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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4
    앞에서 유대인 군목인 밀턴 로젠이 1950년 12월 부산에 왔다는 점을 소개했는데, 그가 유대인 군목으로 전쟁에 참가했다는 점은 미군병사들 가운데 유대인 병사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12월 25일자로 쓴 글에 보면 12월 25일 이전에 부산으로 왔고 부산에 체류한 기간은 2주 정도라고 한다. 부산에 대한 그의 인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야간에 이동할 경우 부랑자를 만날 수 있고, 도둑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는 천개의 눈을 가졌어도 도둑맞기 일쑤라고 했다. 또 부산은 어두운 도시라고 썼다. 전기 보다는 등유나 석유 램프를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점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 부산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전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로젠은 한국은 사회적으로 도덕이나 사회규범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가 많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동성 간의 친밀한 교류를 동성애자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짧은 기간 부산에서 체류했던 로젠은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중공군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로젠은 이렇게 썼다. “중공군이 개입했고, 우리가 전선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솔직히 원산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군목이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게 된 것은 10월 19일이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2일 마오쩌둥이 출병을 결심했고, 10월 4-5일의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하였고 이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런 결정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미 이전부터 전쟁에 개입을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동북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참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한 것은 10월 3일이었고, 중국은 이보다 앞서 전쟁 개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개입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되었고, 전투병력이 후방에서 안주할 수 없었기에 로젠 또한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6.25 전쟁의 전개과정을 소개하면, 전쟁 과정은 흔히 네 시기로 구분하는데, 6월 25일 인민군이 전면적으로 남침하여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한 시기가 첫 번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을 장악한 인민군은 바로 남하하지 않고 3일 동안 서울에 체류했는데, 이 기간 동안 국군은 전력을 정비 할 수 있었고, 낙동강 전선을 강고하게 구축하여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한편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미국 주도 아래 유엔군 결성을 승인하여 유엔군의 참전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계시하여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여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는데,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이 북진을 강행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10월 26일에 이르러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북한의 요청을 받은 중국군 13병단의 압록강 도하와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된 시기였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흥남 등지에서 철수하게 되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른바 ‘1.4후퇴’라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후 국군이 다시 되찾은 뒤 38도선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시기는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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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11-25
  • [소강석칼럼] “간절함이 없는 자리, 핑계뿐”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집회와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어쩌면 저만큼 많은 연합집회와 목회자 세미나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흰돌산기도원에서 4천 명이 모여 2박 3일 동안 했던 목회자 세미나, 또 양수리수양관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한신목회세미나에 단골 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단과 신대원에서 하는 세미나나 특강을 셀 수 없이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2,50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인 생명나무 목회 컨퍼런스를 몇 번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도 600여 명의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위드 코로나 세미나를 하며 1인당 백만 원 이상을 드리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갖고 세미나 원고도 제가 다 작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부교역자들에게 돌리고, 몇 분의 전문가에게 보내서 보완할 것 있으면 보완의 의견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보완해 준 부분도 있지만, 보완할 것이 없을 정도로 원고 내용이 충실하고 원고만 봐도 가슴에 전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원고를 보고 또 보면서 부족한 부분은 빨간펜으로 체크를 하였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내용인데도 원고를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가장 어려운 때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헌금으로 컨퍼런스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500명이 넘는 미자립 교회에 100만 원씩 지원금을 준다는 것이 보통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행정비, 광고비 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제가 간절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지요. 또 미자립교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하고 초토화된 예배를 회복하며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런 기대감을 갖고 온 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생각하니까 간절함이 안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목사님들이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거의 한 사람도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을 하였습니다. 