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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칼럼] 크리스천 청년들의 결혼관(1)
    주일학교 시절에 나의 고향 모교회(母敎會)에는 도회지에서 이사와서 약국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계셨다. 농촌마을에 약국을 차려가지고 제대로 운영이 될 것 같지 않는 데 피부가 뽀얀 정식 약사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 계신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여기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가 조금 더 자라면서 알게 된 것은 두 분중 한 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고 한 분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다소 불편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부라는 것은 무엇보다 신앙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서 ‘결혼’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아주 많이 기록돼있다. 결혼 이야기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결혼-이방혼인’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원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 만큼은 아주 단호하시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불신결혼(이방혼인)을 보라는 듯이 그것도 한 두번도 아니고 아주 난맥상을 이루는 인물 한 사람이 열왕기상에 나타난다. 바로 솔로몬 왕이다. 솔로몬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부왕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크게 올려드림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셔서 솔로몬에게 ‘어떤 것이라도 요구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어거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 4:29을 통하여 이렇게 축복하셨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주셨더라” 믿음 좋은 아버지 다윗왕으로 부터 <여호와신앙>을 정확하게 계승받았으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긴 사람이 솔로몬이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록 하나님으로 부터 <과분한 은총과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결혼관>은 혼돈과 난맥상의 극치를 이룬다. 열왕기상 11:1,3은 이렇게 기록돼있다. “솔로몬 왕이 바로 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은 후궁이 칠백명이요 첩이 삼백명이라”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전혀 거짓이다. 속이는 것이다. 왜? <사랑>이란 존중하는 것이요 책임을 지는 것이요 주는 것이다. 부모는 열자녀를 아끼고 책임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다함이 없는 사랑과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주신다. 그러나 <결혼과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한 남자(남편)가 한 여인(아내)만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사랑과 능력만을 주셨다. 그러므로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또는 한 여인(아내)이 여러 남편을) 사랑할 수 없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일부다처(一夫多妻)는 자신과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다. 일부일처(一夫一妻)야 말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이 법칙에 순종 할 때 평강과 행복과 만족이 있다. (시편 128:3, 4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신결혼(이방혼인)을 왜 그렇게 엄격히 금지하실까? 전혀 우리를 위하여서 그렇게 하신다. 성경은 불신결혼의 부정적인 파장을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다. 노아시대의 만연된 불신결혼 풍조는 결국 대홍수 심판을 초래하였다(창6:2,4). 어머니 리브가는 장남 에서가 불신 이방인과의 혼인을 기어이 밀어부치자 “나는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구나!” 하고 탄식하였다(창26:34,35, 27:46). 성경에서 불신결혼(이방인과의 혼인)의 최악사례는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시돈왕국 출신의 불신이방여인<이세벨>공주와 혼인한 사건이다. 이 잘못된 혼인은 북 이스라엘 나라에 최악의 참화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솔로몬 왕이 저지르는 비신앙적인 <불신이방혼인>은 이스라엘의 남북왕조에 아주 나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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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 검토할 가치도 없어 (1)
