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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2월 혁명
    부산 출신 임영준 시인은 2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제 / 한 꺼풀 벗고 / 당당히 나서 볼까 / 핑곗김에 둘렀던 / 장막도 걷어야지 // 햇살 마중 나가던 / 새순의 속삭임이 / 불을 지폈다” 얼어붙었던 겨울 땅을 뚫고 새순이 돋는 것을 보고 시인은 ‘2월 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2월의 속성인지-역사 속에서도 2월은 혁명의 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을 세웠고, 1917년 2월 22일 러시아에서도 파업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1919년 2월 8일,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일본의 수도 동경 한복판에 한국인 유학생 수백 명이 모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3.1 운동보다 한 달 앞선 2.8 독립선언입니다.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쳐 일단 강제 해산을 당했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 YMCA 강당에 50여 명의 학생들이 다시 모여 독립 운동을 협의하다가 주동자들이 검거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학생들의 독립 운동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광수에 의하여 국내외에 알려졌으며, 결과적으로 2.8 독립 운동은 다음 달에 벌어진 3.1 독립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97년 전 적들의 심장 한복판에서 일어난 2월 독립 운동은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선포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학생운동의 본산이나 다름없던 YMCA를 거점으로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1928년 1월 28일 이용도는 협성신학교 제14회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목회 초창기 그는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문화적인 교역자’였다고 합니다. 결국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그는 이른바 ‘신앙 혁명’에 들어갑니다. 박재봉이라는 청년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가 10일 간 불식불음(不食不飮)의 금식기도를 드리고 하산했습니다. 이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산기슭이나 시냇가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이나 언제든지 때를 가리지 않고 엎드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 3시쯤 되어 성전에 나갔다가 성령의 감동이 그의 영혼을 감쌌다고 합니다.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예수님께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그날 밤 마귀와 사투를 벌이고 동리 밖까지 마귀를 쫓아내고 할렐루야를 부르며 돌아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를 살았던 젊은 목회자 이용도는 그렇게 내적인 신앙혁명을 이루기 위해 고투를 벌였고, 마침내 울분을 품고 살았던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와 도전을 던지면서 영적인 회개와 쇄신을 부르짖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 세상에 오셔서 얼어붙은 땅을 깨고 굳어버린 마음들을 녹이셨습니다. 전쟁과 공포와 학대와 차별이 횡행하던 세상에 오셔서 평화와 위로와 연합과 통일의 혁명을 이루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들은 언제 어디서든 동토의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힘들고 난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용도처럼 필요하다면 신앙의 내적 혁명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때가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 기독청년들처럼 필요하다면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2월입니다. 새순 같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조국의 산하에 교회마다 곳곳에 불꽃처럼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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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목회자칼럼] 나의 마음에 울림을 준 기도
    WEC국제선교회(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는 영국의 C. T. Studd에 의해 1913년에 창립된 선교단체인데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다. Studd는 귀족출신, 캠브리지대학의 수재, 유명 크리켓 운동선수로서 졸업 후 출세의 길이 확실히 보장된 청년이었다. 어느 날 대학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선교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많은 유산, 직책, 명예 등 출세가 보장되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사의 길로 나서려 할 때에 이런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교수가 스터드에게 말한다. “여보게, 그것은 자네에게 너무 지나친 헌신이 아닌가?”, 그 말에 스터드 청년의 대답은? “교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 분을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수 없습니다.” 그 이후 그의 고귀한 믿음은 고귀한 삶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유산을 상속 받을 그였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10년 동안 사역하다가 건강 악화로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선교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리고 50살이 넘어선 어느 날 어느 문에 새겨진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글귀를 보고 이번에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선교현장에서 헌신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우리 가족이 영국에 살 때에 나는 런던 근처에 위치한 WEC국제본부를 여러 차례 방문한바 있다. 귀족이 살던 고풍이 찬란한 성과 수만평의 넓은 대지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이 팍 트였다. 기다란 복도에는 선교지에서 사역하다 순교한 WEC선교사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몇 주 전 주일오전예배에 뜻밖에 한국WEC국제선교회대표 박경남, 조경아 선교사 부부가 참석했다. 두분 모두가 의사출신으로 언젠가 선교사로 강한 부름을 받고 위험천만한 아프카니스탄에서 5년 가까이 사역하다가 2011년부터 대표로 섬기는 분들이다. 국제WEC는 80여 개국, 2200여 명의 선교사가 있고, 한국WEC는 60여 개국, 460여 명의 선교사가 소속돼 있다. 몇 주 전에 나는 믿음의 친구인 한철호 선교사(선교한국-미션 파트너스 대표)로부터 박 선교사 부부가 7주간 안식월을 갖는데 거처할 처소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 교회 집사의 조용하고 아늑한 별장을 연결시켜주었다. 그곳에서 안식하고 계시는 중이다. 그런데 사전에 연락도 없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마산재건교회는 설립70주년을 맞이하여 2016년 표어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요21장, 계2장)로 정했다. 주일예배의 설교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1)”(요21장)로 주님께서 베드로의 잃어버린, 식어진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는 사건이었고, 다음 주일설교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2)”(요계2장)로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이었다. 예배 후에 담임목양실에서 박 선교사 부부와 교회 성도 몇 명과 함께 기쁨의 교제시간을 가졌다. 교제 후에 나는 사모인 조경아 선교사께 기도를 부탁드렸다. 기도 가운데 조 선교사의 이런 기도가 나의 마음에 울림으로 다가왔다. “주님, 매일의 삶을 시작할 때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런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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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가정칼럼] 세상을 투명하게 살아라
