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교회회계] 소규모&개척교회의 재정과 회계 : 단식부기의 응용
    20년전, 박사과정 재학 중 도쿄의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담임목사님께서 불쑥 회계에 관한 질문을 해 오셨다. 당황한 기색으로 재무상태를 설명했지만,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목사님은 매주 당장 들어오는 헌금수입과 지출을 어떻게 관리하고, 회계장부에 표시할 것인가가 궁금했는데, 엉뚱하게 재무상태에서 답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본 칼럼(제1-8회)은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구체적인 적용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안)'에 따라 적어도 1년 예산규모가 10억원이상의 교회는 복식부기에 따른 운영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작성하도록 하고, 그에 필요한 매뉴얼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모든 교회에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적용하는 것이 아직 시기상조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개척교회는 물론, 상당수의 소규모교회가 복식부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 이를 이해할 만한 회계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제9회 칼럼은 복식부기의 적용은 계속해서 확대해 가되, 개척교회와 예산규모 2억원 미만의 소규모교회에게는 현실을 감안하여 예외적으로 단식부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회계처리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즉 소규모교회에게는 단식부기에 의한 운영성과표(자금수지계산서)의 작성을 인정하되, 다음과 같이 별도로 자산과 부채의 변화를 표시한 재산목록을 작성하고 교회 내부적으로 감사를 실시할 것을 추천한다. 첫째, 단식부기에 기초한 운영성과표는 차변과 대변 분개의 구분없이, 현금의 수입과 지출을 흐름을 집계하여 표시한다. 즉 [전기이월+수입=지출+차기이월]의 형식으로 발생주의가 아닌 현금주의 관점에서 작성한다. 특히 전년도에 세운 예산과 결산을 비교해, 교회 재정이 계획에 맞추어 적정하게 운영 집행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둘째, 교회 개척초기에 투하된 자산과 부채 금액을 재산목록에 작성하고, 또 매년말 결산시점에 전년대비 자산과 부채의 증감을 표시하여, 교회의 재산가치가 어떻게 변동되었는가를 나타내도록 한다. 즉 [자산=부채+순자산]의 형식으로 재산목록을 작성해, 효율적인 재정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정과 형편에 맞추어 감사인을 선임해 내부적으로 감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회계감사를 실시한다. 단식부기의 장점은 적용이 간단하다는 점에 있다. 회계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적용이 가능한 특징이 있다. 또 최근에는 다양한 전산회계 교회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어, 비용이 발생하기는 하나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 대부분의 전산 교회회계 프로그램이 단식부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입과 지출을 집계한 결산은 가능하나, 복식부기에서 제시한 자산부채의 관리, 공정가치 도입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다. 복식부기의 적용이 어려운 소규모교회에게는 단식부기 사용이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부기의 지속적인 확대는 필요하다. 또 이를 위해서는 차변/대변 복식부기의 구조와 회계처리절차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회계교육이 요청되며, 또 교단과 노회, 성시화 단체등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다음호는 교회회계와 관련한 내부통제제도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 오피니언
    • 칼럼
    2015-11-05
  • [시사칼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19세기 말 인도에서 라마누잔(Sriniv?sa Ramanujan, 1887~1920)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총명했던 소년은 15세 우연히 친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기초 결과 개요(A Synopsis of Elementary Results in Pure and Applied Mathematics)』라는 책 안에 있는 6천 개 가까운 정리를 독학으로 증명해 내었습니다. 이 노트 때문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중에는 마드라스 우체국 회계과에 근무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캐임브리지 대학의 촉망 받는 교수 하디(Godfrey Harold Hardy, 1877~1947)는 그를 초청해 같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놀라운 수학적 결과물들을 내놓았고 라마누잔은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일평생 수학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라마누잔은 향수병과 결핵병으로 32세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라마누잔이 죽은 지 2년 후인 1922년, 서울에서 또 한 명의 수학 천재가 태어났습니다. 성장하여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25세의 청년 이임학(1922~2005)은 공교롭게도 하디(G. H. Hardy)가 사망한 해인 1947년 남대문시장에서 우연히 미군이 버리고 간 미국 수학학회지 한 권을 발견합니다. 책 속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막스 초른(Max August Zorn, 1906~1993)의 논문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초른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한 부분을 풀어서 보내자 미국 학회가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인연으로 결국 미주(美州)로 건너간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딴 리군이론(Lee Group Theory)을 정립하는 등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인’으로, 그리고 10월 말 언론이 그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할 때까지 라마누잔 스토리에 맞먹는 그의 기화(奇話)는 오랜 세월 초야에 묻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임학이 ‘리군이론’을 완성하기 직전인 1966년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장차 수학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그리고리 페렐만(Grigori Y. Perelman)이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발군의 수학적 재능을 보여 스탠포드나 프린스턴 등 유수의 대학들이 교수로 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향의 