    ■헌법 개정에 대한 연구 흔적 전혀 보이지 않아 ■개정초안대로 개정된다면 더 잘못된 몹쓸 헌법으로 전락 제100회 총회에서 위탁한 헌법개정위원회가 개정안을 초안하여 서울지역 공청회를 하면서 배부한 헌법 개정 초안에 대하여 심히 걱정과 염려가 된다며 필자에게 보내주신 분이 있어 고맙게 받아 읽어 보았다. 그런데 개정 초안 내용을 보니 아연실색할만한 흠결부분이 부지기수여서 아예 검토할 가치조차도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말하면 뒤죽박죽이 된 개정 초안으로 오히려 미흡하기는 하지만 현행 헌법을 그대로 두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다. 1. 뒤죽박죽이 된 개정안 많은 부분이 뒤죽박죽되었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한 곳만 검토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현행 헌법의 정치 제15장 제8조는 A노회에 속한 S교회가 다른 노회인 B노회에 속한 T교회 사역자를 본 노회인 A노회에 청빙 청원하는 절차이고, 정치 제16장 제3조는 B노회가 다른 노회인 A노회로부터 B노회에 속한 T교회의 사역자를 청빙한 청빙 청원서를 송달 받고, T교회 사역자인 목사와 T교회 당회의 뜻을 물어 목사와 당회가 전임에 합의하면 T교회 목사의 시무 사임서를 받아 처리하고, A노회로 이명 증서를 주어 전임을 허락하는 절차이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 헌법개정위원회는 이와 같은 “다른 노회 목사 청빙” 절차(정치 제15장 제8조)와 “다른 노회로 전임” 절차(정치 제16장 제3조)의 조화와 연관성을 망각하고 정치 제15장 제8조는 현행 헌법 조문을 그대로 두고, 정치 제16장 제3조를 개정하면서 정치 제15장 제8조의 법조문 내용을 제16장 제3조로 옮겨 청빙과 전임을 혼합하여 개정 초안을 한 결과 뒤죽박죽이 되어서 사실상 정치 제15장 제8조와 정치 제16장 제3조의 연관성이 무너지고 서로 충돌되어 다른 노회의 사역자를 청빙을 할 수도 없고, 다른 노회로 목사 전임을 할 수도 없는 개정안이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 제15장 제8조는 지교회가 다른 노회 사역자를 청빙하는 청빙 절차로서 “지교회가 목사 청빙 청원서를 노회 서기에게 송달”하면 “노회 서기는 본 노회인 A노회의 허락 전에 즉시 해 노회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는 법리에 비하여(교회법률 상식 PP.255-256 참조) 정치 제16장 제3조의 개정안 내용은 해 노회인 B노회는 반드시 A노회가 S교회의 목사 청빙 청원을 허락한 것을 확인한 후에 T교회 사역자를 A노회로 보내도록 하였으니, A노회의 청빙과 B노회의 전임에 관련한 법조문이 정면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다른 노회의 사역자는 청빙도, 전임도 할 수없는 개정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현행 헌법을 그대로 둔 정치 제15장 제8조와 개정 초안인 제16장 제3조를 나열하면서 서로 상충된 부분을 비교해 보자. ①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둔 정치 제15장 제8조(다른 노회 사역자 청빙) “지교회가 청빙서를 노회 서기에게 송달한다. 노회 서기는 즉시 해 노회에 통보하며 노회는 해당 사역자의 이명서를 접수하고 청빙을 허락한다.” ② 개정 초안인 제16장 제3조(다른 노회로 이임) (필자 주: “전임”을 필요 없이 “이임”으로 자구 수정을 했는데 제목만 이임이라 하고 내용은 역시 전임이라 했다.) “어느 교회든지 다른 노회 지교회의 시무 중인 목사를 청빙하고자 하면 정치 제15장 제2조에 의한 목사 청빙 절차를 거쳐 청빙서와 청원서를 본 노회 서기에게 송달하고 본 노회가 허락하면 그 청빙서와 청원서를 청빙 받은 목사의 소속 노회에 송달한다. 청빙 받은 목사가 해 교회와 합의되면 소속한 노회가 목사의 교회 시무 사면을 허락하고 이명 증서와 함께 청빙 노회로 전임을 회송하면 이명을 접수한다.”로 되어 있다. 정치 제15장 제8조는 본 노회 허락 없이 통보한 후 해 노회에서 이명서가 오면 이명서를 접수한 후에 의무적으로 청빙을 허락하도록 했는데, 개정안인 정치 제16장 제3조는 노회가 허락하고 통보한 것을 확인하고 전임을 허락하도록 했으니 만일 이대로 개정이 된다면 청빙을 한 A노회와 전임을 해야 하는 B노회 간에 법조문 내용이 상충, 충돌되어 청빙과 전임이 불가능한 법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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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성공칼럼] 불과 물
    불과 물은 서로 상극이다. 이 상극은 서로 갈등할 수도 있지만 서로 하나가 되어 생명이 될 수도 있다. 식물이나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햇빛과 물(수분)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몸에 70%의 물과 36.5도의 체온이 유지되어야 한다. 즉 불과 물이 함께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하고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불과 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불과 물이 필요하다. 그럼 영적인 생명을 위한 불과 물은 무엇일까?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불은 사랑이고, 물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불과 물이 함께 있어야 하듯이 사랑과 진리는 늘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불과 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사랑과 선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삶에는 내가 예상치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이 때 서로 충돌하여 걱정과 화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서로 하나가 되어 자신과 타인의 삶을 살리는 생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9장에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옷을 다 벗고 잠자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세 아들 중, 함은 아버지를 비난하고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지 않았다. 함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었으며 아버지에게 선을 행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깨어난 후 이 아들의 모습을 듣고 난 후 그의 후손은 저주를 받는다. 반면 첫째 셈과 셋째 야벳은 겉옷을 가져가 뒷걸음질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사랑했으며 아버지에게 선을 행했다. 똑같이 아버지가 깨어난 후 셈과 야벳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선을 베푼 모습을 알고 난 노아는 두 아들의 후손을 축복하였다. 쌀 한 알 속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과 쏟아져 내리는 비와 하늘과 땅 속에 숨겨져 있던 온갖 영양분이 들어있다. 그러나 쌀이 쌀로만 있으면 딱딱하고 맛이 없고 소화도 되지 않는다. 이 쌀에 물을 넣고 불을 때서 밥이 되어야만 쌀 속에 있는 생명을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쌀에 물을 넣어서 불을 지피고 밥이 될 때까지는 솥에서 부글부글 끓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때 언제 밥이 다 되냐고 뚜껑을 열거나 부글거리는 것이 싫다고 솥을 엎어버리면 쌀이 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을 할 때 밥이 꿇는다고 뚜껑을 여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갑자기 자신이 원치 않는 사건이나 예상 못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걱정하고 분노하며 ‘나는 이해 못하겠다. 