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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인물탐구]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서 베드로와 같이 갈릴리 해변 벳새다의 어부였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고 자기 형 베드로를 전도한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가 예수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하시면서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같이 예수의 부름을 받자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습니다. 안드레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함을 뜻합니다. 실제로 안드레의 삶은 예수께 부름 받은 후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안드레는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물속에 있는 고기를 잡는 자가 아니라 죄악의 물결 속에 떠내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보고 안드레와 또 한사람의 제자에게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였고 안드레는 예수를 쫓았습니다. 안드레는 예수가 계신 곳에 방문하여 예수와 함께 거하면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후 제일 먼저 그 형인 베드로를 찾아가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말씀을 믿고 고대하였기에,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이 최대의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안드레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전함으로써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복음을 증거 하실 때 무리가 기진하여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광야인지라 음식을 살 수도 없었으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고 물으셨을 때 빌립은 계산을 통해 그것이 불가능함을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예수께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사람들이 굶주려 고통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할 수 있는 방도를 다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드레의 모습에서 그의 인정이 풍부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을 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 자리를 피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만일 안드레가 사람들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별로 효용성도 없어 보이는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드레의 인정 많음은 주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시는 데 있어서 한 도구로 사용 받았습니다. 성도는 이웃의 고통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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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교회회계] 교회와 세금
    지난 12월 2일, 종교인 과세를 명문화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목회자 사례비를 기타 근로소득으로 간주하여, 2018년부터 6∼38%의 세금을 부과하는 세법이 확정된 것이다. 교회는 지금까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음으로, 교단의 유지재단에 소속되어 사업자등록을 신청하면 고유번호증(606-82-XXXXX)를 부여 받고 일정한 부분의 조세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종교인 과세를 포함, 최근 언론을 보면 학사관과 교육사업, 쉼터 공간 등 선한 취지로 시작한 교회사역이 수익목적으로 분류되어 과세대상이 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해 복음전도에 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본 교회회계 칼럼 제11호에서는 교회와 세금문제에 대해 다룬다. 조세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경비충당에 필요한 재정수입을 조달할 목적으로 과세요건을 충족한 모든 자에게 직접적 반대급부 없이 부과하는 것으로, 교회의 경우 주로 다음 사항이 관련되어 있다. 첫째 소득세(법인세)는 개인의 소득과 법인의 이익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교회 고유의 예배와 목적을 위해 발생하는 헌금수입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를 들어 교회건물에 카페를 운영하며 금액을 받거나, 학사관을 운영하며 시설유지를 위해 최소 임대료를 받는 경우 수익사업으로 간주되어 과세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이 경우 과거년도 분까지 소급되어 과세될 수 경우 교회재정이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취득세와 등록세는 교회 부동산 및 비품 등의 취득시에 부과하는 것으로, 교회의 종교용 재산, 예배당, 교육관, 담임목사 선교용 사택(1주택) 및 교회와 인접한 주차장(연건평 약1/4의 면적이하)은 비과세된다. 그러나 부목사 및 사찰집사 가족의 주택, 차량, 공원묘지의 취득 등록은 과세대상이다. 기도원은 종교목적으로 온전히 사용될 때 비과세된다. 또한 교회재정을 통한 부동산 취득은 모두 교회명의로 소유권 등기가 되어져야 하며, 위반시 부동산 실명제법에 의해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셋째 재산세와 양도세는 교회재산의 보유 또는 처분시에 발생하는 세금으로, 취득 및 등록세와 동일하게 고유 목적에 관련된 예배당, 담임목사 사택, 주차장 등의 보유는 비과세되나, 그 이외는 과세 대상이 된다. 또한 담임목사 명의로 등기가 된 경우 재산세와 종합토지세가 과세될 수 있다. 또한 교회 고유목적을 위해 재산을 취득하였더라도 3년 이상 동 목적에 사용되지 않을 경우 재산세와 양도세가 부가될 수 있다. 넷째 부가가치세는 재화와 용역의 소비행위에 대해 부과되는 소비세로 보통 매출세액의 10%가 부과된다. 그러나 교회는 면세사업자로 고유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실비 또는 무상으로 공급시 부가가치세가 면제되며, 부동산 임대 등 수익사업을 위해 계속적으로 공급하는 경우 과세대상이 된다. 