자립교회 목사님들도 교회 세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강의 초두에서 이 세상에 새로운 교회는 하나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모델 교회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진정한 모델 교회는 어뉴 처치(Anew Church), 즉 성경적 원형교회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모델 교회가 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적 원형 교회로 가기 위해 새에덴교회가 어떻게 최선을 다했고 몸부림 쳤는가를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팬데믹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함께 우리의 공적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가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함이 있으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길이 보이고 방법이 보이고, 얼마든지 하이 콘셉트를 가지고 창의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맨날 핑계만 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코로나 팬데믹 때 얼마나 간절함을 가졌었던가요. 지금도 얼마나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가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성도를 향한 간절함, 교회 세움을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있는가요.” 제가 목사님들께 묻고 되물으면서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원래 부교육자들에게는 약 30분씩 강의 시간을 주기로 했는데, 제가 워낙 인심이 좋아가지고 “여유를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50분도 하고, 어떤 분은 1시간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제가 강의를 마무리를 할 때 시간에 쫓기는 것입니다. 제가 넉넉하게 마무리를 하고 자세히 강의를 해야 되는데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렇다고 8시, 9시까지 붙들어둘 수도 없는 것이고요. 제가 만약에 3, 40분을 더 활용했더라면 마지막에 찬송도 하고 기도회도 하면서 목사님들의 눈이 눈물로 흠뻑 젖고 흐르도록 할 수 있었는데 시간에 쫓겨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박주옥 음악목사님도 목사님들 앞에서 노래를 한곡하기를 원해서 그 희망도 들어주고, 또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 시간도 드린 것입니다. 결국 제 강의 시간을 다 할애해 준 것이죠. 물론, 아쉬움이 있는 만큼 저는 강의에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마치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내고 입술에 모터를 단 것처럼, 긴박한 강의, 간절함이 넘치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강의 시간이 축소되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이 다 전달이 됐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것 다 알아들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곳은 길과 방법이 보이고 간절함이 없는 자리에는 핑계뿐이라고.” 부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교회 세움을 향하여 헌신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간절함의 나비 효과가 더 크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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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시사칼럼] 새로운 자본주의(C-Capitalism)가 필요하다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1819년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을 발표합니다. 한 때 나폴레옹을 태우기도 했다는 전함 메두사호가 아프리카 세네갈 연안에서 좌초(坐礁)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부자와 귀족들은 구명정을 타고 탈출한 반면 나머지 150명 가까운 승객들은 버림을 받았고 급조한 뗏목에서 2주일을 견뎌야 했습니다. 동료의 시신을 먹으면서까지 버텼건만 생존자는 불과 1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당시의 참상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공산주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선전포고를 날렸습니다(1848,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이후 불황 등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그러나 극적으로 변신에 성공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복지제도 등이 마련되었고, “수정자본주의”라고도 부르는 <자본주의 2.0>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 시대를 지나며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치열한 쟁투를 벌이면서도 승승장구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고 또 실업율과 인플레이션이 동반 상승하는 새로운 현상으로 인해 또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때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이념과 도구로 삼고 한 번 더 변신을 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소련연방을 비롯한 공산주의 체제들이 일거에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기업인이자 저술가인 피터 반스(Peter Barnes)는 이를 <자본주의 3.0>(2006)이라 불렀습니다. 적수가 없어져버린 자본주의는 그러나 점차 괴물로 진화되어 갔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SPC 불매운동’을 알고 있습니까? 지난 10월 15일, 평택의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20대 초반 여성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사측은 현장을 일부 천으로만 가린 채 계속해서 공장을 가동했고, 시민들의 분노가 이 지점에서 폭발해 해당 기업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케팅학의 대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기업자본주의(Corporation Capitalism)”라 불렀습니다(Confronting Capitalism, 2015).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알게 된 투기적 금융자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카지노(Casino) 자본주의”, 최근 전기자동차 보조금철폐조치에서도 알 수 있는 미국 위주의 “카우보이(Cowboy)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과 유착 관계로 인해 시장을 왜곡하고 불공정을 양산하는 “정실(Crony) 자본주의” 개념들이 연이어 등장했습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나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듯 보였습니다. 경제평론가인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자본주의 4.0>을 들고 나온 때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는 동명의 저서에서 구체적인 전략이나 정책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자본주의는 현존하는 위기를 결국은 잘 극복하고 다시 회생하리라는 희망적인 예언을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일까요? 