    큰아들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를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이 식당 입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제 엄마는 먼저 들어가라는 눈치였다. “아빠,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여기서 이야기할래? 무슨 얘긴데?” 아들의 얼굴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아빠! 저를 용서하실 수 있겠어요?” “무엇이든 용서 못할 게 없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범하게 대답했지만 무슨 사고를 쳤나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빠! 저, 음란 사이트에 세 번 들어가 봤어요.” 아들의 고백은 청소년기 남자아이들이 한 번쯤 빠져드는 고민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심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성적 호기심이 큰 청소년 시절에 흔히 있는 문제이므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죄책감을 덜어줄까 생각하는데,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아들의 고백을 들으며 내 속으로는 뜨끔했다. 아들은 세 번 봤다고 했지만 나는 그 이상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고백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아빠는 너보다 더 많이 봤지만 이야기하지 못했구나. 우리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자. 앞으로 안 보면 될 거 아냐.” 이렇게 말했다면 아들이 나를 멋지고 화끈한 아빠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솔직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 나는 내 자존심과 체면을 차리느라 훈계조로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이제 그것으로 끝내라.” 아들은 용기를 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가 원치 않는 답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무엇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아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탈의 즐거움을 맛보느라 하지 말라는 짓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몰래 친구들과 술집에도 가보고,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집단폭력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창피함을 무릎 쓰고 솔직하게 고백한 아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살이에 대해 한 수 배운 느낌이었다. 뿌듯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부모 자식 간의 기강이 유지되던 시대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지도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스승으로 여기며 따라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 그날 나는 아들에게서‘용기도 힘’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용기는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진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법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당연히‘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거짓말이 더 많고 심각하다. 거짓말이 많은 사회일수록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강도가 높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감화가 자식에게는 두고두고 교육적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위압적 가르침보다‘우리 모두 투명하게 살자’고 말한다. 시간에 투명하고, 장소에 투명하고, 생각에 투명하자는 것이다. 가족에게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려서 시간과 장소에 투명한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함으로써 생각에 투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생각에 투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투명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격함양이라는 자기계발의 단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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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은혜의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장 13~17절)
    하나님 앞에서 반듯한 사람, 하나님과 통하고 가깝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그리고 신앙생활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16절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다이나마이트, 헬라어로는 두나미스, 능력. 복음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시기 때문에 만남과 만짐과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 의인의 반열로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과 함께 의인의 반열에 딱 서기 때문에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사람 때문에 요동치지 않고 주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의 반열에 서면 어떻게 될까요?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창세기 5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았기에 온 세상이 물심판을 당할 때 노아 한 가정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합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서는 의인 한 명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무너집니다. 