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교회법률] 예배모범의 뿌리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장로교회로부터 복음을 수입하여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 헌법(신조,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신도게요,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은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등의 교회에서 제정된 헌법이 아니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총회가 제정한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세계 만국장로교회가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 역시 1915년부터 1921년까지(제4회 총회록 p.32, 제6회 총회록 p.p.18~19 참고) 9인 위원(마삼열, 양전백, 원두우, 김필수, 김선두, 곽안련, 함태영, 배유지, 남궁혁)에게 위탁하여 6년 동안 영국 웨스트민스터 헌법(신조, 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번역하여 출판한 1922년도 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최초의 헌법이다. 그러므로 예배모범의 뿌리는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등의 선교국가들이 아니요 오직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헌법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1월 22일까지 영국 교회의 목사 120명과 장로 30명(10명은 귀족, 20명은 하원 의원)으로 도합 150명을 위원으로 선정하여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5년 6개월 22일 동안에 1,064회를 회집하여 제정하는 중에 매월 하루는 150명 전원이 모여 금식 기도를 하였고, 매회 모일 때마다 3명이 기도하고 시작하는데 한 사람이 1시간씩 기도를 하였으니 3시간을 기도하고 헌법 제정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헌법 제정에 있어서 유일한 규칙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입증하라.”는 것으로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하여 헌법 조문을 제안하고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였으니 곧 성령의 역사로 제정된 헌법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는 독단적으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기도가 더하는 곳에 충만히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에 대한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신앙과 교리’는 개혁교회를 따르고 ‘의식과 제도’는 카톨릭 교회의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 영국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호응을 받았으나 철저한 개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들은 영국 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카톨릭 교회의 잔재를 뿌리까지 뽑아내겠다는 결의를 가지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찰스 1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마자 반 칼빈주의 자인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왕의 고문직까지 겸임케 하였다. 윌리엄 로드는 ‘가지이론’을 내세웠는데 그 ‘가지이론’이란. “원래의 교회는 카톨릭 교회 하나뿐이었으나 거기에서 몇 개의 가지가 나왔는데, 그 가지 중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가 영국교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지이론”을 스코틀랜드까지 따르도록 강요함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영국이 패전하자 영국은 전쟁 배상 요구를 당하게 되었고 찰스 1세는 배상금 지불에 대한 동의를 위하여 국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원 대다수가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로드를 파면하고, 종교재판소를 폐지하며, 3년마다 국회를 소집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청교도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체포 구금케 하니 청교도들은 이에 불복하고 청교도 혁명을 감행하였고, 국회 노장인 올리버 크롬웰이 국회 군대를 지휘하여 왕 군(王軍)을 제압하고 청교도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여기에서 청교도 혁명과 그 승리의 기간은 1642년부터 1649년까지인 반면,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청교도 혁명 승리의 가장 순수한 기간이었던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1월 22일까지 제정한 후 1649년에 찰스 1세를 참수하고 장로교를 영국의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에 관련한 영국의 시대적·정치적 배경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헌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청교도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 위에 성령의 역사로 제정되었으니 제2의 성경이라는 말이다. 즉 예배모범의 뿌리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이요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성경의 권위 위에 성령의 역사로 제정되었으니 곧 예배모범의 뿌리는 성경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1-14
  • [성공칼럼] 사랑이 시키는 대로 해보기
    천계에서 예수 이름이 나타나면 모든 영들이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지옥의 권세를 굴복시키시고 천계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중보하신 천계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의 악한 영은 그 예수 이름을 절대로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이해가 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뭔가를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뭔가를 얻는다는 것은 예수가 수단이 되고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면서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악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신문에서 학생들을 교회에 오게 하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면 만 원씩 주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안 불량학생이 예배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돈을 빼앗아서 도리어 예배에 참석한 아이의 삶이 망가지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학생들이 하도 예배를 나오지 않으니 이런 방법이라도 사용해서 말씀을 듣게 하려한 것이라 이해가 가지만 예배가 돈 받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를 잘 믿으면 내가 잘 되고, 내가 높아지고, 내 가문이 번창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 되고, 진리와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사실 또한 우려스럽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중심에 주님 즉 하나님 사랑이 주인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이 목적과 주인이 되고 나는 수단과 종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며칠 전에 기대했던 일이 취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하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두려움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면 취소한 상대방을 향해서 비난을 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잘못된 증거를 찾아서 서운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사랑이 시키는 대로 반응을 해 보았다. 