또한 교회가 건축, 건물수리, 비품구입 등을 할 때 납품업자에게 지급하는 부가가치세액 환급은 매출세액이 없는 면세사업자이므로 없다. 다섯째 종교인 과세는 기존 교회직원의 근로소득 원천징수에 추가해, 목회자 사례비를 기타소득 중 종교인 소득으로 규정해 세금을 부과한다. 일반적으로 원천징수 대상은 ①이자소득과 배당소득, ②봉급, 상여금 등의 근로소득, ③퇴직소득, ④상금 및 강연료 등 ⑤인적용역소득, ⑥공급가액의 20%를 초과하는 봉사료 등이다. 또한 징수세액은 연말정산 시 소득자에 따라 보험료, 의료비, 연금, 신용카드 등을 추가로 공제하여 환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천징수를 하지 않을 경우는 다음연도 5월까지 종합소득세를 납부한다. 그리고 과세당국에 의한 종교단체 장부 확인은 종교인 소득 관련 부분에 한정하도록 되어 있다. 즉 교회는 영리는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도의 예배 공동체로서, 고유목적 사업에 대해서는 소득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등 대부분이 과세가 면제되고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포함해 교회사역의 지경이 넓혀지고, 또 수익사업에 대한 경계선과 판단해석이 모호해짐에 따라 과세범위를 확대하려는 일부 시민단체의 요구나 과세당국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일련의 종교인 과세문제가 이 시대 한국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교회가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다. 국가는 교회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세상을 향해 더 거룩해 지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가는 희망찬 한국교회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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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교회법률상식] 은퇴장로는 원로장로 될 수 없다
    [질의] 대구중노회 산하 S교회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당회가 은퇴한지 5년이 지난 P장로님을 원로장로로 세우기 위하여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원로장로로 피택을 하였습니다. 노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법적으로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총회에 질의를 하였는데 총회에서는 노회가 알아서 하라는 답변이 왔다고 합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법에 적합한지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대구 평신도) [답]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 질의 내용의 문장에 따라 합동측 헌법으로 답한다. 1. 원로장로의 추대 절차에 대하여 정치 제5장 제5조(원로장로)에 “동일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하던 장로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임할 때 그 교회가 그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공동의회의 결의로 원로장로로 추대할 수 있다. 단,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 원로장로에 대한 규정 안에 질의자가 요구하는 해답이 다 들어 있다고 본다. (1) 원로장로의 추대 구비 조건 ① 시무장로로서 시무 사임이 전제되어야 하고 ② 원로장로로 추대 시기는 시무 사임을 제출할 때이어야 하고 ③ 시무 기간은 동일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자이어야 하고 ④ 교회가 그의 명예를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2) 원로장로 추대 절차 ① 장로로 시무 기간이 20년 이상이 된 자로서 사임서를 제출할 때 교회가 그의 명예를 유지하고자 하면 ②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③ 투표수 과반수의 찬성으로 원로장로로 추대한다. 2. S교회 당회와 P장로에 대하여 S교회 당회가 은퇴한지 5년이 지난 P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하여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원로장로로 피택하였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과연 S교회 당회는 은퇴한지 5년이나 지난 은퇴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산하의 목사와 장로들이라면 이와 같은 법리 정도는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는 P장로의 과욕에 의하여 S교회의 당회가 고의적인 불법을 행함으로 교회와 노회를 어지럽게 함에 다름 아니다. 3. 대구중노회와 총회에 대하여 대구중노회가 S교회의 불법행위로 은퇴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한 공동의회까지 한 것을 인지하고 “법적으로 안 된다.”라고 S교회 당회에 지도했으면 일관성 있게 하회를 지도해야지 총회에 질의를 했다고 하니 법리를 몰라서인 것은 아닐 터인데 총회에 떠넘기려는 것 같아 보이고, 총회 역시도(혹 임원회?) 불법인 사실을 알면서도 법리적인 답변을 하지 아니하고 “노회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노회에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 등은 노회 행정이나, 총회 행정의 흠결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결론 원로장로의 추대는 노회의 허락이나 총회의 지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요 당회의 직무에 속한 것이므로 당회 자체에서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원로장로의 추대 사항이 당회의 직무에 규정되지 아니한 것은 1993년도 헌법 개정에 의하여 원로장로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당회 직무에 원로장로 추대 업무를 추가하여 규정하지 아니한 연유이다. 본건 S교회 당회는 은퇴장로가 된지 5년이나 경과한 P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하여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를 회집하여 원로장로로 피택한 것을 무효로 하고, 대구중노회는 하회인 S교회 당회에 법리적으로 한결같은 지도를 해야 한다. 만일 이를 방치하여 S교회 당회가 은퇴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는 전예를 남긴다면 전국 교회에 확산되는 것은 물론이요 전국 교회에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혹 S교회 당회가 교회 헌법을 어기고 무리하게 P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한다면 상회인 대구중노회는 S교회 당회와 당회장에 대하여 그 책임을 추궁하여 교회의 법적인 질서를 철저히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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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성공칼럼] 좁은 문, 넓은 문