수학연구소(Steklove Institute of Mathematics)에 남아 연구하던 그는 2002년 11월 36세의 나이에 한 인터넷 저널에 논문을 하나 올림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에 등장한 그 논문은 오랫동안 수학 7대 난제 중 하나로 불린 푸앵카레 추측(Poincare conjecture)을 증명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보여준 페렐만의 행적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상금 100만 달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유럽학회상으로부터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상을 거부하고 학술원 추대마저 거절하며 철저히 은둔자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도 고향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노모(老母)의 연금으로 생활하며 우주의 충돌이론 연구에 여념이 없다고 합니다. 21세기에 수학이 주식이나 통계 심지어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 뒤안길에는 이처럼 그저 수학이 좋아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학을 연구한 많은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도 이럴진대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성경 속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썼습니다(히 11:38). 이들이 흘린 땀과 피 위에 교회는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세속적 명성과 영광뿐 아니라 교회에서마저 이름을 내려 하고 영예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느덧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많은 것을 가졌으나 주 이외에는 배설물로 여겼던(빌 3:8) 사도의 고요한 외침이 이 가을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11-05
  • [소강석 칼럼] 산이 허락한 자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언제부턴가 천왕봉을 한 번 정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에 천왕봉을 등정할 기회가 있었다. 해발 1653m인 장터목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천왕봉 1915m를 향해 가서 일출을 보는 코스였다. 천왕봉은 남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너무 기대가 되고 설렜다. 마침내 천왕봉 등정이 시작되었다. 가을 지리산은 참 아름다웠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지리산은 가을 풍경을 물씬물씬 자아내며 만추의 정경을 그려주고 있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가을숲 나무들의 모습이 나의 남은 여생을 연상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잠시 이런 시상에 잠기기도 했다. “초봄부터 그리도 사랑을 속삭이더니 / 가을엔 벌써 늙었다고 수줍음을 타네요 참 아름답게도 늙었어요 / 나는 그래도 늙어가는 그대들이 좋아 / 그대들과 함께 늙고 싶어 / 나는 지리산에 살어리랏다.” 마침내 장터목에 도착 했다. 1653m 고지를 4시간 동안 오른 것이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천왕봉을 오른다고 생각하니 저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몸은 피곤하고 노곤하지만 천왕봉을 정복한다는 게 꿈 같았다. 그렇게 잠을 설치는 중에 산악인 엄홍길님의 말이 생각났다. “산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고 산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다.”그 분의 말에 의하면 천왕봉이라는 정상이 내게 허락해야 나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찌 산이 내게 허락을 하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엄홍길님의 문학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겸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높은 산은 자기의 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허락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시를 쓸 때 산은 하나님의 품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이미지화할 때가 많이 있다.“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이렇게 볼 때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단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왕봉을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새벽에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마침내 천왕봉에 발자국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출을 알리는 여명의 빛이 한동안 비취더니 마침내 붉은 태양이 둥근 쟁반의 모습으로 저 동쪽에서 떠올랐다. 차마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계속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간순간 눈을 감으며 새에덴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새에덴 성도들의 가슴에도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아침에 희망차게 떠오르게 하옵소서. 어두운 가슴일수록 더 솟구치는 의지와 희망으로 떠오르게 하옵소서.” 나의 가슴은 호렙산 부흥회가 연속되었다. 사진을 찍고 산청 쪽으로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급경사인 돌길인데다가 젊었을 때 눈구덩이에서 너무 오래 무릎을 꿇었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무릎 꿇을 때 고통스러웠던 십자인대와 그 속 힘줄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그럴수록 더 깊이 깨달아졌던 것은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천왕봉이란 정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아니, 내 인생의 어떠한 고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5-11-05