걱정보다 서운함보다 당당함과 여유가 밀려왔다. 나는 상대방을 향해서 그동안 힘이 되어준 것에 대해서 밝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감사인사를 했다. 전혀 미안해하시지 말라고 했다. 상대방도 기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런 거절의 순간에 밝게 반응한 내 자신이 뿌듯했으며 상대방도 미안해하지 않아 전보다 더 좋은 관계기 되었다. 이런 것이 사랑이 시키는 대로 한 덕분인 것이다. 올해 막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면 딸 두 명이 대학생이다. 등록금과 책값과 생활비와 기숙사비를 조달해야하기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두 딸 중의 한명이라도 기숙사가 되지 않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학점관리를 잘할 것을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성적을 보니 잘 하기는 했으나 기숙사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원룸을 얻어야하는 상황이 될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되자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 밀려왔다. 걱정이 되면 걱정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서 비난을 하게 된다. 나는 당연히 딸을 향해서 비난과 잔소리의 화살을 쏘고 싶어졌다. 그 때 나는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사랑은 무엇을 하기를 원할까를 생각했다. 그러자 “두려워하지 말라. 해결책을 찾으라.”고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해결책을 찾기로 결정하고 찾은 해결책대로 행동하고 있다. 물론 딸에게도 웃으면서 대화하게 되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매 순간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보면 두려움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 해결책을 얻는 순간으로, 욕심이 사라지고 사랑과 자유가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1-14
  • [은혜의 말씀] 사무엘과 말씀 (사무엘상3:19~4:1)
    사무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라는 사람은 성경역사상 독특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14명 사사 중에 마지막 사사시대의 사사이기도 하고, 최초의 선지자이기도 하고, 제사장이기도 하는데 그 시대에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사무엘은 독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에 대한 말씀 몇 가지 중에 19절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성장엔진이 있는데 성장본능을 상실하고 성장엔진이 꺼져버린 시대가 이 시대가 아닌가! 엘리가 오늘 본문에서 죽습니다. 4장에 가면 엘리와 그의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죽습니다. 이 사사시대는 모든 것이 어두운 시대이고 성경역사상 가장 암흑의 시대입니다. 이 어두움의 시대에 아이 사무엘만큼은 쑥쑥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나타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이 19절 하반 절에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저는 오늘 말씀 중에 이 말씀이 가장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는 반드시 자랍니다. 시편 92편에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92:12) 우리가 이 시대에 성장본능을 잃어버리고, 성장 엔진이 꺼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사사시대와 한국교회가 비슷하다고 하는데요! 사사시대 암담한 시대에 지도자들이 쓰러지고 엘리는 늙어서 눈도 안 보이고 그런데 사무엘은 지금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성전에서 자랍니다. 엄마의 기도를 통해서 태어난 이 아이, 사무엘의 기도를 보면 재미있는 것이 어머니의 기도가 굉장히 힘이 있어서 그 어머니의 기도덕분에 사무엘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 이것이 사무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 결과로 결실로 태어난 아기가 사무엘인데, 사무엘은 많은 쓰임 받고 큰일을 했지만 사무엘의 자식들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무엘은 자식농사를 실패한 사람입니다. 기도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어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의 한 때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시간을 주신 것은 섬기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돕는 배필이 되고 회사에서 일터에서 어디든지 섬김의 자리가 되고,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고 주의 일을 할 때가 좋고, 쓰임 받을 때 그때는 죽을 틈이 망할 틈이 없는 기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오늘 성도들이 받는 데만 급급해가지고 은혜를 받고 내가 은혜의 막장 내가 은혜의 마지막 종착점이 되면 안 되고, 우리가 플랫폼이 되고 파이프, 행복통이 되고, 유통자가 소통자가 되어야 됩니다. 사무엘이 말을 하면 그대로 적중이 되고, 기도를 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고, 찬송을 부르면 그대로 주님께 사무칩니다. 이 시대, 마지막시대에 연말에 혼란한 시대에 지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성장발전을 시켜서, 하나님 말씀을 받는 대로 그것을 자녀에게 이웃에게 하나님 내게 짝지어 준 사람들에게 유통해서 필통해서 소통해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6-01-14
  • [가정칼럼] 뇌를 말랑말랑하게