    성경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한번 이렇게 상상해보자. 육체가 때가 되어 죽게 되었다. 죽은 후에 천계에는 심판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두 개의 문을 보여주신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이다. 하나님의 심판 방법은 두 길을 보여주시면서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좁은 문을 택할 것인가? 넓은 문을 택할 것인가의 자유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람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한 부류는 옳은 것과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좁은 길을 가는 사람과 또 다른 부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지만 그 옳은 길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와 학식에 관계없이 어떤 것이 옳은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음란한 행동을 하거나 또 거짓말이나 폭력을 행하면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옳은 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거짓과 옳지 않는 것을 하고나서 후회하고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또 몸이 비만이어서 혈압이나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자. 그러면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인이 배긴 습관 때문에 옳은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의사의 말대로 행동으로 옮겨서 건강을 회복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육체로 있을 때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죽음 후에 심판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즉 내 마음속에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습성이 있으면 좁은 길, 생명의 길로 갈 것이다. 그러나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거짓을 선택하고 악한 길로 가는 습성이 있으면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핸드폰을 밝은 곳에서 보면 괜찮은데 불 끄고 보다가 동영상이 켜진 채로 잠을 자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 되면 그 눈이 어떻게 될 지 걱정이다. 아이들은 이런 일이 반복되면 눈이 망가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이 아이는 눈을 망가뜨리는 길로 가는 것이다. 또 새해에 자신이 어떤 결심을 한다. 이루어지지 않는 길, 안 되는 길로 가는 사람은 목표를 세우고는 놀기만 하고 즐기기만 한다. 반면에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며 집중하여 아이디어를 찾고 기획하고 움직여서 목표를 이루어낸다. 무엇이 옳은 길이며, 진리의 길인가? 난 어릴 때는 부모님께 칭찬 듣기 위해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옳은 줄 알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진리를 깨달은 다음부터는 진리를 아는 것이 옳다고 여겨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살았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옳은 줄 알고 모든 심혈을 다 기울였다. 5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 말씀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믿음이란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랑과 선은 진리대도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노라하고 사랑과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내년 한해는 좁은 길 즉 옳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 또 내 생각과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서운해 하지 않고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삶 그리고 혹시 누군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을지라도 여유 있게 받아들이면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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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은혜의 말씀] 전쟁과 주적 (엡6:10~13)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전쟁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는 것이 전쟁입니다. 총성 없는 전쟁, 소리 없는 전쟁, 이상한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오늘 성경 말씀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다 합니다. 인생사는 것이 전쟁이고, 성경말씀은 전쟁이야기입니다. 창세기부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있고, 시편 중간에 나오는 용어들이 군사용어가 많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우리가 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속으로 성령 충만, 겉으로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문제가 내부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전쟁에 있어서 어이가 없는 것은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사탄마귀의 샅바를 잡아보기도 전에 적전분열, 내부갈등, 내적인 소모전으로 인생 끝내버리는 게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적을 잘 분간해라 합니다.