출애굽 할 때 가나안을 정탐하러 간 12지파 대표 12명 중 10명은 암담한 현실만 바라보았기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 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을 향해서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5절에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는 법이 없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지 않습니까? 시편 12편에 의인의 성장이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한다. 믿음의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면 거목이 되고 그로 인해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 집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악인이 잘되고 승리하는 것이 맞습니까 했을 때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 말씀 하십니다. 환난과 고통의 때에도 의인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눈에는 안 보이고 손에는 안 잡혀도 오직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손에 잡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신앙인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 때문에 상처 받거나 흔들리지 말고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때문에 흥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외치는 믿음이 아니고 기도와 찬송 중에 믿음이 담대해 지도록 믿음이 굳세어 지도록 믿음 찬 삶을 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감당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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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성공칼럼] 내적인 교회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이 땅에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이 땅의 생명이며 천국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가 위기라는 것은 참 무서운 말이다. 이 땅의 교회란 주님을 시인하여 주님사랑이 근원과 목적과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인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셋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며 생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주님을 시인하고 사랑하는 것이 없거나 혹은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말씀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면 또는 말씀을 사랑한다면서 거짓말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악을 행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겉과 속이 있다. 겉은 그릇이고 속이 진짜인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겉에 속하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 생명이다. 그리고 회개는 깨닫고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그릇에 해당되고 실제로 깨달은 대로 사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또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건물은 천국의 통로가 되지 못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노후 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보여주는 속 모습이 진짜 교회인 것이다. 사람들의 속 모습은 어떤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사람을 사랑하는가? 진리대로 살고 있는가? 자신의 내면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과 사람에게도 사랑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가? 이것이 진짜 교회의 내면인 것이다. 한국교회가 왜 위기일까? 그 원인을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말씀을 너무 많이 듣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말씀을 들으면 행동으로 옮겨야하는데 말씀을 듣는데만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매일 새벽예배 때 말씀을 듣고, 수요일, 주일 아침과 오후 또 방송 혹은 주중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더 많게는 매일 큐티를 하면서 말씀을 듣고 행동하려고 하면 또 듣게 되고, 공부할 때마다 깨닫고 새로 행동할 것들이 생겨나서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은 멀리하게 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지 않거나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 몰입하거나 심지어는 말씀을 수단삼아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하면 결국에는 말씀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뱃살이 많이 나왔다고 하자. T.V나 인터넷 혹은 책에서 뱃살을 쉽게 빼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하자. 뱃살이란 꾸준히 노력하지 않고는 빠지지 않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게 된다. 이것을 반복하다보면 뱃살 빼는 방법을 누가 말하면 “그 방법 나도 알아” “말은 쉽지 실제로는 어려워”하면서 그 방법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게 된다. 이렇게 육체에 대한 진리를 무시해서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사장이 비서나 직원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을 했다하자. 그런데 명을 들을 때마다 “예”하고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심한 벌을 받든지 쫓겨나게 된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는 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일 수 없어 은혜를 베푸시고 유예기간을 두신다. 성경은 마지막 날 심판이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심판이란 내가 진리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리대로 살았는가에 대한 저울을 달아보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지 않으면 진리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 그러다가 싸움을 하기도 한다. 내 진리가 옳다고 서로 주장하다가 서로 원수가 되게 되어 사랑과 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위기의 한국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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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교회법률상식] 총회 임원회 노회에 목사 시벌지시 어불성설(2)