  • [성서연구] 사흘길의 의미(출애굽기 15장 22-27절)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흘길을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했고, 마라에서 물을 얻었으나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홍해에서는 넘치는 물로 인해 위기를 만났던 그들이 이번에는 물이 없어 위기를 만났으니,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려운 사태가 발생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 후엔 책임 추궁을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는 상황에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모세 탓일까요? 여기서 매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탓!>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물 없는 수르 광야로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면 <하나님의 탓!>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도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탓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족하고 판단이 모자란 분이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수르 광야에 물이 없는 줄을 모르셔서 그리로 인도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을 수르 광야로 가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훈련이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한 나무를 집어넣음으로써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물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단물로 바꾸는 데 사용된 나무도 마라의 쓴물 곁에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엘림으로 이끄셨는데, 그 곳에는 물 샘이 열 두 개나 있었고, 종려나무가 일흔 그루나 있어 마음껏 지친 몸을 쉬게 하셨습니다. 엘림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이벤트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처음에는 물 없는 광야로 가는 것처럼 힘들게 여겨집니다. 그 때는 인도를 받는 게 아니라 <방황>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따르면 반드시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엘림에 도달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관건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훈련하고자 그들을 수르 광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25절 중간부터 당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말씀의 인도대로 순종하면 질병이 내리지 않고, 하나님의 치료가 함께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지금 물 없이 사흘길을 걷는 어려운 처지에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말씀대로 가십시오. 결코 다른 길을 모색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시험을 받으시는 중입니다. 계속 가면 반드시 엘림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11-0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언제인가?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국호는 자랑스럽고 당당한 대한민국 최근 역사교과서 문제로 논란이 많다. 잘못된 역사는 다소 진통을 겪을지라도 기필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일에 관해 기술하고자 한다. 극히 당연한 것인데 왜 문제가 되고 논란이 많은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주저없이 단언하거니와 1948년 8월 15일이다. 개개인에게 태어난 생일이 있듯이 나라마다 그 나라가 태어난 건국일이 있다. 필자는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건국일이 없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에는 건국일이 없다. 건국일이 엄연히 있는데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가 없고 이 날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건국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고 그것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일각에서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한 것이 건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1945년의 광복이 곧 건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1919년 삼일운동 때에 독립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건국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단기 원년에 단군이 건국했는데 다 무슨 소리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건국에는 4개 성립요건, 즉 영토가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어야 하고, 정부의 주권행사가 가능해야 하고, 국제적인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상해임시정부는 건국 4개 기본요건 중 한가지도 해당되는 것이 없다. 상해임시정부는 건국의 토대를 마련하는 중대한 조직이었고 대한민국 정부의 정신적인 뿌리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건국은 아니었다. 8.15광복도 건국일수는 없다.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곧이어 미국의 군정하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독립이라고 할수 없고 따라서 건국이라고 볼 수 없었다. 또 어떤 이들은 단군개국설을 주장하지만 단군은 선화적인 인물이지 실존인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단국개국설로써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에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어떤 이는 “고려공화국으로 하자” 어떤 이는 “조선공화국으로 하자” 어떤 이는 “한국으로 하자” 그때 이승만은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했다. 표결 결과는 대한민국이 17표, 고려공화국이 7표, 조선공화국이 2표, 한국이 1표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채택되었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찬성 163표, 반대 2표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확정되었다. 재차 말하거니와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국호는 자랑스럽게도 대한민국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11-05
  • [목회자 칼럼] ‘See you again in Heaven (2)’
