미트라’(Mitra)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마이트레야’(Maitrya)가 파생되었고,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면 “미륵”이지만 히브리어로 번역하면서 “메시아”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42). 그러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면 오히려 기독교의 메시아 개념이 불교의 미륵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합니다. 하기야 주지스님이 누가 교회에 가서 이야기하고 오겠는가 하니 모두가 쭈뼛거리는 상황 속에서 동자승 하나가 손을 들고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유머도 있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의 앞부분부터 등장하는 ‘기름 붓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마쉬아흐’인데, 메시아라는 말은 이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등장 시기는 불교의 미륵 사상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기원전 5, 6세기 인물로 알려진 반면, 기름부음은 그보다 천 년 이전의 야곱(창 35:14)이나 모세의 시대에 이미 등장하고 있고(출 30:26),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인 제사장(출 30:30)이나 왕(삼상 10:1; 삼하 2:4)의 출현 또한 마찬가지로 불교의 미륵에 비해 훨씬 앞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메시아”는 신령한 기름부음을 받을 자로 인류의 구원자요 대속자로 오실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그 표적을 이사야서(9:6)를 비롯해서 수많은 책들이 점점 더 또렷하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렘 23장, 겔 34장, 암 9장, 미 5장 등). 바로 그 진정한 메시아가 이 땅에 나신 성탄의 달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지양합니다. “메시아적 세계”가 아니라 ‘메시아의 세계’를 수긍합니다. 이단에서 곧잘 도용(盜用)하듯 예수 이외에 그 누구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월드컵 우승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도탄에 빠진 이 세상 속에 참된 “평화”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메시에겐 미안하지만, 오직 메시아 예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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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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