힘들다. 답답하다. 화가 난다. 내가 원하는 환경이 아니다. 자존심 상한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을 거부하고 탓하고 충돌하며 관계를 깨뜨리며 주변의 상황을 망가뜨린다. 이것은 마치 쌀이 밥이 되기 위해 끓고 있는데 밥솥을 엎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나 쉽게, 얼마나 많이 밥솥을 던져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태복음 17장에는 산 밑에서 한 아들이 귀신이 들려서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져서 아버지와 주변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원하던 상황과 조건이 아니라고 물불 안 가리고 자기 성질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분노하는 것은 불과 같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물과 같다. ‘불’은 서운해 하고 화를 내며, 원망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며 자신과 주변의 것들은 깨뜨려버리는 것이고 ‘물’은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두렵고 힘들고 우울함과 절망을 만들면서 내 내면의 힘들을 빼앗아가서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불과 물은 사랑과 진리일 수도 있고 악과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사건을 만났을 때 걱정하고 서운해 하고 원망하고 화를 낼 상황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품어 진리대로 선을 행함으로 사랑과 진리가 내 영의 생명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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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은혜의 말씀]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하박국 3장 16~19절)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왜 이렇게 이유 없이 고통이 왔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 들을 들어서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뒤에 하박국이 다시금 감사의 노래를 고백을 기도를 찬양을 한 것이 오늘 하박국 3장입니다. 성도들이 살아갈 때 오도 가도 못할 상황들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전화위복으로 삼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가고 그런 하나님의 소문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들을 때 죄인 된 우리가 연약한 우리가 큰 두려움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 말씀을 보면 ‘못하며’, ‘없으며’란 단어가 여섯 번 나옵니다. 아무것도 안되고 없을지라도 18절에 가서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그리고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어떻게 이런 악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냐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죄악 중에라도, 어려운 중에라도, 죄악이 더하는 곳에 은혜가 넘치듯이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이 쏟아지는 진노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혼란한 마지막 때 악한시대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이 수년 내에 회복을, 재건을, 부흥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소문을 듣고 가슴에 불이 일어나서 시기오놋에 맞추어서 박자를 빠르게 하고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려 아주 열정적으로 찬송을 고백을 기도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인도하사 사슴의 발같이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 고통의 때 가 오고 큰 싸움이 시작되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마지막 때 종말의 때에 속으로 성령 충만하고 겉으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해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앞에서 얼른 회개하고 얼른 자복하고 얼른 얼른 내 자신을 회개와 충만으로 변화시켜나가야 됩니다. 이 마지막 시대를 그렇게 감당하는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되 우리의 발을 높은 곳으로 인도해 주시고 사슴의 발 같이 해주시며 혼란한 세상 가운데 지치고 상하고 멍들고 삶의 의욕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절망인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지만 우리 하나님께선 다시는 시험들 일이 없고 요동칠 일 없고 의중에 흔들일 일 없는 그런 높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발목에 힘을 주실 것이고 가슴팍을, 우리의 심령을, 눈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해서 높은 곳으로 고공비행하고 세상의 잡다한 것에 흔들리지 않고 더 이상 악한 것에 낚이지 않는 그런 고차원의 삶을, 수준 높은 삶을, 높은 곳을 활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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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중독칼럼] 포켓몬go, 현실증강 게임을 통해 본 중독 문화