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야 될 가족하고,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적을 만드는 그 자체가 비극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대적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해야합니다. 다 죽이면 누구와 사는 겁니까! 전쟁의 비극은 싸우는 사이에 적군도 죽고 아군도 죽고 쌍방이 다 다치기 때문에 그것이 전쟁의 비극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내 내면의 세계가 어지럽고, 혼란하고, 불안할 때는 건드리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건드리면 과민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속으로 성령 충만, 겉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됩니다. 여러분, 가장 어려운 전쟁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자기를 이겨서 감정 선을 극복하고, 마귀를 대적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야곱이 씨름할 때 보면, 야곱이 마지막 전쟁 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선물공세를, 작전을 세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의 샅바를 잡고 주의 사자와 얍복강에서 씨름을 하는데 하나님이 거기서 야곱에게 져 주시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울고불고 밤을 새워 다리가 부서져도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져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주적을 분간 못하면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내가 주인이 된 사람은 이기적인, 독선적인, 자기합리화에 빠져서 최악에 빠지는 것이고, 돈이 주인인 사람도 맘몬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인색하게 되고 그걸 가지고 효율을 따지다 보면 사람이 야비해지는 것입니다. 돈 한 푼 아끼려고 사람이 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고 경천애인이 동양사상의 핵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따라가니까 그 사람이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이고,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생로병사, 생사화복,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루시는데,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내면의 세계가 충만해지고, 내면의 세계가 성령 충만을 받아 속사람이 부유하고 단단해지십시오. 그리고 겉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서 마귀의 체계를 능히 물리치고, 마귀의 속임수에 나가떨어지지 말고 괜히 대리전에 빠지지 말고, 마귀의 속임수에 나가떨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전선에서 승리하고 자기를 이기고 마귀를 대적해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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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1)
    그리스도인도 노쇠하지만 속사람마저 낡아지면 안돼 사람들이 어릴 때에는 나이 먹는 것을 퍽 좋아한다. 설날 아침에 한살 더 많아졌다고 좋아서 폴짝폴짝 뛰는 아이도 있다. 어릴 때에는 그래놓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나이가 많아지는 것을 싫어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하다. 여성은 29세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30대에 접어들고도 30대가 아닌듯이 2, 3년간 어물어물하며 지낸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젊어보인다’하면 좋아하고 ‘늙어보인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어느 극장에서 있었던 얘기다. 장내에서는 모자를 쓰지말라고 ‘탈모’라고 써붙였다. 그랬는데도 여성관객들이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다. 극장 지배인이 묘안을 강구했다. ‘탈모’라고 쓴 팻말에 ‘단 노인은 써도 무방함’ 이렇게 썼다. 그 후로는 여성들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모자부터 벗더란 것이다. 우스운 것은 할머니까지도 모자를 벗더란 것이다. 이만큼 사람들이 늙는 것을 싫어하고 늙어보이는 것까지 싫어한다. 그러나 늙기 싫어한다고 늙지 않는가. 우탁의 시조에 뭐라고 했던가.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엔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하지 않았는가. 사람이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늙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세월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는 것은 불신자의 말로는 ‘자연의 섭리’이고 성격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세월이 지나가면 별수 없이 나이가 많아지고 노쇠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서 명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명심해야할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속사람만은 노쇠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고후 4:16에 보면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랬다. 또 시편 92편에 보면 그리스도인을 종려나무와 백향목에 비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종려나무와 백향목처럼 늙어도 여전히 결실이 있어야하고 빛이 청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로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도 젊은이 못지 않은 패기와 의욕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아는대로 모세는 80세에 동족을 구출하는 엄청난 사역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했고 갈렙은 85세에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는 열정이 있었다.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나이가 조금 많다고하여 의욕을 상실하면 그는 그리스도인 답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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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목회자칼럼] 우리 안에 숨어있는 5가지 적(敵)