    3년 전 교회 홈페이지 목양칼럼에 ‘See you again in Heaven’란 제목으로 글을 쓴바 있다. 오늘 같은 제목으로 다시 글을 올릴 사연이 생겼다. ‘See you again in Heaven (2)’, 故 문승희 집사를 그리워하며.... 며칠 전에 남편 되는 하진 장로께서 집안을 정리하던 중 아내의 귀한 유품을 발견했다. 하늘나라 가기 얼마 전에 남편과 두 딸들에게 쓴 편지인데 용기 부족에서인지 직접 전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고인의 편지 내용이 남편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나 보다. 마침 어제가 소천 3주년이여서 하 장로는 몇몇 분들에게 그 편지내용을 띄웠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남편들, 아내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에게 울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편지내용을 나누고 싶다. “나의 남편 하진 집사.... 성질 못된 나 만나서 고생이 많았어요. 철이 들면 사랑하며 살 줄 알았는데 사랑도 하기 전에 병이 들어 버렸네요. 끝까지 나를 지켜줘서 고맙고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웃음 잃지 말고 변함없이 따뜻한 아빠가 되어 줄 거라 믿어요. 사랑합니다.” “늘 자랑스런 유빈... 유빈아! 엄마는 너로 인해 많이 행복했단다. 멋진 딸로 자라줘서 고맙고 이 땅의 여성 지도자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사람이 되길 늘 기도해 왔다. 하나님 품 떠나지 말고 건강 잘 지키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사랑한다. 유빈아, 사랑한다...” “보석 딸 유정... 너무도 소중한 내 딸 유정아, 힘든 시간을 함께 견더줘서 고맙다. 하나님 품 안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너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큰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앞으로 멋진 삶 살아가길 바란다. 건강 잘 챙기고 생활 습관을 바르게 해라. 늘 행복하게 살길 엄마는 바란다. 사랑한다. 우리 유정... 사랑한다”. 고인은 학구열이 대단해서 30대 중반에 사회복지를 공부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 수료를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뜻밖에 난소암에 걸린 것이다. 그 이후 3년의 투병 끝에 2012년 10월 15일(월) 4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치유를 위해서 본인과 가족과 교회는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 나왔던가! 그때를 회상할 때에 두 가지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고인께서 건강했을 때보다 투병가운데서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딸,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얼굴에 늘 환한 미소이다. 그런 고인에게 담임목사가 붙여준 별명이 있다. “문 집사님은 우리 교회의 오드리 헵번이야”.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천국으로 보내고 난 그 다음날 하진 집사가 나에게 들려준 고백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목사님, 문 집사와의 결혼생활은 21년입니다. 그러나 지난 20일 동안 병실에서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고 싶네요. 그러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41년이겠지요?”.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10-22
  • [교회법률상식] 굴화리와 천상리는 남울산노회 지역(1)
    - 양 노회의 논리적인 주장으로는 판단기준이 될 수 없어 - 오직 노회분립청원서와 총회의 분립결의 및 촬요로 판단해야 [질의] 2007년에 총회의 울산노회 분립위원회(위원장 최재우 목사)가 울산노회를 분립할 때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로, 남쪽은 남울산노회로 하되 양산시찰은 남울산노회 소속으로 하는 내용의 분립을 합의결의하고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가 보고를 받음으로 울산노회 분립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부터 노회분립에 관련한 지역 경계에 대하여 울산노회는 태화강 중심이 아니고 시찰별 중심으로 분립되었다고 주장하고 남울산노회는 시찰별 중심이 아니고 태화강을 경계로 분립되었다고 주장하여 갈등 중에 있습니다. 이에 관련한 참고서류로 ① 울산노회 분립에 관계된 총회 제91회, 92회 보고서 ② 분립전 울산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 ③ 분립 전의 울산노회 제52, 53, 54회 촬요 ④ 울산노회의 주장 내용 ⑤ 남울산노회의 주장 내용 ⑥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 등을 첨부하여 노회분립과 관련하여 태화강 남쪽에 위치한 굴화리와 천상리가 법적으로 어느 노회의 소속 지역인지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울산 H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양 노회의 주장에 대하여 울산노회는 태화강을 경계로 분립한 것이 아니라 시찰단위로 경계를 정하여 동부시찰, 북부시찰, 중부시찰은 울산노회로, 남부시찰, 서부시찰, 동해시찰, 양산시찰은 남울산노회로 분립되었다는 주장이고, 남울산노회는 시찰단위로 분립한 것이 아니라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 남쪽은 남울산노회로 분립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은 양 노회의 주장은 서로 상반된 주장으로서 법리적인 면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면이므로 노회분립의 판단에 대한 참고자료일 수는 있으나 법리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2. 노회 촬요와 김호환 목사 사실증명에 대하여 분립 전 울산노회의 제52회의 촬요는 “노회를 분립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과 분립위원회를 조직한 내용뿐이어서 경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제53회의 촬요는 “노회 분립 기준”을“태화강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기로 하다.”는 결의와 “노회명”은“울산노회(북쪽), 울산남노회(남쪽)으로” 결의한 내용(촬요 p.50)으로 노회분립의 경계기준에 대하여 태화강을 경계로 한다는 법리적 기준을 결의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제54회 촬요는 노회분립위원회의 구성으로서 “위원장: 서유성 목사, 서기: 장활욱 목사, 강북측 위원: 목사 - 권주식, 김형백, 정연철, 양성태, 장로 - 강희열, 조경택, 김용길, 강남측: 목사- 안종택, 이성택, 배광식, 김신현, 장로- 이정섭, 이상용, 전성은”으로 결의하여(촬요 p.51) 역시 강북측과 강남측의 위원을 언급하여 태화강이 노회분립의 경계임을 확증하고 있다. 또한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의 내용은 “저희(주사랑교회: 현재 독립교단 소속) 교회는 2006년 당시 남울산노회 소속으로 되어 있으나 노회 분립 당시 북쪽 울산노회가 당회가 모자라 부득이하게 울산노회로 소속이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남울산노회 소속 영내에 속했던 교회가 맞습니다. 사실을 증명합니다. 2015.4.30. 주사랑교회 김호환 목사 (010-3588-0817) 印” 으로 역시 “북쪽은 울산노회”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강을 경계로 하여 노회를 남과 북으로 분립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노회촬요와 사실확인서를 종합해 보면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 남쪽은 울산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한 것이 분명해 보이고 특히 태화강 남쪽에 위치한 주사랑교회는 남울산노회 지역임이 분명하나 태화강 북쪽의 울산노회가 21당회가 되지 못하므로 21당회가 되도록 조정하기 위하여 노회경계와는 관계없이 특단의 비상조치로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회촬요와 사실확인서는 지역 경계를 결의한 증거는 확실하나 노회를 분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관한 증빙서류이므로 참고하기에 중요한 서류임은 사실이지만 직접적인 판단의 법리적 표준을 삼는 것보다는 분립 전의 울산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와 총회가 보낸 분립위원회의 분립보고서와 총회가 보고서를 받아 결의한 총회 회의 결의서를 검토하여 판단함이 법리적으로 옳아 보인다.(계속)