    [상황 5] 미국의 한 침례교회에 비그리스도인들이 마구 들어와 스마트폰을 들고 서서 포켓몬을 잡겠다고 난리가 났다. USA Today에 따르면 웨스트보로 침례 교회는 ‘www.godhatesfags.com(하나님은 동성애자를 싫어하는)'이라는 URL을 소유, ‘안티 LGBT' 활동과 인종 차별을 나타내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작은 교회다. 그래서 이 교회를 점령하는 포켓몬 유저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몸살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는 속초에서 다양한 사건사고가 일어났고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게임에 몰두하는 것보다 집 밖을 나가 움직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환경을 접한다고 쌍수를 들고, 이 게임을 환영하고 있다. 본인은 ‘P폐나목’이라는 저서를 통해 미래의 게임 산업에 대해 최소 2년 전부터 현실 증강 게임에 대하여 반복해서 예언한 바 있다. 축구나 야구처럼 제대로된 직업으로써의 프로게이머가 활성화되고, 현실 증강 프로그램처럼, 일과 공부를 하는 것과 게임을 하는 것이 접목되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었지만,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온라인 중독문화에 대한 영적 싸움의 자세 조차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적 싸움은 고사하고 신앙 전수와 영적 훈련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소홀한 현 시점과 미래를 볼 때 안타깝다. [조언5] 첫째는 전신 갑주를 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싸우겠다는 의지를 뜻하는 것이다. 링에 오르면 상대 마귀는 달려들어 우리를 삼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은 중독문화에 대해 오픈된 자세로만 서 있다는 것이다. 다운되었을 때 그 때 ‘도대체 이게 뭐지?’ 무엇이 중헌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은 마치 스몸비(스마트폰 좀비 신종어)가 되어 ‘무엇이 중헌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0-14 둘째는 세월을 아껴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껴라:원문을 살펴보면, ‘아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메노이'는 ‘도로 사다'라는 의미로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갈 3:13). 또한 ‘세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론'은 ‘중요한 시기' 또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기회를 사라'는 의미로(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회를 찾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놓치지 말라는 권면이다(갈 6:9). 중독문화에 빠져 있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와 교회도 어쩌면 어떤 중독에 빠져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령의 충만 기회,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잡을 기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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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소강석 칼럼] 통일 목회와 기도
    지금 한국교회는 전방위적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타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통일을 위한 역할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자 우리 시대에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을 하는데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는 합의 통일이다. 북한 정권이 개혁, 개방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북한 내부의 급격한 돌발 상황과 내부분열에 의한 통일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서는 둘 다 거의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원하고 희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지도자와 국민들이 평화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 역할을 한국교회가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개교회에서 통일설교와 기도를 통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통일을 희망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서 통일의 열망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정부와 정부는 서로 갈등하고, 군사적으로는 충돌하고 대치할 수는 있지만 교회는 물밑에서 북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따라서 무조건적인 나눔과 지원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독일교회가 그랬지 않는가? 독일교회가 국민들의 가슴에 통일을 희망하고 열망하도록 불쏘시개 역할을 했지 않는가? 물론 지금 남북의 상황과는 조금 다르지만, 서독 정부는 독일교회를 통해서 동독교회를 조건 없이 섬기고 지원하도록 했지 않는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 정부도 평화통일을 위해서 한국교회를 선용했으면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독일 교회의 경우 크리스천 목사와 보네베르거 목사를 위시해서 통일기도운동을 주도했던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30명이 시작해서 30만이 되고 50만이 모이는 평화통일 기도회로 발전하여 결국에는 통일의 꽃길을 열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도 작년에 광복70주년을 맞아 시청 앞 광장에서 평화통일기도회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가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을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정치적, 군사적 역학관계를 아무리 전략적으로 잘 관리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통일의 문을 열어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연합이다.