    ①욕망 ②의심 ③불평 ④교만 ⑤두려움 감사의 반대가 불평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감사하라>는 말이 그 무엇보다 많이 나타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겠다고 까지 말씀하신다(시50:23). 감사하면 내 자신이 행복하고 건강해진다. 그렇다면 감사의 반댓말은 <불평>이다. 그러므로 불평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다. 불평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소통)가 막힌다. 불평하면 마음속에 평강이 스며들 수 없다. 불평은 평강이 찾아드는 것을 가로막는다. 오히려 작으나마 있던 평강까지 쫓아내버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평을 하면 자신만 손해보고 불행하게 된다. 계속 불평하다보면 자신의 심성이 악해진다. 황폐해진다. 알고 보면 불평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병이다. 암보다 무섭다. 감사하면 암이 점점 나을 수 있지만 불평하면 암이 발생할 수 있고, 계속 불평하면 암이 심하게 악화되어 회복불능 상태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불평이 암보다 더 무서운 우리 안에 숨어드는 적이다.성경에서 불평의 절정 사례(事例)는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라는 인물이다. 고라는 무엇을 불평하는가? 모세의 지도자 직분을 불평한다. 모세는 자기가 원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한사코(?) 모세를 밀어 붙이셨다. 이 과정을 온 이스라엘이 다 알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모세의 지도자 직무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달거나 도전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모세를 큰 권위와 능력과 영적권위로써 감싸 보이셨다. 그러므로 고라는 모세를 불평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고라는 모세의 지도력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불평을 쏟아 내었다. 사람에게는 이러한 죄성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불평은 무서운 적(敵)이다. 불평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불평한 결과로서 상황이 바뀌어진다면 그 바뀌어진 상황은 결코 축복이나 행복이 되어지지 않는다. 성경에서 불평의 사촌은 <원망>이다. 고라의 불평 때문에 순식간에 250명이 죽었다(민16:35). 그리고 이 후유증이 <원망>으로 발전돼 무려 14,700명이 죽는다(민16:49). 불평은 참 나쁜 병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평/교만/우상숭배> 이 세 가지를 가장 싫어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불평의 열매는 4가지이다. 첫째, 불평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는데 불평은 맹렬한 불길과 같이 순식간에 여러 사람에게로 퍼져나간다. 고라 한 사람의 불평이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사정없이 흔들어버렸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집단불평 유행병>에 빠져들고 말았다. 둘째, 불평하면 그 속마음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소화불량과 불면증에 걸린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며 신뢰하는 자>에게 단잠을 주신다. 그러나 불평하면 자기 스스로 불안의 감방에 갇혀버리고 만다(시편127:2, 렘31:26, 삼상16:14). 셋째, 불평하면 자기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간다. 그리고 사람이 오지 않는다. <소문만복래 - 笑門萬福來>라는 말이 있다. 자족하면서 감사함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집에는 대문으로 만복이 들어온다. 그러나 불평하면 있던 복도 떠나고 곁에 있던 사람도 떠나간다. 넷째, 불평하면 무엇보다 <성령님의 임재>가 사라진다.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가는 것도 손실이고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님이 떠나가 버리시면 살 수가 없다. 살 맛이 없다. 살 의욕이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主)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51:11)라고 눈물로 간구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다. 불평할 권리도 없다. “주님, 나는 오직 <감사할 의무>만 있는 사람이로소이다”라고 믿고 고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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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목회자칼럼] “서울에서 감사, 일산에서 그리움”