    (지난 번에 이어)[답] 2. 총회 임원회가 제시한 죄상에 대하여 ㆍ노회 허락 없는 기관목사 사칭에 대하여 기관목사 시무를 위한 노회 허락에 관하여 사설 언론사를 운영하는 자는 노회 허락이 필요치 않다. 기관목사라 함은 총회 사무 행정, 기독신문사 등의 총회 기관 사무를 의미하고 기관목사로 노회의 허락을 받은 목사는 노회의 정회원권이 부여된다.(교회정치 제4장 제4조 7항) 그러므로 S목사에 대하여 허락 없는 기관목사 사칭 운운하는 것은 기소할 수 있는 죄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노회의 허락을 받은 기관목사가 지교회의 위임목사는 겸직할 수 없으나 미조직교회의 임시목사는 겸직 시무할 수 있도록 교회 헌법은 규정하고 있다(정치 제15장 제12조 2항). 그러므로 S목사는 위임목사가 아닌 임시목사요 기관목사도 아닌 사설 언론사를 운영하면서 미조직교회를 시무하는 목사이므로 법적인 하자가 없고 오히려 합법적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현행 대한민국의 국법이요, 교회헌법이다. ㆍ담임목사 직무 해태에 대하여 담임목사란 조직교회의 위임목사를 의미하는데(정치 제9장 제3조, 동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가 아니고 미조직 교회를 시무하는 임시목사(시무목사는 제96회 총회장이 헌법 개정안을 공포하지 아니하고 총회를 파회했으므로 그 헌법 개정안은 폐기되었다. 그런데 그 폐기된 개정안을 2년이나 지나 제98회 총회장이 “추안 공포”라 하며 권원 없는 자의 공포였느니 법적 효력이 없어 여전히 임시목사이다. 만일 시무목사로의 개정을 인정한다면 그 개정된 헌법은 위임목사와 부목사를 노회의 언권회원이 되게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에 대하여 담임목사 직무 해태 운운하는 것은 담임 목사가 무엇인지 위임 목사가 무엇인지 임시 목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에서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S목사는 임시목사로서 총회 산하의 지교회를 시무하면서 사설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는 목사이므로 “담임목사(위임목사) 직무 해태”라는 죄상은 삼척동자도 생각할 수 없는 억지에 다름이 않는다. ㆍ총회와 산하 교회의 연합과 화합 저해하는 분열 행위에 대하여 필자는 S목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총회와 교회의 화합과 화해를 저해하는 분열행위를 한 일이 있느냐?”고 문의한바 “기독신문에 당사자가 직접 ‘호기심에서 카지노에 가본일이 있다.’고 시인 하였고 총회 임원으로서 카지노에 출입한 것과 총회 지도부 인사들이 습관적으로 카지노에 출입한 행위는 잘못이라는 것, 특히 그 중에 어떤 인사는 100회 이상이나 출입했다는 것과 고액의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확인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내용을 기사화한 것뿐이고 총회와 교회의 연합과 화해를 저해하거나 분열한 일은 없다.”는 답을 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총회 임원회가 S목사의 죄상 운운하기보다는 언론에 공개된 사건에 임원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임원회 자체로라도 총회를 개혁하는 차원에서 언론에 공개된 기사 내용을 분석 정리하여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합동 교단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상 3개 항의 죄상들은 한 가지도 범죄 요건이 성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증설명서가 없는 기소장으로는 노회도 총회도 절대로 재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결론 본건은 모모 언론사에서 수시로 총회 지도급 인사들의 공금 유용이나 횡령 등의 기사는 물론 금번 총회 임원을 비롯하여 총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필리핀 카지노에 출입한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특히 카지노에 100회 이상이나 출입했다는 등의 사실까지 기사화하자 범죄 당사자들이 총회 임원회를 충동하고 압력을 넣어 언론사를 운영하면서 미조직교회를 시무하는 S목사에 대하여 보복적으로 책벌을 시도하려는 불의를 행한 것 같아 보인다. 바라기는 총회 임원회와 S목사와 서울강남노회는 지혜를 모아서 법과 원칙을 따라 풀어야 할 것은 풀고 개혁해야 할 것은 개혁하여 멀지 않은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하는 칭찬을 받는 청지기들이 다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불법자들에 대한 심판 주 예수님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코람 데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코람 데오! 코람 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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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서임중 칼럼]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마다 새해가 되면 교회표어를 제정하고 1년 동안 기도하면서 그 제정된 표어 실천에 최선의 경주를 한다.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 가장 많이 보는 표어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읽으면서 가슴이 찡한 표어임에 틀림없다. 왜 이런 표어가 오늘의 교회 주제가 되었는가? ‘표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의, 주장, 강령(綱領) 등을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 즉 슬로건’이다. 이런 표어를 제정하는 오늘의 교회 근간은,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초대 신앙회복을 위한 부흥운동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직설하자면 오늘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주일 전국교회 초청을 받아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대부분의 교회 실상은, 구별된 거룩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일반 사회단체와 다를 바 없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라 슬픔을 넘어 아픔이 크다. 표면적으로는 행복하고 평안한 교회다. 그러나 며칠 함께 해 보면 실상은 갈등과 아픔과 분쟁과 분열현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표어가 단순히 표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사도행전 2:42-47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찡한 내용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그 모진 고난을 당하고 피범벅이 되어 골고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탄생된 것이 교회다. 이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사도행전적 교회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첫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지 불분명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주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수확물 없는 벌판 같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현상은 교제가 아니라 분쟁을 하고, 나눔이 아니라 할퀴며, 기도가 아니라 개인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셋째는 영적으로 죄인 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있다. 그것을 경외라고 한다. 경외(敬畏)란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 그러니 기사와 표적이 사라지고 울리는 꽹과리와 구리소리가 높아간다. 넷째는 믿음 있는 사람들은 ‘더불어의 삶’이어야 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보편적 삶이 실천되어야 한다. 사회단체도 그럴진대 하물며 거룩한 공동체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너무도 개인주의다. ‘네가 없어야 내가 있다’는 사탄의 논리가 자리매김을 해 가고 있다. 다섯째는 공생(共生)의 아름다움이 연주되어야 한다. 그리할 때 진정한 구제와 선교가 실천되고, 그 결과는 아름다움으로 진정한 복음의 은총을 공감하고 공유하게 된다. 진정한 공생(共生)은 복음의 삶에서 가능하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의 실현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이런 아름다움이 연주되고 있는가? 