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해도 한국교회가 연합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하나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통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연합부터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 되어서 기도하고 정부와 사회를 향해 통일에 대한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통일에 대한 시대정신과 분위기, 흐름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교회마다 통일의 희망과 열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서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에 대한 전략, 정책과 관련해 정부와 사회를 향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제사장의 가슴으로 민족분단의 아픔을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선지자의 눈빛으로 통일조국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을 위한 한 줌의 중보요, 꽃씨가 될 때 역사의 지평 위에 통일의 꽃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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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16-08-24
  • [성서연구] 일기와 자서선(로마서 14장 10-12절)
    초등학교 시절 가장 힘든 방학숙제는 일기쓰기였습니다. 개학 며칠 전쯤 불이 납니다. 불과 이삼 일 동안 밀렸던 일기를 써 치워야 하니, 엉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간 날의 기억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그 날의 정확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닌데다가 한꺼번에 여러 날치를 쓰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의 꾸중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일 뿐이었습니다. 그 일기는 숨기고 싶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 엉터리로 써 치운 글이었기에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철이 조금 들어 중고등부 시절이 되자 일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 때 역시 일기를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초등학교 시절처럼 일기가 급조된 엉터리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한 일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온갖 감정을 여과 없이 적었기에 일기를 보여준다는 것은 벌거벗은 영혼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의 마음이라 할까요? 어쨌든 그 때의 일기는 치기어린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어 부끄러웠습니다만,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적어도 그 내용만은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는 초등학교 시절의 것이건, 사춘기 때의 것이건 남에게 보이기 힘든 글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자서전은 어떻습니까? 자서전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입니다. 일기와 자서전의 고통점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기와 자서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 기록인 반면, 자서전은 원하지도 않는데도 사방에서 보내온다는 것입니다. <제발 내 인생의 기록을 좀 읽어 주세요.>라고 하는 게 자서전입니다. 왜 일기나 자서전 모두 자기가 쓴 자기 삶의 기록인데도 이처럼 다를까요? 그 이유는 일기는 정직하고 솔직한 기록인 반면, 자서전은 부끄러운 이야기는 빼버린 채, 삶을 미화시킨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자서전은 거짓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담은 일기는 숨기려 하면서, 거짓으로 미화된 자서전은 남들에게 공개하고 있으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은 자서전이 상당 부분 과장된 것임을 알면서도 <아, 참 훌륭하게 사셨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낯 간지러운 이야기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숨기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하지만, 장차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일을 낱낱이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셨고, 11절에서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고 하셨으며, 12절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오면 숨길 수도 없고, 과장하거나 미화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일기를 숨기듯 숨길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과장된 자서전을 내밀 수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한 줄 한 줄 진실된 우리 모습을 고백하듯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으로 채워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의 제2장 제목을 <혼자 읽는 자서전>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서전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혼자 읽기 위해 쓰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 혼자만 읽는 진실된 자서전을 쓰듯이 정직한 삶을 적어 나중에 하나님 앞에 내놓길 원합니다. 오늘도 한 줄씩 마음을 다한 삶의 내용을 적어가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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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양궁 스타 장혜진 선수