코틀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간적(Humanistic) 자본주의”나 “인도적(Humane) 자본주의”, 이를 위한 “포용적(Inclusive) 자본주의”와 “건강한(Healthy) 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깨어 있는(Conscious) 자본주의”와 “온정적(Compassionate) 자본주의”라는 개념들을 제시했습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자본주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힘의 근거는 뭐니 해도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주하고 집착했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까요? 윤리적인 색채를 가미한 전술했던 두 개의 ‘C-자본주의’에 더해, ‘회개하는(Contrite) 자본주의’와 자본-노동과 국가-시민이 서로 ‘협력하는(Collaborative) 자본주의’ 그리고 개발과 환경이 ‘양립가능한(Compatible)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C-자본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는 외국의 자본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한국인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Corea Capitalism)’를 모색하고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니, 물질자본이 아니라 영적자본,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예수주의를 지향하는 ‘성경적 자본주의(Cannon Capitalism)’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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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은혜의말씀] 하나님이 거하실 집(출 25:8~9)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두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또 하나는 성막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면, 성막은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할 성소(거룩한 장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의 모양과 규격, 만드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신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입니다. 나아가 성소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막 건립의 이유와 건축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8절)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또 한편으로 특별한 장소를 택하여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겠다는 말씀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 안입니다.(요1:14)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고전3:16) 우리의 매일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성일입니다. 2. 죄인을 만나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만 가지고 내려 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날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의 미팅 장소입니다. 그래서 회막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고후5:17) 교회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집입니다. 둘째, 성막은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지어야 합니다.(9절) 성막은 아무렇게나 지으면 안 됩니다. 왜요? 성막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교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대로 짓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고, 성경의 지식을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잘 순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2. 헌신의 예물을 통해 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모든 것을 계획하셨지만, 백성들의 헌신을 통하여 이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최고의 헌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십시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일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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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3
    지난번에 이어서 말씀을 중심으로 보다 디테일하게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제 찬양을 할까? 야고보서(5:13)는 찬양하고 싶을 때, 시편(42:5)은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 그리고 시편(57:8) 새벽에, 시편(119:62) 저녁에 찬양하라고 한다. 즉 찬양의 삶 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레위인들은 24시간 하나님을 섬겼고(찬양, 예배), 신약 히브리서(13:15)에서는 항상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합3:17-18)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어디에서 드려야 할까? 시편149:5, 시편113:3에서는 어디에서나 드려야 한다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드리는 찬양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시22:22,25, 시26:8,12, 시27:4, 시35:18, 시68:24-26, 시69:9, 시107:32, 시122:1) 나아가 모든 나라와 백성들 앞에서 찬양해야 한다고도 했다.(시96:3, 시40: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뿐 아니라 당신의 영화롭고 위대한 역사가 불신자들을 포함한 만민들, 온 땅위에 충만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드려야 할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선포되거나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사야서에서 나의 찬송을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파수에 우리가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이 되어 전달이 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시103:1, 시42:5-6),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집중하여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출15:26, 창22장, 겔48:35) 무엇으로 드릴까? 입술로(시119:171), 마음으로(시13:5), 춤추며(시149:3, 시150:4), 손뼉 치며(시47:3), 영혼으로(시103:1), 악기들로(시150:3-4, 시15:16) 만군의 주요 전능자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양해야 한다. 다윗이 찬양한 것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데 그는 즐겁게(삼하6:15, 삼하6:16, 삼하6:21) 힘을 다하여(대상13:8, 대상16:5) 또 큰소리로(대상16:42, 대상15:16) 날마다(삼상18:10) 신령한 노래(대상25:1-3)로 감사의 찬양(대상16:4)을 드렸는데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와 같이 찬양하는 삶을 살아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베푸시는 선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신실하고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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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목회자칼럼] 확증 편향(선택적 사고)