    어제 오전, 제경숙 집사로부터 모친(강정순 집사, 86세)의 소천소식을 듣고 오후 3시경 여러 성도들과 문상 길에 올랐다. 서울을 거쳐서 일산으로 가는 여정이어서 우리는 먼저 최근에 뇌출혈로 쓰려져 마산삼성병원에서 치료받다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긴 김민진 집사(강복수)를 문병갔다. 최근에 메르스 사태로 큰 홍역을 치룬 병원인지라 면회시간은 저녁 8시까지! 서울이 가까이 올수록 어찌나 차량들로 막히던지 조마조마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7시 40분경에 도착했다. 친정 어머니(권사)께서 딸을 돌보고 계셨다. 머리에 수술부위가 길게 보이는데 먼 길을 찾아 문병 온 우리들을 바라보는 김 집사의 얼굴! 그처럼 환한 미소의 얼굴은 사고 이전에도 볼 수 없었던 그런 모습에 아,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하고 기쁘고 기쁜지. 현대의학의 도움도 많지만 그동안 딸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나오는 우리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란 확신이 들었고 우리 모두의 입술에선 감사가 절로 나왔다. 머지않아 사고 이전의 상태로 정상회복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김 집사와 현재 암으로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을 생각하며 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렘17장 1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사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늦은 밤9시경에 일산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고인께서는 이십여년전 마산에 사실 때에 권현+제경숙, 두 자녀 영민+현진 온 가족이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서울로 이사 가시기 전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왔다. 딸만 다섯이고 다섯 사위들을 친아들처럼 사랑했고 다섯 사위들도 장모님을 어머니처럼 공경하며 사랑했다. 특히 둘째 따님인 제 집사(경남대유아교육과 교수)는 남편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귀감이다. 고인께서는 우리 가족에게도 어머니 같으셨다. 허물 많은 목사임에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해 주시던지 서울로 이사 가신 후에도 우리 마산재건교회를 그토록 그리워 하셨다. 몇 개월 전에 새 성전에서 함께 예배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 내려 오셔서 기쁨의 시간을 가진바 있다. 고인의 영정사진은 본교회의 제4기 베델성서대학 졸업식(1년반 과정, 1998년)때 찍은 학사모를 쓰고 밝게 웃는 졸업사진이어서 더욱 고인을 그립게 만든다. 빈소에서 조문 후에 유족들을 끌어안고 기도를 드릴 때에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린다. 하루의 심방길, 서울의 문병에서 감사가 많았고 일산의 문상에서 고인과의 생전의 사귐과 그리움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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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 [교회법률상식] 지역노회가 사라져 가고 있다
    -지역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는 것 전적인 총회의 책임-지역 노회 경내의 타 노회 교회 해 지역노회로 이적해야 [질의] 우리 노회는 얼마 동안 노회 내부의 정치적인 분란으로 다툼을 하다가 지역도 나누지 않고 노회분립청원을 하여 총회가 노회를 분립해 주었습니다. 총회가 지역도 없이 끼리끼리 노회를 분립해 주는 것도 합법인지요? 목사님의 헌법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K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 교단의 목사이므로 합동측 헌법으로 답한다. 1. 노회 조직의 요건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에 “노회는 일정한 지방 안에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총대로 세례교인 200명 미만이면 1인, 200명 이상 500명 미만이면 2인, 500명 이상 1000명 미만이면 3인, 10000명 이상은 4인씩 파송하는 장로로 조직한다. 단, 21당회 이상을 요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본 규정에서 하나의 노회를 조직하기 위한 절대적 요건은 ① 일정한 지역 ② 법이 정한 목사 ③ 지역 내의 각 지교회가 파송한 총대장로 ④ 21당회 됨을 필수요건으로 하고 있다. 2. 노회 분립 절차 노회 분립 절차 역시 기존 노회가 분립노회와 전통노회의 ① 일정한 지역 경계를 나누어 정하고 ② 각 지역 안에 있는 목사와 ③ 각 지역 안에 있는 총대 장로로 조직하되 ④ 양 노회 각각 21당회 이상이 되어야 하고 ⑤ 양 노회간 재산 분할과 양 노회 중 정통노회를 정하고 분립노회의 명칭(가칭)이 결정 합의되면 총회에 분립 청원한다. 총회는 분립 청원 서류를 검토하여 전통노회와 분립노회가 다 같이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의 규정대로 위의 ①-⑤항의 요건이 갖추어진 것을 확인한 후 총회가 노회 분립 허락을 결의하고 노회분립위원을 선정 파송하면 노회분립위원회는 분립청원서 내용대로 전통노회는 그대로 두고 분립노회만 제1회 노회로 조직해 준다. 그리고 전통노회는 스스로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노회 분립으로 인하여 결원된 임원을 보선하고 노회분립으로 인하여 개정이 필요한 부분을 개정하고 시찰회와 상비부를 조정한다. 3. 지역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는 것 총회의 책임. 근간에 총회 산하의 노회 중 일부 지역노회가 얼마동안 정치적인 갈등으로 분쟁을 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지역은 종전 그대로 두고 서로 마음에 맞는 교회들끼리 헤쳐모여 식으로 총회에 노회 분립청원을 하면 총회가 받아 분립을 허락한 결과로 한 지역 안에 지역 경계도 없이 2개의 노회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실례로 수원에 있는 S노회와 대구에 있는 S노회와 부산에 있는 N노회 등으로 기억된다. 이상과 같은 결과는 전적으로 총회의 책임이다. 그 이유는 노회가 노회 분립 요건을 갖추지도 못한 노회분립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거나 위헌적인 불법 긴급동의안을 받아 지역 경계가 정해졌는지 양 지역의 조직교회가 몇 개인지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분쟁하는 노회를 나누어 노회 분란을 해결해 주자는 식으로 노회분립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보내면 노회분립위원회는 거액의 돈을 받으면서(한국기독신문 제746호 참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조직교회의 수가 모자라면 꾸어주는 식으로 짜 맞추어서 불법으로 노회를 분립하여 주는 것이 현실이다(한국기독신문 제758호 참조). 이와 같이 총회가 분립하여 준 한 지역에 지역경계도 없이 두 노회로 존재하는 노회도 과연 지역노회인지 총회는 반드시 답해야 한다. 