    보통 사람의 뇌의 무게는 1400g다. 아인슈타인은 보통사람보다 170g 더 적은 1230g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천재인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아인슈타인은 뇌의 두정엽이 정상인에 비해 15% 넓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눈으로 본 이미지 등이 서로 결합해 공간 감각을 구성하고 수학적 능력을 담당하는 곳이다. 결국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수학적 능력은 이러한 능력을 담당하는 부위가 훨씬 넓었기 때문이다.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익숙한 일, 잘하는 일, 비슷한 일을 계속하는 것은 뇌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를 훈련하려면 특별한 비법보다는 내 생활에서 가장 익숙해진 것들을 조금씩 바꿔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평소 자신이 듣던 음악과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들어보고, 늘 가던 길과 다른 방향의 길로 가보고 같은 뜻이라도 전과는 다른 표현을 구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오리콤은 광고인의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는 브레인 체조를 소개했다. 1. 아인슈타인이나 칸트처럼 산책을 즐겨라.단순히 걷기보다는 게임 같은 것을 즐기면서 걷는다면 더 효과적이다. 에를 들면 항상 세 걸음 째는 큰 보폭으로 걷는다든지 하는 방법 말이다. 뇌신경 세포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뇌혈류량은 늘릴 수 없다. 많이 걸으면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회로가 튼튼해진다. 2. 대화를 해라.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고 단어를 선택하고, 표정을 관리하는 등 신경을 써라.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도 효과가 있다.일단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에서 벗어나라.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되면 전두엽이 게을러지게 된다. 전두엽은 자극할수록 발달한다. 3. 계산을 하라. 복잡한 숫자보다는 간단한 계산을 반복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하루 15분씩 매일 계산에 투자해 보라.계산은 마치 유산소 운동과 같다. 뇌는 근육과 같다고 말한 칼 세이건의 명언을 다시 떠올려 보라. 근육은 움직여져야 단단해진다.4. 손을 써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 일단 요리를 시작해 보자. 직접 다듬고, 자르고, 양을 재고, 지지고 볶는다. 손은 제2의 노리고 하지 않는가. 의외로 요리는 머리와 손을 동시에 쓰는 행위로, 뇌를 부드럽게 자극한다. 음식 맛도 전두엽을 자극한다. 여기에다 하나를 더 추가하라면 이것이다. “많이 웃어라.”는 가르침이다. 웃음은 뇌에 산소를 공급한다. 유머는 가장 탁월한 뇌의 자극제가 된다. 웃는 동안 창조성을 발휘하는 전두엽 부위에서 뇌 활동을 각성시키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하루 한번의 브레인체조가 삶의 생동감 있게 하고 행복을 안겨 준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1-14
  • [시사칼럼] 믿음이 승리다
    새해가 밝았습니다만,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와 전쟁 소식이 들려옵니다. 가난과 기아와 실업과 불황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세상입니다. 월터 윙크(Walter Wink)에 의하면 이 ‘세상’에 해당하는 단어 ‘코스모스(cosmos)’는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인간의 사회학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린 인간사회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는 죄가 지배하는 영역이요(로마서 3장),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다스리는 영역입니다(에베소서 6장). 신년 벽두부터 북쪽으로부터 수소폭탄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폭력 단체들이 난무하는 나라들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전히 악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이슬람제국(IS)과 내란 그리고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 독재정권들을 보십시오.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인간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방식을 통해서는 이러한 세상 권력에 맞서 장엄한 승리라는 것을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계속 권세를 확장합니다. 그러나 엘륄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신다. 그가 세계사의 심장에 꽂아 놓은 십자가를 어느 누구도 다시 뽑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결코 사라질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로마 제국을 바라보면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 의지하여 다음과 같이 토로(吐露)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여기서 “승리”라는 단어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와 어원이 같습니다. 니케는 티탄(Titan)족의 하나인 팔라스(Palas)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Styx) 사이에 태어났는데, 날개가 있고 손에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니케 여신을 유달리 숭상했습니다. 아테네의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 옆에도 니케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고, 터키의 에베소 유적지에도 니케 여신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새겨진 바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승리의 여신 니케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b)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승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으로는 ‘nike estin pistis’, 영어로 하면 ‘belief is victory’가 되겠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더 열심히 믿고,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만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칠고 타락하고 사악한 세상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야말로 그 자체가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히말라야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등반한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어떤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온 대답이 가슴을 아련하게 했습니다. “후배 산악인 박무택 대원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나섰다가 조난을 당했는데, 지독한 악천후 속에서 누구 하나 선뜻 구조하러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홀로 강풍과 눈보라,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그것도 밤중에 등반을 강행해 결국 박무택 대원을 만나 함께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박정복 대원, 그리고 그날 밤 등반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산악인, 가장 위대한 등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하나 알아주지 않는 평범함 속에 곧잘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향한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향한 승리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6-01-14
  • [서임중 칼럼] 軍·農·競의 정신으로