    장 선수, 세계인이 보는데서 기도해 그는 양궁만 아니라 신앙도 금메달! 금번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양궁선수 장혜진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는 단체전에서도 개인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놀랍게도 한국의 첫 2관왕이 되었다. 양궁이 얼마나 어려운가 확인해 보니 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가 70m이고 10점 과녁은 지름이 겨우 12.2㎝ 밖에 안된다. 사대에서 보면 10점 과녁이 희미한 점으로 보인다고 한다. 양궁은 매순간 방향과 세기가 바뀌는 바람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끝없는 훈련으로 터득한 감(感)으로 쏘는 경기라고 한다. 이번 경기에서도 간헐적으로 바람이 불었고 한번은 갑자기 초속 6m의 강풍이 불었다. 장혜진 선수의 마음은 요동이 없었으나 활이 흔들렸다. 화살이 그만 3점 과녁에 꽂혔다. 그래도 장 선수는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되레 방긋 웃기만 했다. 장 선수의 경기 장면은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이다. 특히 장 선수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는 그가 기독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산위의교회(장병창 목사) 교인이다. 그는 선수촌에서 생활할 때에도 성경책을 늘 곁에 두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라고 한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경기 전에 펼쳐보는 수첩에도 평소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는 활시위를 당기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머리 속으로 되뇌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고 한다. 장 선수의 얼굴 인상을 보면 어디 한군데 독한 구석이 없다. 온순해 보일 따름이고 얼굴엔 늘 웃음이 있다. 그토록 온화한 얼굴을 갖고도 그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두번이나 올라섰다. 특히 온 세계가 주목한 것은 그가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이다. 요즘 어떤 청년들은 자기가 기독신자임을 숨기는데 장 선수는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밝혔으니 얼마나 장한가.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기도세리머니를 삼가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불교 단체인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은 성명을 통해 올림픽은 개인의 종교를 들어내는 곳이 아니라면서 기도세레머니를 삼가라고 했다. “국가대표 지도부는 선수들이 종교행위를 못하도록 지도해야한다”하고 “언론은 기도세리머니 장면을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종자연의 트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도 기도세리머니를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개인의 신앙적인 표현은 당연한 권리이자 자유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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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24
  • [시사칼럼] 누구를 위한 일갈인가?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가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里)로도 모인다.”(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1. 1 중에서) 한국 조계종 소속 현각 스님의 발언이 화제입니다. 예일대 학부, 하버드 대학원의 스펙을 자랑하는 독일계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미국인 폴 뮌젠(Paul Muenzen)은 숭산을 스승으로 1992년 한국에서 출가하여 ‘현각(玄覺)’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됩니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벽안의 스님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는가 하면 그가 쓴 『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는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5년간 한국 불교의 자랑같이 보였던 현각이 얼마 전(7.29) 충격적인 일갈(一喝)을 남겼습니다. “실망한 한국 불교와 인연을 끊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가 제시한 이유는, 과도한 순응(hyper conformity) 문화로 대표되는 유교적 잔재, 여전히 만연한 인종 차별과 남녀 차별, 기복 신앙 등이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돈만 밝히는 한국 불교를 떠나겠다!” 박상륭의 소설 속 유리(?里)는 구도자의 성명(姓名)인 동시에 구도의 성소(聖所)였습니다. 청소년기 절친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삶과 죽음의 비밀 앞에 고뇌하던, 그러나 공문의 안뜰도 바깥뜰도 아닌 곳에 서 있던 미국인 폴 뮌젠은, 또 한 사람의 유리가 되어 또 하나의 유리에 정착해서 구도의 길을 걷는 현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박상륭의 ‘유리’인 동시에 예수 사람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각의 수행을 방해하고 결국 절연선언을 하게 만든-비록 바로 글을 내리고 연을 끊겠단 말은 와전된 것이라 번복했음에도-종교적 구습과 사회적 인습들은 어쩌면 한국 불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에 역사적 통찰력과 무엇보다도 성경의 고갱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굴종(屈從)과 교회에 대한 자기애(自己愛)에 의지하는 성도들, 혹은 백인에 대한 까닭 모를 동경과 유색 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은밀하게 자리 잡은 교회들, 교단 중앙에서부터 개(個) 교회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만연한 돈봉투의 신화들, 생존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 거룩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일신의 유희와 안락과 건강과 번영에 천착한 값싼 신앙들!