이북 피난 노회가 전국적으로 여러 교회가 섞여 있는 노회처럼 한 지역에 두 노회의 교회가 섞여 있는 노회도 위헌적인 무지역노회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각 지역노회 역시도 교회가 타 노회 지역으로 이전을 하면 이전 허락 결의만 하고 해 지역 노회로 이명을 해 주지 않는가하면 해 노회 역시도 자기 노회 지역에 타 노회에서 교회당을 이전하고도 종전 노회에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므로 전국 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어가고 있음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전국 노회들이 타 지역노회의 교회가 자기 지역 노회 경내에 하나도 없는 노회는 거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따라서 전국 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고 있다는 말이다. 4. 후속 조치 총회는 혹 노회의 분쟁이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한 지역에 두 개의 노회를 분립하는 것은 위헌적인 처사이므로 자제해야 한다. 또한 전국 노회를 실사하여 지역노회에 타 지역노회의 교회들은 해 지역노회로 이적조치 할 것을 지시하고 해 교회와 해 노회들은 총회의 지시를 따라 지역노회 경내에 타 노회의 교회가 하나도 없도록 정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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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 [성공칼럼] 숫자 세는 순간
    구약성경에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하게 여겨서 그 벌로 이스라엘 백성 칠 만 명이 죽게 된다. 그럼 숫자를 센다는 것이 왜 하나님께 이토록 악한 일인가? 숫자를 센다는 것은 숫자를 의존한다는 것이며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며 마귀의 시험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는 것이다. 부부사이나 부모, 자녀사이나 많은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고, 가족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사랑과 감사가 가득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해야 한다. 소유나 지위 등의 숫자 때문에 누구는 위고 누구는 아래면 거기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과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부부와 부모와 자녀는 구별이 있으며, 자녀는 부모를 받들고 존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간은 동등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부부는 존중하되 친구 같은 관계이며, 부모와 자녀는 존경과 서로 친구 같은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이런 관계 안에는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숫자를 택할 것인가? 한국의 부모와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학원을 가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좋은 성적을 위해 즐거움을 마다하고 보약을 먹이고 온갖 투자를 한다. 그런데 수능을 보았는데 평소의 실력보다 훨씬 점수가 적게 나왔다면 숫자가 엉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당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수능생의 부모라면 어떻게 반응했는가? 부모의 목표가 사랑과 선(善)이면 이 낮은 점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가 목표였다면 낮은 점수를 받은 자녀에게 화를 내며 “그동안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것밖에 받지 못했느냐!”하며 무시하고 비난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숫자가 우선이면 사랑도, 이해도, 자녀도, 자신의 기쁨도, 선함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말하며, 늙음이란 예전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을 벗어나서 내면적인 것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나이를 말한다. 그런데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숫자로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많은데 나에게 이렇게 대우하는가?” 또는 “내가 너에게 잘해준 것이 몇 번인데.. ”내가 너와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라고 주장한다. 숫자를 말한다는 것은 과거의 옷을 걸치고 새로운 내면의 세계는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또 과거를 갖고 현재를 지배하고 군림하겠다는 것이다. 숫자란 그동안에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사랑한 것에 대한 열매인데 이제는 이 숫자를 근거로 상대방을 서운해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면 그동안의 사랑과 선을 헛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의 명령으로 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그동안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얼마나 거대한 것을 이루어냈는지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다윗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했으며, 백성에게 선을 행했으며, 자신으로 인해서 백성이 자유롭고 힘 있게 살았다는 증표이다. 그러나 숫자를 세는 순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며, 내 능력이며, 내 말을 들어야 하며, 나에게 잘해야 하는 것으로, 악한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다윗왕은 숫자를 세는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모든 힘으로 솔로몬 성전을 준비하는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짜 영적인 세계는 늙어서 아무것도 없을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육체의 시대가 끝나고 더 깊은 세계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지금부터 “옛날에 내가 ~ 을 했다.”라는 과거의 숫자를 세는 일을 중단하고 숫자를 만들어냈던 예전처럼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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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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