    우리는 언제나 그렇지만 더 좋은 내일을 소망한다. 2016년도 더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만복을 내려주시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성령님이 분초마다 도우시는 은혜로 충만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 놓고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하나님과 우리의 마주침이 있어야 기적 같은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마음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제일 원인을 발견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둘째는 무엇을 하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는 하루를 살더라도 살아가는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주님도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디 말대로 쉬운 일인가?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자기관리를 통하여 새해는 그렇게 축복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첫째는 군인정신을 가져야 한다. 군인정신은 고난을 각오하는 것,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 개인주의가 아니라 연합정신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군병이라면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각오해야 하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오직 주님이어야 하고 내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군인은 ‘아니오.’가 없다. 그랬다가는 죽는 날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엉덩이로 밤송이를 까라면 깐다.”라는 말이 군인정신을 대변하는 속언이다. 둘째는 경기자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경기자의 정신은 rule을 지키는 정신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탁월한 경기 능력을 가졌어도 경기에는 규칙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1등을 하고도 규칙을 벗어난 조그마한 일 하나 때문에 탈락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또 한 가지 경기자의 정신은 인내다. 승리의 면류관을 쓰기까지 참아야 할 일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포기하고 싶고 벗어버리고 싶을 때가 수없이 다가와도 승리의 그 시간을 바라보면서 경기자는 참고 또 참으면서 경기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지고한 가치는 페어플레이다. 이기기만 위한 전략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실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경기의 가치개념이다. 그리고 결과에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고 순복하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셋째는 농부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농부의 정신은 오래 기다리는 정신이며, 농부의 정신은 성실이며, 인내다. 그래서 시기를 잘 알고 그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농부가 때를 놓치면 그해의 농사는 폐농이 된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금방 이해가 되는 말이다. 밀레(J. F. Millet)의 만종(晩鐘)은 밀레가 가난했을 때 65달러를 들여서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그 후 12만 5천 달러에 미국인이 사갔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 신성이 있는데, 노동의 신성, 가정의 신성, 종교의 신성이다. 이 세 가지를 다 성취한다고 정말 축복된 삶이 이루어지는가? 이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게 해 주셔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는 말의 본뜻은 은혜 앞에 전치사 ‘엔’을 붙이는데 그것은 강해지는 것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을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군인과 농부와 경기자의 軍?農?競의 정신으로 강해질지라도 그것이 은혜 안에서가 아니면 안 된다. 즉 진정한 축복은 힘으로 강하고, 돈으로 강하고, 권력으로 강한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강하다는 것이다. 믿음 없는 사람일수록 세상적인 것으로 강함을 드러내는데 그것이야 말로 못난이들의 삶이다. 좋은 생각이 좋은 정신을 만든다. 좋은 정신이 좋은 역사를 만든다. 생각하는 것이 비뚤고 바르지 못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비뚤고 바르지 못하다. 말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의 행동은 더럽다. 그 결과는 항상 실패일 뿐이다. 신앙생활도 올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절제의 은사는 그래서 귀한 것이다. 말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행동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인격과 신앙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절제가 안 된다. 그래서 짐승 같다고 하는 것이다. 왜? 짐승은 절제가 없기 때문이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이 짐승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2016년을 맞이하면서 올 한 해가 평행감축(平幸感祝)의 한해가 되기를 바램 한다. 바램 한다고 되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만복을 내려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는가? 아니다. 복 받을 마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하고 그 그릇에 축복을 담기 위하여 촌음(寸陰)을 아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군·농·경(軍·農·競)의 정신이다. 2016년 한해를 그렇게 살아 축복받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16-01-14
  • [성서연구] 낡은 것 속의 새 것(빌립보서 3장 1절)
    해가 바뀌는 요즘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글자는 “새”자일 것입니다. 또 “새”를 한자로 하면 “신(新)”이니 신 자도 많이 사용합니다. 즉 새해, 신년, 새 수첩, 새 시간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새 자와 신 자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새해를 맞는 우리가 그 만큼 새로워지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해가 바뀐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이름, 신분, 가족관계, 직장 등 거의 모든 것이 지난해와 똑같습니다. 말은 “새”라고 하지만, 실제는 낡은 것들과 함께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설교도 늘 같습니다.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 때문에 답답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찬송가 205장을 보면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늘 들려주시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어찌 보면 목회자들이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웃을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1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전에 하지 않던 새로운 말을 한 게 아닙니다. 