    • 오피니언
    • 칼럼
    2015-10-22
  • [성공칼럼] 믿음으로 살리라
    성경 하박국에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신약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 나온다. '산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내 영혼이 다른 사람과 서로 사랑하면서 선을 행하며 기쁘고 자유롭고 당당하고 부유하게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산다''의롭다'의 반대인 '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두려워하며 증오와 갈등으로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로운 삶이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럼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진리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믿음을 알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믿음을 깨뜨리는 것은 사소해 보이는 거짓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돈을 일주일 후에 갚는다고 해서 빌려주었다 하자. 그런데 약속한 날짜에 갚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음에 주겠다고 하며 또 약속을 했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이것도 어겼다. 말로는 하겠다고 해놓고 실제 상황에서는 지키지 않으면 이런 행동이 거짓말이며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심리 상담이나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영성훈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거짓은 치유나 나를 만나는 것이나 사랑하는 관계를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거짓에 어찌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돈이나 권력은 거짓으로 얻을 수 있지만 치유, 사랑, 진리를 만나는 것처럼 속사람과 관계된 것에는 결단코 그럴 수 없다. 믿음에는 진리가 꼭 있어야 하는데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매 순간 삶 속에서 옳은 것, 진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삶에서 실패했을 때나 전혀 희망이 없을 때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잘못되었지?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옳음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이렇게 방법을 찾아서 행동으로 옮길 때 다시 기쁘고 자유스러운 삶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부부가 수년을 같이 살다가 이혼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부부가 사랑으로 가는 길이며 진리를 행하며 사는 것이다. 외도, 지저분함, 배우자를 무시하는 말과 행동, 거짓말하는 것,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없애야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삶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옳은 길, 진리를 찾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첫 걸음이다. 모든 분야에는 살아나게 만드는 진리가 있다. 몸에 관한 진리, 마음에 관한 진리, 관계, 부부, 가족, 성공, 자연에 관한 진리 등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 모든 진리는 몸, 마음, 관계, 부부, 가족, 자연 안에 기쁨과 자유로움, 밝음과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길이며 방법이며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몸이 아파서 고통스럽고 주변의 사람들도 떠나가고 돈도 없어져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다시 살기 위해서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길 때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몸에 관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부분에 진리가 있으며 진리를 따라서 살아갈 때 내 삶은 건강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이다. 내 삶이 어려울 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망가지는 방향으로 가며 살 수도 있다. 또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삶 속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 삶은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더 큰 진리 즉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본래 삶은 사랑과 자유, 기쁨이 가득한 것이다. 이런 삶을 다시 회복하는 길로 들어서려면 먼저 정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으로 진리 아닌 것은 거절하고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10-22
  • [은혜의 말씀] 사망에서 생명으로 (막2장1~5절)
    오늘 성경말씀은 전신이 마비된 중풍 병자가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회복되어서 새털처럼 일어나는 그런 기적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볼 때 유형무형의 중독이나 마비가 오는 시대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중독, 생각의 마비, 관계의 마비가 되어 힘들어 합니다. 