    “한국교회, 분열과 함께 확증 편향 회개해야…” 지난 달, 우연히 본 기독교 신문의 헤드라인입니다. 저 한 문장 중 ‘확증 편향’이라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신’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성’ 등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확증 편향과 같이 있을 수 없는데, 한국교회가 확증 편향 속에 있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나, 막막함이 차올랐습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 가치, 판단과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에는 다 무시하는 ‘선택적 심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그 외에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몇 해 전부터 현대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로 ‘확증 편향’이 등장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확증 편향을 꼽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취합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니, 확증 편향의 시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보면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를 취합해 자녀에게 강요하고, 자녀 또한 부모의 말을 들어 고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입장을 타당하게 해 줄 근거 찾기에 급급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이기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확증 편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갈등 구조인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는 진보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오로지 보수쪽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더 많이 취합하므로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시킵니다. 진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에게 유리한 내용들만 골라 골라 자신들의 신념의 탑을 쌓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는 확증 편향의 정확한 사례로, 이들을 보면 절대 하나 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의 길이 진리인 것 마냥 목소리를 낼 것이 확실합니다. 사회가 이럴 때,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확증 편향과는 거리가 멀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하려고 애쓸까요?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며 같이 소그룹 나눔을 하는 교인들도 몇몇 성도들은 “말씀이 최고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씀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느 성도들은 “봉사를 통해 섬기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식당봉사, 성가대 봉사 등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나는 기도원파이다. 나는 성령파이다. 나는 직통계시파이다” 등으로 확증 편향을 가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방법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방법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인 확증 편향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성도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선택적 사고에 붙잡혀 있는 체계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짐으로 너도 나도 자기가 가진 정보는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너가 잘못됐어”라고 지적하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항상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어제 내가 알던 것이 오늘 잘못된 사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만이나 독선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 편향 속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나의 잘못을 고치려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가질 때 확증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된 교제가 있을까요? 자기 신념만이 진리라고 우기는 정치 집단 속에 합의와 타협은 있을까요? 내가 가진 신앙만이 참된 믿음이라 고집하는 성도에게 성령의 하나됨이 있을까요? 이처럼 확증 편향적 자세는 고립, 대립, 경쟁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로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세상이 말하는 확증 편향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예수님이 원하는 가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다른 이들을 향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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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3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복무 중이던 밀턴 로젠 랍비는 1950년 11월 5일 주일 이른 아침 제너럴 하세(General Hasse)호로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 배에는 미군 1천명 이상의 장교와 사병이 타고 있었다. 이틀 후 7일에는 일본 남부의 나가사키현의 사세보(世保, Sasebo)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1천명이 탑승하여 한국으로 향해 11월 10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로젠이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한 보고에 의하면 인천에 도착한 새벽 3시부터 낮 11시까지 8시간 동안 작은 선박으로 병사들의 상륙을 도왔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이지만 이날은 맑고 따뜻했으나 큰 건물은 파괴되어 있었고 여기 저기 벽돌들이 흩어져 있고 거리는 정비되지 않은 어설픈 상태였다고 했다. 이날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난과 배고픔이 베여 있는 슬픈 눈빛이었다고 기록했다. 인천항에서 군 기지로 이동은 기차를 이용했는데, 군인들은 손을 흔드는 한국인들에게 창문으로 캔디와 담배를 던져 주었다. 