그는 늘 전에 하던 그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 그 안에서 성도가 맛보는 기쁨 등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조금도 수고로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안전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에 듣지 못하던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건 이단일 것입니다. 우리가 전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듣던 그 설교, 늘 듣던 예수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것이 영적으로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새해가 되어도 달라지는 것도 없이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그 답답함은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도 바뀐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뀐 것처럼 느끼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만 바뀌면 세상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록색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 온 세상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도 내가 선글라스를 썼기 때문에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6년을 맞이하면서 <왜 세상이 변하지 않는가? 왜 환경이 새로워지지 않느냐?>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만 새롭게 바뀌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를 새롭게 하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셨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에스겔서 36장 26-27절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했습니다. 2016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음과 같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그 동안 환경을 바꾸어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으나, 이제 다시 기도하오니, 저희 자신을 새롭게 하소서. 저희가 새로워짐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게 하옵소서!>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6-01-1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2)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생각지 말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해야 이런 통계가 있다. 역사상 놀라운 업적의 35%는 60대 노인들이 이룩했고, 23%는 70대 노인들이 이룩했고, 6%는 80대 노인들이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상 놀라운 업적의 64%를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이룩했다. 이러한데도 어떤 이들은 나이 70만 되어도 노인 티를 내기 시작한다. 새로운 도전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다. 생각이 왜 그런지 보기에 딱하다. 요즘의 70은 청년이다. 노인이 아니다. 70세를 고희(古稀)라고 한 것은 60세까지도 살기 어려운 때에 생긴 말이다. 해방되던 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50세 였다. 그 때문에 60세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잔치를 했다. 그것이 환갑잔치이다. 지금은 60세가 되어도 환갑잔치를 하는 이가 없다. 지금은 100세 시대이다. UN이 정한 연령 구분을 보면 17세까지는 미성년, 18세부터 65세까지는 청년, 66세부터 79세까지는 중년, 80세부터 99세까지는 노인,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이라고 했다. 나이 70을 가지고, 80을 가지고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더욱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생각하면 그는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시편 110편을 보라. 거기 그리스도인의 별칭이 있다. 그리스도인을 ‘청년’이라고 했다. 거기 청년은 10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전체를 청년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여간 나이가 맣아도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도리어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70, 80 아니라 90대 노인이라도 그리스도인의 별칭답게 청년다운 면이 있어야 한다. 정신도, 생각도, 패기도, 의욕도 젊어야 한다. 노년을 마치 청년처럼 살아가는 몇몇 분을 보라. 자교감리교회 강순용 장로는 81세에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91세에 전시회를 가졌다. 그는 지금도 나이를 잊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서면교회 원로인 원종록 목사는 82세에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지금 85세인데 전시회를 가졌다. 권춘식씨는 87세에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지금 그의 꿈은 대학원을 졸업하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올해 97세인데 현역처럼 이곳 저곳 강의하러 다닌다. 일본 나가오가 미에코라는 할머니는 80세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여 지금 100세가 넘었는데 그간 세계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60개를 따고 세계신기록을 11개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가 여간 많아도 위축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 뭐든 못하는 것은 나이 때문이 아니고 못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1-14
  • [시사칼럼] ‘ㅎ’이 득세하는 ‘ㅎ’ㅐ
    지난 을미년(乙未年)은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이라는 영화(1991년) 제목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충격적인 사건 사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난 테러(terror)는 문자 그대로 공포(恐怖)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불어권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정월 샤를르 엡도 잡지사 테러 사건과 11월 파리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시리아는 일 년 내내 이어진 난민 사태로 인해 지구촌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동시에 자극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메르스가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는 간통제가 폐지되었고 미국에서는 동성애가 합법화되었습니다. 모랄 해저드(moral hazard)에다 섹슈얼 해저드(sexual hazard)까지 가미될 예측불가능한 미래에 단정 지을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이 문제들 때문에 앞으로 무척 시끄럽겠다는 전망 정도일 듯합니다. 