여섯째는 예배가 살아있어야 한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배가 무당이 굿 놀음하는 것 같이 세속화 되고 있다. 표현이 과격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타락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성전에서의 모임이 약화되고 예배가 개인의 소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 가는 것이다. 일곱째는 가정생활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집에서도 떡을 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런 가정예배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러니 이제는 기독교 가정도 붕괴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여덟째는 식음(食飮)의 구별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제도를 굳이 오늘에 지키라고 하진 않겠지만 주초 금지 문제가 이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짐이 되는 현상이 아프다. 먹고 마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몰락 이유 중 또 하나다. 아홉째는 감사와 기쁨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다. 만약 유행가는 잘도 외우면서 찬송가는 제대로 외워 부르는 곡이 없다면, 그런 그리스도인은 잠언 6:2절을 되새겨야 한다. 열 번째는 지역사회에서 칭송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의 교회는 지역사회의 칭송을 받는가, 지탄을 받고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스스로 눈을 감고 묵상해 보라. 대부분 지탄의 원인을 나에게 두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너 때문에’로 돌리는 현상이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이다. 마귀는 항상 ‘누구 때문에’를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항상 ‘무엇 때문에’를 강조하신다. ‘무엇 때문에’에 초점을 두면 ‘모든 영광은 주님께로 돌아가고 모든 잘못은 나에게로’ 맞추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변명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고, 걸면 넘어지며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실 말씀이 없었을까? 그렇게 자신을 모해하고 아프게 하는 무리들을 대항하실 능력이 없었을까? 아니다! 결단코! 주님은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다. 그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실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찢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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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성서연구] 믿음의 두 가지 능력(신명기 3장 23-29절)
    불교는 믿음보다는 수행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자력종교들은 면벽참선을 하든지 와선을 하든지 나름대로의 수고를 통해서 진리에 이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이시며 아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음 속에는 신뢰, 의지, 위탁, 순종 등이 모두 망라됩니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위대한 능력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임하는 능력을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또 누가복음 17장 6절은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교인들은 믿음을 <현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눈앞의 답답한 현실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믿음은 그러한 힘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 9장 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믿으면 아들 속에 임한 귀신이 쫓겨나고 건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에 익숙합니다. 믿으면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어나고, 믿으면 바다 가운데도 길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이와는 색다른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상을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바라보기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모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상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본문 23-25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모세의 반응입니다. 모세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 일로 다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대로 순종하였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믿음으로 현실을 바꾼 이들의 간증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간증은 듣는 이들에게 기쁨과 부러움을 함께 줍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주어진 형편을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예라고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 밖에서도 자유인이었고, 감옥 안에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감옥의 담장이 그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나 찬송하고 기도했으며, 복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빈궁에 처할 줄도 알았고, 풍부함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현상을 바꾸는 능력>과 <현상을 받아들이는 능력>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길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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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찌 이런 나라가 …