기지에 도착했으나 허름한 건물이었고 침대가 없어 한국인들이 짚으로 만든 침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주었고 거기서 군용 리쿠사쿠로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DDT로 소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식사를 못해 극도로 배가 고팠는데, 돼지고기가 나와 유대인이었던 밀턴 로젠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커피만 마셨다고 한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 남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힘을 모아 캠프를 급조했다고 한다. 로젠과 미군병사들은 일단 인천항으로 입항했는데, 알몬드 장군(General Almond) 휘하의 원산의 10군단으로 배속되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장비와 무기 이동이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예정된 날에 원산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군사기밀이었는데 실제로는 목적지가 원산이 아니라 부산이었다고 한다. 로젠이 신문에 쓴 보고를 보면, 부산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게 되는데, 기차는 더럽고 성한 곳 없이 지저분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피난민들로 들끓었는데, 미군이 음식을 준비하면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 빈 캉통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경쟁했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지치고 고통스런 아픔이 서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는 350마일, 곧 560km인데 주야로 며칠이 걸렸다. 문제는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게릴라의 공격 또한 염려되어 두려웠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잠을 자는 것인데, 쉬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병사들 가운데서는 이미 북쪽에서 전선에서 싸웠던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는 상처를 보여주었고 상처난 전투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전선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중 기차가 정차하면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잡다한 물건을 가지고 차에 올라 팔아달라고 조르는데, 로젠 군목은 “나는 나의 생애에서 이처럼 열정적이고 도전적으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13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돈을 가지고 미국 담배, 캔디, 껌을 사고자 했다. 담배 한 갑은 1200원(약 3달라), 껌은 한통이 6백원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동하는 동안 일본어를 아는 한국인과 어렵게 대화했는데, 북한의 집은 파괴되고 재산을 강탈당하여 대구로 내려 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서 신기했고, 한국인들은 유대인들은 다 부자인 줄로 착가하고 있다고 썼다. 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 랍비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2월이었다. 부산은 인민군의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이었고, 철도도 무사했다고 기록했다. 부산역에서 군 캠프로 이동하는데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자기들 보다 세배 이상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날씬한 여자들도 머리에 짐을 이고 두 손으로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가방을 두르고 짐을 나르는데 놀라울 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군목은 일단 부산으로 왔으나 약 일 주일 후 원산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부산 거리를 다니며 부산 사람들을 보았는데, 부산은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도시라고 생각했다. 지게를 지고 다니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현대적인 복장이나 물품들이 유통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젠의 눈에 비친 부산은 도둑들이 설치는 도시였다. 군용품이 가게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또 미국 영국 인도 캐나다인 등 여러 종족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인도군인들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잘 다려진 군복이 흥미로웠다고 기록했다. 로젠은 8일간 부산 생활을 경험하고 9일째 되는 날 부산을 떠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LST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가 다른 병사들과 무기 탱크 트럭 등 장비를 싣고 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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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11-04
  • [서임중칼럼] 지도자의 언행
    일찍이 나의 목회철학은 언행일치(言行一致) 학행일치(學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통해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었다. 걸어 나온 길을 돌아보면 이 삶을 살기 위해 가히 몸부림을 친듯한데 원하는 만큼 살지만은 못한 것 같아 古稀의 중반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목사로서 오늘도 전국에 산재한 작은 교회를 향해 말씀사역 길을 행보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육신의 아픔도 하나 더 품었기에 운전도 더 벅차고 잠자리도 불편하며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쇠진하는 것을 느끼지만 오늘도 감사로 절차탁마의 삶을 다듬는다. 작금에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으로 세간이 시끄럽다. 범인들의 말이었다면 관심도 없을 일이지만 지도자의 언행이라 주목을 받는다. ‘비속어를 사용했느냐 안 했느냐? 언론사가 짜깁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결국 고소 고발에 이르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마땅히 국민들이 들어야할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 성과에 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다. 본질과 비본질이 뒤틀린 논쟁으로 국격은 걸레가 된 듯하다. 요즘 들어 더더욱 살기 힘든 백성들을 좁쌀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마지막 보루라는 언론의 행태와 당리당략에 허우적거리는 정치권을 향해 분노를 넘어 허탈한 마음이다. 소망조차 보이지를 않는다. 전직 대통령 중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분이 계셨다. 그 분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이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한 도시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시를 유명한 강간(관광)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무장관이 깜짝 놀라 용어 수정을 말씀 드렸다. “대통령님! 강간 도시가 아니라 관광 도시입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단다. “애무(외무)장관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무(외무)나 잘 하세요.” 