중풍병이라는 것이 풍을 맞아서 몸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어지며 무기력해지는 상태인데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시면 피가 돌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소생시켜 주시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삶속에서 그런 부활로 나타나는 데는 어떤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기적의 단계, 천국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오늘 말씀 2장 1절에 보면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이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입소문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집에 들어가시니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천리향이 퍼져 나가듯이 소문이 나니까 환자들이 오고 각색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 받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주님을 만날 때 그런 기적의, 부활의, 소생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신기한 것이 예수님께선 온 세상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구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구세주로 오셨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다가오지만 한사람 중풍 병자에게 집중해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주열방을 품는 스케일이 있어야 되지만 아주 세미하고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는 디테일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우리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가시는데 어떻게 임하십니까?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사람들이 모여서 전심으로 기도할 때 그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했던 일이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마음이 이심전심, 동병상련, 대동단결, 마음을 하나로 합쳐서, 그 다음에 기도하고 성령이 임하시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동지의식을 가지고, 파트너십을 가져서 형제가 연합해 동거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보면 내가 믿음이 자라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도 사람이고 내 신앙생활의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입니다. 인간 방패가 있는 반면에 인간 방해가 있다고 봅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힘들 때, 무서울 때, 내 손잡아주고 기도해주는, 내 편이 되어 말씀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것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하고, 인생을 포기할 상황에서 다시금 힘을 얻게 만들고, 소생케 하는 그런 친구가 되고, 파트너가 되는, 그런 멘토가 되고 선생님이 되는 사람이 많지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를 부르고, 주를 의지하고,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한계를 초월하는, 문제를 돌파하는 힘이 있습니다. 발상전환, 고정관념을 버리고 아름답게 일어나는 잔디처럼 밟아도 살아나고, 펄떡거리는 물고기와 같이 시대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그런 살아있는 신앙, 회복되는 신앙이 있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5-10-22
  • [가정칼럼] 영적 결핍을 이겨내려면
    술에 잔뜩 취해 밤길을 비틀거리고 걷던 술꾼 한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던 할아버지와 부딪혔다. 순간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나뒹굴고 말았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얼른 할아버지의 뺨을 두들겨 보고 심장에 귀를 대어 본다. 아무 소리가 없자 할아버지를 등에 들쳐 업었다. 한순간에 집을 내 다른 그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찬물을 끼얹고 다리를 주무르며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해 본다. 그러다가 지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새벽녘 눈을 뜬 그는 기겁을 하고 만다. 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침대에 KFC 할아버지(광고용 마네킹)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왜 술을 찾을까?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 도피인 것이다. 술에 취하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에 애를 쓴다. 이를 숨바꼭질의 순례라 부른다. 굳이 술만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술 속으로 숨어 버리고 어떤 이들은 취미생활로 숨어든다. 그래야만 편하다. 숨다가 거기에 중독된다. 일 중독증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린다. 그러다가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자신을 잃어간다. 일의 노예로 스스로의 삶을 제한한다. 이러한 중독증상은 가정생활을 파괴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영적 결핍증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한다. “성령에 충만 하라”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앤드류 머레이가 정확한 답을 주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나는 그것이 고도의 흥분상태나 절대적인 완전함, 혹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함은 단순히 나의 모든 본성을 성령의 능력에 굴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전체를 성령께 복종시킬 때 하나님 자신이 나를 충만케 하실 수 있다.” 결국 성령 충만 외에는 영적 결핍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 화려한 외식도 명품구매를 위한 쇼핑도 세계 일주 여행도 영적 결핍을 메워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권한다. 비겁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하고 그 일을 변명하기 위해 쏟아 붓는 에너지의 십분의 일만 자신을 직면하는 일에 써보라는 말이 있다. 이제 나 자신의 충만한 삶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 보자. “성령님이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성령에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는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겠습니다. 언제 어느 때 실수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에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는 중요한 결정을 보류하겠습니다. 종종 잘못될 가능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출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사에 중요한 결정 앞에 잠시라도 성령의 충만을 구합니다.”- R. A토리
    • 오피니언
    • 칼럼
    2015-10-22
비밀번호 :