> 현각의 일갈이 있은 후, 불교계 안팎에서는 자성과 참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회개의 목소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물며 절대적인 진리요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세계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국 교회를 향한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일갈이 있기는 있으되, 한국 교회 전체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영향력 있는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갈이 가끔 있긴 있으되, 거룩한 도전(holy challenge) 앞에서 진정성 있는 반응(realistic response)을 찾아보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회개하라!” 세례 요한의 외침이 문득 그리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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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04
  • [목회자 칼럼]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답게 ,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 다양한 실험을 해 보았다.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제도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이 곧 〈민주주의, 民主主義〉이다 민주주의 요체 (핵심)는 ①천부 인권사상 ②시장 경제이다 시장경제의 내용은 시장(수요와 공급)의 자유 사유재산인정, 자본흐름의 자유이다. 지금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경제는 〈소비가 미덕이다〉고 줄기차게 외친다. 생존과 생계조차 힘들던 1960~70년대에 우리는 이런 구호를 사치스럽고 꿈같은 희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가 남용되고 과잉소비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폐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소비하는 것이 취미가 되더니 그것도 이제는 싫증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심심하다고 한다. 이 집단적 〈무관심과 심심함〉이 “먹는 것, 요리하는 것, 음식 열풍”으로 쏟아지고 있다. 근래에 읽은 충격적인 글 일부분을 소개한다. 「어느 시간에 TV 채널을 돌려도 요리 Program을 만난다.〈건강 식단 만들기〉도 있고 산해진미 프로도 있다. 어느 여배우 집의 냉장고를 열어젖히자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온 진기한 버섯과 지중해産 요리 재료가 그득했다. 배곯던 시절을 경험한 우리세대의 눈에는 ‘호기심’보다 “저러고도 벼락 안 맞겠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요리사〉라는 좋은 우리말을 밀어내고 〈세프〉라는 서양어를 유식한 척 더 선호한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 후발국가 독일이 영국을 추격해오자 영국국민들은 〈국가적 위기〉라고 모두 소리를 높였다. 그 때가 10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이내 영국 사람들은 〈무관심과 심심하다〉라는 유행병에 빠져 들었다. 「맛없는 소박한 음식」도 감사하면서 달게 잘 먹던 영국인들이 미식열풍(美食?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맛집〉을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와 이태리 까지 맛을 찾아 떠나는 순례행렬이 줄을 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던 100년 전의 저 영국과 닮은꼴이 돼간다. 참으로 애타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음식 잔반으로 내버려지는 음식이 어느 정도냐 하면 북한주민 전체가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전국 곳곳이 지나친 소비와 낭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폐기물, 쓰레기처리 문제 때문에 대 홍역을 치루고 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마구 낭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 받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절제의 은사〉를 발휘하자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부요해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얼마든지 적게 쓰고 절제할 수 있다. 지구가 지니고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우리는 다음세대 우리 후손들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뱃새다 들판에서 큰 무리를 먹이신 후에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끼고 절제할 때 귀한 줄을 알게 되고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다. 편리주의, 낭비주의, 사치화를 경계하고 절제의 미덕을 세워 나감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움을 널리 펼쳐 보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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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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