사실관계를 떠나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그냥 파안대소하고 너나없이 대통령의 말에 대하여 달리 마음을 두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탄핵하라고 소란을 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리더는 말과 행동이 명확해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웃기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사건 이야기가 생각난다. 2004년 11월 18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웃지 못 할 기사가 실렸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출판한 저자 차모 씨가 구속 수감 된 이야기다. 차 씨는 경영컨설팅을 하는 사람인데, 요리조리 둘러대며 남의 돈 18억을 빌려 쓰고 중국으로 도주를 했다. 그런 그가 아내가 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된 건이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고 책을 쓰고 자기가 그 말대로 행한 웃기는 언행일치 사건인데, 이런 경우를 두고 당시 네티즌들은 “진짜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댓글을 달았던 유명한 에피소드다. 갈라디아서 2:14절에는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 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목사가, 장로가, 목사답게 장로답게 살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하느냐?”로 문장을 바꾸어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다. 지도자의 언행을 다시금 일깨우는 교훈이다. 「왜 부모의 권위는 소중한가?」를 출간한 제임스 돕슨(James C Dobson)의 <Bringing Up Boys>가 있다. 이 책에서 돕슨은 “미국은 아버지의 몰락으로 무너졌다”고 역설했다. 이유는 지난 30~40년간 페미니스트(feminist)가 남녀가 똑같다는 논리아래 남성성(男姓性)과 여성성(女姓性)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남자아이용 완구와 여자아이용 완구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그 결과 가정에서 남자의 모델이 없다 보니 아버지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가정도 무너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흐름은 이미 한국에서도 정착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생태학적 심리학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 호르몬이 분명히 다르다. 진정한 남성은 희생할 줄 알며 책임성이 있고 가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할 줄 알며 그래서 가장(家長)의 책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위치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뜻있는 기관 단체는 그 단초가 되는 성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교회를 들여다보자.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 당회장의 위치가 모호해 지고 있다고 우려를 한다. 당회장의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슨 말인가?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도자다운 말을 해야 하며 지도자다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할 때 그 공동체가 힘이 있고 공동체 전체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기능과 권위와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은 그 원인행위가 지도자 자신에게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야옹거리며 우는 고양이는 쥐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말이 많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말도 쓸모 있는 말이어야 하고 가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살다보면 한 마디 더 말할 시간은 있어도, 그 한 마디를 취소할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말 한마디로 복도 부르고 화도 불러온다. 생각 없이 욱하는 감정으로 불쑥 내뱉은 말은 평생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아름다운 말이 아름다운 삶을 이끈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하다고 야고보 사도가 가르쳤다. 지도자의 언행은 그 무게가 그래서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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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0
  • [성서연구] 천국에 관심없는 교회
    자기 나라가 아닌 타국의 국민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미국 국적을 얻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미 영주권을 가진 사람을 전제로 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한민국 영주권자이면서 5년 이상 계속 한국에 거주하고 있을 것, 둘째, 경제적 요건으로 6천 만원 이상의 부동산 혹은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직업 혹은 소득이 있을 것, 셋째, 사회통합 프로그램 귀화용 종합시험 및 면접심사를 통과할 것, 넷째, 큰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서류를 제출하고, 2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감사하면서 나라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왜 이상한 나라일까요? 우선 천국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입니다. 또 천국은 사람이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들은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독재자일 수도 있고, 무능할 수도 있고, 갈등만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나쁘거나 무능한 통치가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또 천국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지금까지 땅에는 무수한 나라가 있었지만, 모두 사라지고, 새 나라가 생기곤 했습니다. 각 나라마다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국가반란죄 등으로 처벌하지만, 그렇게 해도 나라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새 나라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생긴 이래도 수천 년 이상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유지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변함없는 나라입니다. 또 천국이 이상한 나라인 이유는 백성이 되는 자격 때문입니다. 본문은 천국의 백성이 되는 조건을 말씀하는데, 그 조건을 한 가지만 말씀합니다. 