    영예로운건 하나같이 꼴찌이고 영예롭지 않은건 단연 1등인 나라 세상에 나라가 많다보니 이런 나라도 저런 나라도 있을 수 있지만 북한과 같은 나라가 또 있겠는가. 이미 알려진대로 북한은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EIU에서 발표한 2014년 전세계 민주화지수를 보면 167개국 중 167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또 북한은 2015년 헤리티지 재단이 발표한 경제자유화지수를 보면 178개 국가 중 178위로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 자유가 없는 나라로 꼽혔다. 그뿐아니라 2015년 프리덤하우스는 각국의 언론자유를 조사했는데 199개국 중 199위로 북한은 ‘최악 중 최악의 언론탄압국’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5년 오픈도어즈가 발표한 세계기독교박해지수를 보면 북한은 2002년부터 13년간 연속 1위를 차지하여 세계최악의 기독교탄압국임이 밝혀졌다. 또 있다. EU에서는 2006년 전 세계민주의 지수를 처음 발표한 이후 2008년, 2010년, 2011년, 2012년, 그리고 2014년 여섯차례 발표했는데 북한은 여섯번 모두 167개국 중 167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 기관에서는 조사대상국가들을 민주주의 수준에 따라 ‘완전 민주국가’ ‘불완전 민주국가’ ‘민주, 독재 혼합국가’ 그리고 ‘독재국가’ 이렇게 4등급으로 분류하였으며, 북한을 전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발표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명예로운 것은 하나같이 모두 꼴찌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은 단연 1위이다. 한가지 더 밝히고 싶은 것은 종교전문 사이트 어드히런츠닷컴은 2007년 김일성 주체사상을 세계 10대 종교 중 하나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종교의 3요소는 교주, 교리, 교인인데 김일성 주체 사상교의 교주는 김일성과 김정일이고 교리는 김일성 주체사상이고 교인은 북한 주민이라고 발표했다. 북한 정권은 3대 세습 독재체제이며 김일성 일가 신격화, 우상화체제이다. 북한에는 3,200개의 영생탑이 있다. 영생탑에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쓰여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죽지 않았다. 북한 인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 이렇게 믿는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두가지 생명이 있다. 하나는 생물학적 생명이고 또 하나는 사회정치적 생명인데 이것은 영원하여 김일성 수령을 통해서 인민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즉 김일성 수령을 통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부분 때문에 주체사상은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 2011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에도 노동신문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영생하실 것이다” 그랬다. 이것이 북한의 실상인데도 아직도 종북좌파가 적지 않다고 하니 이해가 안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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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시사칼럼] 붕어빵 아이들
    지난 1월 25일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글 하나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주의 한 거리에서 간암에 걸린 엄마를 대신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오빠를 곁에서 보살피면서 붕어빵을 굽고 있는 중학교 여학생 이야기였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시민들의 온정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SNS에 올린 글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확인 결과 붕어빵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연은 좀 달랐습니다. 간염이나 우울증 증세 등으로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부모를 둔 네 가정의 아이들을 교회가 돌보면서 자활할 수 있도록 붕어빵 포장마차를 지원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아동 학대’를 이유로 당국에 민원을 내는 사람들이 생겼고 결국 단속요원들이 철거 계고장까지 발부했다가 또 다른 시민들의 항의로 일단 철거는 보류되었다고 합니다. 켈로그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이자 세계적인 마케팅 대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그의 책 『다른 자본주의(Confronting Capitalism)』(더난, 2015)에서 자본주의가 직면한 14가지 문제를 적시했습니다. 첫 번째부터 순서대로 쓰면, ‘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소득불평등, 파괴의 씨앗’, ‘수렁에 빠진 노동자들’, ‘자동화에 일자리를 빼앗기다’, ‘이익은 기업이 비용은 사회가!’ 등입니다. 서두에 소개한 붕어빵 아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이 아이들과 그 가정들은 그토록 가난해야 합니까? 확실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답 하나는, 가난이 이 아이들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에 모순이나 결함이 있는 걸까요? 코틀러 교수는 바로 이러한 모색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자본주의는 가능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를 꿈꾼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하는 일종의 대안들이 바로 ‘온정적(Compassionate) 자본주의’, ‘포용적(Inclusive) 자본주의’, ‘인도적(Humane) 자본주의’, ‘건강한(Healthy) 자본주의’, 그리고 ‘깨어 있는(Conscious) 자본주의’ 들입니다.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일본 디플레이션의 진실』(2016)의 저자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그는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2015)라는 책에서 오늘날 인류가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를 향하고 있다는 스웨덴 환경운동가 헬라나 호지(Helena Norberg Hodge)의 말을 인용하면서, 울창한 삼림에 널려있는 나무 조각을 이용해 펠릿(pellet)이라는 연료를 개발하거나 친환경 스토브를 만들고, 나아가 CLT(cross laminated timber)라 불리는 고강도 목재를 개량해서 고층 빌딩을 건설하며, 농가의 버려진 집들이나 자가소비하고 남은 작물을 재활용하고 공유하는 일본 산촌(山村)의 현장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이산(里山) 자본주의’라고 부르면서,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때와 같이 자본주의가 그 기능을 상실할 경우 보완해 줄 수 있는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동화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전주의 붕어빵 아이들을 돌봐준 것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 식의 온정적 자본주의도 아니요,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 식의 ‘이산(里山) 자본주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기업 무를 자를 두며,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교회가 불쌍한 아이들을 품었습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오히려 세상은 교회의 아동 학대를 말하고 교회의 착취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언제 어디서나 교회는 항상 세상의 피난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능을 감당하는 교회의 모습마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교회가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이 그만큼 썩어버렸기 때문일까요? 붕어빵 속에 진짜 붕어 없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진짜 그리스도가 없다고들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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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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