지금부터 꼭 한 갑자(甲子) 전인 1955년 을미년(乙未年),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 목사는 스위스의 알프스 산록에 라브리(L’Abri)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라브리(L’Abri)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은신처,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유럽에 여행 차 들렀던 쉐퍼 박사는 유럽의 영적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고 아예 거처를 스위스로 옮겨 일종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과 문명과 사회에 대한 공공의 신뢰가 무너지고 영적으로 지독한 방황에 빠졌던 신앙인들뿐 아니라 학자, 예술가, 엔지니어 등 수많은 지성인들이 쉐퍼 목사와 함께 모여 쉼과 회복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통해 치유와 자유의 은총을 나누었고, 그 결과 유럽 사회가 영적으로 회개하고 회복하고 화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이보다 앞선 1940년에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남부 손 에 로와르(Saone-et-Loire)에 위치한 떼제(Taize)에 스위스 출신의 개신교 수도자인 로제 수사(Brother Roger, 1915-2005)가 테제 공동체(The Taize Community)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 단체로, 1950년대부터 매주 이곳 떼제(Taize)에는 특히 전세계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와 자발적인 예배와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대전(world war)과 냉전(cold war)으로 인해 피멍이 들고 정신적인 여유와 신앙적인 공간을 잃어가던 청춘들이 이곳에서 진정한 휴식과 회개와 화해와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소 철학적이면서 학구풍이 강한 라브리 공동체와 달리 자유분방한 떼제(Taize)는 어느덧 한국의 젊은이들도 알음알음으로 많이 찾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10년 전 창설자인 로제 수사가 한 여인에 의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테제는 더욱 회복과 화해를 외치며 오늘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새로운 아노미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수선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마저 그 부패와 타락상이 세상의 가십거리로 전락한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앙의 공동체들 또한 기나긴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새해는 회개와 화해와 회복이 득세하는 ‘ㅎㅎㅎ’의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12-31
  • [소강석 칼럼] 네트워크 교회론으로 다시 시작하자
    한국교회는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교회가 부흥하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부흥 할 것이라는 막연한 장밋빛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주의와 속도주의에 편승하여 물량화, 자본주의화, 세속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의 거룩성과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상실해 버렸다. 또한 교회의 내부 기득권 싸움과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부도덕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비춰지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만과 불신이 최고조로 달하면서 비난과 공격을 받고 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정체 내지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이유는 한국교회가 21세기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와 21세기는 똑같은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도 달랐다. 시대와 사람, 목회 환경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회 스타일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세계교회, 특히 미국교회의 변화적 흐름을 보면 1970년대까지는 교단 중심의 전통적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80년대부터는 커뮤니티 교회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도자 중심과 문화적인 예배와 공동체 중심의 교회를 이루며 부흥 코드로 성장을 해 왔다. 그렇게 하다 보니 교단이나 다른 교회와는 별 상관없는 개교회 중심의 교회가 되었고 대형교회 목회자들 간의 영향력 전쟁이나 스타플레이를 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새천년을 맞은 어느 때부턴가 커뮤니티 교회에서 네트워크 교회로 바뀌기 시작했다. 구도자 중심보다는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r) 중심의 교회가 되고 문화 중심보다는 복음적 중심, 혹은 래디컬(radical)한 신앙 구조로 바뀌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커뮤니티 구조보다는 네트워크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부흥 코드보다는 플랜팅(Planting) 코드로 바뀌었다. 미국교회를 보면 하나의 대형교회가 아니라 코드가 맞는 교회끼리 서로 네트워크를 하며 세움형 교회로 확장해 가는 것을 본다. 그런데 미국교회가 아무리 네트워크형으로 간다 하더라도 내 눈으로 볼 땐 여전히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자기 코드나 성향에 맞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할 뿐이지, 미국 전역에 교회 생태계를 살리고 미국교회를 전방위적으로 지키기 위한 네트워크는 아직도 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대형교회도 많고 큰 교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동성결혼법이 통과되어 버렸지 않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내부적으로는 부흥이 침체되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공격을 받으며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기존의 조직과 매뉴얼만 유지하며 안주하고 있다.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면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교회를 다시 세우는 마음으로 개교회 내부에서부터 먼저 처치 플랜팅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끼리 주 안에서 유기적으로 거룩한 네트워킹이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힘으로 이웃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가 네트워킹을 하며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네트워크이고 세움이며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신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네트워크 교회로 새판짜기를 해야 한다. 그 견고한 네트워크 교회 위에 부흥의 불씨를 살리고 사회적 리더십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히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을 막고 다시 목회 생태계를 복원하여 비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한국교회여, 다시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네트워크 교회론의 토대 위에 제2의 부흥 시대를 일으켜보자.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5-12-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