그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은 이렇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란 땅의 나라 백성으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땅의 나라의 욕망과 부정한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천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땅의 나라를 위해, 땅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그 삶의 대부분이 천국의 원리와 반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땅의 나라 백성으로 살던 과거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교회는 천국에 가겠다고 예수님께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임시 처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천국에 가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천국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일반 성도들도 땅의 나라 이야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통해 땅의 나라에서 잘 사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신청서는 냈지만, 별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 표정입니다. <드디어 허가증이 나왔으니, 천국으로 가세요>라고 할까봐 겁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청선를 낸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밀 심사를 하는데, 그게 회개입니다. 신청서는 냈지만, 회개는 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 백성으로 합격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전히 땅의 나라 방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상합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는데, 별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천국 이야기만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회개를 말하면 어리석다고 합니다. 땅의 나라 원리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중요한 일을 맡기도 합니다. 어떠세요? 천국에 정말 가고 싶으신가요? 정말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머지 않아 천국이 정말 간절히 바랄 순간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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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4
  • [시사칼럼] 바이든 고개 들어 날리면 고개 들지마
    작년 연말 미국에서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이 개봉됩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블랙코미디 장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별달리 재미를 보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방의 무명대학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디비아스키는(제니퍼 로렌스) 에베레스트 크기의 혜성을 하나 발견하는데, 궤도와 속도를 계산해보니 6개월 후 지구와 충돌할 예정입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랜들 민디 교수에게(무려 디카프리오), 박사는 정보기관과 대통령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언론에까지, 이 사실을 알렸지만 재선에 목을 맨 대통령은(메릴 스티립!) 의도적으로 이들을 무시하면서 비밀리에 숨기기 바쁘고 언론도 기업도 교만과 잇속에 물들어 저마다의 이유로 진실을 외면합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이 두 파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고개 들어”(look up)파와 “고개 들지 마(don't look up)”파로 말입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참고로 영화 제목은 ‘돈 룩 업’(Don't look up)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내리고 난 후 약 6개월이 지난 현재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발단은 역시 앞선 영화가 개봉된 미국에서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해서 미국 대통령이 주관하는 글로벌펀드 재정회의에 참석했고, 나오는 길에 측근을 향해 무심결에 던진 한 마디가(정확하게 27글자로 이루어진 한 문장) 한 방송국 카메라에 잡히는 바람에 난리가 났습니다. 언론은 보도하고 당국은 반박하면서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여부가 전 국민의 관심사였습니다만, 며칠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나 보도자제요청을 어기면서까지 국익을 해치는 보도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방송사에 대한 항의가 이어졌고 이 때문에 언론탄압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말한 본인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이 문장의 뒷부분에 과연 현직 미합중국 대통령의 이름이 나오느냐 그렇지 않다면 일설에 따라 다른 말이 그렇게 들렸던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세상은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바이든”파와 “날리면”파로 말입니다. 자, 이제 각각의 둘들을 비교하고 연결시켜 봅시다. 먼저 사실을 제기한 쪽은 “고개들어”파와 “바이든”파였고, 뒤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묵살하려고 한 쪽은 “고개들지마”파와 “날리면”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개들어-바이든”파와 “고개들지마-날리면”파의 짝을 만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흑백논리만으로 재단(裁斷)할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고개들어-날리면”파와 “고개들지마-바이든”파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순서대로 편의상 ‘가, 나, 다, 라’의 기호를 붙여보겠습니다. 먼저 “가”와 “나”파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사람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장에는 적어도 일관성이 존재합니다. 순수한 진보나 순수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다음 “다”와 “라”파는 사안마다 절묘하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여지도 존재합니다. “다”와 비슷한 부류를 굳이 생각해 본다면 이른바 ‘태극기 보수’쯤 되지 않을까요? “라”와 비슷한 부류를 굳이 찾아본다면 이른바 ‘수박’쯤 되지 않을까요?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에 따르면 기호(sign)는 기표(signifie)와 기의(signifian)의 결합입니다. 이러한 고전파 언어학에 따르면 바이든은 바이든이고 날리면은 날리면이지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고 날리면이 바이든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1939-2004)는 이러한 구조를 “해체”(deconstuction)하면서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이면에도 유사한 동질성이 있다며 “차연”(defférrance) 이론을 주창하여 일대 혁신을 이뤘습니다. “차연”(差延)이란 ‘차이’와 ‘연기’를 의도적으로 합성한 개념입니다. 만일 데리다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조금 만 더 들어가 보면(들어 보면?) 바이든이 날리면이고 날리면이 바이든이며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 마디 날리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하셨습니다. 이중으로 “감추”(칼립토)고 “숨긴”(크립토) 진실도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제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하고,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힘을 합쳐 산적한 현안들부터 해결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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